톈안먼광장 대학살 10년 후:노동계급을 위한 정치적 교훈
제임스 코나치. 세계사회주의웹사이트. 6/4
노동자자율연맹
매우 다른 성격과 정치적 목적을 가진 또다른 운동의 맹아가 학생들과 더불어 태동하였다. 4월 22일 톈안먼광장에서 열린 후야오방의 장례식에 모여든 십만 명의 사람들 중에는 4월 20일에 베이징노동자자율연맹(공질랸)을 결성한 일군의 청년 노동자들도 있었다.
같은 날 광장에서 뿌려진 두 개의 전단은 독립적인 노동자 조직의 등장을 알리고 있었다. 이는 지배체제와 노동계급을 가르는 계급적 분할을 직접적으로 가리키는 것이었다.
한 전단은 관료제의 특권에 대한 비난 가운데서도 덩샤오핑의 자식들이 보유한 개인적 자산을 공격했으며, 경제개혁의 “단점들”에 대한 설명을 요구하였다. 다른 전단은 “관료독재의 장기적 통제”의 결과인 “인민의 생활수준의 지속적 저하”를 비난하고 물가안정을 요구하였다. 이 전단은 정부관료들의 부와 소득, 그리고 이러한 부의 원천이 공공화되어야 한다는, 중국 노동자들 사이에서 커다란 반향을 일으키게 될 요구로 마무리하고 있었다.
[국가/당-옮긴이] 기구의 특권과 지위에 대한 정면공격을 주장하는 노동자자율연맹의 등장은 중국 체제에 대해 “폴란드 모델”(스탈린주의 통치의 존재 자체에 대해 도전하는 대중적인 노동계급 운동)의 진정한 위협을 제기하였다.
당 지도자들은 학생시위와 행진, 특히 보다 광범위한 사회층에 정치적 활동을 가져오려는 시도를 종식시켜야 한다는 점에 동의하였다. 학생들에 의한 국가 통제와 권위의 균열은 노동계급 불만의 분출에 대한 조기경보였다.
4월 26일 정부는 승인되지 않은 모든 집회와 시위를 금지시키고 연설과 전단 배포를 불법화했으며, 학생들에게 “공장, 농촌 지역, 학교 등에 진출”하지 말 것을 경고했다. 국영 신문인 런민르바오(人民日報)의 사설은 “소요에 대해 분명한 태도가 필요하다”라는 제호로 정부의 입장을 옹호하였다. 덩샤오핑이 친히 지시한 주장을 담고 있는 이 사설은, 당 지도자들이 후야오방에 대한 학생들의 진정한 애도를 악용하여 정부를 전복하기 위한 “계획된 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4월 22일의 전단 내용을 특별히 언급하였다.
학생들은 다른 세력의 꼭두각시에 불과하다는 정부의 포고와 암시는 분노와 도전을 강화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4월 27일에는 십여개 학교의 8만여 학생이 톈안먼광장으로 행진하였다. 공장으로 가지 말라는 경고에 대한 대응으로 학생 그룹들은 광장에서 흩어져서 교외 주거지역으로 진출, 저녁 늦게까지 거리집회를 열었다. 학생 조직에 대한 요구를 보여주기 위해 5월 4일 대규모 집회를 열자는 제안이 이루어졌다.
새로운 요소는 4월 27일 행진에서 등장했다. 베이징에 거주하는 대규모 군중이 거리에 도열, 박수를 보내고 지지를 표명했을 뿐만 아니라 수만명의 노동자들이 학생들과 나란히, 혹은 학생들 뒤에서 행진하였다. 이러한 사태(학생들의 저항과 그들이 급속도로 동력을 가질 수 있었던 대중적 지지)는 중앙정부를 놀라게 하였다. 그 결과 상황을 흐트러뜨리는 방안을 둘러싸고 격렬한 내부 논쟁이 벌어지면서 정권이 분열되었다.
덩샤오핑으로 대표되는 당파는 질서를 회복하기 위한 군대 배치를 요구했는데, 이는 즉각적인 지지를 얻지는 못했다. 공산당 총서기 자오쯔양이 이끄는 국가 관료층은 노동계급 내에서 점증하는 시장개혁에 대한 반대에 맞서는 지지기반을 만들기 위해 학생과 중간계급에 대한 양보조치를 취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들의 모델은 고르바초프가 글라스노스트 혹은
정치개혁의 약속을 통해 시장의 복원에 대한 지식인과 전문직층의 지지를 공고히한 러시아였다. 소련의 지도자로는 30년 만의 방중(訪中)인 5월 15일 고르바초프의 방문을 앞두고 학생들과 협상해야 한다는 자오쯔양의 주장이 압도적이었다.
