[부록]

정세연구

코소보 사태의 의미

– 신 세계대전의 불길이 타오르고 있다(3)

전태일을 따르는 민주노조운동연구소

2. 발칸사태의 배경 : 발칸은 어떻게 재발칸화되어 왔는가?

<2> 경제적 배경 : 초국적 자본의 집행기구인 IMF가 유고경제를 무너뜨렸으

며, 유고 경제의 붕괴가 유고의 사회주의와 연방체제를 무너뜨렸다. 발칸

의 재발칸화(격심한 민족분쟁과 제국주의의 무력 간섭)는 이러한 사태전개

발칸반도가 지금 각 민족들(ethnics) 간의 전면적인 전쟁상태에 들어가고, 이

를 계기로 서구 제국주의의 무력간섭을 거쳐 식민지–

지의 표현으
로는 보호령(protectorate)–로 전락하기에 이른 것은 유고 경제가 총체적으로
무너져 내렸기 때문이다. 경제가 총체적으로 무너져 내리면서 노동자·민중의
삶이 파괴되고 깊은 절망에 빠져 있는 속에서, 그리하여 사회주의와 연방국가
체제에 대한 노동자·민중의 믿음이 무너지는 속에서, 외세와 부르조아는 극단
적인 민족주의를 선동하며 연방 해체와 자본주의로의 전환을 꾀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것들을 관철시킬 수 있었다. 특히 서구 제국주의는 유고경제를 무너뜨
리는 것을 통해서 각 민족의 분리독립을 선동하고, 민족들간에 서로 싸움을 붙
이며, 이 틈을 타서 각각의 작은 국가들을 자신(들)의 식민지로 삼을 수가 있었
다.
이러한 의미에서 지금 타오르고 있는 발칸사태의 배경을 말하고자 하면 유고
경제가 어떻게 붕괴되어 왔는지를 빼놓고는 제대로 말할 수가 없다. 아니, 그것
을 말하는 것이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발칸반도에 왜 90년대에
들어 민족주의, 쇼비니즘, 민족청소 같은 것들이 분출하게 되었는지를 이치에
닿게 설명할 수가 없다. 오래 잠재해 있던 요인이 어떤 못된 사람(예컨대 슬로
보단 밀로세비치!)의 뛰어난 선동으로 어느날 갑자기 터져나왔다고 밖에는 달리
설명할 수 없지 않겠는가*주37)

(1) 유고의 ‘분권적 시장사회주의’ 경제는 취약점을 안고 있었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유고 경제는 ‘분권적 시장사회주의’ 모델을 취하고 있었
다. 여기에서 유고 경제모델의 ‘분권적’인 측면은 유고가 다민족 국가라는 현실
을 일정하게 반영하고 있었다. 그래서 유고는 출발 당시부터 6개 공화국(슬로베
니아, 크로아티아, 보스니아-헬체고비나, 세르비아, 몬테네그로, 마케도니아)과
2개 자치주(세르비아 공화국 내의 코소보와 보이보디나)로 구성된 연방국가 형
태를 취했다.
그러나 이 ‘분권적 시장사회주의’도 고정불변의 모습을 취해 온 것은 아니었
다. 유고는 애초에는 중앙집권과 민족 공화국-자치주별 분권이 긴장관계 속에
균형을 유지하고 있었다. 유고는 이렇게 분권화되어 있는 데에다 시장(영리를
추구하는)이라는 요소까지 포함함으로써, 각 민족 공화국-자치주들 간에 경제자
원을 보다 많이 차지하려는 이기주의가 발동되고 그로 인해 분쟁이 발생할 소지
를 안고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갈등의 소지를 적절하게 해소·극복하지 못함으
로써 점차 분권화가 심화되고 국가적 통합성이 떨어지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그
리고 이렇게 경제의 대내적 통합성이 떨어질수록 서구 자본주의 경제로 더 깊숙
이 편입되어 들어갔다. 또 그럴수록 시장의 역할이 높아져 갔다. 즉 분권화·시
장화(자본주의화)가 심화되는 방향으로 나아간 것이다.*주38)

유고 경제는 사실 나치로부터 해방될 당시부터 이미 지역간에 상당한 구조적
차이를 지니고 있었다. 북부–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 공화국 및 세르비아 공
화국 내의 보이보디나 자치주–지역은 공업이 발달한 지역이었다. 반면 남부–
보스니아, 마케도니아 공화국 및 세르비아 공화국의 코소보 자치주–지역은 지
하자원이나 농산물 같은 일차산품 생산이 발달한 지역이었다. 세르비아(보이보
디나, 코소보 자치주를 제외한)는 그 중간적인 산업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이러
한 경제구조의 차이는 역사적으로 북부쪽이 이태리, 오스트리아, 독일 등과 접
촉이 많았던 데에 연유하였다.
유고 경제의 이러한 지역적 차이는, 공화국-자치주별로 각기 독립성을 가지
는, 분권적인 모델의 채택에 의하여 더욱 고착되었다. 중앙집권적인 모델을 택
한다고 해서 그러한 지역적 격차가 자동적으로 해소되는 것은 아니지만, 지방
분권화는 그런 격차를 해소할 수 있는 중앙(연방)당국의 노력을 원천적으로 제
약했던 것이다.
분권화로 인해 남부 지역의 공화국-자치주들은 오로지 자신의 경제력으로 산
업화를 추진해야 했다. 그런데 이 지역은 경제적으로 낙후된 지역으로서 저축을
할 여력이 많지 않았다. 게다가 시장도 매우 좁았다. 각 공화국-자치주들은 제
각기 독자의 중공업 기반을 건설하고, 독자의 국내(연방 전체가 아니라 각 공화
국 내부의)시장을 형성하려 하면서, 자신의 관할 아래 있는 기업들을 보호하는
조치들을 강구하고 있었던 까닭이다. 즉 수많은 합법, 반합법 및 자의적인 규정
들을 통해서 자본, 상품 및 노동력의 자유로운 이동에 제약을 가했던 것이다.
그 결과는 국민경제의 지역간 분절화와 지역격차의 구조화였다. 1983년도의 경
우 각 공화국과 자치주들의 산출물 가운데 2/3가 자신의 공화국 또는 자치주 안
에서 유통되었다. 자본 이동의 경우는 지역적 분권화가 더욱 심해서, 총 자본형
성 가운데 공화국-자치주를 가로질러서 행해진 부분은 자본형성 전체의 겨우
21%에 지나지 않았다.*주39)
한편 분권화와 함께 ‘시장 사회주의’ 모델을 취함으로써 각 공화국은 서구 자
본주의 경제와 폭넓은 시장관계(외자도입 및 상품 수출입)를 가질 수 있었는데,
이러한 관계 또한 북부 지역에서 두드러지게 활발했다. 그리고 이에 따라서 자
본과 시장이 있는 북부지역과 그것이 없는 남부 지역의 격차는 더욱 굳어져 갔
다. 1989년의 경우 1인당 순개인소득은 가장 부유한 슬로베니아 공화국에서는
3,110천 디나르(유고통화 단위)인데 반해 가장 가난한 마케도니아 공화국에서는
1,399천 디나르에 불과했다. 세르비아(코소보와 보이보디나 제외)는 그 중간 수
준으로 1,946천 디나르였다. 말하자면 북부지역은 제2세계에 상당했다면 남부지
역은 제3세계에 상당했던 것이다.*주40)

