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이 영화를 보고 그랬단다.

“하종강 씨도 꼭 보라고 하세요.”

그이의 말이 아니었어도 나는 이 영화를 봐야했다. “랜드 앤드 프리덤” 이후 켄 로치 감독의 영화를 본다는 건 좌편향적 ‘편견’을 애써 유지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에게 마치 순례자의 의무처럼 되었으니까…

딸 아이에게 예쁜 드레스를 하나 사 입히기 위해서 실직한 아빠가 겪는 온갖 일들이 영화 ‘레이닝 스톤’의 줄거리이다. 내 짐작이지만, 실직한 노동자에게 세상은 마치 ‘돌멩이 비’를 퍼붓듯 고통을 안겨준다는 것이 영화 제목의 뜻은 아닐까…

“브레스드 오프”와 “풀몬티” 때도 그랬지만, 우리 주변에는 영화보다 훨씬 더 절실한 일들이 무수히 널려있다는 생각을 영화를 보는 내내 떨칠 수 없었다.

몇 년전인가… 철 지난 두꺼운 바바리 코트를 입은 50대 초반의 남자가 우리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섰다. 미리 연락을 받은 터라 옆에 앉으시라고 권했다. 죽어라 일해주고 돈을 한 푼도 못 받았다는 그가 감기에라도 걸렸는지 코트 소매로 연신 콧물을 훔치면서 풀어냈던 이야기 중에서 한 토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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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놈이 엊그제 군대에 갔는데 내가 논산까지 따라 갔습니다.

찢어지게 가난한 살림이지만 에미도 없이 내가 직접 옷 갈아 입히며 키운 아들이라 여비를 빌려서라도 내려갔던 거지요.

그놈이 자라는 동안 생전 나한테 뭘 사달라고 졸라 본 적이 없는 놈이었는데 여관방에서 아침에 일어나 그럽디다.

“아버지, 나 돼지고기 한 근만 사 주소. 나 그놈 먹고 군대 갈라요. 내가 지금까지 아버지한테 뭘 사 달라고 졸라 본 적이 없었잖아요. 그러니까 돼지고기 딱 한 근만 사 주시면, 나 그놈 먹고 군대 가서 몸 튼튼히 있다가 올라요.”

주머니를 뒤져보니까 만원짜리 한 장이 딱 남았어요. 그래서 “에비가 너 고기를 사주고 나면 올라갈 차비가 없어서 못 사준다”고 했더니 그 놈이 그 말 듣고 울면서 연무대 정문을 들어갔습니다.

그 꼴 보고 집에 와 보니 방바닥에 아들놈이 벗어 놓고 간 옷만 덜렁 놓여있는데 어찌나 속이 뒤집히는지요. 에미도 없이 내 손으로 옷 갈아 입히며 키운 아들놈이 군대가면서 그래 아무것도 필요 없고 돼지고기 한 근만 사달라고 했는데 내가 그걸 못 사줬어요.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뭐가 크게 잘 못 되었어요. 그래서 내가 국회의사당 정문에 가서 벌렁 누워버렸던 거 아닙니까.

“법 좀 고쳐라. 어떻게 된 법이 나쁜 놈들만 보호하고 나처럼 억울한 사람 권리는 하나도 보호하지 못하니, 이건 법이 잘못된 거 아니냐. 그러니 법을 고쳐라…”

그랬더니 국회에서 검사님에게 보내고 검사님이 여기로 가 보라고 해서 우여곡절 끝에 왔습니다. 여기까지 오기도 참 힘들구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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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말하는 동안 내내 코트 자락으로 눈물 콧물을 닦으며 나이답지 않게 울먹였는데, 휴지를 접어주면서 나도 눈시울이 뜨거웠다.

김대중 대통령은 취임 1주년을 맞아 ‘국민과의 대화’라는 행사를 치렀고 그 내용은 SBS 방송으로 생중계되었다. 다음날 아침 조간신문을 보니 그 내용을 특집으로 보도했는데 제목은 이랬다.

“개혁만큼은 영국처럼 철저히 할 것이다.”

대통령의 그 말은, 군대에 가는 아들에게 돼지고기 한 근도 사주지 못하는 바바리코트의 사내나 딸아이에게 드레스를 입혀주기 위해 양을 훔쳐야 하는 아버지를 무수히 만들어낼 수밖에 없는 신자유주의적 정책을 지속하겠다는 말에 다름 아니다. 수돗물 공급사업까지 민간 외국 자본에 넘겨준 영국에 비하면 우리는 아직 한참 멀었으니 실업자를 양산하는 인원정리 중심의 구조조정 행진을 한 동안 지속하겠다는 것이다.

지난 서울지하철노동자들의 파업이나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현대정공, 마이크로, 의료보험 노동자들의 파업은 그 정책에 쐐기를 박겠다는 것이고, 쐐기를 박지는 못할지라도 최소한 그 정책이 주춤거리게는 하고 있다. 그 주춤거림 때문에 우리 경제의 회복 속도가 늦어질 거라고 한탄하는 ‘오른편’의 사람들도 있으나, 장기적으로는 그 주춤거림 때문에 우리 사회가 보다 건강해질 것이라고 생각하는 ‘왼편’의 사람들도 있다. 소수의 떼부자를 만들어내는 것보다 다수의 적당한 중산층을 만들어내는 것이 옳다는 생각이다. 역사적으로 볼 때 ‘왼편’ 사람들의 생각이 더 많이 옳았다는 것이 내 주변 사람들의 믿음이다. 켄 로치 감독이 영화를 만들어내는 힘도 그와 같은 생각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리라…

우리 모두 그 사람들의 고난을 우리 몸 안에 채우는 일에 주저하지 말자. – 영화 한 편을 보고도 이런 구호가 나오는 건 나의 직업병이다. 나도 싫지만 어쩔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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