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68년
앨런 월드, 인터내셔널뷰포인트 98/5
축복받는 해인 “1968”년이 가지는 상대적 중요성을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 앨런 월드가 30년 전 미국의 진보 세력들이 가졌던 복합적인 경험을 평가한다.
1968년은 서구와 동구 유럽의 계급투쟁에서 진정한 전환점이었다. 프라하의 봄이 탱크를 앞세운 소련의 침공과 정부의 몰락을 야기하고, 프랑스의 오월 봉기가 라땡구(區)의 바리케이드와 천만 노동자의 총파업을 가져온 것은 유명하다.
미국의 경우, 확실히 그 해에 벌어진 사건들은 어쩔 수 없고 외상(外傷)적인 경험이었다. 군사전선에서는 세상을 놀라게 한 구정공세가 있었는데, 이는 남베트남의 군사기지와 미국 통제하에 있던 도시들에 대한 북베트남측의 예상치 못한 공동공격이었다. 또한 미라이 대학살도 있었는데 이는 2년 후 폭로되어 미국의 전쟁 추구가 가지는 도덕적 권위에 커다란 타격을 입혔다. 한편 대통령 후보 로버트 케네디와 민권운동 지도자 마틴 루터 킹의 암살도 있었다. 킹 목사의 살해는 당시 168개 도시에서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의 봉기를 촉발시켰고, 현재까지도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의 해방운동을 흑인권력(Black Power)이라는 전투적 국면으로 진전시킨 전세계적 계기로 인용되고 있다.
마지막으로, 미국의 급진적 학생운동은 가장 활동적인 국면으로 들어섰다. 1968년 1월에서 6월 사이에 200여 차례의 주요 학생 시위가 있었으며 그 중 59개는 건물 점거로 특징지워졌다. 가장 주목할 만한 것 중 하나는 콜럼비아대학의 동맹파업이었는데 여기서는 흑인에 대한 인종주의(콜럼비아대학은 인접한 할렘 지역사회의 바램과는 달리 새로운 체육관을 건설중이었다), 대학과 전쟁기구(war machine)와의 연관성, 민주적 통치 등의 중요한 이슈가 제기되었다.
콜럼비아 대학생과 교직원의 시위에 대한 뉴욕경찰의 야만적 공격은 미국 전체를 뒤흔들었으며 급진적 요구의 대부분이 관철되었다. 학생운동은 또한 그해 시카고에서 열린 민주당 전당대회장의 대중시위-이는 폭력적으로 진압되었다-에서 중심적 역할을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68년의 일련의 사건들은 빠리나 프라하 같은 방식으로 “권력”의 문제를 전국적인 차원에서 제기하지 못했다. 구정공세는 결국 패배하였다. 킹 목사 이후의 흑인운동 또한, 보다 전투적이기는 했지만, 파편화되고 경찰의 침투에 시달렸으며 종종 극좌주의에 굴복하였다. 수십만명의 성원을 자랑하던 민주사회를 위한 학생연합(Students for a Democratic Society)이라는 이름으로 극명하게 드러난 전국적 학생운동은 69년 봄에 산산히 흩어졌다. 미국의 학생운동은 이후 당시와 같은 조직적 응집력을 회복하지 못했다.
민주당 시카고 전당대회에서의 항의시위는 “평화 후보” 유진 맥카시의 지명을 얻어내는데 실패했고 68년 가을은 리차드 닉슨의 승리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사실, 같은 선거에서 공공연한 인종주의자인 조지 월러스와 그의 미국독립당(American Indepedent Party)은 14퍼센트를 득표했다. 닉슨과 월러스의 득표를 합치면 57%에 달하는데 이는 미국 유권자의 다수가 보수주의로 기울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흔히 68년의 선거는 대공황 이래 당 정책의 대규모 재조정과 우익으로의 선회의 개시, 그리고 “레이건 혁명”의 전주곡으로 해석된다.