물론 이러한 취약점을 극복하려는 시도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초기에는 남부
지역의 공화국-자치주들에서도 자신의 중화학 공업(철강산업, 엔지니어링 복합
단지, 수력발전소 등)을 발전시키려는 대담한 시도가 경주되었다. 그러나 이러
한 시도는 비동맹노선이 실패로 돌아가면서 더불어 실패하고 말았다. 그러한 중
화학 공업화는 비동맹국들의 시장을 내다보고 대규모 시설로 건설되었던 것인
데, 비동맹 나라들간의 경제협력이 부진했기 때문이다. 남부지역은 또 일차산품
(목재, 보크사이트, 시멘트, 납, 구리, 담배, 생선, 포도 등)을 가공하는 공업
을 발전시키고자 했는데, 이 시도도 70-80년대에 들어 이러한 일차산품의 가격
이 대폭 하락함으로써 심각한 어려움에 처했다. 그리하여 남부지역은 그 경제적
지위가 북부지역에 비해 더욱 떨어지고 말았다.
반면에 북부지역은 기왕에도 공업적으로 발달한 지역인데다 비동맹노선의 실
패 이후 유고의 대외 경제관계가 친서구적으로 기울어지면서 숙련 및 반숙련 노
동력을 이용한 제조업 제품을 서구에 수출하여(원자재는 서구에서 수입을 하
고!) 높은 성장을 구가하였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서구 경제에 더욱 깊이 편입
되어 갔다.*주41)
요컨대 유고경제는 국민경제 내부의 유기적 결합도가 낮고, 지역간의 격차가
크며, 서구경제에 편입되어 있는 등의 취약점을 지니고 있었다.

(2) 외채위기가 취약점을 안고 있는 유고경제를 위협했다. 지역갈등 격화
로! 제국주의 간섭으로!

위에서 살펴본 취약점은 60년대까지만 해도 심각하게 문제가 될 정도는 아니
었다. 그러나 70년대에 들어 세계경제에 두 차례에 걸쳐 석유파동이 일어나고
이에 따라 선진자본주의와 제2 및 제3세계 간의 경제관계에 구조적인 변화가 초
래되면서 유고 경제가 안고 있던 취약점은 ‘심각한 문제점’으로 비화하게 되었
다.
석유파동 이후 세계경제에는 의외의 양상이 초래되었다. 석유 및 공산품(특히
시설재를 비롯한 기술집약적인 제품)의 가격은 추세적으로 상승한 반면 일차산
품(및 노동집약적 공산품)의 가격은 추세적으로 하락했던 것이다. 그 이유는 간
단했다. 유가 상승으로 비산유국들 특히 제2, 제3세계의 비산유국들은 막대한
국제수지 적자를 보게 되었고, 이 적자를 국제금융시장에 쌓인 오일달러를 빌려
서 충당했다. (초국적 금융자본은 주체할 수 없이 커진 오일달러를 낮은 이자
(soft loan)로 제2, 제3세계에 빌려주는 것(recycling)을 과잉자본의 출구로 삼
았다!) 이렇게 하여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 외채–수입 원유 및 공산품의 가격
상승으로 국제수지 한 자꾸만 높아져 갔다. 그리하여 외채는 계속 누증되었다. 그리하여 제2, 제3
세계의 많은 나라들이 외채의 수렁에 빠졌다. 이것이 바로 80년대 초에 터져나
온 ‘외채위기’이다.–는 일차산품의 수출 드라이브로써 갚아야 했고, 이것은 세
계시장에 일차산품의 과잉공급을 가져왔다. 그 결과는 일차산품 가격의 하락 추
세였다. 반면 이른바 선진자본주의 나라들은 석유가 인상으로 인한 비용증가를
공산품 가격에 이전시켰다. 이 공산품들은 시장에 대한 지배력이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전가시키는 것이 가능했던 것이다.*주42)

이러한 세계경제의 농·공산품간 가격구조의 변화추이는 유고 경제에도 커다
란 부담이 되었다. 유고는 일차산품과 조립 공산품(숙련 및 반숙련 노동력에 의
한)을 수출하는 나라로서 똑같은 물량을 수출하고 수입해도 수출금액은 줄고 수
입금액은 늘어났다. 그리하여 외채는 계속 늘어났다. 아무리 열심히 수출을 해
도 늘어만 가는 외채를 갚기가 어려워졌다. 그리하여 유고의 외채는 1970년의
20억 달러에서, 1975년에는 60억 달러로, 1980년에는 크게 늘어 2백억 달러에
달하였다. 그리고 80년대 내내 이같은 수준을 지속했다. 이러한 유고의 외채는
80년대 내내 GDP의 1/4을 넘었고, 부채 원리금상환액은 총수출의 20% 가량을 차
지했다.
게다가 이러한 상품 가격구조로 인해서 일차산품을 주로 생산하는 남부지역의
소득이 공산품을 주로 생산하는 북부지역의 경우보다 더 급격히 떨어졌다. 그
리고 이는 남북부 지역간의 경제적 격차를 더욱 벌여 놓았다. 더구나 더 많은
수출로 외채를 갚으려고 노력했음에도 불구하고 80년대 내내 외채는 줄어들지
않으면서 외채 원리금 상환을 수행하는 문제를 둘러싸고 각 지역간에 갈등이 야
기되었다. 즉 커져가는 지역간의 소득격차에다 외채 원리금 상환의 부담을 어떻
게 분담하느냐 하는 문제를 놓고 지역간에 대립이 발생한 것이다.*주43)

