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영희 교수 (한양대)

그들은 그 지적 성장과 사상적 대전환의 고통어린 기쁨을 지금도 나에게 실토한다. 나는 그 몇 마디로 내가 지금까지 30여년 걸쳐서 겪은 수많은 고통을 위안받는다.

나의 10여 권의 저서 목록의 첫머리에는 그 발행의 시간 순으로 세 권의 책이 등장한다. 당시에는 모두 한자로 이름한 그 세 권의 책은 『轉換時代의 論理』(1974년 6월 5일), 『8億人과의 對話』(1971년 9월 1일), 『偶像과 理性』(1997년 11월 1일)이다.

그 책들이 처음 출판된 1970년대의 중반에서 후반에 걸친 시기는 바로 박정희정권이 유신헌법을 제정하고 박정희 ‘황제’체제를 발족시킨 폭력적이고 광적인 극우, 반공주의 군부독재가 단말마적인 횡포를 부리고 있던 상황이다. 그 후에 밝혀졌듯이 그 정권과 사회체제와 국가성격은 한마디로 ‘미치광이’였던 것이다. 일체의 경험적 상식이 거부되고, ‘미치광이’였던 것이다. 일체의 경험적 상식이 거부되고, 거짓이 진실의 허울을 쓰고 권력으로 강요되는 시기였다. 진실은 그것이 지식이건 정보이건 사상이건 모조리 탄압을 받았다. 전체 언론기관이 어용화되고, 대학 내외의 지도적 지식인들의 기능은 시민의식을 마비시키고 ‘국가안보’의 이름으로 무조건적 복종을 설득하는 현실이었다. 국민대중은 마치 중국의 사상가, 작가 노신(魯迅)이 1920∼30년대의 중국과 중국인을 가르켜, “강철로 된 밀폐된 방속에 갇혀서, 빛도 공기도 없이 감각과 의식이 마비되어 그 상태를 고통으로 느끼지도 못하면서 죽어가는” 사회와 인민의 남한판 현실이었다.

노신이 괴로운 마음으로 말했듯이, 그 무쇠의 방속에서 조금이라도 의식이 덜 마비되고 덜 질식한 사람은, 희망이야 있건 없건 몇마디의 소리라도 지르고 몸부림을 쳐서, 의식을 잃고 죽어가는 사람들을 몇 사람만이라도 깊은 잠에서 깨워 일으켜야 할 의무가 있다.

한국의 극우·반공 군부독재 집단은 그런 외침과 몸부림을 ‘의식화’라고 불렀다. ‘의식화’의 죄를 다스리는 반공법과 국가보안법에 단두대가 시퍼렇게 날을 세우고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이 이른바 ‘의식화’를 ‘빨갱이’의 소행으로 단죄하려 했다. 그와 관련된 모든 의사표시는 ‘

공산주의’거나 ‘용공사상’이거나 ‘국체민환’이었고 당연히 반국가사범이었다.

나의 『전환시대의 논리』와 『8억인과의 대화』, 그리고 『우상과 이성』은 태어나면서부터 의식화의 기본교재라는 낙인이 찍혀졌다. 모두 반공법으로 1심에서 징역 5년 구형에 선고 3년, 2심에서 징역 3년 구형에 2년형을 선고받았다. 『전환시대의 논리』만은 맨 먼저 태어나 세 살(3세)이 되어 있어서 그동안에 제법 많은 독자의 ‘의식화’를 했다. 하지만 『8억인과의 대화』와 『우상과 이성』은 태어나자마자, 각기 두달과 13일의 핏덩이 상태로 의식화 처벌법의 단두대에 놓여졌던 것이다. 바로 사상적 ‘유아(幼兒)학살’이었다.

1977년 11월 23일 아침, 동대문경찰서 서원들에게 끌려서 무슨 영문인지도 모른 채 처박혀진 곳이 용산구 남영동에 있는 악명 높은 대공분실이었다. 수도 대도시의 한복판 뒷길에 숨어있듯이 자리잡은 대공분실의 대문 위장간판이 엉뚱하게도 ‘해양…무슨 공사’였던 것이 기억에 남아 있다. 이곳은 박종철 학생이, 조사관이 탁자를 딱!하고 한번 내리치니까 “억!”하고 죽었다(!!)는 악명 높은 곳이다.