변화하는 의식
급진주의자들에게 있어 68년은 -나 자신을 포함한- 상당한 층의 신좌파 학생운동가들의 의식에서 전환점이었으며, 이들은 “구좌파”에 대한 이전의 견해를 수정하기 시작했다. 당시 우리들 대다수는 혁명적-민주적 변혁의 정치적 지도력은 사회주의적 강령으로 교육받고 전문적인 방식으로 조직된 다국적 노동계급에 기반해야 한다고 결론지었다. 그러나 이러한 결론은 프랑스나 이탈리아 등에서 벌어진 명확한 사태들에 대한 관찰로부터 나온 것이었지 미국의 진정한 혁명적 성공에 기인한 것이 아니었다. 비록 우리가 흑표범당(Black Panther Party)이나 젊은예수단(Young Lords)[푸에르토리코를 비롯한 라틴계의 급진적 운동체], 미국인디언운동(American Indian Movement), 황색베레모(Brown Berets)[메히꼬계 미국인들의 전투적 조직] 등을 비롯한 인상적인 운동의 투쟁정신을 존경하긴 했지만 말이다.
그럼에도, 신좌파의 상당 부분이 영향력 있는 프랑크푸르트학파 철학자 허버트 마르쿠제와 연관된, 대행자라는 관점-이에 의하면 영원히 흡수된 노동계급이 문제의 원천인 반면, 학생과 고통받는 소수자들이 유일한 해결책을 담지하고 있었다-과 결별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많은 활동가들이 미국 계급투쟁의 역사와 노동조합의 현 상태, 공산주의와 트로츠키주의 운동의 유산을 새롭게 바라보았다. 이들은 혁명의 잠재적 행위자로서의 미국 노동자, 그리고 특히 다가오는 투쟁들에서 독특한 지도력을 발휘할 세력으로서 아프리카계 미국인 노동자들-이들은 이미 디트로이트 등지에서 움직이고 있었다-에 관한 전망을 모아내기 시작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미국의 1968년에서 백인 학생들의 경험을 과잉특권화시키는 경향이 존재한다. 그 해가 기억되는 이유가 되는 미국의 투쟁들 대부분은, 건물을 점거하고 “어린이 십자군” 식으로 유진 맥카시를 위해 활동하며 시카고 민주당 전당대회에 항의시위를 위해 함께 집결한, 종종 가장 엘리트적인 대학에 기반한 급진파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68년에 대한 집착은 또한 열사(烈士)와 도시폭동의 이미지로 흑인해방 투쟁을 환원하는 경향이 있다. 사실 아프리카계 미국인 운동의 정치사는 60년대 초반 말콤 X의 상승을 비롯한, 50년대 민권운동에서 시작된 몇몇 주요 축을 중심으로 순환한다. 치카노[메히꼬계 미국인]와 푸에르토리코인, 미국원주민 투쟁의 반(半)자율적인 역동성 또한 68년에 대한 집착에 의해 주변화되고 있다.
동성애자 해방운동과 여성 해방운동에서의 계기들을 규정하는 것은 오히려 1969년(스톤월 봉기)과 1973년(낙태를 합법화한 대법원의 판결)일 것이다.
일반적으로 볼 때, 이들 사회운동이 정점에 달한, 혹은 어떤 변화 경험을 겪은 단일한 연도를 찾고자 하는 노력은 그것들이 가지는 종별성과 복잡성을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을 왜곡하게 된다. 한 예로, 앨리스 에콜스(Alice Echols)는 자신의 저서 [나쁜 여자가 되기: 미국의 급진적 여성주의, 1967-75(Daring to Be Bad: Radical Feminism in America, 1967-75)]에서 68년에서 73년 사이의 일련의 지속적인 사건과 일화들을 통해 새로운 여성주의 운동의 전투적 부위가 겪은 흥망성쇠를 이론화하였다.
대안적 전망들
68년에 벌어진 어떤 사건들도 그 해 혹은 뒤따른 2년에 관한 한정적인 정보가 없이는 평가할 수 없다. 예를 들어, 학생운동이 68년에 고양되기는 했지만 69년에는 커다란 위기를 겪었다. 1969년은 또한 우드스탁과 시카고에서의 극좌파적인 “분노의 나날들(Days of Rage)”, 흑표범당 지도자인 프레드 햄튼과 마크 클라크의 암살, 미국원주민인디언(Native American Indian)의 알카트라즈 점거, 그리고 60년대에 급진적 10년이라는 명성을 부여한 여러 유사한 사건들의 해였다.