다른 한편으로 외채문제는 국제금융기구를 앞세운 초국적 자본의 개입을 불러
오게 되었다. 이것은 이후 유고 경제의 전개과정에서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유
고경제가 외채위기를 맞이한 상황에서 초국적 자본은 외채를 갚으라고 독촉하면
서 유고경제를 죽이는 처방을 내렸다. 초국적 금융자본의 집행기구로 그 역할을
재규정한 IMF와 IBRD는 외채상환을 압박하면서 그 방도로서 강도높은 경제안정
화-구조조정 프로그램에 의한 시장경제로의 개혁을 강요한 것이었다.
유고에서는 이러한 흐름은 1974년 카르델지(Kardelj) 수상의 개혁으로 준비되
고 있었다. 그는 중앙집중적인 경제계획을 사실상 폐지하고 일련의 지방분권화
조치를 취했다.*주44) 그리고 이로써 각 공화국-자치주들에 대한 연방정부의 통
제력이 약화되기 시작했다. 이러한 흐름은 1980년 IMF가 강요한 거시경제개혁
(경제안정화-구조조정 프로그램)–미국이 외채위기에 직면한 중남미 나라들에
강요한 력한 재정긴축이 강요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신자유주의 개혁 처방은 서서히 유
고경제를 무너뜨려 나갔다. 그리하여 중남미에서 80년대가 ‘잃어버린 10년’이었
듯이 유고에서도 80년대는 잃어버린 10년이 되었다.
요컨대 외채문제는–일차산품 가격하락, 공산품 가격상승의 추세와 복합하여
–남북간 갈등을 악화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함과 동시에 보다 중요하게는 제국주
의가 유고경제에 간섭하여 무너뜨릴 수 있게 하는 빌미를 제공했던 것이다.

(3) IMF의 경제안정화-구조조정 프로그램이 유고 경제를 무너뜨렸다.

외채누증을 빌미로 한, IMF를 앞세운 초국적 자본의 개입은 두 단계를 거쳐서
이루어졌다. 그 첫 번째 단계는 국제수지를 개선해야 한다면서 경제안정화-규제
완화 프로그램을 강요하고, 경제활동에 대한 국가의 역할을 대폭 위축시키는 것
이었다. 그 결과는 경제활동 전반의 심각한 위축이었다. 이 단계는 대략 80-88
년의 기간에 걸친다. 그 다음 단계는 이렇게 해서 무너뜨린 경제를 살리기 위해
서라고 하면서 더욱 전면적이고 강도높은 구조조정을 강요하며 자본주의로의 체
제전환을 밀어붙이는 단계이다. 이 단계는 89년부터 92년 연방이 해체되기까지
이다. 그 다음서부터는 자본주의화를 심화시키면서 내전을 빌미로 정치·군사적
개입을 하고, 이를 통해 식민지화하는 단계이다.

신자유주의적 경제안정화-구조조정 프로그램은 80-88년간에 걸쳐 지속적으로
실시되었다. 이러한 거시경제 개혁은 티토가 사망하기 직전인 1980년에 시작된
이래 여러 차례를 거치면서 단계적으로 확대·심화되어 갔다. 이 개혁은 국제채
권단(파리클럽, 런던클럽 같은)과의 부채상환 만기 재조정(debt rescheduling)
협정 체결을 통해 강제된 것이었다. 그리고 “경제성장의 둔화”, “외채의 증가
및 원리금 상환부담의 가중”, “통화의 평가절하”를 가져오는 것이었다. 그리고
외채 원리금 상환을 위한 국민소득의 누출과 수출증대를 위한 통화의 평가절하
[및 그로 인한 인플레이션]는 “노동자·민중의 생활수준을 지속적으로 저하”시
키는 것이었다.*주45)
한마디로 “수출을 더 많이 해서 빚을 갚아라!”는 것이 IMF와 IBRD의 요구였
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 정부를 비롯한 공공부문이 경제 및 사회의 발전에 견인
차 역할을 하지 못하게 하고, 그 대신 시장기능과 사기업–국내든 해외든–에
맡기라는 것이 그들이 요구한 구조개혁의 요체였다.

IMF가 강요한 이러한 신자유주의 개혁 처방은 1987년에 이르면 약의 강도가
한층더 높아진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이 시기의 IMF의 처방을 ‘충격요법’이
라고 부르고 있다. 사실 이 시기에 이르면 이미 위기의 조짐이 눈에 띄게 표출
된다. 이 시기에 이르면서 연방 내부 균형 역시 극적으로 변화되었다. 1987년에
이르러 연방의 최남단에 자리잡은 세 공화국과 자치주–코소보, 마케도니아 및
몬테네그로–가 파산선언을 했다. 이런 상황에서 ‘충격요법’이 처방되었던 것이
다.
“1987년의 구-유고는 비록 갖가지 비극적인 결점들을 지니고 있었음에도 불구
하고 여전히 하나의 [통합된] 국가로 기능하고 있었다. 이 때 IMF가 경제정책을
접수했다. 그리고 오늘날 극히 친숙해진 일련의 ‘충격요법’–평가절하, 임금동
결, 가격에 대한 탈규제 등–을 실시했다. 이 요법은 하바드-MIT대학 경제학 교
과서의 원리에 기초하여 설계된 것으로서, 임금을 국제적으로 경쟁력이 있는 수
준으로 인하하는 것을 의미했다. 그리고 이 충격요법에 의해서 경제규모가 축소
되자 중앙정부에 들어가는 수입금이 줄어들었고, IMF는 이를 계기로 예산균형을
유지하기 위해서라며 세금을 인상하라고 압박했다. 매양 그러하듯이 이 강요는
한때 시세가 강했던 유고 디나르 화의 가치를 더욱 떨어뜨렸다. … IMF가 고
르바초프 정부로 하여금 루블 화를 평가절하하도록 위협한 것이 구-소련을 산산
조각냈듯이 유고는 이 디나르 화 평가절하로, 문화적.종교적 경쟁집단들이 제각
기 급속히 줄어드는 자원-풀을 놓고 서로 많이 차지하고자 거듭 다투게 됨으로
써, 갈기갈기 찢어졌다.”
1986년까지 높은 다. 그리하여 “1989년 12월이 되면 디나르 화의 가치는 1986년에 비해 2백 배나
떨어지고 만다. 1디나르에 22달러에서 11센트로!”
“IMF의 충격요법이 유고를 덮쳤을 때 사회적 무질서의 초기 형태는 민족분규
가 아니라 대규모의 반복되는 파업 및 노동자들의 집단행동이었다. … 보통사
람들은 정상적인 경제생활을 할 수 있는 선택지가 모두 파괴되어 버리고 나서야
비로소 민족이라는 괴물로 변모했다. ‘민족청소’는 ‘충격요법’이 자신의 임무를
다하고 나서야 비로소 출현했던 것이다.”*주46)