당국은 학생 대표들과 만남을 가졌을 뿐만 아니라 중국은 학생운동을 감싸안을 만큼 자유가 있다고 언론에 알렸다. 한 고위 관료와 학생지도자 사이의 논쟁이 전국 방송을 통해 방영되기도 했다. 대학 예산은 증액되었고 관료층의 부패에 대한 분노를 달래려는 상징적 제스처로 리무진 수입이 금지되었다. 학생들이 제기한 이슈는 정치적 논쟁의 중심부로 상승되었다.
체제가 전혀 양보하려 하지 않았던 한가지 요구는 자율적인 학생조직을 인정하라는 것이었다. 이를 인정할 경우 독립적인 노동조합과 정치적 결사체를 건설하려는 노동계급의 운동이 정당성을 갖게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양보조치를 취하는 데 있어 스탈린주의 관료제는 학생들이 대부분 관료 엘리트나 그들과 비슷한 특권을 열망하는 중간계급의 자식이거나 계승자라는 사실에 입각하였다. 학생들의 상당층은 자신들의 계급적 이해의 관점에서 노동계급의 정치 활동 증대를 우려스럽게 바라보았다.
자오쯔양은 지식인과 학생들 사이에서 중국의 고르바초프가 될 수 있는 인물로 환영받았다. 따라서 5월 4일 톈안먼광장까지의 행진은 그릇된 승리 축하라는 성격을 띠었다. 2십 5만 명의 노동자가 6만 명의 학생들과 결합했다는 사실은 학생운동에 소동을 가져왔다. 노동계급이 점점 거리에 등장하고, 관료제의 상이한 구성요소들 사이에 구분선을 긋지 않은 채 시장이 야기한 사회적 불평등에 반대하는 자신들의 구호를 지휘하는 상황에 당황하여, 한 학생 분파가 정치활동에서 손을 떼었다.
단식농성
5월 4일을 기점으로 학생들 사이에서 분명한 분열이 나타났다. 왕단, 차이링, 우어카이시 같은 새로운 인물들이 전면에 등장하였다. 자오쯔양이 학생들을 이용할 수 있다고 믿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이들은 대중적인 지지를 이용하여 국가로부터 보다 많은 양보와 인정을 이끌어낼 수 있다고 믿었다.
최대의 압력을 행사하고 언론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한 수단으로 학생들은 심리학과 대학원생 차이링(그녀는 마하트마 간디를 자신의 모델로 삼고 있었다)의 제안을 채택하였다. 차이링은 5월 15일 고르바초프가 전세계 언론이 주목하는 가운데 화환증정식을 하기로 예정되어 있는 톈안먼광장의 혁명영웅기념탑에서 단식농성을 벌이자고 제안한 바 있었다.
5월 13일 5백여 명의 학생들이 톈안먼광장으로 행진, 공개적인 단식농성을 시작하기 위해 기념탑 앞에 천막을 설치하였다. 이 과정에서 이들은 “베이징의 봄”이라 불린, 1871년의 빠리꼬뮨에 비견되는 운동을 일으키게 되었다.
광범위한 학생운동이 흩어짐에 따라 노동계급이 학생들의 단식시위를 받아들여 대중적인 반정부 시위의 초점이 되었다. 5월 15일까지 5십만의 학생, 노동자, 베이징 주민이 광장에서 집회를 가졌다. 중국에서의 정치운동의 성격은 왼쪽으로 질적 전환을 이루었고 산업 노동계급의 대중행동과 노동자자율연맹들의 점증하는 역할로 특징지워졌다.
베이징 혹은 수도노동자자율연맹(나중에 후자로 개명했다)은 처음부터 선동적 역할을 담당했으며, 공장을 방문하면서 지지를 얻어내고 새로운 성원을 보충하였다. 수도노동자자율연맹(이하 연맹)은 4월 27일과 5월 4일 행진에 참여했지만 독자적인 깃발 아래 행진하지는 않는 신중한 모습을 보였다.