정부 정책에 대항하는 대중 동원이 정치적 힘의 기준이라면, 1969년 또한 10월의 베트남전 중단 집회와 11월 워싱턴 DC에서 열린 베트남전 반대 행진의 해로 특별히 주목받아야 한다. 또한 대중적인 학생 시위의 정점이 68년이나 69년이 아니라 1970년 5월이었다고 주장할 수 있다. 당시 전국 2천 5백개 대학의 60퍼센트가 미국의 캄보디아 침공과 켄트주립대와 잭슨주립대에서 벌어진 학생들에 대한 총격 이후 시위 장소가 되었다.
1968년은 그 해에 선거가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미국 정치에서 혁명적인 해로 절충되었다. 1930년대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민주당이 급진적 정치에 대해 행사해왔던 가로막이 역할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독자적인 정치적 표현의 도구가 없었기 때문에, 이후 미국에서의 투쟁은 선거 득표로 모든 게 종속되는 한 그들의 대의를 기꺼이 받아들이겠다고 약속한 자유주의 정치가들의 출현에 의해 불가피하게 흡수되고 탈동원화되었다.
이는 급진 운동의 추진력이 베트남전 반대였던 68년의 경우 명확했다. 민주당 대선후보로 선출되기 위한 유진 맥카시의 선거운동은 수천 활동가들의 에너지와 이보다 훨씬 많은 이들의 꿈과 희망을 삼켜버렸다. 반전 경력이 없는 허버트 험프리가 시카고 전당대회에서 승리한 후, 68년 가을에 걸쳐 운동은 쇠락을 향해 비틀비틀 나아갔다. 리차드 닉슨이 집권할 즈음에는 운동은 거의 사망한 것처럼 보였다. 이러한 대중운동을 소생시킨 것은 캄보디아를 폭격하기로 결정한 국무장관 헨리 키신저였다.
한편 맑스주의적 관점에서 중요한 것은 1968년의 노동운동의 전개이다. 파업중인 아프리카계 미국인 공공위생 노동자들에게 연대를 표명하려고 멤피스로 갔던 킹 목사가 암살당한 것은 감동적이고 상징적인 일화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미국 노동계급은 68년 동안 침묵하고 심지어 매파적인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물론 일부 노동조합, 특히 전통적으로 좌파 성향인 노조들은 반전 운동을 지지하였다. 하지만, 뉴욕에서 건설노동자들이 반전시위대를 습격한 1970년의 사건은 베트남전 문제를 둘러싸고 노동자들이 보여준 가장 유명한 사례일 것이다.
경제적 관점에서 본다면, 노동계급은 1969-71년의 불황이 있기까지는 그다지 극적으로 영향받지 않았다. 그 후 1971년 8월 닉슨 대통령은 “신경제정책”에 착수하였다. 이는 임금 및 물가 동결, 연방정부의 통제, 달러화의 평가절하, 수입에 대한 부가세 등을 특징으로 하는 것이었다. 1973년에서 75년 사이에는 또다른 불황이 있었다.
일련의 정점들
1968년은 미국에서 분기점을 이루는 해였지만 이는 단지 어떤 각도에서나 어떤 집단들에게만 그러했다. 정치적 지형을 보다 엄밀하게 재현해본다면 연속적인 일련의 용마루들이 있었지만, 아쉽게도 이는 프랑스에서 전개된 것과 같은 전지구적 “전환점”을 낳을 수 있을 만큼 대중적인 방식으로 연합되지 못했다. 의심의 여지 없이, 50년대 “침묵하는 세대(Silent Generation)”에 결부된 정치적 수동성의 아우라(aura)는 결정적으로 역전되었다. 60년대에 등장한 특정 사회운동들의 쇠퇴에도 불구하고, 가시적인 반대파가 획득한 새로운 정당성은 오늘날까지 지속되고 있다.
특히, 1968-71년의 시기를 하나의 덩어리로 생각할 경우, 이는 “미국의 세기(American Century)”-오로지 소련제 미사일에 대한 공포로 억눌린 제삼세계에서 자신이 하고자 하는 바를 거의 거리낌없이 행할 수 있었던 미국의 힘이 지배한 2차대전 이후의 시대-의 종말을 분명히 나타낸다. 또한 그 해는, 존슨 행정부와 그들의 위대한 사회(Great Society) 프로그램이 인종주의와 빈곤, 제국주의 전쟁에 직면하여 파산했음이 입증되면서, 자유주의의 수명이 다했음을 보여주었다.