이리하여 80년대를 거치며 유고경제는 무너져 내렸다. 그에 따라 노동자·민
중의 삶도 무너져 내렸다. 그리고 그에 따라 유고 연방체제도 무너져 내렸다.
IMF의 지도 아래서!
“IMF의 프로그램은 무역자유화와 대출동결[즉 초긴축] 조치로 상징되었다. 이
로써 투자는 차갑게 얼어붙었다. 그리하여 1966-79년간 연간 7.1%에 달했던 ‘산
업성장률’은 1980-87년에는 2.8%로 떨어졌고 87-88년에는 0%가 되었다.”
또 “생산물량은 늘어났으나 무역수지를 흑자로 만들기 위해[즉 외채를 갚기
위해] 국내소비 대신에 수출로 돌려져야 했고 … 그리고 이에 따라 80년대 10
개 년 가운데 8개 년에서 ‘실질소득’이 마이너스를 기록했다. 1980년의 ‘실질소
득’은 1979년에 비해 30%나 저하했다.”
국민들의 ‘소비수준’ 또한 계속 저하했다. “산업성장이 멈추거나 아예 뒷걸음
질치고, 대량실업 사태가 벌어지게 되었으며, ‘개인소비’는 1979-1985년 사이에
7.7%씩이나 떨어지게 되는 속에서, 노동자 계급은 심대한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었다.”
“‘사회화 부문’ 노동자의 개인소득은 1979년에서 1985년 사이에 25%가 저하했
다. 그리고 1989년에는 유고 노동자의 60% 가량이 국가가 보장하는 최저수준 이
하에서 살고 있는 것으로 추계되었다. [노동자들의] ‘생활수준’은 1982년에서
1989년 사이에 40%나 떨어졌다.”*주47)

이렇게 경제상황이 지속적으로 악화되는 상황에서 80년대 말, 안테 마르코비
치 수상의 친미정부가 들어섰다. 그리고 경제개혁은 절정에 달했다. 그는 IMF의
권고에 따라 제조업에 대한 규제철폐(무엇보다도 가격에 대한 규제의 철폐)를
실시했다. 이렇게 되자 그 동안 억제되었던 인플레이션 요인이 폭발하고 말았
다. 유고의 인플레이션은 1970년대에는 15% 수준이었으나, 81-83년간에는 40%,
85-88년간에는 200%에 이르렀다. 그러다가 1989년에 들어서는 가격자유화와 통
화의 평가절하로 물가가 한 달에 100%씩 년간으로는 1300%나 폭등했다. 악성 인
플레이션은 의도적으로 방치되었다. 연방은행은 소득(명목)은 오르는 데 반해
생산품은 외채를 갚기 위해 수출되어 버리는 데 따른 갭을 메우고자 돈을 찍어
내기만 했던 것이다.*주48)
이렇게 성장은 멈추고, 외채는 증가하며, 물가는 폭등하게 되자 마르코비치
수상은 베를린장벽이 무너지기 얼마 전인 1989년 가을에 기 위해 워싱턴으로 건너갔다. 그 후 또다시 통화의 평가절하, 임금동결, 정부
지출의 대폭 삭감, 자주관리 체제의 공기업제도 철폐, 시장의 자유화 및 경제의
대외개방을 내용으로 하는 전면적인 경제개혁에 착수하는 것을 조건으로 금융지
원 패키지가 약속되었다. 이러한 미국과의 약속에 따라 1990년 1월부터 외국자
본의 투자에 대한 법개정을 비롯하여 각종의 “근본적인 개혁”(즉 자본주의화 개
혁!)이 본궤도에 오르게 되었다. 신자유주의 친미정권을 앞장세우고서!*주49)

(4) IMF 협약과 시장경제 개혁이 유고경제 붕괴를 완성하고 자본주의화를
관철시켰다.*주50)

1989년에 동유럽의 사회주의가 붕괴하고 1990년에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면서,
IMF의 구조조정 프로그램은 바짝 가속화되었다. 이것은 또한 “공산당 및 공산정
부를 전복하는 ‘조용한 혁명’을 추진하는 노력을 확대·강화하고 동유럽을 시장
지향 경제에 통합시키기 위한” ‘미 국가안보 결정 지침 1982’의 내용을 관철시
키는 것이기도 했다.

1. ‘재정 무력화’ 개혁과 금융·외환·무역 등의 ‘시장 자유화’ 개혁
1990년 1월에 IMF의 대기성차관 협약과 세계은행의 구조조정차관을 조건으로
경제개혁이 시작되었다. 그런데 IMF와 체결한 이 협약에서는 다른 무엇보다도
“GDP의 5%에 해당하는 재정축소”가 요구되어 있었다. 그리고 연방 재정의 이러
한 축소로 공화국-자치주들에 대한 연방정부의 재정지원이 동결되자 각 공화국
들에서는 ‘국가부도 위기’ 상황이 초래되었다. IMF가 몰고온 유고연방의 재정위
기는 연방국가적인 재정구조–연방정부가 지방정부에 예산을 배정해 줌으로써
연방정부와 지방정부가 유기적으로 통일되게 하는 재정구조–의 붕괴를 교묘히
획책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수법을 우리는 연방국가인 브라질에서 지금
다시 목격하고 있다!)
그리고 그들이 의도했던 바 그대로, 연방예산을 외채상환용으로 돌리기 위해
중앙정부가 공화국과 자치주에 대한 예산지원을 중단하자 정치적 분열과 분리주
의운동이 한층더 가열되었다.

