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록]
누구에 의한, 누구를 위한 전력산업 해외매각인가?
* 편집자 주
다음은 ‘공기업 민영화와 해외매각에 관한 시민사회단체 공청회’에 토론자로
참가한 전태일을 따르는 민주노조운동연구소 박찬식 소장의 토론문입니다. 공청
회의 주발제문이 아니기 때문에 한국전력 분할 해외매각에 관한 상황과 쟁점들
을 전반적으로 다루고 있지는 않지만, 그간 진행되어온 흐름과 맥락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으로 판단되어 옮겨 싣습니다.
제공 : 전태일을 따르는 민주노조운동연구소
1. 전력산업 분할 해외 매각은 IMF-미국-초국적 자본의 강요에 의한 것이다.
그 동안 극히 일부 관계자들 안에서만 논의가 이루어진 채 졸속적으로 추진되
어 오던 전력산업 구조개편 문제에 대해 공개적인 토론의 장이 열리기 시작한
것은 늦었지만 다행스러운 일이다. 한국전력 노조가 비상대책위를 만들어 파업
까지 결의하면서 투쟁에 나서지 않았다면 우리나라 전력산업의 전부나 다름없는
한국전력이 갈가리 분해되어 소리소문 없이 초국적 자본에 팔려갔을지 모를 일
이다.
참으로 아찔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도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는가?
아무리 정부가 타당한 근거를 가지고 구조개편안을 만들었다고 자신한다손 치더
라도 전력산업이 어떤 산업이며, 한전이 어떤 기업인가?
자동차 산업이나 반도체 산업이 중요하다고 하지만 그것이 잠시 가동을 멈추
었다고 나라경제가 치명타를 입거나 사람들의 삶이 혼란에 빠지지는 않는다. 그
러나 만에 하나 전력이 단 하루 이틀이라도 끊긴다고 생각해 보라. 상상하기에
도 끔찍한 가공할 사태가 벌어지지 않겠는가?(일찍이 선구적으로 전력산업을 민
영화한 칠레에서는 작년 말부터 몇 차례에 걸쳐 실제로 그런 일이 벌어졌다.)
또 혹시라도 전력요금이 대폭 오른다고 생각해 보라. 당장 서민들의 생활은 말
할 것도 없고 경제 전반에 얼마나 큰 영향이 미칠 것인가? 그밖에도 전력산업을
개편했을 때 닥칠 문제들, 검토해야 할 과제들은 무수히 많다. 더구나 한전은
국민의 혈세로 키워온 국민의 재산이다. 국민의 재산을 국민들도 잘 모르는 가
운데 팔아 넘길 수 있는 것인가?
지난 1월 21일 정부가 확정 발표한 전력산업 구조개편 계획은 구체적으로 세
가지 측면으로 나뉘어진다.
첫째는 말 그대로 전력산업의 ‘구조’를 개편하는 것이다. 발전·송전·배전부
문이 한전이라는 하나의 기업에 수직·수평적으로 통합되어 있는 독점적인 구조
로부터 발전, 송전, 배전을 수직적으로 분리하고, 발전과 배전 부문은 그 안에
서 또 여러 개의 기업으로 수평 분할해서 경쟁적인 구조로 만든다는 것이다. 둘
째는 단순히 구조를 개편하는 것이 아니라 분할된 기업―원자력을 제외한 발전
부문과 배전부문―들을 민간자본에 매각하여 ‘민영화’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셋
째는 민영화의 방식도 과거에 추진했던 국민주 방식이 아니라 국내외 공개입찰
을 통해 매각하는 방식으로, 그것도 단기간 내에(당장 올해부터 시작하여 2002
년까지) 팔아치운다는 것이다.
