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 네트워크]
철원군 수해 농민들의 고난과 투쟁
이 성 경
한반도의 중반부, 대대로 오손도손 살아오던 한 마을이 남북으로 나뉘어져 있
는 강원도 철원.
비무장지대, 민통선, 백마고지, 옛 노동당사 등이 늘 분단의 아픔을 일깨워주
고 있는 곳.
전쟁으로 황폐화된 마을을 아주 잘 정돈된 거대한 농경지로 일구어놓은 철원
군 농민들의 긍지와 자부심은 남다르다.
그러나 96년 7월의 큰 물난리와 산사태의 상처가 31일, 또 다시 큰 물난리를 겪은 철원은 시름과 통한의 도시로 변해버렸다.
거센 물살을 견디다 못해 움푹 패여 터져 버린 논두렁과
물살에 휩쓸려오다 멈춘 자갈과 모래로 가득한 황토빛 개울들.
진흙탕물에 온통 뒤덮인 채 광활하게 펼쳐져 있는 논과
축대가 반쯤 무너져 허공에 붕 떠있는 집, 반쯤 잘려나간 다리, 쓰러진 수목
들…
3년 전에도 그랬듯이 이번에도 피해가 가장 심한 와수리 마을에서는 아직까지
집집마다 가재도구를 꺼내놓고 말리고 있거나, 못쓰게 된 가재도구를 불에 태우
고 있는 모습도 눈에 띄었다. 마을 들머리에 아직 덜 완성된 다리가 하나 있었
는데, 지난 8월 1일 철원군 농민회장을 지낸 안용수 씨를 중심으로 이 마을 주
민 4명이 억수같이 퍼붓는 빗속에서도 필사적으로 자신의 몸을 내던져 모래주머
니를 하나하나 쌓아올려 더 큰 피해를 막기도 하였다. 이는 마치 “수해는 천재
(天災)라서 사람의 힘으로 어쩔 도리가 없는 것”처럼 호도하는 것이 얼마나 거
짓이고, 기만인가를 온몸으로 보여준 좋은 사례가 아닐까 싶다.
이번 수해로 오이, 콩, 수박, 참깨, 고추 등 밭작물이 거의 다 망가져 버려
농민들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다. 또 덜 익은 상태에서 수정이 되지 않은 벼
는 시꺼멓게 변해버리는 ‘관자현상’을 보이고 있으며, 전체 벼 수확량의 20∼
30%가 감소될 것으로 보인다.
아직 구체적인 피해상황이 파악되지는 않았지만, 96년 수해 때와 강우량은 비
슷했지만 그 피해는 훨씬 덜하다는 게 농민들의 추측이다. 그나마 3년 전 복구
작업으로 새로 건설한 수십 개의 다리와 석축들이 이번 물난리에 톡톡히 한 몫
을 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당시에 날림으로 부실공사한 곳은 여지없이 또
다시 터지고 무너져 내렸다. 이를 보며 철원군 농민들은 “수해는 천재(天災)가
아니라 인재(人災)요, 관재(官災)”라고 힘주어 말한다. 많은 부분 예방이 가능
하다는 것이다. 적어도 양심을 가지고 돈보다는 사람의 생명을 소중하게 여기는
정책을 펴기만 한다면 말이다.
평생에 한 번 겪을까 말까 하는 큰 재난을 두 번씩이나 겪으면서 엄청난 피해
를 당한 철원군 농민들은 “농사는 하늘을 보고 짓는 건데 재해가 발생하면 손실
이 너무나 크다. 따라서 정부가 농경지에 대한 원상회복과 농작물에 대한 적절
한 보상을 해야 한다”고 울분을 토로하고 있다.
재해보상법이라고 있으나 농민에게는 거의 적용되지 않거나, 적용된다 해도
아주 쥐꼬리만하다. 정부 지원이라고 하는 것이 고작해야 ‘융자’가 전부니 말이
다. 융자만 받아도 농사만 지어서는 도저히 갚기 힘들다. 한 해 농사 지어봤자
기껏 한가족 먹고살기도 힘들기 때문이다. 96년 수해 때 받은 융자를 채 갚지도
못한 상태에서 올해 또다시 수해를 당한 사람들도 많다. 이들은 눈물을 머금고
품을 팔러 농촌을 떠날 수밖에 없다.
수해를 당한 농민들의 요구는 너무나 간단하다. “현실에 맞는 농작물 피해보
상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현재 농작물에 대한 피해보상은 약간의 농약
과 쌀을 지원해주는 정도이다. 이에 농민들은 “피해면적과 피해정도에 따라 적
절한 보상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농민들의 시름은 이 뿐만이 아니다. 철원군 농민들만 해도 농가부채가 가구당
5,000만 원 이상이나 된다. 20년 전 50만 원의 영농자금을 빚내어 시작한 한 농
민회 간부는 현재 1억 원대의 부채를 지고 있다. 또 거의 대다수의 농민들이 연
대보증 때문에 하루하루 고통스런 나날을 보내고 있다. 이를 견디다 못해 농약
먹고 자살하는 농민들이 속출하고 있는 안타까운 현실이다.
