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 네트워크]
천만 원 짜리 옷 입는다고 인간도 천만 원 짜리가 되냐?
– 고급 옷 로비사건을 보며 –
이 영 수
5월의 마지막 주, 세상이 온통 초록으로 물들여지고 있다. 자연은 시기를 놓
치지 않고 정직하게 신록의 계절을 자랑하고 있다. 실로 오래 간만에, IMF 이후
처음으로 가족과 함께 산에 가기로 하였다. 산에 가기 위하여 그 동안 입었던
무거운 옷을 벗고 여름용 남방 셔츠와 바지를 샀다. 마음에 드는 남방셔츠가 1
만 원, 청바지가 1만 5천 원이었다. 2만 5천 원어치 옷을 사면서도 가계부를 다
시 들여다보고 따져보는 우리 살림살이를 얘기하면서, 옷가게 주인에게 도대체
요즘 떠들어대는 천만 원대 옷은 어떻게 생긴 옷이냐고 물어 보았다. 고관 집
부인들이 입는 옷은 예술품이고 우리 같은 서민들이 입는 옷은 그냥 옷이냐고!
그러니까 옷가게 주인은 오늘에야 있는 새삼스런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 동
안 있는 사람은 줄곧 그런 생활을 해온 것인데 오늘에야 이 일을 가지고 호들갑
을 떨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덧붙이는 말이 고관 집 사모님들이 천만원대
옷을 사 가지고 나와서는 그 앞의 다른 옷가게에서는 2만 원 짜리 잠바를 두 개
사갔다며 천만 원대의 옷은 누가 입고 2만 원 짜리 옷은 누가 입는가? 라며 반
문을 한다.
고관 집 부인들의 ‘고급 옷 로비 사건’ 문제는 누가 몇 천만 원대의 옷을 사
고 정말 옷값을 지불해 달라고 했느냐, 이 옷값을 지불해 주지 않았기 때문에
최순영 회장이 구속을 당했느냐 하는 것만이 쟁점이 아니다. 이 사건을 보도하
면서 새삼스럽게 ‘고급 옷 로비 사건’이라며 마치 있을 수 없는 특별한 일이 벌
어진 양 떠들어대는 것이 더 문제다. 옷가게 주인 말대로 언제부터라고 말할 필
요도 없이 고관들, 재벌들은 늘 이렇게 호화스럽고 사치스럽게 살아온 것인데,
이제 와서 이러한 문제가 드러났다고 해서 마치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진 것인
양 호들갑을 떠는 것이야말로 오히려 우스운 일이다.
지난해 IMF라면서 모든 노동자가 허리띠를 졸라매고 함께 경제공황을 극복해
야 한다고 모든 매스컴에서 귀에 못이 박히도록 녹음기를 틀어 놓은 것처럼 반
복해서 들려주고 있을 때, 200-300만 명의 노동자가 실업자가 되어 가정을 책임
지지 못한 것을 비관하여 자살을 하고 심지어는 노숙자가 되어 차가운 밤거리에
서 잠을 자고 있을 때, 한편에서는 할 일 없는 고관 부인들이 천만 원대 밍크
코트를 사고, 300만 원 짜리 스웨터를 비싸다고 말하는 사람은 촌스럽다고 비웃
는 예술적(?)인 삶을 살고 있었다.
정말 그렇다! 우리가 ‘고급 옷 로비 사건’을 보며 정말 심각하게 느끼는 것은
누가 진짜 로비를 했느냐 하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도 우리 생활 속에서 느껴지
는 없는 자와 가진 자의 괴리가 너무 엄청나, 그 같은 사건이 이제는 같은 나라
같은 민족 같은 것이다.
천만 원, 백만 원 짜리 옷을 입고, 그것이 비싸다고 생각하면 촌스러운 사람
인 세상! 남편의 지위를 이용하여 고관 부인들이 떼거리로 몰려다니면서 옷 구
경을 하고, 백만 원 짜리 식사를 예술적으로 품위있게 즐기고 있을 때, 수많은
노동자들은 정리해고로, 실직의 아픔으로 자살하고, 보험금을 타기 위해 손가락
이나 발목마저 절단해야 하는 양극화된 세상…
검찰에서는 고관 집 옷 로비 사건이 사회 문제로 일파만파 커져 나가자, 급하
게 불을 끄기 위하여 병원에 입원해 있는 전 통일부장관 부인 배 씨와 라스포사
사장 정 씨, 김태정 법무장관 부인 연 씨, 앙드레 김을 소환하여 조사하였다.
