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 네트워크]
노근리만이 아니다. 미국은 모든
양민학살의 진실을 밝히고 사죄하라!
임 선 희
숨죽인 통곡의 진실이 조금씩 드러나고 있다.
6.25 한국전쟁이 발발한지 한달 만인 1950년 7월 25일. 충북 영동군 노근리에
는 미군의 ‘피난시켜 주겠다’는 말만 믿고 모여든 인근 마을 주곡리와 임계리
주민 700여 명이 힘겨운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전쟁통에 젊은 남자들은 전장
에 나갔거나 미리 피하고 대부분 아이들과 부녀자, 노인들이었다.
26일 새벽. 미군은 갑자기 길을 막고 주민들을 철교 위로 올라가게 했다. 당
시 상공에는 정찰기 한대가 맴돌고 있었다. 한시간 뒤 무스탕 전투기 2∼3대가
나타났다. 순간 폭음과 함께 전투기의 기총소사가 시작됐다. 수많은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고 쓰러졌다. 주변을 막고 있던 미군은 어느새 사라진 뒤였다. 사람
들은 철교 아래 굴다리 밑으로 뛰어 들었다. 전투기의 기총소사가 끝나자 이제
는 주변 산기슭에 있던 미군들이 굴다리 양쪽으로 기관총을 쏘아대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쌓이는 시체 밑으로 파고들었다. 그렇게 아수라장은 30분 가량이나 계
속되었다. 결국 그 자리에서 사망한 사람만 400여 명. 살아남은 사람도 부모를
잃고 자식을 잃은 채 허리에, 허벅지에, 눈에, 온 몸에 총알이 박혀 사경을 헤
매야 했다. 이들을 더욱 고통스럽게 한 건 평생 마음놓고 진실을 밝히고 억울함
을 호소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미군에 의해 학살당했다고 하면 빨갱이로 내몰
리며 갖은 협박과 탄압을 받아야 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50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리고 지난 9월 29일 AP통신은 당시 ‘전투지역의 모든 민간인은 적으로 규정
하라’는 것과 ‘난민들이 남쪽 경계를 넘지 못하게 하고 넘어오면 발포하라’는
미군의 명령서와 학살에 참여한 미군병사들의 증언을 담아 노근리 학살사건을
보도하였다. AP통신은 또 노근리 학살 이외에도 50년 7월과 8월 두 차례에 걸쳐
또 다른 양민학살이 있었다고 폭로했다.
AP통신 보도를 계기로 노근리 학살이 대대적으로 언론에 보도되자 전국 각지
에서 당시 미군에 의해 자행된 양민학살이 속속 고발되고 있다. 그 동안 숨죽이
며 통곡을 해온 진실들이 조금이나마 제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호들갑 떠는 미국, 눈치보고 쭈뼛대는 한국정부
노근리 학살은 국내 언론에서도 몇 차례 보도된 바 있는 사실이다. 이미 1950
년 8월 10일자 <조선인민보>에 ‘폭격과 기총소사의 대상으로 평화주민 400명을
학살―미국놈들 황간에서도 또 만행’이라는 제목의 르포기사가 실렸고, 다섯 살
난 아들과 두 살배기 딸을 잃은 정은용 씨(79, 현 대책위원장)는 1960년부터 미
국정부에 진상규명을 촉구해 왔으며 94년 봄에는 <그대, 우리의 아픔을 아는가
>(도서출판 다리)라는 책을 내기도 했다. 그 이후 94년에 <한겨레신문>(5월 4일
자 지방면)에 보도되고, 특히 <말>지는 94년 7월 호, 9월 호와 99년 6월 호에서
미군 작전일지 등을 공개하면서 이 사건을 지속적으로 다루었다. 그밖에 영어방
송 아리랑 TV(97년 6월 25일)와 문화방송의 <시사매거진 2580>(98년 7월28일)이
이 사건을 조명했다. 시민단체 쪽에서도 주한미군범죄근절운동본부와 한국기독
교교회협의회 등에서 이 사건의 진상규명에 지속적인 노력을 기울여왔다.(<한겨
레> 1999, 10월 5일자. 오연호)
이러하기에 AP통신의 보도가 있은 후 미국의 첫 반응이 “노근리 보도는 새로
운 사실이 아니다”였다는 것은 신은 이전에 밝혀진 사실에다 미군병사들의 증언과 미군 명령서를 증거로 제시
했다. 그러자 다음날 백악관의 샌디 버거 국가안보보좌관은 “매우 당혹스럽다”
고 말했고, 클린턴 대통령은 미 행정부 차원의 진상조사가 이뤄져야 한다며 전
향적인 자세로 돌아섰다. “새로운 사실이 아니고”, AP통신 기자가 취재를 하고
다닌 사실을 적어도 몇 달 전부터 알고 있었음에도 말이다.
