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선을 대비하는 자유주의와 급진적 민주주의
맥스 레인, 주간녹색좌파 5/26
수하르토 정권이 1965년 쿠데타로 정권을 탈취한 이후, 안정적 기반을 확보하기까지 5년에서 7년의 시간이 필요했다.
그 과정에서 거의 백만 명 가까운 사람들이 학살되었으며 10년간 약 1만 4천명 이상이 투옥되고 작업장에서는 전투적인 노동자 수천 명이 해고되었다. 또한 수십 개의 신문이 판매 금지당했으며 강력한 검열이 실시되었고 좌파 조직은 활동이 금지되었다. 어용노조는 10년간 활동이 금지되었으며 자주 노조 역시 약 20년간 활동이 금지되었다.
1970년 초까지 모든 권력은 독재자 수하르토의 손아귀에 있었다.
수하르토는 세계은행 및 국제통화기금과 맺은 협정으로 인해 대규모로 외국 차관을 유입할 수 있었다. 지원받은 자금과 1975년부터 유입된 석유 달러로 인도네시아 경제는 안정을 되찾았으며 매년 6-8% 성장하였다.
1970년 말까지 산업과 상업, 농업의 팽창은 법률가, 의사, 대학생, 학자, 기술자, 다른 과학자들, 기자, 회사의 이사, 때때로 전문적인 정치인 등 “중산층”의 빠른 증가를 낳았다.
많은 사람들은 자신들이 감내해야 하는 모든 제한 조치들에 분노했다: 예술과 언론, 합법적 기구에 대한 검열, 효율성과 장점을 파괴하는 사업상의 정실주의, 사업상의 계약을 무의미하게 만드는 부패와 관료주의. 1980년대까지 세계은행은 인도네시아에서 “법에 의한 통치”를 요구하는 특별보고서를 제출했다.
대학에서는 초기에 학생들의 정치적 참여가 보장되었다. 이는 그들이 수하르토의 학살과 탄압을 지지했던 우파 학생운동 출신이라는 특권에서 비롯되었다. 그러나 1970년대 초부터 수하르토는 이 특권을 빼앗기 시작했다. 수하르토의 부패를 비판하던 반공 성향의 학생들이 투옥되고 추방당했으며 심각한 폭력에 위협당했다. 1978년까지 모든 학생회활동이 금지되었으며 캠퍼스에서의 정치적 활동 역시 금지되었다. 학생들은 다양한 불만계층과 연대하였다.
1980년까지 중산층의 불만을 대변하는 수십 개의 비정부기구가 존재했다. 정치와 사업활동에 있어서 임의적인 통치 방식을 종식시키고자 하는 열망이 중산층에 스며들었으며 계속해서 확산되었다.
이런 배경에서 수하르토를 비판하는 몇몇 명망가들이 등장했다: 학생운동 지도자인 하리만 시레가, 법률가 아드난 부융 나스티온, 전 자카르타 시장 알리 사디킨, 다른 퇴역 장성들, 출판인 구나완 무하마드, 전 의원 스리 빈탕 파뭉카소, 노무사 무치타 팍파한.
1980년대와 1990년대 초 그들은 일정한 명성을 누렸음에도 불구하고, 독재에 항거하는 정치적 운동을 전혀 조직하지 않았다. 이러한 자유주의적인 관점에는 인도네시아 수백만 노동자와 농민의 조직화에 대한
어떤 가능성도 내포되지 않았으며 노동자와 농민을 무방비 상태로 내던져 버렸다.
노동자와 농민을 조직하고 학생들 사이에 전투적 분위기를 고양시켰던 것은 혁명적이고 민주적인 분위기였으며 이는 곧 정권에 대한 위협으로 드러났다.
1999년 자유주의적 민주주의
중간계급 자유주의자들의 조직적 무능력은 1999년 6월 7일 총선 준비과정에서 여실히 드러나고 있다.