톈안먼광장을 점거한다는 학생들의 결정으로 인해 연맹은 상대적으로 안전하게 대중적 활동을 시작할 수 있게 되었다. 광장 북동쪽에 천막 본부를 설치한 후 연맹은 정치적 논의와 조직을 찾아 광장에 오는 점증하는 수의 노동자들 가운데서 지속적인 선전을 수행하였다.
5월 13∼20일 사이에는 중국에서 전후 최대의 시위가 벌어졌다. 5월 17일 베이징 중심부를 통과하는 행진에 참여한 사람의 수는 2백만으로 추산되고 있다. 이들은 대부분 자신들의 작업조나 기업의 깃발 아래 행진한 노동자와 그들의 가족이거나 중국 전역에서 온 학생들, 베이징 근교 농촌 지역에서 온 농민, 그리고 공무원과 언론인들이었다.
수천 명의 노동자가 노동자연맹에 참여하였다. 공장과 작업조로부터 대표들이 끊임없이 본부로 와서 보고서를 모으고 투쟁기금을 전달했다. 5월 말경에는 톈안먼광장에 150명의 상근 조직가들이 모여 헌장 채택, 지도위원 선출, 학생 보호를 위한 노동자 경비대 창설, 인쇄설비 가동, 공공방송 시스템 설비(이를 통해 매일 저녁 대규모 군중이 정치연설을 듣게 되었다) 등에 주력했다. 그 주에 배포된 한 논설은 이들이 표명하는 정치적 관점을 총화하였다.
“부패한 관료들의 학정은 너무나도 극단적인 상태이다… 인민들은 이제 더 이상 당국의 거짓말을 믿지 않을 것이다. 우리의 깃발에 과학, 민주주의, 자유, 인권, 법치 등의 말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노동자 착취를 성실하게 기록해왔다. 착취를 이해하는 방법은 맑스의 {자본}이 제시하는 분석방법에 근거하고 있다… 우리는 ‘인민의 공복(公僕)’들이 인민의 피와 땀으로 이루어진 모든 잉여가치를 삼켜버린 데 대해 놀라움을 금할 수 없다. 이러한 착취의 총가치는 역사상 유례가 없는 것이다! 그러한 무자비함과 ‘중국적 특수성’으로 가득찬 모습이라니.”({덩샤오핑 시대: 1978∼1994년의 중국 사회주의의 운명에 관한 일 연구}, 모리스 마이스너, p. 446)
이 문서는 덩샤오핑, 자오쯔양, 리펑, 첸윤, 완리, 장쩌민 (그리고 그들의 가족) 등의 “물질적 소비와 호화별장 사용”에 대한 조사를 요구하였다. “그들의 재산은 즉각 동결되어야 하고 전국인민조사위원회의 감사를 받아야 한다.”
“인민은 정치적 의식을 획득하였다”라고 이 글은 끝맺고 있다. “그들은 단지 두 계급(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만이 존재한다는 점을 인식하고 있다… 또한 지난 40년간의 정치운동이 인민을 억압하기 위한 정치적 수단에 불과했다는 점도 알고 있다.”
베이징 사태의 부산물로서 노동자자율연맹이 청샤, 샤오양, 시앙탄, 헹양, 위양 등 중국 전역의 주요 도시에서 결성되었다.
계엄령
노동계급이 대중적으로 투쟁에 참여함에 따라 무력 사용 여부에 관한 관료제 내의 논쟁은 끝나게 되었다. 5월 20일 저녁 리펑 수상은 계엄령을 선포하였고 자오쯔양은 가택연금에 처해졌다. 베이징군사령부의 십만 명의 군인이 도시 진입을 명령받았다.
노동계급은 대중행동으로 계엄령에 맞섰다. 5월 21일 백만 명의 베이징 시민이 단식농성을 엄호하기 위해 시 중심부에 집결했고 다음날에도 비슷한 수가 모였다.
노동자연맹과 학생 그룹, 여타 독립적 기구들의 호소에 응하여 노동자들은 톈안먼광장으로 이르는 베이징 거리에 바리케이드를 세웠다. 오토바이를 탄 젊은이들은 보초대를 결성하였다. 문제 지역으로 신속하게 이동하기 위한 이동 “결사”대도 건설되었다. 5월 23일 군대가 시 교외에 진입하자 수천 명의 노동자와 학생이 군대를 만나 시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을 설명하기 위해 행진하였다.