철원군 농민회 간부들은 “IMF가 농민들 죽여놨다”고 한마디로 잘라 말하고 있
다. 또 IMF 이후 급격히 늘어난 귀농자들이 정부 시책에 의해 2∼3,000평 규모
의 땅에 특수작물을 마구잡이로 짓는 바람에 채소 값이 똥값이 되었던 것이다.
거기다가 수해로 농사를 다 망쳐버려 이제는 채소 값이 오르고 있으나 팔아먹을
채소가 없는 기막힌 현실에 놓여 있는 것이다. 농업생산비도 논보다 밭이 5배
이상 더 들어가는데도 정부는 아무런 대책이 없다.
한편, 철원군 농민들이 97년부터 지금까지 3년 동안 정부를 향해 끈질기게 제
기하고 투쟁하고 있는 문제가 하나 있다. 그것은 96년 수해복구 과정의 부정비
리 의혹 진상규명 요구이다. 이는 한 양심적인 수해복구 참여업자의 폭로에 의
해 비리사실이 밝혀지면서 시작되었다. 철원군 농민회는 이 마을 저 마을을 누
비며, 방송국과 공무원, 의원들을 만나가며 ‘비리의혹 진상규명’을 요구해 왔
다. 지금 구속되어 있는 김태정 검찰총장이 9시 뉴스시간에 직접 나와 “전면 재
수사하라”고 지시한 바도 있다. 그러나 당시 수사지시를 받은 관할 의정부 지검
은 담당검사가 휴가를 가버리는 등 수사를 회피했고, 아직까지도 제대로 수사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농민들은 하나같이 “결국 우리 농사꾼들이 관에 이용만
당한 꼴”이라면서 분노하고 있다. 그들에게 관련 조사자료를 넘겨주면 나중에
그들은 터무니없는 답변으로 일관해왔다. 이에 철원군 농민회는 여러 가지 정황
으로 보아 ’96 수해복구 부정비리 사건’은 의정부 검찰·공무원, 일부 정치권이
연루된 고질적인 부패구조의 하나로 확신하고 있다.
96년 수해복구 부정비리 사실을 간단히 살펴보면, 먼저 개인별로 배정된 복구
금액과 실제 공사비의 차이가 엄청나게 크다는 것이다. 100가구 중 4∼5가구 정
도만 복구비에 맞게 공사를 하였고, 나머지는 배정금액의 10%∼30% 정도만 작업
을 한 것이다. 자신의 땅도 아닌 곳에 자신의 이름으로 복구비가 책정된 경우가
부지기수였다. 심지어 있지도 않은 땅이 수해복구 내역에 오른 경우도 있었으
며, 같은 필지에 4∼5번씩 반복되어 책정된 경우도 있었다. 또 농민이 신고한
면적보다 서류상의 피해면적이 부풀려지고, 벼랑이나 지뢰밭에도 정부지원금이
사용된 것으로 되어 있다. 이와 같은 사실은 KBS 등 각 언론사의 취재를 통해서
도 충분히 밝혀진 바 있다.
더욱 기가 막히는 것은 98년 12월 30일 국회가 철원군에 수해복구 관련 제반
서류를 제출해 줄 것을 요구하였으나, 철원군은 ‘관련서류를 절대로 내줄 수 없
다’면서 뻔뻔스럽게 이를 거부하였다는 사실이다. 도대체 철원군은 얼마나 든든
한 정치적 배경이 있는지가 의심스러울 따름이다. 이러한 사실은 KBS 9시 뉴스
에만도 5차례, MBC 2580, 한겨레21, KBS 시사기획 강원 등을 통해 전국적으로
실상이 알려졌으나 아직까지도 그 숱한 의혹들은 단 한가지도 제대로 밝혀진 것
이 없다. 수사를 담당한 의정부지검은 수사를 거부하고 있고, 감사원도 2,700억
원이라는 국민의 혈세가 쓰여진 곳에 대해 감사 한 번 제대로 시행하지 않고 있
는 상태이다.
철원군 농민회의 ’96 수해복구 부정비리 진실규명 투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
다. 농민회가 적극적으로 투쟁을 벌인 결과, 철원군 농민들도 정당한 몫을 받아
야 한다는 권리의식이 상당히 높아졌다. 그리고 이번 수해복구 과정에서는 공무
원들의 태도도 조금은 나아진 편이다. 그러나 이것으로 만족하고 있을 일이 아
니다. 농번기라서 잠시 중단되어 있던 ‘수해복구 부정비리 진상규명’은 무슨 일
이 있어도 꼭 밝혀내고야 말겠다는 농민들의 의지는 강고하다. 다시는 더 이상
이런 천재, 아니 인재로 인해 겪는 고통과 좌절을 반복해서 당하지 않기 위해서
라도 반드시 이번 사건의 매듭을 짓고야 말겠다는 것이다.
이는 비단 철원군 농민들만의 외로운 싸움으로 그칠 문제가 아니기에 좀더 많
은 관심과 폭넓은 연대가 요구된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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