정부가 내놓은 전력산업 구조개편의 문제점에 대해서는 이미 많은 전문가들이
지적하고 있다. 예컨대 김태유 교수는 정부의 전력산업 구조개편(안)에 대해 조
목조목 설득력 있는 반론을 제기하고 있다.(21세기를 준비하는 에너지·자원정
책기획단, 「전력산업구조개편 정책보고서」, 새정치국민회의 정책위원회,
1999, pp. 90-111 참조) 그 외에도 고려대 김동기 교수(“기간산업 외국인 소유
재고해야”, <문화일보>, 1999.3.3자 참조), 영국 케임브리지대의 장하준 교수
(“민영화정책 재검토 필요하다”, <한국일보>, 1999.6.23자 참조), 전 한전기공
사장인 현대중공업 서석천 상임고문(“전력의 식민지화를 막자”, <한국일보>,
1998.4.28) 등 많은 전문가들이 같은 맥락에서 정부안을 비판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부는 구조개편안을 그대로 밀어붙일 태세이다. 지난 8월
13일 정덕구 산업자원부 장관은 기자회견을 갖고 전력산업 구조개편을 원안대로
강력히 추진할 것이며 불법 파업에 대해서는 엄정 대처하겠다고 밝혔다. 노조의
투쟁으로 전력산업 분할 해외매각 문제가 국민적으로 공론화되려고 하는 시점에
서 아예 토론의 여지를 봉쇄하고 나선 것이다.
정부는 “이러한 결정(전력산업 구조개편안)은 국내.외 전문가 및 전력산업구
조개편위원회, 공청회 등에서 충분한 토의과정을 거쳐 결정한 사항”이라고 강변
하고 있다.(1999.1.28 ‘전력산업해외분할매각반대범국민대책위원회’의 질의에
대한 기획예산위원회의 회신) 그러나 이것이 얼마나 억지인지는 집권당의 논평
이 말해주고 있다. 국민회의 제2정책조정위원장이고 당내에 설치된 ’21세기를
준비하는 에너지·자원 정책 기획단’ 단장인 박광태 의원은 1999년 1월 21일
‘정부의 전력산업 구조개편 계획 확정 발표에 대하여’라는 제목으로 내놓은 논
평에서 “전력산업의 구조개편이 …국민적 공감대를 형성하고 경제, 사회 각계의
의견을 충분히 수렴하여 신중히 추진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정부가 일방적으로
진행시키고 있는 데 대하여 우려를 표명한다”고 밝혔던 것이다.
그렇다면 정부가 국민적 논의조차 외면하고 일방적으로 전력산업 구조개편을
밀어붙이는 이유는 도대체 무엇인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지금의 전력산업 구조
개편은 우리 스스로의 필요에 따라 우리 스스로의 판단과 결정으로 이루어지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지적하고 있듯이, 전력산업을 초국
적 자본에 팔아 넘기는 것은 1997년 금융위기 당시 IMF-미국-초국적 자본의 협
박과 강요에 굴복해 우리 정부가 받아들인 밀약사항이었다는 것이다. ‘전력산업
구조개편’은 그것을 포장하기 위한 수사일 뿐이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어떤 이들은 단순한 추측이 아니냐고, 물증이 있냐고 물을
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생각해 보자. 도무지 국민들이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을
밀약하면서 물증을 남길 리 있겠는가? 물증이 없다고 해서 사실이 아니라고 할
수 있는가? 1997년 금융위기에 대해서 IMF-미국-초국적 자본의 공격이라고 했을
때에도 언론은 물론 소위 진보세력에서도 이를 소위 ‘음모론’이라고 치부하면서
애써 부정했다. 그 때도 물증은 없었다. 그러나 최근 사카키바라 에이스케 일본
대장성 고문이 <요미우리> 신문에 기고한 회고록 등을 통해 실상이 하나하나 드
러나고 있지 않은가? 초국적 자본이 전 세계를 경제적으로 통합시키기 위한 전
략을 가지고 있음은 부인할 수 것이 당연한 일이다. 전술에는 공공연하게 하는 것도 있지만 음모와 술수도 있
는 것이다.
물증이 없다고 해서, 근거도 없이 목소리만 높이자는 것이 아니다. 전력산업
구조개편이라는 미명하에 추진되는 한전의 분할 해외매각이 IMF-미국-초국적 자
본의 강요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라는 정황증거들은 충분히 있다.
1) 지난 1월 정부가 확정·발표한 전력산업 구조개편안은 IMF 이전에 전문 연
구기관이나 정부 자체 내에서 논의해 오던 구조개편안과도 배치되는 것이다.