이 날에 관한 한 기록에 따르면, “리펑과 그 무리들이 선포한 계엄령은 백지만큼이나 무용한 것으로 간주되었다. 군인들은 흥분한 시민과 학생들에 의해 설득당하고 있다. 몇몇 이들은 흐느낌으로 목이 메고 군인들 또한 이에 답하여 눈물을 흘리고 있다. 상당수의 군인이 트럭을 돌려 물러갔다”. 5월 24일경에는 베이징 군대가 완전히 철수했다. 정부는 군인들이 노동자들에 합세할까 두려워했다. 베이징을 지지하는 대중시위가 중국 전역에서 벌어졌다.
베이징 자체만 놓고 보자면 가시적인 정부의 권위가 완전히 사라졌다. 학생과 노동자들이 교통 지도, 필수 서비스 관리, 범죄로부터의 재산 보호(베이징의 소매치기들조차 학생들과의 동조시위를 선언했다) 등을 떠맡았다. 노동자들이 대중집회에 참여하기 위해 일자리를 벗어나면서 생산은 사실상 중단되었다.
5월 25일 노동자연맹과 학생 그룹들은 백만에 가까운 노동자가 모인 정치시위를 조직했다. 노동자 조직의 구호와 분위기에 나타난 반역적 어조는 더욱 분명히 표현되었다. 5월 26일 발표된 한 성명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우리 노동자들과 다른 모든 정신적, 육체적 노동대중의 투쟁과 노동으로 건설되었다. 우리는 이 나라의 정당한 주인이다. 우리는 국가 사무에 관해 알아야 한다. 우리는 조국과 노동계급의 한줌도 안되는 타락한 무리들이 우리의 이름을 강탈
하고 학생들을 억압하며 민주주의를 살해하고 인권을 짓밟도록 내버려두어선 안된다.”
또다른 성명은 다음과 같이 선언하였다.
“마지막 싸움이 도래했다… 우리는 수억 인민에 의해 거부당한 파시스트 정부와 스탈린주의 독재들이 역사로부터 스스로 물러나지 않았음을, 앞으로도 물러나지 않을 것임을 알고 있다… 20세기의 바스띠유, 스탈린주의의 마지막 보루를 습격하자!”(톈안먼시위에서의 노동자들: 베이징노동자자율연맹의 정치학, 앤드루 G. 월더/공샤오시아, {호주중국저널}, 29호, 93년 1월호에 실린 글. 이 글은 http://www.nmis.org/gate/links/Walder.html에서도 볼 수 있다.)
이즈음 학생운동은 광장 점거를 얼마나 더 계속할 것인가에 관한 내부논쟁을 겪고 있었다. 수많은 베이징 학생들이 계엄령 선포 후 학교로 돌아갔고 그들의 조직은 광장에서 철수하자(이는 애초에 차이링이 지지한 결정이었지만 수도 외부로부터 온 학생조직들의 개입으로 뒤집혔다)고 제안했다.
하루하루가 지나면서 중국에서의 정치적 투쟁은 점점 더 확산되고 있었다. 거의 우발적으로 선출된 학생 지도자들은 상황 전개의 규모에 압도되었다. 아무리 용감하다 하더라도 이들은 혁명을 이끌기 위해 정치적, 혹은 심리적으로 준비된 사람들이 아니었다.
5월 13일 단식농성에 착수한 차이링이나 왕단 같은 학생들의 행동이 이후의 사태전개에 결정인 요소였다는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이들의 정치적 관점은 스탈린주의 국가로부터 타협을 이끌어낼 수 있다는 희망에 근거한 것이었다. 하지만, 유혈적 대결이 확대되었을 뿐이다.
날카로운 긴장이 노동자연맹과 톈안먼광장의 학생조직들 사이의 관계를 지배하게 되었다. 학생들은 노동계급과 그들의 사회적 요구가 정치 운동에서 행사하고 있는 지배로 인해 체제와의 대화가 불가능해졌음을 정확히 인식했지만, 이들은 또한 반정부 운동을 확장시키기 위해 연맹이 제안한 제한적 조처들조차 지지하려 하지 않았다. 5월 28일 군대가 베이징시로 접근하면서 학생 조직들은 전국적 총파업이라는 노동자연맹의 제안을 거부하였다.