이러한 두가지 상황전개는 70년대에 혁명적인 사회주의적 조직들이 부활할 수 있는 기반을 만들어냈다. 확실히 이는 지난 십여년간 60년대의 급진주의에 관해 출간된 수많은 학술서적이나 회고록, 문헌선집 등이 놓치고 있는 특징이다.
베트남 전쟁의 종결은 정치적, 조직적 에너지가 집중되지 않은 수만명의 급진화된 투사들을 남겨주었다. 많은 사람들은 68년의 국제적 사건들에 강하게 영향받은 동시대인들이 이끄는 사회주의적 의식을 향한 길을 따라갔다. 일부는 50년대에 유명해진 기존의 맑스주의 조직들-특히 공산당 청년조직인 청년노동자해방동맹(Young Workers Liberation League), 사회주의노동당(Socialist Workers Party) 청년조직인 사회주의청년연맹(Young Socialist Alliance), 국제사회주의자(International Socialists)[구(舊) 독립사회주의클럽(Independent Socialist Clubs]-로 들어갔다.
마오주의
그러나 훨씬 많은 수는, 부분적으로는 마오주의가 보다 전투적인 경향을 대변한다는 환상 속에서, 또한 유럽 외부에서 기원하고 상대적으로 베트남과 근접성을 가지고 있던 마오주의가 반인종주의 투쟁과 제삼세계 해방투쟁에 보다 적합해 보였기 때문에, 마오주의에 경도되었다. 진보노동당(Progressive Labour Party)이나 공산주의노동당(Communist Labour Party) 같은 예외가 있긴 했지만, 대부분의 마오주의(반수정주의) 그룹은 전세대의 베테랑이 아니라 구 신좌파들에 의해 직접 시작된 것이었다.
불행하게도, 미국의 마오주의 운동은 유명한 전직 빨갱이 사냥꾼 조 맥카시와 경쟁하면서, 반동적 정부들을 지지하고 반소련 음모이론을 조장할 수 있는 고도로 불안정한 체제에 스스로를 속박했다. 이들이 보여준 분파주의와 분열의 기록은 미국 트로츠키주의 그룹들의 부끄러운 기록을 능가했고, 일부 마오주의자들은 좌파 경쟁자들에 대한 폭력 행사라는 변호의 여지가 없는 관행을 다시 도입했다.
70년대 말에 이르러, 68년과 그 후과 속에서 레닌주의적 조직의 필요성이라는 교훈을 배운 이들의 대다수는 다시 한번 재고하게 되었다. 공산당, 사회주의노동당, 국제사회주의자 등을 비롯하여 “68세대”의 쇄도로부터 혜택받은 그룹 중 어느 하나 간부 차원의 대규모 분열이나 극적인 조직원 이탈을 경험하지 않은 데는 없었다. 마오주의 그룹들 대다수(이 중 일부는 친알바니아 경향으로 변화하였다)는 덧없이 사라져버렸다. 한편, 상당수의 활동가들은 대학으로 돌아갔으며, 그곳에서 포스트맑스주의는 수퍼스타 순회토론회에 등장하는 전채요리(entr )가 되었다. 실질적인 위기가 60년대 세대를 덮쳤고 여기에는 전적인 굴복도, 효과적인 해결책도 존재하지 않았다.
이후 광범위한 활동가들은 “재편성”과 기층노조 및 풀뿌리 공동체의 투쟁에 대한 헌신이라는 전략을 통해, 미국에 살아남은 혁명적 사회주의의 최선의 전통-30년대와 60년대의 전통-을 이어가고자 노력했다. 그러나 미국의 새로운 투사 세대-여성과 남성, 동성애자와 이성애자, 유럽계 미국인과 아프리카계, 남미계, 아시아계 미국인, 그리고 인디언 원주민-가 분열된 모든 이들에 대한 무차별적 억압에 맞선 공동의 투쟁에서 공동의 지반을 찾기 전에는 위기는 해결될 수 없다. 이러할 때만이 미국 정치사에서 68년이 가지는 의미가 명료해지고 그것의 유토피아적 약속이 회복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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