수많은 지식인, 학생, 노동자, 시민을 “억!”하게 만들었던 곳이다.(나는 1983년에 두 번째로 이 악의 소굴에 끌려가서 “억!”할 뻔했다. 그 때는 기독교사회문제연구소에서 각급학교 교과서의 민족분단 고취, 반통일적 내용을 연구, 토론하는 각급학교 교사들의 세미나에서 강의한 내용 때문이었다.)

영하 10도의 혹한에 끌려간 나는, 며칠간의 잠안재우기 신문이 지나서야 무엇 때문에 내가 끌려온 지를 알았다. 출판된 지 3년 밖에 안되는 『전환시대의 논리』가 그들의 표현을 그대로 빌리자면, “수없이 많은 지식인, 대학생, 노동자들을 의식화시켰다”는 것이다. 『전환시대의 논리』는 초헌법적 대통령긴급조치 제1호가 발동된 직후인 74년 4월에 처음으로 조직적 항거를 계획했던 ‘민주청년학생연맹(민

청학련)’주도의 대학생 반독재운동의 전국화와 거의 시기를 같이하여 탄생했다. 그 때문에 반독재민주화운동 세력의 ‘필독서’가 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나에게는 뜻하지 않은 과분한 영광이었다. 『전환시대의 논리』는 그 책 이름대로 세계가 탈냉전, 반핵, 평화, 민주주의를 향해서 도도하게 흐르고 있는 현실과 시대정신과 그 논리를 제시하려는 것이었다. 『8억인과의 대화』는 중국 사회주의혁명의 전모와 그 철학, 사상을 소개했고, 『우상과 이성』은 극우 반공 군부독재가 숭배하는 온갖 허구의 우상들의 가면을 이성의 작용으로 벗겨버리려는 의도에서 쓰여진 글들이었다. 당시의 심정으로는 어쩌면 만용이었을 지 모른다.

남영동 대공반과 중앙정보부의 조사관들, 그리고 나의 기소장을 쓴 검사들은 나와 나의 책들을 매도하면서 공안당국이 편집한 팜플렛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그 속에 적혀있는 나에 관한 부분이 바로 “한국의 대학생들을 총체적으로 용공, 좌익분자로 이식화시키고 있는 죄의 증거”라고 소리치는 것이었다. 그 책자는 “학원 내 좌익사상 운동 맥락'(확실치 않지만) 그런 뜻의 제목이었다. 그들이 입에 거품을 물고 나를 매도하면서 지적하는 부분을 보니, 서울대학교 학생 연구단체들이 선정해서 전국 대학생들에게 ‘필독서’로 권고하고 있는 ‘의식화’ 교양 30권의 리스트였다. 『전환시대의 논리』가 1위, 『8억인과의 대화』가 2위, 『우상과 이성』이 5위로 적혀있었다. 3위가 박현채의 『민족경제론』, 4위가 송건호의 『한국민족주의의 탐구』로 되어 있었다. 그들 폭력숭배자들, 어둠의 지배자들이 나와 나의 저서를 사갈시하는 이유를 알만 했다.

주로 이 세권의 저서 때문에 70년대와 80년대의 20여년동안 나는 그들에 의해서 ‘의식화의 원흉’이라는 공식 칭호로 적대시되었다. 그 반면에 그 저서들은(그 후의 것들을 합하여) 수없이 많은 지식인, 대학생, 노동자들에게서 사랑을 받았다. 그 책의 70∼80년대 독자들은 광적인 극우 반공주의의 기존의 가치관과 신념체제가 근본에서부터 허물어지는 괴로움을 체험해야 했다. 그들은 그 지적 성장과 사상적 대전환의 고통어린 기쁨을 지금도 나에게 실토한다. 나는 그 몇 마디로 내가 지금까지 30여년 걸쳐서 겪은 수많은 고통을 위안받는다. 다만, 1977년 12월 27일, 옥중에 있는 자식의 임종 없이 돌아가신 늙은 어머니의 슬픔과 나의 가슴에 새겨진 상처는 죽는 날까지 지워지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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