IMF가 요구한 거시경제개혁에는 또 디나르 화의 호환성 보장(즉 외환자유화),
금리자유화, 수입쿼터제의 추가적인 축소(즉 무역자유화)가 포함되어 있었다.
그리고 극히 중요한 점으로서, “국제채권단이 통화정책을 완전히 장악하는 것”
(즉 금융자유화)이 들어 있었다. 즉 IMF협약으로 연방정부는 자국의 중앙은행에
서조차 대출을 금지당했던 것이다. 이로 인해 연방정부의 예산집행과정이 사실
상 마비되었고, 사회복지 및 경제발전 계획을 실행하는 연방정부의 능력이 불구
화되었다. 뿐만 아니라 금융개혁과 함께 진행된 상업대출의 규제철폐로 사회적
으로 소유되는 기업 즉 공기업에 대한 투자는 완전히 중단되었다.
요컨대 IMF는 유고연방의 재정지출을 통제함으로써 연방국가의 기능–지방정
부에 대한 예산배정, 사회복지 지출, 재정투·융자 등–을 마비시켰다.(재정의
지출 면에서) 또 연방정부의 금융·통화정책을 무력화시켰으며, 이로써 연방정
부는 중앙은행으로부터의 차입을 통해 적자재정을 운영할 수도 없었다.(재정수
입 면에서) 나아가 통화정책을 장악하여 공기업들을 고사시켰다. 즉 공공부문을
총체적으로 무너뜨렸던 것이다!

이렇게 공공부문을 와해시키면서 IMF는 또 인플레이션으로 실질수입이 줄어들
었는데도 1989년 1월 수준으로 임금을 동결하라고 주문했다. … 그 결과 실질
임금은 1990년 상반기 동안 41%나 감소했다. 한편 인플레이션은 1990년에 70%를
넘었다. 그리고 1991년 1월 디나르 화에 대한 평가절하 30%가 추가로 시행되자
또 한 차례의 물가인상이 밀어닥쳤다. 그리하여 인플레이션은 91년에는 140%,
1992년에는 937%, 93년에는 1,134%나 치솟았다.
요컨대 임금은 동결하면서 통화는 평가절하를 함으로써(자유변동환율제를 택
함에 따라 유고 통화의 가치는 1992년 여름에는 1달러당 1/2센트로 폭락했고,
93년 5월에는 0.003센트가 되었다. 그리하여 초-인플레이션이 초래되었다.), 그
리고 이를 통해 물가를 앙등시킴으로써 실질임금을 대폭 깍아내렸다. 그리하여
높은 이윤을 얻을 수 있는 터전을 마련했던 것이다.

그렇다! 경제를 더욱 철저하게 자본주의화하려면 공공부문(정부재정과 공기
업)을 무너뜨려 사기업과 시장이 활개칠 수 있게 해야 한다. 정부는 기업이 진
빚 상환을 보증하는 역할만 해야 한다! 그리고 임금을 떨어뜨려 착취율을 높여
야 한다! 가능하면 천문학적으로! IMF는 외채를 고리로 주권국가의 경제정책을
장악하고(경제 신탁통치를 하고서!) 이것들을 관철시켰다.

2. 기업·은행의 사유화 개혁
1989년서부터 시작된 친미 마르코비치 정권의 기업개혁은 유고의 산업부문을
몰락시키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1990년 GDP 성장률은 -7.5%를 기록했다.
1991년에는 GDP 성장률이 -15%로 곤두박질쳤고, 산업생산은 21%나 감소했다.
IMF를 앞세운 국제채권단은 또 공기업제도의 폐지를 요구했다. 이들의 압력에
의해 제정된 ‘1989년 기업법’에서는 ‘노동자 기본조직’을 폐지하도록 되어 있었
다. ‘노동자 기본조직’은 노동자 자주관리제를 취하고 있는 공기업–사회적으로
소유되는–의 생산단위인데, 주요 의사결정기구로 ‘노동자위원회’를 두고 있었
다. 그런데 ‘1989년 기업법’은 ‘노동자 기본조직’들이 통제하는 자주관리제 공
기업들을 자본주의제 사기업으로 전환시키는 것과, ‘노동자위원회’를 채권단을
비롯한 기업 소유주가 주도하는 ‘사회 이사회’로 대체한다는 내용으로 되어 있
었다. 유고경제를 사유화·민영화하고 공공부문을 와해시킨다는 것이 이 법의
의도였던 것이다.

유고경제의 이러한 사유화·민영화는 국내 부르조아를 위한 것이 아니었다.
외국자본이 먹어주기 위한 조건을 마련하는 것에 불과했다. 1989년 초에 개정된
‘외국인 투자법’은 외국자본이 산업·금융·보험·서비스 부문에 무제한적으로
투자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다. 이 법이 실행되기 전까지는 외국인 투자는 공
공소유 기업과의 합작에 국한되어 있었다. 뒤이어 1989년에 입안된 ‘사회자본의
전환과 운영에 관한 법’과 1990년의 ‘사회자본법’은 공공소유 기업을 외국자본
에 매각하는 것을 비롯해서 초국적 자본의 공기업 탈취를 합법화해 주었다.
특히 ‘사회자본법’은 공기업이 민영화 절차를 밟을 때 기업이 자산을 평가할
‘자산평가와 구조조정을 위한 기구’를 탄생시켰다. 그러나 다른 동유럽 국가들
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기업의 자산평가는 유고 화폐를 기준으로 한 의해 이루어졌다. 이렇게 실제가치보다 형편없이 낮게 평가되어 있는 이 장부가
격에 따라 공기업들은 감자(感資)되어 헐값에 팔려나갔다.
또 1989년과 1990년에는 새로운 ‘은행법’이 입안되어 공공소유인 ‘조합은행들
(Associated banks)’의 파산을 재촉했다. 유고연방에 있는 은행 전체의 절반 이
상이 문을 닫았다. 이렇게 1990년에 이르면 유고연방의 3단계 금융구조(유고 중
앙은행–8개 공화국과 자치주 은행–상업은행)는 세계은행의 지도(!) 아래 허물
어진다. 그 대신 “이윤추구 지향의 독립적인 금융기관”의 설립이 강조되었다.
1990년 6월에는 보험 및 금융 회복을 위한 연방기구가 설립되어 구조조정을 거
친 은행들을 재조정하고 다시 민영화하는 일을 추진했다.

그렇다! 시장경제로 개혁한다는 것은 단지 공공부문을 무너뜨리는 데 그치지
않고 알짜 공기업과 금융기관들을 사유화·민영화하는 것, 특히 외국자본에 팔
아 넘기는 것이었다.