정부는 개편안이 97년 6월 구성된 ‘전력산업 구조개편 위원회’의 논의 결과에
따른 것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그런데 이 ‘전력산업 구조개편 위원회’는 그 이
전에 이루어진 경영진단에 근거하여 만들어진 것이었다. 한국산업경제연구원과
안진회계법인, 삼일회계법인에 용역 의뢰해 1994년 7월부터 1996년 6월까지 실
시된 경영진단에서는 △현 시점에서 민영화를 추진하는 것은 시기상조임 △상당
기간 공기업 체제를 유지하며 전력산업 구조개편을 추진하는 것이 바람직함 △
민영화는 구조개편이 완료되는 시점에서 검토함이 바람직함 등의 의견이 제시되
었다. 아울러 △1997-98년 구조개편위원회의 구성 및 논의 △1999-2003년까지
사업부별 독립채산제 운영 △2004-08년까지 사업부를 자회사 형태로 분리 △
2009-10년까지는 풀(Pool) 창설과 도매시장 경쟁 도입 △2010년 이후 Pool 제도
완비 △Pool 제도 완비 이후 자회사 민영화 결정 등의 일정이 제시되었다. 즉
민영화는 하더라도 최소 2010년 이후에 결정하자는 것이었다.
(이러한 진단결과에 대해 당시 통산부 한전경영진단반(반장 전력심의관)은
‘민영화는 상당기간 불고려’라는 진단결과에 동의했음은 물론이고 우리나라 여
건상 경영진단에서 제시한 구조개편 방안이나 영국식 Pool 제도에 도입이 타당
한지에 의문을 제기하면서 내부 경영효율 증진을 우선하면서 장기적으로 전력산
업의 구조 유형을 검토.선정해도 늦지 않다는 평가의견을 내놓았다.)
‘전력산업 구조개편 위원회’는 이러한 경영진단 결과에 따라 공기업 체제의
유지를 전제로 한 구조개편 방안을 논의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그런데 그로부터
1년여 지난 1998년 7월 기획예산위원회의 공기업 민영화 계획 발표 때 한전은
민영화 대상으로 발표되었다. 이어 11월 전력산업 구조개편 위원회는 구조개편
뿐만 아니라 민영화(매각)까지도 즉각적으로 시행하는 전력산업 구조개편안을
내놓았고, 그것이 당정회의와 요식적인 공청회를 거쳐 정부안으로 확정.발표되
었다. 97년 말 IMF 신탁통치를 거치면서 기조가 180도 바뀌어버린 것이다. (전
력산업 구조개편 위원회는 98년 12월까지 12회에 걸쳐 위원회를 개최하여 전력
산업 구조개편의 기본방향을 논의했다고 하는데 그 논의경과는 전혀 공개되지
않고 있다.)
2) 전력산업 구조개편 위원회의 발족에 발맞추어 서울대 기초전력공학 구소에서는 ‘국내 전력산업의 경쟁력 국제비교 및 향상방안’에 관한 연구가 진
행되었다. 98년 7월까지 계속된 이 연구에서는 △한국의 전력산업은 주요국 전
력산업에 비해 평균비용 하락이 빠르고 생산성 성장 또한 가장 빠르다 △한전은
세계 주요 35개 전력회사 가운데 생산성 수준의 측면에서 4위이고 생산성 성장
률도 4위이다 △전력회사의 소유관계(국영이나 민영이냐), 산업구조(경쟁이냐
독점이냐)는 생산성 성과와는 직접적 상관관계가 없다는 등 현재 정부가 추진하
고 있는 구조개편안과는 정반대 되는 결론을 내놓았다. 그러나 이 연구결과는
철저히 무시되었다. 이미 한전을 분할 매각한다고 결정이 난 상태였기 때문이
아닌가?