그 대신 학생운동이 제기한 중심적 요구는 정치개혁이라는 학생들의 요구를 논의하기 위해 비상 전국인민대회를 개최하라는 것이었다. 이는 자신들의 물질적 이해가 중국 인민에 대한 계속적인 억압과 긴밀히 결부되어 있는 최고위 당관료들로만 구성된 기구에 불과한 것이었다.
정치적 전망의 위기
베이징은 2주일 동안 시민들의 수중에 있었다. 그러나 체제는 수수방관하고 있지만은 않았다. 자오쯔양의 양보조치가 학생들을 억제하는 데 실패하자 덩샤오핑은 이 시간을 활용해서 베이징 노동자들에 대한 유혈학살을 준비하기 위한 스탈린주의 국가의 용기와 통일성을 다시 모았다. 덩샤오핑에 전적으로 충성하는, 농촌 지역에 근거를 둔 제27군의 2십 8만 군대가 수도로 이동하여 6월 1일 도착하였다.
정치적인 경험이 부족하고 현존 체제에 대한 반대 외에는 정치적 전망이 부재한 노동지도자들은 학생 조직들에 대해 아무런 대안도 제시하지 못한 채 이들을 추종하였다. 중국 노동자들은 삶의 경험을 통해 그들이 무엇에 반대하는지(스탈린주의와 자본주의)는 알았지만 대안적인 사회질서를 위한 어떠한 전망도 명료하게 표현할 수 없었다.
중국에서 진행된 수십년 간의 스탈린주의 지배와 진정한 맑스주의에 대한 적극적인 억압은 혁명적 사회주의, 즉 트로츠키주의적 경향이 노동계급 내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 나라의 어느 조직도 중국 노동계급의 행동과 정서에 내재된 강령(스탈린주의 체제를 전복하고 노동계급을 위한 경제개혁을 도입하는 정치적 혁명)을 자발적으로 제출할 수 없었다.
노동자 정부의 건설을 통해 정치권력을 획득하고 자신의 권한과 영향력을 전국적으로 확장시킬 필요성이 노동계급 앞에 제기되었다. 세계적인 트로츠키주의 운동체인 제4인터내셔널국제위원회(International Committee of the Fourth International)가 6월 8일 발표한 성명은 이러한 전망을 정교화하고 있었다.
“중국의 스탈린주의 관료제는 이미 자본주의의 복
원이라는 길을 따라갔으며, 따라서 오늘날 중국에서의 정치혁명은 주요한 사회적 함의를 지니게 되는데 첫째, 그리고 무엇보다도 노동계급과 그들의 혁명정당이 관료제의 후원을 받는 자본가계급을 해외 다국적기업들과 더불어 몰수해야 한다는 것이다…”
“중국 계획경제의 잔존물은 아래로부터 재조직화되어야 한다… 노동자들에 의해 자유롭게 선출된 공장위원회의 통제 하에 생산을 위치지워야 하며 상품의 가격과 질은 민주적으로 조직된 소비자 협동조합의 수중에 놓여져야 한다.”
“이러한 정치혁명은…아시아 전체와 국제적으로 사회혁명의 충격파를 가져올 것이다. ‘일국적 사회주의’라는 스탈린주의의 구속복을 벗어버리고 제국주의를 종식시키기 위한 공동의 투쟁에서 아시아와 전세계 노동자들과 연계를 맺음으로써 중국 노동자들은 세계 사회주의 발전의 일부분으로서 중국 사회주의의 발전을 위한 진정한 기반을 창출하게 될 것이다.”(“중국 정치혁명에 승리를!”, 제4인터내셔널국제위원회 성명서, 1989년 6월 [제4인터내셔널(Fourth International)], Vol 16 No 1-2, p. 8)
톈안먼광장의 여파
독자적인 전망 없이 끝까지 저항하면서, 정치적, 물리적으로 무장되어 있지 않은 베이징 노동자들이 전면적인 국가의 반동에 직면하게 되는 것은 시간 문제였다.
6월 4일 아침 톈안먼광장에 처음으로 진입한 탱크는 노동자자율연맹의 천막 본부를 타겟으로 삼아 깔아뭉갬으로써 군부에 대해 계속적인 저항을 조직하던 20여명의 지도자들을 살해하였다.
군대의 수도 점령은 중국 전역에서 벌어진 테러 통치의 신호탄이었다. 베이징의 소식이 전파되면서 전국적으로 발생한 자생적 시위는 야만적으로 진압되었고 수백 명의 노동자, 학생이 살해당하는 결과를 낳았다.