3. 대량 파산과 대량 실업을 강제하는 구조조정
IMF와 세계은행이 주도하는 개혁 프로그램은 부실기업을 정리한다는 명분으로
산업부문에 대한 대출을 동결할 것을 요구했다. 1989년의 ‘금융운용법’에 따라
이른바 ‘퇴출 메커니즘’이 확립되었다. 이 법에 따르면 기업이 30일간 계속 파
산상태에서 운영되거나 45일 가운데 30일간 파산상태에 있게 되면, 그 후 15일
이내에 채권단과 회의를 열어 채무이행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이러한 메커니즘
을 통해 국내은행을 비롯한 채권단은 기업에 대한 대출을 기업에 대한 통제의
수단으로 이용할 수 있게 되었다. 또 기업에 대한 대출금을 경영권을 갖는 지분
으로 바꿀 수 있었다.
이 법은 또 기업퇴출에 관한 정부의 개입을 금지시켰는데, 화의(和議)에 이르
지 못하면 파산절차를 밟게 하고, 이런 경우 노동자들에게는 해고수당이 지불되
지 못하게 했다. 그 결과 많은 기업이 파산했고, 많은 노동자들이 실직했다.
공식자료에 의하면 1989년 한해 동안 248개의 기업이 파산하고 8만 9천4백 명
의 노동자들이 해고당했다. 그러다가 IMF 신탁통치 프로그램이 적용된 바로 직
후인 1990년 들어 9개월 동안 889개 기업과 52만 5천 명의 노동자들이 파산절차
에 따라 희생되었다. 다시 말해서 2년도 채 안되는 기간 동안 ‘금융운용법’에
의한 연쇄파산 메커니즘으로 전체 산업인구 270만 명 가운데 60만 명이 넘는 노
동자들이 일자리를 잃게 된 것이다!
이같은 기업 파산과 노동자 해고는 특히 가난한 남부지역의 공화국과 자치주
들에서 집중적으로 일어났다. 즉 세르비아, 보스니아-헬체고비나, 마케도니아,
코소보 등의 경제가 황폐화된 것이다.

이처럼 IMF가 지원하는 1990년 1월의 경제개혁과 구조조정 프로그램은 기업의
손실을 증가시켰으며 전력·정유·기계·화학 산업의 기업들의 도산을 부채질했
다. 나아가 1990년 1월에 실시된, 무역에 대한 규제철폐는 수입 소비재를 범람
하게 만들었고 이는 유고의 국내 생산을 더욱더 요구하는 경제개혁을 실시한다는 조건으로 빌려온 돈(경제개혁을 지원하는 IM
F·세계은행·쌍무채권단의 각종 기금-지급-차관)은 이러한 소비재 수입에 충당
되었다.
물밀듯이 쏟아져 들어오는 소비재로 유고연방의 외채는 불어나기만 했고, 금
리와 생산재 가격의 급등으로 허덕이고 있던 국내기업들은 국내시장에서 설자리
를 잃거나 파산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구조조정과 경제자유화는 대량해고와 대량실업을 동반했다. 1990년 9
월에 세계은행은 전체 7,531개 기업 가운데 2,435개가 부실기업이라고 추정했
다. 다시 말해서 ‘금융운용법’에 따라 이 2,435개 기업과 여기에 고용되어 있는
130만 노동자들은 채무이행불능 기업으로 분류되어 즉시 파산절차에 따라 처리
되어야 한다는 뜻이었다. 1889년 이전에 이미 파산기업에서 60만 노동자들이 쫓
겨난 사실을 감안한다면, 전체 270만 노동자 가운데 190만이 “과잉”노동력으로
분류된 것이다.
그런데 ‘금융운용법’으로 파산기업이 노동자를 해고할 때 해고수당을 지급하
지 않고 바로 해고하는 것이 가능해졌지만, 우량기업(민영화된 기업 포함)에서
의 노동자의 해고는 여전히 ‘1989년 노동법’에 따라야 했다. 그런데 이 노동법
은 기업이 과잉노동력을 감량하는 것을 허용하면서도 해고수당 지급은 의무화하
고 있었다. 이에 대해 세계은행은 ‘1989년 노동법’에 따른 노동자해고의 비용부
담이 너무 크다고 하면서, 기업의 해고수당 지출은 불법적이라고 주장했다.
세계은행은 노동법이 안고 있는 이러한 단점(!)을 보완하기 위해 ‘해고 노동
자를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시, 공화국, 연방기구가 공동으로 참여하는 사회안
전망을 구성하자고 제안했다. 그러면서 노동시장의 경직성 또한 시정되어야 다고 주장했다. 노동자의 재취업을 위해 세계은행이 제안한 것은 중소기업의 육
성이었다. 그러나 재정긴축과 기업에 대한 대출제한 정책이 실행되고 있는 상황
에서 이러한 제안은 무의미한 것이었다.

그렇다! 초국적 자본이 약소국을 자신들의 경제식민지로 만들어 먹어주려면
기업들을 대량 도산시켜야 하고, 노동자들을 대량 실업자로 만들어야 한다!

(5) 경제식민지화가 본궤도에 오르고 있다.

유고 경제는 붕괴되고 이에 따라 연방체제도 붕괴되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유고 경제는 자본주의화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워싱턴 시나리오’의 끝이 아니
다. 이 시나리오의 끝은 재식민지화이다. 이 재식민지화는 유고의 연방체제가
해체되면서 본궤도에 올랐다. 그리고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주51)

이러한 식민지화는 보스니아-헬체고비나에서 집중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보스
니아-헬체고비나는 지금 내전을 거쳐 나토군의 점령하에 보호령과 같은 통치를
받고 있는데, 두 개의 대립하는 공화국으로 나뉘어진 ‘병렬국가’ 체제로 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점령군 나라들이 파견한 ‘최고 대표’에 의해 통치되고 있다.
이 최고대표가 두 개의 공화국의 대통령까지도 사실상 자신의 임의로 임명·해
임하고 있다.
경제도 마찬가지이다. 현지인의 정부는 독자의 경제정책을 수립·집행할 수
없게 되어 있다. 중앙은행은 돈도 자기 마음대로 찍어낼 수 없다. 국제대부는
전쟁으로 파괴된 경제를 재건하는 데 사용될 수 없으며, 국제채권자들에게 진
빚을 갚는 것과 ‘데이톤 평화협정’에 따라 진주한 평화유지군의 군사비용을 지
원하는 데 사용되어야 한다고 명령받고 있다.*주52)