3) 현재의 정부안의 단초는 1998년 2월 김대중 대통령 당선자 진영에서 나왔
다. 정부에서 이미 전력산업 구조개편 논의가 진행되고 있는 가운데, 김대중 당
선자측은 1998년 말까지 전력산업의 전반적인 구조개편 종합계획을 수립, 민간
기업의 전력산업 참여를 확대하고 전력사업자간 동등한 경쟁체제를 구축하는 등
에너지산업구조를 전면적으로 개편한다고 밝힌 것이다. 당시 대통령직 인수위의
한 관계자는 “국내 에너지산업은 에너지의 안정적인 공급을 위해 공기업 형태로
출발했으나 IMF 체제를 맞아 민간의 참여와 대외개방을 확대하는 경쟁체제로 전
환하는 것이 불가피해졌다”고 언급했다. (<연합통신>, 1999.2.14) 전력산업 구
조개편이 IMF와의 밀약에 따른 불가피한 조치임을 내비친 것이다. 결국 그 이후
전력산업 구조개편은 이 방향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4) 지난 3월 26일,27일 양일간 윌리엄 데일리 상무장관을 단장으로 한 기업사
절단이 우리나라를 방문했다. 이 기업사절단은 에너지, 환경, 정보통신, SOC 등
네 분야를 중심으로 구성되었는데 특히 ARCO(전력회사), ABB(전기분야 엔지니어
링), ENRON(자원회사), 뱁콕&일콕스(에너지설비), 테렌스쏜(복합전력), 파슨스
(석유프로젝트) 등 전력, 에너지 분야 기업인들이 주를 이루고 있었다. 이들은
박태영 산자부 장관과 한전 및 가스공사 사장을 만나 조속한 민영화를 촉구한
것으로 알려졌다. 한전의 민영화 일정이 늦추어지지 않도록 강력한 압력을 행사
한 것이다.
5) 지금 시기에 한전의 발전소들을 공개입찰 방식으로 매각한다면 그것을 초
국적 자본들이 차지하게 될 것은 너무나 자명하다. 5-6개 자회사로 분할하더라
도 하나 하나의 자회사가 최소 수조 원은 되는데 지금 우리나라 재벌들이 그것
을 인수할 여력이 없다는 것은 새삼 재론할 필요도 없지 않은가? 그러니 재벌들
도 내심 지금 한전을 민영화하는 데 반대할 것이 분명하다. 심지어 민영화를 주
도하고 있는 정부 경제팀의 고위 관료조차 사석에서 “(반대) 여론이 일어나면
이를 업고 재협상에 나설 수도 있다”고 털어놓았다고 하는 이야기가 중앙일간지
에서 발행하는 경제지의 지면에 오르고 있지 않은가?(<이코노미스트> 99.8.24
자, p.74)
6) 왜 작년 외환위기 직후에는 주로 ‘부족한 외화를 조달하기 위해서’라고 했다가 외
환보유고가 늘고 외국자본이 유입되자 다음에는 ‘글로벌 스탠더드’를 내세웠다.
그런데 최근 들어서는 ‘한전이 부채가 너무 많아서 부실화의 우려가 있으므로
발전소를 팔아서 갚아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왜 이렇게 말을 바꾸는가? 한전
을 분할 매각하는 것은 이미 밀약된 사항이고 그것을 이행하라는 강력한 압박이
계속되고 있기 때문에 상황에 따라 이런 구실, 저런 구실을 것이 아닌가?
7) 이렇게 말을 바꾸고 있을 뿐 아니라 이치가 닿지 않는 근거를 끌어다가 억
지주장을 펴고 있다. 이 부분은 다른 토론자들이 전력산업 구조개편의 쟁점으로
충분히 다룰 것이지만 최근 몇 가지 사례들만 들어보고자 한다.
지난 8월 16일자 중앙일보의 지상논쟁에서 에너지경제연구원의 조성봉 전력연
구단장은 한전 부채가 23조에 이르고 있고 그로 인해 대우와 같은 사태가 일어
날 수 있다고 은근히 위기의식을 부추기면서 그 이유로 정부의 간섭을 들었다.
“전기요금은 공공요금으로 분류돼 용 전기요금은 원가에 크게 미치지 못한다. 공기업으로서 한전 경영층이 마음놓
고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다고 할 정도로 경영재량권은 제한돼 있다. 게다가
정부는 전력산업을 국내 무연탄, 천연가스, 지역난방, 원자력뿐 아니라 수자원
등에 대한 지원창구로 삼고 있다. 몇 개의 발전소를 무슨 연료로, 얼마만큼의
규모로, 언제까지 짓느냐와 같은 중요한 결정도 사장이 아닌 정부의 계획으로
결정된다”라고. 그러면서 다짜고짜로 해결책은 ‘시장원리’밖에 없으며 “발전설
비의 해외매각 등을 포함한 민영화와 경쟁촉진의 두 축으로 시장원리를 도입한
다는 전력산업 구조개편은 지금 당장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런 비약이 어디 있
는가?