6월과 7월에만 4만여 명이 체포되었고 이들 대부분은 노동자연맹의 성원이거나 그에 연계된 사람들이었다. 수십 명의 노동자들이 사형선고를 받고 처형되었는데 몇몇 경우에는 공개 총살형에 처해지기도 했다. 지금도 수백 명의 노동자가 여전히 구금되어 있다. 억압은 중국사회 심층에까지 확대되어 모든 베이징 시민이 “자아비판”에 참여하여 4월과 5월에 저지른 자신의 “과오”를 설명하도록 요구받았다.
대다수의 학생들은 다소 상이한 대우를 받았다. 단식농성자들과 군대가 베이징으로 난입할 당시 혁명영웅기념탑에 잔류해 있던 수천 명의 학생들은 협상을 통해 상처 하나 입지 않은 채 캠퍼스 복귀를 허락받았다. 학생지도자의 대다수는 이후 밀항을 통해 국외로 망명하였다. 체포된 학생들은 보통 상대적으로 가벼운 형량을 선고받았다. 베이징대학 학생들은 몇 년간의 단절을 겪었지만 그 후 일상으로 복귀하였다.
톈안먼광장 대학살의 계급적 내용은 서구 정치인, 대중매체, 기업들의 반응에 의해 가장 생생하게 보여졌다. 1989년 6월과 7월에 표명된 비난과 혐오의 물결은 훨씬 더 실용적인 측면인 이윤에 대한 고려에 길을 내주었다.
스탈린주의 체제가 정치 상황을 안정시켰다는 게 분명해지자, 노동계급에 대해 가장 억압적인 조치를 활용함으로써 시장개혁을 추구하겠다는 당국의 의사표시가 해외 중국인 경제공동체와 전세계 주요 기업 회의실에서 적극적으로 환영받게 되었다. 톈안먼광장은 (착취와 억압에 대한 어떠한 반대도 용서받지 못하는 중국에 대한) 투자의 전세계적 홍보물과 같았다.
1990년 이래 중국에 대한 투자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되었다. 1994년 한해에만 1979∼89년 사이의 10년을 합한 것보다 더 많은 투자가 이루어졌다.
톈안먼의 희생자들을 위해 흘린 거짓 눈물의 가장 대표적인 사례는 오스트레일리아 수상 봅 호크(Bob Hawke)였다. 그는 1989년 전국 방송에 등장해서 베이징의 광경을 보며 눈물을 쏟았다. 몇 년 후 정계에서 은퇴한 뒤 그는 대중국 기업투자에 관한 주요 자문가로 등장했으며, 지도급 스탈린주의 관료들과의 개인적 친분을 충분히 활용했다.
노동계급이 진압되고 젊은 지도자 세대가 학살, 투옥되고 망명함으로써 체제는 대중적인 정치적 반대로부터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채 자본주의 시장의 복원을 가속화할 수 있었다. 90년대는 1979년 시작
된 과정의 실질적 종결을 목도하였다. 국가소유 기업의 대부분은 내년말이면 민간기업으로 구조조정되거나 폐쇄될 것이다. 현재 순조로이 진행되고 있는 과정으로 경제활동의 대부분은 해외 경쟁과 소유에 개방될 것이다. 1999년의 전국인민대회는 사적 소유를 국가소유 산업과 동등한 지위로 상승시켰다. 이는 자본제적 사회관계의 우월성을 복원하고 중국이 일정 유형의 공산주의 사회라는 허구를 종식시키는 최후의 헌법적 행위였다.
그러나 신흥 부르조아지에 맞서는 중국 노동계급의 새로운 출현은 불가피하며 이러한 움직임이 벌어지고 있다는 사회적 지표가 무수히 존재한다. 이 투쟁에서 노동자들은 1989년에 등장한 것과 동일한 본질적인 정치적 이슈(프티부르조아지 민주주의자들로부터 독립적인 정치적 전망의 필요성)에 직면해야만 할 것이다. 용기와 결단으로는 충분치 않다. 혁명적 사회주의 정당이 중국 노동계급 가운데서 건설되어야 한다. 그것의 기반은 레온 트로츠키와 제4인터내셔널국제위원회가 남겨준 유산 속에서 찾아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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