이렇게 보스니아-헬체고비나를 완전히 재식민지화한 이후 미국-나토 세력은
지금 그러한 재식민지화를 유고의 여타 지역 전체로 확대시키려 하고 있다. ‘랑
부이예 협정’의 실제내용이 밝혀지면서 분명하게 알 수 있게 되었듯이 나토의
군사개입은 결코 코소보에 진주하는 데에만 국한되지 않고 있다. 나토군은 유고
전 지역을 점령하는 것을 겨냥하고 있다.*주53)
“지금 유고에 개입하고 있는 나토군의 침략은 지난 시기에 수행되어 온 목적
–구 유고연방의 경제적·사회적 발전들 모두를 파괴하고, 이 지역 전체를 자본
주의 강대국들의 일종의 반식민지로 전환시키고자 하는–을 달성시키는 이전과
는 다른 수단으로서, 말하자면 다른 방법에 의한 같은 목적의 수행이다.”*주54)
“IMF–초국적은행들이 미 재무부를 통하여 통제하고 있는–는 발칸반도에 위
기를 조성하는 진짜 “사탄 세력”이다. 이 세력이 무력화되지 않는 한 민족청소,
잔혹행위, 내전이 전 세계에 걸쳐 계속될 것이다.”*주55)

(6) 맺음말

이상에서 간략히 살펴본 바와 같이 유고 경제는 IMF를 앞세운 초국적 자본 특
히 초국적 금융자본의 시장경제로의 개혁 강요에 의하여 붕괴되었다. 뿐만 아니
라 노동자·민중에게는 대량실업과 생활수준의 대폭적 저하라는 고통을 안겨주
었다. 그리고 이러한 경제적 고통은 당연히 인간적인 고통으로 이어져서 노동
자·민중은 실망과 좌절의 늪에 빠지게 되었다.
유고의 경우는, 다른 구 사회주의 나라들의 경우에도 그러하지만, 이러한 고
통이 사회주의를 표방해온 지도층들의 배반에 의해 빚어짐으로 인해서 대중은
더욱 깊은 좌절감을 가지게 되었다. 대중은 대안적인 전망이나 세력이 부재하는
아노미 상태에 빠져들게 되었다. 국내 부르조아와 외세는 이러한 대중의 아노미
상태를 철저히 이용했다. 그들은 대중의 의식이 멍해져 있는 이 빈 공간에다 민
족주의, 쇼비니즘, 원리주의 같은 것들을 불어넣었다. 그리고 각 민족들간에 서
로 죽고 죽이는 싸움을 하도록 부채질했다. 이렇게 대중의 의식이 왜곡·마비되
고 서로 싸우는 가운데서만 자신들이 추구하는 자본주의화·재식민지화가 순조
롭게 관철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었다.
이러한 대중의식의 아노미 상태를 배경으로 하고서 유고의 부르조아 계급은
극단적 민족주의를 내세우며 자본주의화하는 한편으로는 연방 국가체제를 허물
고 각 공화국별로 분리독립함으로써 서로 영토분쟁을 벌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제각기 외세에 의지하여–실은 그들에 예속되어–살길을 찾고 있다.
이 과정은 또 처음부터 끝까지 서구 제국주의에 의하여 기획되고 선동되고 추
진되어 온 것이기도 했다. 정치·군사적으로도 그러했지만 그 이상으로 경제적
으로 유고경제를 무너뜨리는 것을 통하여 그것을 관철시켰다는 것을 우리는 주
목하게 된다. 오늘날의 식민지화는 정치·군사적 침략에 앞서 경제적으로 허물
어뜨리고 먹어주는 것을 통하여 이루어진다는 것을 유고의 경험은 뚜렷하게 보
여주고 있다. 식민지화는 정치·군사적 지배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닌 것이다!