전기요금에 대한 통제나 농사용, 산업용에 대한 지원, 그리고 무연탄, 천연가
스, 지역난방 등에 대한 지원은 그야말로 정책적인 기능이다. 이것을 수행하고
말고는 민영화 여부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 민영화하지 않더라도 그런 정책기능
이 불필요하거나 과도하게 부담이 되면 없애버리거나 조정하면 된다. 그러나 그
런 정책기능들은 한전에서 빼더라도 결국 정부가 세금을 들여 수행해야 하는 것
들이다.
한편, 정덕구 산자부 장관은 한 술 더 떠서 우리나라 전력요금이 비싼 편이고
노동생산성도 낮다는 주장을 펴면서 구조개편을 강행하겠다고 밝혔다. 이는 그
동안 산자부와 한전이 자랑해 왔고, 많은 전문가들도 공인해 온 ‘세계적으로 저
렴한 전력요금과 높은 생산성’을 주무장관이 스스로 부정하고 나선 것이다.
조성봉 단장과 정덕구 장관의 이야기는 한전이 97년에 에디슨 대상을 받은 이
유와도 정면으로 배치된다. 전세계 2백46개 전력회사와 72개 관련기업이 가입된
세계적인 전력민간단체인 미국 에디슨 전기협회(EEI)가 주는 에디슨 대상은 일
본의 관서전력이나 프랑스의 EDF등 세계유수의 전력사들도 도전했지만 실패한
바 있는 권위 있는 상으로 아시아에서는 한전이 처음으로 수상했다. 그 수상 이
유로 EEI는 “한전은 최근 수년간 기업혁신노력이 두드러졌고 원자력분야에서 기
술자립과 안전운영수준을 크게 높였으며 5년간 1천1백20억 원에 달하는 중소기
업지원을 한 실적 등이 감안됐다”고 밝혔다.(<중앙일보> 1997.6.12자)
부채 문제만 해도 그렇다. 한전의 부채가 크게 늘어나는 것은 문제다. 그러나
170%대인 부채비율은 우리나라 재벌들에 비할 바 못된다. 정부나 자본측에서 그
렇게 떠받드는 신용평가회사인 스탠더드&푸어스는 지난 1월 한전의 신용등급을
국내 기업중 최상 등급인 BBB-로 상향 조정했다. 그런데 어떻게 정부와 관변 연
구소들이 대우 사태와 비교하면서 위기의식을 부추긴단 말인가? 부채가 늘어나
는 것을 막기 위해서 투자보수율을 단계적으로 현실화해 나갈 필요가 있을지는
모르나 그것이 발전소를 초국적 자본에 팔아 넘겨야 하는 이유는 될 수 없다.
발전소를 팔더라도 전력요금이 올라가는 것은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다는 것
은 누구나 인정하는 사실이 아닌가?
다소 장황하게 정황증거를 나열했지만 사실 이런 이야기는 사족에 지나지 않
는다. 이 시점에서 느닷없이 한전을 분할 매각한다고 할 때, 최소한의 상식만
가지고 본다면 그것이 IMF-미국-초국적 자본의 압력 때문이라는 것을 모를 사람
이 어디 있겠는가? 다 아는 사실을 가지고 정부는 온갖 이유를 들먹이며 손바닥
으로 하늘을 가리려 하고 있다. 그리고 식자라는 사람들이 ‘물증’ 운운하며 애
써 눈을 감고 있다. 진실이 이러할진대 외세에 의해 이미 결정된 것을 놓고 우
리끼리 전력산업에서 공기업이 맞는가 민영화가 맞는가, 독점체제가 나은가 경
쟁(분할)구조가 나은가 논의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정부는 먼저 국민
앞에 솔직해져야 한다. 그리고 IMF-미국-초국적 자본과의 밀약을 철회하고 우리
나라 전력산업의 실정에서 요구되는 구조개혁에 대한 논의를 시작해야 한다.
2. “한전 매각은 나라를 팔아먹는 것”이다.
