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호요? 아직 집에 안들어 왔는데요…”
벌써 시간은 오후 9시를 넘어서고 있다.
“오늘 방문해야하는 고등학생 회원이 아직 3명이나 남았는데…”
눈높이 대교 대전 판암 사업소에서 근무하는 한선희 교사. 그녀는 매일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시간과 싸운다. 오전에 출근해서 학습지 채점과 각종 회의, 교재준비 등을 마치면 어느새 오후 2시… 이 때부터 하교하는 아이들을 가르치기 위해 회사를 나선다. 입사 7년차인 그녀는 판촉에 따라 일정 수수료를 받는 계약직 교사들과 달리 다달이 정해진 월급을 받기는 하지만, 계약직 교사들이 다니기 힘든 곳에 있는 30여군데 가정을 날마다 방문해야 한다.
그는 노동절인 지난 5월1일에도 쉬지를 못했다. 회원모집 활동 결과를 월별로 전산입력하는 ‘마감일’이었기 때문이다. 마감 결과 회원수가 다소 늘어난 것으로 집계됐지만 한 교사는 한숨부터 나왔다. “실제 가입한 아이들은 오늘까지 집계하지만 그만둔 아이들은 일주일전쯤 통계라고 보면 됩니다 . 모자란 회비는 교사들 월급에서 공제하는 게 관행이고…” 말끝을 흐린 그에게도 이런 유령학생을 10여명이나 있다. ‘눈높이 수학’ 한달 교육비가 2만 2,000원이니 매월 급여에서 20만원 이상이 깎이는 꼴이다.
*눈높이 대교의 초고속 성장…”노조여, 내 발목을 잡지마라”
보라매 공원 들머리에는 새로 들어서는 고층건물이 많다. 그만큼 성장기 업들이 모여들고 있다는 얘기다. 그 중에는 ‘눈높이 교육’으로 유명한 대교 본사도 있다. 학습지 시장 부동의 1위, 회원 수 200만, 전국 430여개 지점에 방문교사 1만 5,000여명, 지난해 당기 순익 700여억원…
대교가 이룩한 성취는 유난한 열기의 한국 사교육 성장사와 궤를 같이한다. 하지만 이런 회사의 성장 과실이 제대로 분배되고 있는지는 의문이다.
정작 대교의 눈높이 교육을 실천하는 교사들이 본사 앞에서 천막을 치고 농성을 벌이고 있는 상황은 그것을 말해주고 있다.
회사측은 노조의 활동을 “극소수 세력이 외부 노동단체와 연합하여 벌이고 있는 불순한 책동”이라 주장한다. 회사는 지난 88년 노조결성과 파업, 그리고 해산을 경험했다. 그 후 조직개편을 통해 1만3,000여명의 눈높이 교 사를 실적 수수료만 지급하면 되는 계약직으로 전환하는데 성공했고, 98년 새로 결성된 노조에 철저한 ‘무시’ 전술로 일관하고 있다. 또한 지난해 노조 결성의 산파역할을 했던 신문 방송팀을 대교출판에 넘기는 계열분리를 꾀하고 있다.
*노조의 미래…비조합원의 침묵을 걷어내야
지난 3일. 벌써 보름을 넘긴 대교노조의 농성장을 찾았을 때, 마침 10일로 연기된 중앙노동위원회의 임금협약 조정안에 대한 대책 토론이 열리고 있었다. 이날 회사가 보여준 중노위 조정에 대한 불성실한 자세가 잠시 화두가 되는 듯 싶더니 초점은 이내 ‘노조의 앞날’ 문제로 맞춰졌다.
대교노조의 고민은 회사의 노조정책에 어떻게 대응하느냐 하는 문제와 현재 침묵하고 있는 다수 비조합원을 묶어 노조의 대표성을 다시 확보하는 데 맞춰져 있다.
농성장에서 만난 한 노조원은 말한다. “대교는 이미지로 성장한 기업입니다. 눈높이 교사들이 파업해서 방문학습이 제대로 안된다고 가정해 보세요. 당장 내일이면 학습지 보겠다는 학부모가 반으로 줄어듭니다. 회사로선 기를 쓰고 노조 활동에 훼방을 놓을 수밖에 없어요”
실제 지난 5월18일 총회 참가를 위해 월차휴가를 썼던 대전지부 조합원 정장봉 교사는 회사측으로부터 일방적인 보직박탈 통고를 받았다.
노조원 확대를 통해 노조의 대표성을 높이는 것도 빼놓을 수 없는 숙제다.
우선 대전과 경북지부에서 있었던 노조원의 무더기 가입 취소사태를 거울 삼아 이미 가입한 노조원들이 회사로부터 불이익을 받지 않도록 하는 보호책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노조 관계자는 “대교가 전국적으로 430개나 되는 사업국의 인사에 대해 사업국장이 전권을 행사하는 조직이기 때문에 이런 조직 특성에 걸맞는 노조활동을 구체적으로 고민할 필요가 있다”고 털어놓기도 했다.
노조는 “그동안 노조활동에 우호적이면서 지지, 지원을 아끼지 않았던 이른바 비공개 조합원들이 이제는 적극적으로 조합원 신분을 가지고 ‘권리찾 기’에 나서야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동안 무수한 학습지 교사들이 가입과 탈퇴를 반복하며 암묵적으로 회사측의 압력에 굴복한 상황에서 이런 계획이 현실화되기까지는 많은 어려움이 예상된다.
*”전국 5만 학습지 교사들이 지켜보고 있다”
지난해 말 대교 노조가 실시한 설문조사는 힘들게 노조를 지탱해 온 조합원들에게 뜨거운 감동을 안겨주었다. 각 지국으로 250여장밖에 보내지 못한 FAX 설문지가 네배가 넘는 숫자로 돌아왔고, 대부분의 내용이 열악한 학습지 교사들의 처우 개선을 위해 노력해 달라는 격려와 지지를 담고 있었기 때문이다.
대교노조의 현재 상황은 그다지 좋은 편이 아니다. 조합원 수는 30여명 남짓에 불과하고, 지역조직도 대전지부 이외에는 활동이 없다. 게다가 노조의 고발로 관악지방노동사무소에 계류중인 ‘부당노동행위’에 대한 판단도 언제 이루어질지 기약할 수 없는 상황이다. 하지만 이런 어려움에도 불구하 고 전국에서 쇄도한 눈높이 교사들의 열망이 노조를 지탱해 주는 힘이 되고 있다. 이들의 미래 역시 ‘이런 격려와 성원을 어떻게 현실의 노조활동으로 만들어갈 수 있는가’에 달려있다고 할 수 있다.
구체적으로 노조는 중노위의 조정결과가 나오는대로 쟁의에 돌입할 예정이다. 이 과정에서 침묵하는 다수 비조합원의 참여도 기대하고 있다. 또한, 현재 서울에 집중되어 있는 노조활동을 지부가 건설된 대전으로 확대하는 과정에서 민주노총등 상급단체와 긴밀한 연대 역시 구상하고 있다.
“우리들만의 싸움이 아닙니다. 전국 5만 학습지 종사 노동자들이 움직이 기 시작했다는 것이 대교노조의 의미입니다. 회사는 우릴 흩어놓았다고 생각합니다. 외형만 부풀리고 직원들의 삶의 질에는 무감각한 회사… 그런 회사를 상대로 한 권리찾기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최흥산 노조위원장 얘기가 해질녘, 하늘에 흩어지는 맑은 종소리처럼 여운을 남겼다.
[저 자] 김기현 기자
[출 처] 매일노동뉴스
[발 행 일] 1999.06.09
[발 행 처] 한국노동정책정보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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