몇몇 자유주의자들은 메가와티 수카르노푸트리의 인도네시아 민주당이나 압둘라만 와히드의 국가 계몽당과 같이 오랜 기간 활동하고 있는 정당의 지도부로 흡수되었으며 나머지 대다수의 경우에는 아미엔 라이스의 국가 수권당(PAN)에 입당했다. 이것이 자유주의자들의 조직적 취약성의 원인 가운데 하나로 꼽히고 있다.
그러나 수하르토에 맞선 싸움에서 가장 선도적이던 몇몇 자유주의자들은 자신의 정당을 만들었다. 스리 빈탕 파뭉카소는 통일 민주당을 창당했으며 팍파한은 민족 노동자당을 창당했다.
그러나 지난 몇주 동안 진행된 선거운동에서는, 어느 정당도 강한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했다. 그들은 조직적인 측면에서 빈 조개껍질에 지나지 않았다. 수하르토 체제하에서는 솔직함만으로도 명성을 획득하는데 충분했다. 그러나 현 제도 정당을 지도하고 있는 중소 자본가들과 지역유지, 회교 지도자, 지주들의 거대한 조직에 맞서 정치적으로 경쟁하는데 있어서는 솔직함 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중간계급의 자유주의를 일관되게 지지하는 자들에게는 관심을 가질 만한 어떤 정당도 존재하지 않는다. 가장 밀접하게 접근하고 있는 것이 PAN이지만 많은 이들은 최근에야 자유주의자로 전환한 라이스를 의심하고 있다. 수하르토 집권 당시, 그는 회교분파주의와 하비비와의 밀착 관계로 평판이 좋지 않았다. 현재 많은 자유주의자들은 해외 펀딩을 받고 있는 몇몇 선거 감시 단체를 운영하고 있다.
하비비 정권의 권위주의와 부패, 정실주의에는 강고하게 저항하고 있지만, 종종 노동계급에 대해서 소홀하거나 적대적인 전투적 학생 자유주의자들은 선거를 보이코트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선거가 그들의 슬픔을 감소시켜 줄 것이라는 생각이 대중들 사이에 광범위하게 확산되자, 보이코트 운동의 열기는 사그러 들고 있다.
혁명적 민주주의
민중민주당(PRD)은 지속적으로 선거 과정의 비민주성을 비판하고 무조건적으로 군대의 정치적 역할을 완전히 제거할 것을 요구하며 선거에 참여한 유일한 정당이다.
PRD는 계속해서 선거과정은 더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문제에 대해 훨씬 더 급진적으로 사고할 수 있는 계기가 된다고 주장했다. 이번 총선에는 단지 31명의 후보만이 출마했으며 그들은 이미 많은 논쟁을 불러 일으켰다.
PRD 후보에는 1998년 초에 납치되어 아직까지 행방불명 상태인 3명의 후보와 구속된 당총재 부디만 수자미코와 노동운동가 디타 사리가 포함되어 있다. 행방불명된 세 후보가 등록할 수 있을 지는 여전히 논쟁거리로 남아 있다.
PRD는 돈많은 정당이나 전통 회교도들에 호소하는 정당 및 수카르노주의자들과 경쟁할 만큼 충분한 재원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 그러나 PRD활동가들은 정당원들이 올해 초부터 지지율을 10배나 증가시켜 왔다고 말한다.
선거활동 기간동안, PRD는 조직들의 투쟁을 독려하며 풀뿌리 정치권력 강화를 계속해서 강조했다. 이는 5월 14-16일 노동자 투쟁을 위한 인도네시아 민족전선(FNPBI)의 형성에 있어서 결정적 역할을 했다.
PRD는 또한 계속해서 시위를 조직했다. 노동자들과 함께 PRD는 4월 6일과 노동절에 전국 노동자 행동을 조직했다.
5월 20일, PRD활동가와 수십명의 학생들, 북부 자카르타 빈민 지역인 카폭에 위치한 두 공장에서 온 1800명의 노동자들은 며칠 전 3명의 노동운동가가 행방불명된 사실에 항의했다.
시위대는 군대의 습격을 받았으며 적어도 30명이 체포되었고 수백 명이 부상당했다. 그들 가운데에는 노동자 투쟁을 위한 인도네시아 민족전선 총 비서 일람 시아도 포함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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