좀 더 시야를 넓혀 본다면, 전력산업을 먹어들어오는 것은 초국적 자본에 의
한 경제식민지화의 일환으로 보아야 한다. IMF 신탁통치 이후 우리가 경험하고
있듯이 초국적 자본은 우선 자본.외환시장을 완전히 개방시키고 금융부문을 소
유·지배함으로써 돈줄을 틀어쥐고 환율.통화 정책 등 독자적인 경제정책을 펼
수 없게 만든다. 그리고 나서 국가기간산업을 비롯하여 주요 알짜 기업들을 소
유·지배한다. 은행을 비롯한 금융기관은 이미 초국적 자본에 잠식당하고 있고,
민간기업에서는 대우의 계열사들이 줄줄이 넘어가고 있다. 그리고 한국통신, 포
항제철, 담배인삼공사, 가스공사, 한국중공업 등 알짜 공기업들을 다양한 방법
으로 먹어들어오고 있다.
이렇게 금융, 기간산업 및 알짜 기업들이 차례로 먹히고 나면 우리나라는 영
락없는 경제식민지가 되는 것이다. 경제식민지가 되고 나면 노동자·민중들이
땀흘려 일한 성과 즉 국부가 초국적 자본의 손아귀로 들어가는 것은 물론이고
계속되는 초국적 자본의 요구에 속수무책으로 끌려갈 수밖에 없다. 전력도 마찬
가지이다. 아무리 경쟁체제를 만든다고 해도 결국 과점―쉐네에 의하면 ‘집단적
독점’―일 수밖에 없는 전력산업을 초국적 자본에 넘겨주었을 때 독점적 이윤을
추구하는 그들의 요구를 거부할 수 있겠는가? 그들에게 보편적 서비스를 강제하
고 비상사태시 국가 정책에 순응하도록 만들 수 있을 것인가? 한전이기 때문에,
공기업이기 때문에 감당해 온 비용들을 그들이 감당할 이유가 있겠는가?
이러한 IMF-미국-초국적 자본의 식민지화 프로그램은 우리나라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올초 외환위기를 겪었던 브라질을 보더라도 우리와 너무나 흡사하다.
브라질은 올해 초 초국적 투기자본의 환투기로 주가가 폭락하고 레알화가 평가
절하되면서 IMF와 미국의 압력으로 변동환율제를 도입하고 은행 및 전력 등 에
너지산업을 민영화(초국적 자본에 매각)하기로 합의했다.(초수도프스키 같은 이
들은 이것을 ‘브라질에 대한 재식민지화 프로그램의 집행’이라고 부르고 있다.)
브라질만 아니라 동구, 멕시코 등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이러한 IMF-초국적 자본의 공격에 맞서 브라질 리우 그란데 두 술 주
의 올리비우 두트라 주지사는 주 공업협회와 상업협회 등의 광범위한 지지 속에
서, 에너지와 수자원 부문에 남아 있는 (주정부 소유의) 공기업을 매각하라는
중앙정부의 압력을 거부했다. 또한 카톨릭 교회는 카르도수 대통령의 정책을
IMF의 명령에 대한 브라질의 “완전항복”이라고 비난했다. 브라질 평화위원회 총무인 프란시스쿠 휘타케르는 2월 스탠리 피셔 IMF 수석부총재와
말란 브라질 재무장관 사이에 체결된 협약은 “민족과 국가의 안보에 대한 위협”
이라고 고발하고 있다. 전국변호사협회도 “우리나라는 IMF의 실습장이 될 수 없
다”면서 “브라질이라는 나라가 외세―민족의 발전을 위태롭게 하고, 일자리를
말살하며, 사회적 배제를 악화시키는―에 굴종하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천명했다.
이제 우리도 입장을 분명히 해야 할 때다. 은행의 해외매각, 전력산업의 분할
해외매각, 정리해고 등 식민지화 조약이다. 총칼만 들지 않았지 을사보호조약과 무엇이 다른가? 군사적
위협 대신에 국가부도 위기라는 경제적 위협을 동원한 것 외에 다를 것이 없다.
당시 군주의 옥쇄를 찍지 않고 보호조약을 체결한 것이나 오늘날 국민의 동의를
거치지 않고 경제식민지화 협약을 체결한 것은 하나도 다르지 않다. 단도직입적
으로 말해서 한전을 초국적 자본에 팔아 넘기는 것은 매국행위이다. 그것을 거
부하고 일어서고 있는 한전노동자들의 투쟁은 애국운동이며 제2의 독립운동이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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