□ 주 ———-

37) 이렇게 유고경제의 붕괴를 발칸사태의 주요한 배경이라고 말한다고 하여,
‘정치적인 현상은 상부구조이고 경제는 그 토대’라는 식의 도식적인 인식틀에
만사를 꿰맞추려는 것은 아니다. 경제가 무너져내리는 것과 정치적으로 연방
체제가 해체되고 민족갈등이 분출되는 것은 하나의 과정–자본주의화와 식민
지화 즉 ‘식민지 자본주의’화 과정–의 두 측면으로서 긴밀히 서로 맞물려 있
다. 그리고 이 두 측면은 서로 상승작용을 해 왔다. 그런데 발칸사태에 대한
대부분의 분석에서는 이 경제적인 측면이 간과되고 있다. 아무리 정치적으로
민족(분리)주의를 선동하고자 하더라도 경제가 무너지지 않았다면 분리독립과
연방해체는 결코 성공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처럼 유고의 자본주의화·식민지
화 과정은 유고 경제를 붕괴시키는 것을 통해서만 성공할 수 있었다. 이미 어
느 정도의 분권화가 이루어져 있는 나라에서, 또 민족간의 갈등이 발생할 수
있는 소지가 다분한 나라에서, 그러한 ‘조건’이 존재하고 있는 상태에서, 경
제의 붕괴는 계급간의 갈등과 더불어, 그리고 그 이상으로, 민족간의 갈등을
폭발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한 것이다. 부르조아 계급의 선동과 사주에 의하여!
그리고 이것이 다시 연방국가 체제의 붕괴를 가져오고 그럼으로써 사회주의
구성체가 해체되는 것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이것이 현재 보는 바와 같은, 외
세와 손잡은 각 민족의 부르조아들 간의 극단적인 민족분쟁으로 이어지게 된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현 사태의 배경 가운데서 유고 경제의 붕괴가 결정적
인 지위를 차지한다고 할 것이다.
38) 티토는 1948년–유고는 이 해에 코민포름에서 추방되었다.–에 스탈린과 결
별한 이후 1950년대에 들어 비동맹노선을 추구했다. 민족해방 국가들간의 경
제협력을 통해서 강대국에 종속되지 않으면서 경제발전을 이룩하고자 했던 것
이다. 그러나 이러한 시도는 비동맹노선을 주도한 민족해방 지도자들–인도네
시아의 수카르노, 가나의 엥크루마, 인도의 네루, 이집트의 낫세르 등–의 대
다수가 죽거나 쿠데타(미 CIA의 조종을 받은)로 실각하는 60년대 후반에 이르
면서 대체로 실패에 이르게 된다. 이후 유고는 소련 블록이냐 서구 블럭이냐
하는 양단간의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이때 유고는 소련을 겁내어 서유럽 자
본 쪽을 택하면서 서구로부터 자국 상품에 대한 판매시장을 얻는 대가로 서구
자본에 자국 산업을 개방했다. 이로써 북부의 두 공화국–슬로베니아와 크로
아티아–과 유럽공동체 사이의 경제관계가 매우 밀접해졌다. 양질의 저렴한
노동력을 노리고서 많은 합작기업들이 설립되었다. 특히 2차대전 당시 이 지
역을 식민지로 지배했던 서독과 이태리 자본의 진출이 두드러졌다. 그리고 이
는 이들 두 공화국을 다른 공화국들로부터는 더욱더 멀어지고 서구 자본주의
에는 점점 더 가까워지게 만들었다. 이 부분에 관해서는 Michael Barratt
Brown, “The War in Yugoslavia and the Debt Burden”, ‘Capital and Class’
50(1993)을 참조.
39) Michael Barratt Brown, 위에서 인용한 글을 참조.
40) 브랑카 마가쉬, “유고슬라비아 : 소국분열이라는 망령”, ‘동유럽은 어디로
가는가?’, 신평론, 1990년을 참조.
41) Michael Barratt Brown, 앞에서 인용한 글을 참조.
42) 1999.4.17, Nick Beams, “IMF ‘shock therapy’ and the
recolonization of Balkans”를 참조.
43) 그러면 외채는 어떻게 지역간 갈등을 악화시켰는가? 북부지역은 자신들이
더 많이 생산·수출하여 얻은 외화소득을 세금으로 바쳐서 외채를 갚아나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남부지역과 연방정부가 진 외채를 갚기 위해 자신들이 ‘수
탈’되고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반면에 남부지역의 공화국-자치주들은 지난날
보다 더 많이 생산함에도 불구하고 소득은 계속 줄어들고 있다고 불만스럽게
생각했다. 그리고 이러한 소득 저하를 남북 지역간의 교역관계–남부지역은
북부지역에 일차산품을 공급하고, 북부지역은 남부지역에 공산품을 공급했
다.–가 갈수록 불평등해 지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이렇게 외채문제와 그에
따른 국제 가격구조의 왜곡은 서로가 자신을 상대방의 피해자로 보게 (실은
세계 자본주의 경제의 공동의 피해자들임에도!) 만들었다. 그리고 이러한 불
만은 북부지역에서 더욱 강했다. 그리하여 80년대에 접어들면서 북부지역에서
민족분리주의 움직임이 강하게 터져나오게 되었고, 이것이 반사적으로 남부지
역에도 민족분리주의 움직임을 불붙이게 되었다. 유고 경제의 해체 과정에서
외채문제가 행한 역할에 대해서는 앞에서 인용한 Michael Barratt Brown의 글
을 읽어보시오.
44) “2차대전 뒤로 중앙집중화 경향이 우세했지만, 1974년에 개정된 헌법에 의
해 공화국들과 자치주들이 연방 중앙에 대해 더욱 큰 자율권을 부여받게 되었
고, [보이보디나, 코소보 같은] 자치주들은 베오그라드로부터 훨씬 더 독립되
게 되었다.” 브랑카 마가쉬의 앞에서 인용한 글을 참조.
45) Michel Chossudovsky, 앞에서 인용한 글을 참조.
46) “The IMF and the Balkan Crisis(May 5, 1993)”, Criton Zoakos,
Polyconomics, Inc. web site(www.polyconomics.com), 1999,4,8일자를 참조.
47) 이상, Michel Chossudovsky, Michael Barratt Brown, Nick Beams, 및 브랑
카 마가쉬의 앞에서 인용한 글들을 참조.
48) 앞에서 언급했듯이 유고는 이미 1974년 카르델지 수상의 개혁으로 경제계획
을 종식하고 분권화를 촉진했다. 이는 세계시장의 가격구조의 변화에 따른 남
북 지역간의 갈등의 반영이었다. 그와 동시에 이는 국가경제에 대한 연방정부
의 통제력이 무력화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이것이 IMF가 강요한 개혁으
로 가속화되었으며, 연방정부는 각 공화국-자치주들과 그들이 관할하는 자주
관리 기업들의 경제활동에 대하여 통제력(예컨대 가격통제)을 상실해 갔다.
외환투기를 통제하지 못했음은 물론이고 통화량에 대한 조절도 제대로 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Michel Barratt Brown, 위에서 인용한 글
을 참조.
49) Michel Chossudovsky, 앞에서 인용한 글을 참조. 그 상세한 내용은 이하에
서 상술될 것이다.
50) 이 (4)항의 내용은 Michel Chossudovsky의 앞에서 인용한 글 및 그것을 보
완한 그의 책 ‘빈곤의 세계화’를 발췌·요약한 것이다.
51) 유고연방의 해체는 이같은 경제적 과정의 정치적 확인이라고 할 수 있다.
IMF가 유도한 재정위기는 연방국가적인 재정구조를 무너뜨렸으며, 각 공화국
이 제각기 살길을 찾아 나서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다. 그리고 이같은 상황은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가 1991년에 연방에서 분리독립하겠다고 공식 선언하
기 이전에 이미 사실상 분리독립되어 있게 된 것을 의미한다. 즉 정치적으로
분리독립을 선언한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경제적으로 이미 분리독립되어 있는
‘기정사실’을 확인한 것에 불과했다고 할 수 있다. 독일의 지정학적 야심과
EU의 정치적 압력이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의 분리독립을 고무·선동했지
만, 10년간에 걸친 구조조정의 결과로 연방해체의 경제적·사회적 조건들이
이미 확고히 뿌리내려 있었던 것이다.
52) Michel Chossudovsky, 앞에서 인용한 글을 참조.
53) 랑부이예 협정 부록 B의 ‘평화유지군의 지위’ 부분에서 이렇게 규정하고 있
다. “나토군의 병력은 자신의 차량, 선박, 항공기 및 장비들과 함께 영공과
영해를 포함하는 유고의 전 지역에 걸쳐서 자유롭고 제약없이 통과할 수 있도
록 되어야 하며, 또 방해받지 않고 진입할 수 있도록 되어야 한다.” ,
1999.4.14, Peter Schwarz, “Rambouillet Accord forsaw the occupation of
all Yugoslavia”를 보시오.
54) , 1999.4.17, Nick Beams, “IMF ‘shock therapy’ and the
recolonization of the Balkans”에서.
55) Criton Zoakos의 앞에서 인용한 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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