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내리고 있었다.
지난 주 초 명동성당에 들어섰을 때, 입구에 쳐진 천막 위에도 굵은 빗방울이 후두둑 떨어지고 있었다. 천막 안에서 농성을 벌이는 사람들을 만나보러 가는 길이었다. 거기서 금속산업노조연맹 문성현 위원장을 비롯한 임원들, 서울지하철노조의 석치순 위원장과 핵심 간부들, 그리고 보건의료노조 서울지역본부 나순자 본부장 등을 만날 수 있었다. 이들은 민주노총의 ‘4∼ 5월 총력투쟁’과정에서 업무방해, 불법쟁의행위, 집시법 위반 등의 혐의를 받아 체포영장이 발부된 사람들이다. 20여명 모두가 수배자들인 셈이다. 이들의 긴장된 표정에서 노동운동의 현주소를 읽는다는 것이 무리였을까.
*’산티아고에 비는 내리고’
명동성당에 들어서면서부터 어찌된 까닭인지 [산티아고에 비는 내리고]라는 영화가 불현듯 떠올랐다. 비 때문이었을까. 반드시 그런 것 같지만은 않다. 다급한 지경에 몰린 사람들이 갖는 비장한 각오 같은 것이 명동과 산티아고를 함께 연상하도록 만들었는지도 모르겠다.
영화 ‘산티아고에 비는 내리고’는 1973년 칠레의 사회주의 정권이 아우구 스토 피노체트가 일으킨 쿠데타에 의해 붕괴되는 과정과 살바도르 아옌데 대통령이 모네다궁에서 직접 자기 손으로 기관총을 쏘며 반란군에 저항하다 장렬한 최후를 맞는 시대상황을 담고 있다.
아옌데 정권은 1970년 9월 세계에서 처음으로 자유선거에 의해 수립된 사 회주의 정권이었다. 이 사회주의 정권은 집권 3년 뒤인 1973년 9월 미국의 사주를 받은 피노체트 군부에 의해 무너지고 말았다. 쿠데타에 의해 정권을 장악한 피노체트는 1989년까지 16년 동안 무자비한 방법으로 반대세력을 숙 청하고 폭압통치로 인권유린을 자행했는가 하면, 갖가지 수단을 동원해 노 동탄압을 벌이는 등 독재의 마수를 휘둘렀다.
*’총력투쟁’ 무엇을 남겼나
명동성당 천막 속에서 지난 4월19일부터 26일까지 여드레 동안 전면파업 을 지휘한 석치순 위원장과는 파업의 과정이나 결과에 대한 여러 가지 얘기 를 나눌 수 있었다. 석 위원장이 이번 파업을 어떻게 평가하고 있고, 또 현재 노동운동 지도부가 안고 있는 문제점을 어떻게 파악하고 있는지는 특히 관심을 끄는 대목이었다. {노동사회}에 6월호에 실린 인터뷰 내용은 그날 나누었던 대화 내용과 크게 다르지 않다. 여기에 두 대목만 옮겨 본다.
편집자: 이번 투쟁을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석 위원장: 서울지하철노조 차원의 투쟁 기조와 목표는 옳았다고 봅니다.
하지만 민주노조의 역량이나 조건이 저희의 판단과 기대에는 못미쳤습니다.
결과적으로 아무것도 못바꿨고 얻은 게 없습니다. 이런 점에서 이번 투쟁은 패배입니다. 하지만 이번 투쟁의 의의는 크다고 봅니다. 잘못된 구조조정에 대해 저항의 목소리를 냈고, 다른 노동자들에게도 문제의식과 공감을 불러 일으키게 되었습니다. 정부에 대해서도 일방적인 구조조정이 노동자들의 저 항을 가져온다는 점을 보여주었고, 김대중 정부의 반민중성을 드러내준 계 기도 되었다고 봅니다. 그리고 다른 민중세력과의 연대투쟁에도 활력을 불어넣었습니다.
이런 대외적인 성과와는 별도로 조직 내부적으로 가시적인 성과를 못냈고, 조직력이 훼손되었습니다. 구조조정 문제도 여전하고 쟁점들은 그대로 남아 있어 위원장으로서 책임감을 느낍니다. 그리고 현실적인 힘관계와 조건을 정확하게 읽어내지 못한 점과 이로 인해 실마리를 못끌어낸 점, 무엇보다 잘 싸우고도 성과를 못낸 점에 책임을 느낍니다.
편집자: 왜 이런 문제가 되풀이되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석 위원장: 조심스러운 얘기지만 ‘관료화’의 문제가 있다고 봅니다. 저는 관료화를 노동운동의 지도부가 점점 솔직함과 순수함과 믿음을 잃어가는 경 향이라 생각합니다. 자기 조직과 직책에 안주하고 모든 것을 행정적으로만 처리하려 하고, 열정이나 헌신성이 부족한 것이라고 봅니다. 조직간에 의사 소통이 제대로 안되고, 노선이 다르다는 것을 내세워 “너는 우파, 너는 좌파”하면서 서로를 쉽게 재단해 버립니다. 대신에 대중에 대한 애정과 책임 지는 자세가 부족합니다. 작년부터 올해까지 노동자들이 깨지고 현장이 뭉개지는 상황에서 지도자들이 마음을 열고 현실의 문제를 솔직하게 얘기하고 나아갈 길을 허심탄회하게 고민해야 합니다.
*고난을 넘어
내가 아는 석치순 위원장은 매우 솔직하고 담백한 사람이다. 그가 한 말은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얻을 수 있을 만큼 날카로운 면을 지녔다고 할 것 이다. 그는 서울지하철노조가 앞으로 한 두 해 동안 어려움을 겪을 것이라고 했다. 어디 서울지하철노조 뿐이겠는가. 모진 고난을 견뎌야 한다는 뜻 이리라. 어떻게 그 고난을 넘어 설 것인지는 관심 깊게 지켜 볼 일이다.
‘산티아고에 비는 내리고’를 다시 떠올린다. 아옌데가 죽음을 앞두고 한 마지막 연설이 그 영화에 나왔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러나 여기 기록에 남은 그의 연설을 그대로 인용해 보자.
“역사의 전환점에서 나는 인민의 충성에 대해 내 생명을 바쳐 보답하고자 합니다. 우리가 수많은 칠레 인민들의 가슴에 뿌린 씨앗은 반드시 싹을 피우게 될 것입니다. 적의 힘은 강대합니다. 적은 우리를 굴복시킬 것입니다.
그러나 사회의 진보는 범죄와 무력으로 결코 막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역사는 우리의 것입니다. 역사는 민중이 창조하는 것입니다. 곧 다시 역사의 큰 길이 열려, 자유를 찾은 사람들이 보다 나은 사회를 향해 전진하는 날이 반드시 올 것입니다. 칠레 만세! 칠레 인민 만세! 칠레 노동자 만세!”
명동성당에서 좇기는 몸으로 농성을 벌이고 있는 노조운동 지도자와 간부 들이 아옌데가 한 최후의 연설을 어떻게 받아들일지 궁금하기만 하다.
[저 자] 김금수 한국노동사회연구소 이사장
[출 처] 매일노동뉴스
[발 행 일] 1999.06.01
[발 행 처] 한국노동정책정보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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