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맹찬형 기자(연합뉴스)

1975년 4월 9일 새벽 한국의 수도 서울에서 소위 ‘인혁당 재건위’사건 관련자 8명에 대한 사형이 집행됐다.

전날 대법원에서 사형 확정판결을 받은지 만 하루가 채 기나지 않은 시간이었고 유족들은 재심을 청구할 겨를조차 없이 사랑하는 가장들을 잃었다.

그 후 24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인혁당 재건위 사건 관련자들의 명예는 여전히 회복되지 않았고 남은 가족들에게도 ‘빨갱이 가족’이라는 낙인을 선명하게 남긴 채 세기를 넘기려 하고 있다.

역사의 창고에서 먼지에 덮힌채 가려져있던 인혁당 사건을 지금 언급하는 것은 국가보안법이 적용된 많은 사건 가운데 이 사건만큼 비극적이고도 기막힌 사례도 드물기 때문이다.

소위 ‘인혁당’이라는 이름이 세상에 등장한 것은 1964년과 1974년 두차례였다.

1964년 8월 14일 김형욱 당시 중앙정보부장이 기자회견을 통해 “북괴위 지령을 받고 대규모 지하조직으로 국가변란을 획책한 이민혁명당 사건을 적발, 일장 57명 중 41명을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하고 16명을 수배 중”이라고 발표한 것이 처음이다.

레드 컴플렉스를 자극하기에 충분한 이름을 가진 이 사건은 발표 직후에는 세상을 제법 놀라게 했지만 중앙정보부로부터 사건을 넘겨받은 서울지검 공안부 검사3명이 ‘기소할 가치가 없다’며 공소장에 서명을 거부하면서 우스꽝스러운 촌극으로 변질됐다.

기소 검사가 바뀌고 적용법저가 국가보안법 대신 반공법으로 변경되는 우여곡적 끝에 최종적으로 13명이 기소됐지만 실형을 선고받은 것은 2명에 불과했다.

김형욱 전 중앙정보부장조차도 회고록을 통해 인혁당 사건을 언급하면서 “당시에는 아직 살아있던 검차의 양심에 판정패 당한 샘”이라고 술회했다.

그로부터 10년이 흐른 74년 4월 25일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혀져가던 ‘인혁당’은 신진수 당시 중앙정보부장의 입을 통해 ‘인혁당 재건위’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다시 등장했다.

10년전 수사와 재판을 통해 실체가 없는 것으로 드러났던 인혁당이 ‘재건’을 기도했다는 말도 안되는 논리적 모순이 있었지만 무시됐다.

당시 박정희 정권은 각계에서 터져나오는 유신체제에 대한 반발을 억누르기 위해 긴급조치를 남발하고 있던 시기였고 때마침 터진 2차 인혁당 사건, 즉 인혁당 재건위 사건을국면을 전환할 수 있는 호재였기 때문에 재판은 변론기회조차 충분치 않은 군사법정에서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인혁당 재건위 관련자 21명과 민청학련 관련자 27명 등과 함께 긴급조치 4호, 국가보안법, 반공법, 내란예비음모, 내란선동 등의 혐의로 비상보통군협의회에 기소됐다.

수사발표 1년만인 75년 4월 8일 대법원은 도예종(삼화토건 회장), 서도원(전 대구 매일신문 논설위원), 하재완(양조장 경영), 이수병(삼락일어학원 강사), 김용원(경기여고 교사), 송상진(양봉업), 우흥선(한국골든스벨프사 상무), 여정남(전 경북대 학생회장)씨 등 인혁당 재건위 관련자 8명에 대한 사형을 확정했고, 다음날 새벽 세상이 모두 잠든 시간에 사형을 집행했다.

사형당한 8명은 주로 대구, 경북 지역을 중심으로 민주화운동에 앞장선 무명의 지식인들이었고 71년 대선에서는 김대중후보를 지지하는 선거운동을 벌이는 등 공개활동을 주로 했을 뿐 북한의 지령을 받아 지하활동을 벌인 사실은 없다고 항변했으나 군복을 입은 재판관들은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72년 7·4남북 공동성명이 발표됐을 때 이들이 밤새 기쁨의 술잔을 기울이고 어깨춤을 추면서 떠들썩한 잔치를 벌이기도 했다는 유족들의 증언이 있는 것을 보면 사형된 8명이 지하조직을 만들어 은밀하게 국가전복을 기도했다는 혐의사실이 너무도 터무니없게 들린다.

그러나 이성과 합리가 통하지 않던 시기에 피고와 유족들의 주장보다는 북한의 지령을 청취하는 데 사용됐다는 고물 라디오 1대가 법정에서 유력한 증거로 채택됐고 언론 역시 침묵으로 ‘사법살인’을 방기했다.

악법이 끼친 해악은 8명의 죽음으로 끝나지 않았다.

고문수사에 대한 의혹이 있기 때문에 사형수들의 시신조차 유족들에게 온전히 넘겨지지 않았고 강제로 화장 처리됐다.

사형수의 미망인들은 이웃집 아이들이 자녀들을 기둥에 묶고 ‘간첩의 자식’이라며 총살을 시키는 놀이를 하는 것을 지켜봐야 했고 삯바느질로 연명하던 한 미망인은 동네 사람들이 일감을 주지 않아 생계조차 잇기 힘든 세월을 보내야 했다.

국가보안법과 반공법이라는 무시무시한 혐의를 쓰고 사형당한 이들에게는 추모제는 물론 묘비에 비문을 쓰는 것조차 한동안 허용되지 않았다. 경북대와 영남대 교내에 세워진 추모비는 문민정부하에서도 경찰에 의해 ‘이적표현물’로 간주돼 철거됐다.

대구지역에서는 매년 4월이면 추모비를 압수하려는 경찰과 이를 지키려는 학생들 사이의 숨바꼭질이 벌어졌고, 추모제를 강행한 학생회 간부들까지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가 씌어져 구속됐다.

국민의 정부가 들어선 이후 일부 언론과 정치권에서 이들에 대한 재평가 움직임이 다소 활발해졌다지만 전반적인 사정과 인식은 크게 나아지지 않았다.

지난해 11월 4일 인혁당 사형수 유가족을 비롯한 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 회원들이 ‘민족민주유공자 명예회복과 의문사진상규명 특별법’제정을 촉구하며 국회앞에서 무기한 농성에 들어간 지 벌써 10개월이 흘렀지만 정쟁에 바쁜 여·야 정치인들에게 이 문제를 매듭지으려는 의지는 별로 없는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인혁당 재건위’사건은 잘못 탄생한 악법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고통과 아픔을 주고 정치적으로 악용되기 쉬우며 긴 세월동안 사회 전체에 버거운 짐이 될 수 있는지를 절실하게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지난해 가을 인혁당 사건취재를 위해 대구에 갔을 때 만난 사형수 송상진씨의 아들 철환씨는 “돌아가신 분들이 어떤 사상을 가졌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무슨 이유로도 민주화운동을 하던 분들에게 모진 고문을 가하고 항변의 기회조차 주지 않은 채 사형시킨 것은 용서받지 못할 범죄”라며 따지듯 내게 말했다. 굳이 송씨의 절규 때문이 아니라도 우리 사회에 사상을 이유로 사람의 목숨까지 빼앗을 수 있는 악법이 더 이상 존속해서는 안되는 이유를 인혁당 사형수 8명과 그 가족의 기막힌 운명이 충분하고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우리는 왜 망설이고 있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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