그리고 배 씨와 정 씨 두 사람을 로비 혐의가 있다며 구속시킬 예정이라고 한
다. 과연 이 사건이 구속될 두 사람만의 문제이며 사건종결하면 끝나는 하나의
일과성 사건에 불과한 것인가?
지난 1월에 청와대의 지휘를 받는 사직동 사정 팀에서는 이 사건을 아무런 혐
의가 없다며 수사종결을 하였다. 그런데 세상이 시끄러워지니까 이제 와서 마무
리된 이 사건을 재수사하여 두 사람이 혐의가 있다고 구속시킨다고 한다.
이번 사건을 통해 자신의 지위를 유지하고 사법처리조차도 피해갈 수 있는 그
야말로 고관과 재벌들의 부인들을 중심으로 한 거대한 커넥션이 폭로되었다. 이
번에는 최순영 신동아그룹 회장이 구속되면서 그 연결고리가 깨진 것이지만. 최
순영 회장은 자신을 보호해 주지 못한 뇌물비리의 공범자들을 하나하나 폭로하
고 있다. 그는 홍두표 전 한국방송공사 사장을 감옥에 보냈고 이후 고위 인사
3∼4명을 더 폭로할 계획이라고 한다. 그리하여 발뻗고 잠 못드는 고위인사가
늘어나고 있다고 이 사회가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지 모르겠다. 대중가요 가사처럼, 정말 거꾸
로 돌아가는 세상!
야당과 시민단체에서는 법무장관 사퇴와 진상규명을 요구하고 있다. 그러나
진상규명이 된다고 한들, 김태정 법무장관이 물러난다고 한들, 이 사회가 무엇
이 달라지겠는가? 대통령 부인이 단골로 다니는 라스포사에 장관집 부인들이 몰
려다니고, 수백만 원 짜리 옷을 사 입고, 백만 원 짜리 식사를 하고, 쌀도 빈부
격차가 있어 한 가마에 40만 원을 호가하는 고급 쌀을 팔아먹는 세상! 이러한
돈 치장으로 고관임을 과시하고 즐기는 세상인 한, 김태정 법무장관이 물러나고
그 다음 누가 들어선다고 해서, 과연 법조계가 바뀔 것이며 고관 부인들의 생활
행태가 바뀔 것인가?
김대중 정부가 들어선 후 신자유주의 정책이 실시되면서 이러한 빈부 양극화
현상은 날로 심화되고 있다. 신자유주의란 과연 무엇인가? 20%를 위해 80%를 희
생시키는 것이다. 아니 20%의 호화생활과 탐욕을 위해 나머지 80%를 짓밟고 이
용하는 것이다.
백만 원 짜리 옷을 입으면 백만 원 짜리 인간이 되는 것인 양 착각하고, 돈이
면 안 되는 게 없다는 식의 물질만능주의가 팽배해 있는 것이 바로 오늘의 실상
이 아닌가! 이 땅의 지배세력들이 고위직을 이용하여 자신의 탐욕을 채우고, 떼
거리로 몰려다니면서 공범자로서의 공범의식을 키워 가는 커넥션을 통해 자신의
지위와 인간관계를 유지해 가는 한, 우리 노동자·민중들의 생활은 더욱 피폐화
되고 더욱 벼랑 끝으로 밀려날 수밖에 없다. 노동자·민중에게 일방적으로 강요
되어 온 정리해고 등 생존파괴적 희생 정책을 전면적으로 바꾸지 않은 채 두세
명 구속시키는 임시미봉책으로 이번 사건이 종결된다면 어느 국민도 납득하지
않을 것임을 김대중 정부는 분명히 알아야 한다.
빈부의 양극화 속에서 민심은 날로 이반되어 가고 있으며 ‘세상을 바꾸자’는
노동자·민중의 절박한 요구와 열망은 6월 노동자 총파업 투쟁으로 또다시 떨쳐
나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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