미국 언론들은 연일 노근리 학살에 대해 보도하고 있고, 미국의 군사전문가라
는 사람들도 빠지지 않고 한 마디씩 거들고 있다. 당시 “매우 혼란스러웠으며”,
미군들이 “훈련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장비도 제대로 갖추지 못했다”(칼데라 육
군장관), “제대로 훈련받지 못한 젊은이들 손에 총을 쥐어준 뒤 이들을 낯선 땅
에 보내면 나쁜 일은 일어나기 마련”(스티븐 엠브로스 군사 역사학자), “장교는
부대에 불리한 사건에 대해 가끔 상부에 보고하지 않는다”(전 최고 군검찰관 하
워드 레비), “지금은 법률 부문이 확대되고 군대내 법률 적용이 강화돼 미군병
사의 군법위반이 상대적으로 적다”(조셉 켈리 국제법 교수) 등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당시 노근리에서 미군 병사들은 분명 상부로부터 “모두 없애버려”라는
명령을 받고 기관총 발사를 하였다. 개인의 우발적인 범죄가 아닌 것이다. 분명
피난민을 적으로 간주하라는 명령서가 밝혀졌으며, 사살하라는 명령이 있었다.
즉 한국전쟁 당시 미군은 ‘피난민을 적으로 규정’한 상태에서 공공연하게 전국
곳곳에서 학살을 자행했던 것이다. 이러한 자명한 사실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마
치 사실을 인정하는 듯 하면서도 병사들 개개인의 문제로 본질을 흐리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 미국 정부는 ‘철저한 진상규명’ 의지를 표명하면서도 한-미
공동조사단 구성을 거부하고 있으며, 피해보상에 대해서는 암시하면서도 관련자
처벌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고 있다.
그러면 ‘노근리 학살’ 사건 보도 후 한국 정부의 태도는 어떠했는가? 한국정
부 관계자는 “당시 전쟁상태에서 양민과 인민군의 구별이 어려운 특수한 상황에
서 벌어진 사건일 가능성이 높다”, “우선 사실관계를 철저히 따져본 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다할 것”이라며 “이번 일이 한·미 관계에 악영향을 주지 않기
를 바란다”고 말했다. 도대체 어느 나라 정부인가?
미국을 옹호하기에 급급한 채 분명한 양민학살조차 ‘특수한 상황’ 운운하고,
미국에 항의하기보다는 ‘한미관계’에 영향을 미칠까 전전긍긍하는 모습이라니.
바로 이러하니 이제까지 철저히 학살을 은폐하고 이를 밝히려는 사람들을 잡아
가두다가 결국에는 미국 언론에 의해 보도된 내용에 미국 정부가 어떻게 반응하
느냐에 따라 방향을 결정하고 있는 것이다.
노근리 만이 아니다.
노근리 학살이 언론에 계속 보도되자 숨죽이며 멍든 가슴을 안고 살아왔던 학
살의 피해자들이 전국 각지에서 미군의 학살을 고발하고 있다. 이는 학살 당시
생존자에 의해 주로 제보되고 있으므로 아직도 밝혀지지 않은 사실은 더욱 많을
것으로 보여진다.
최근 제보된 사건은 다음과 같다.
경북 구미시 형곡동에서는 50년 8월 16일 미군 폭격기 7대가 무차별 폭격
해 주민 1백여 명이 사망 또는 부상 등의 피해를 입었다.
경남 의령군에서는 지난 50년 8월 22일 오후 7시께 미군 정찰기가 마을을
선회하더니 전투기 4-5대가 뒤이어 나타나 총격을 퍼부어 30여 명이 그 자
리에서 숨지고 온 마을이 불에 탔다. 당시 마을에 인민군은 한 명도 없었
경남 함안군 군북면 장지마을 주민들도 50년 8월 20일 미군전투기의 폭격
에 의해 마을주민 100여 명이 숨지거나 다쳤다고 증언했다. 주민들은 “흰
색 천을 흔들며 민간인임을 알렸는데도 폭격이 계속됐다”
전북 익산에서는 50년 7월11일 미군 폭격기 1대가 익산역(당시 이리역)사
무소 부근에 폭탄 2발을 투하해 당시 철도국 직원과 승객 등 1백여 명이
숨졌다.
경북 예천지역에서도 순흥 안씨 집성촌인 보문면 산성리 주민들은 지난 51
뒤 잠시 후 미군 전투기 6대가 날아와 폭탄을 대량 투하하고 기름까지 뿌
려 마을이 순식간에 불바다로 변했다. 이로 인해 이 마을 1백30여 가구 가
운데 80여 가구가 불에 타 전소되면서 노인, 부녀자, 어린이 등 양민 50여
명이 숨지고 90여 명이 부상을 입었다.
마산시 진전면 곡안리 주민들은 전쟁당시인 50년 8월11일 마을 뒤편 성주
이(李)씨 재실(齋室)에 피난해 있던 주민들을 향해 미군이 기관총 등을 쏴
83명이 숨졌다고 주장했다.
충북 단양군 영춘면 상2리 주민들은 1.4후퇴 직후인 51년 1월20일 오전 미
군 비행기 4∼5대가 저공으로 날아와 주민들이 피난해 있던 마을 인근 굴
에 폭탄을 대량 투하하고 기총소사해 3백여 명이 숨졌다고 밝혔다.
경남 창녕군 창녕읍 여초리 초막마을 주민들은 5일 “지난 50년 8월 초 북
한군과 미군의 교전이 벌어지던 중 미군이 당시 이 마을에 피난해 있던 주
민 1백여 명에게 총격을 가해 최소 80여 명이 숨졌으며 마을 가옥 40여 채
가 불탔다”고 말했다.
북한지역에서 미군이 자행한 학살도 최근 새롭게 보도되었다. 같은 아군지역
인 남쪽에서도 그러한데 적군으로 대치했던 북한지역에서는 오죽했겠는가?
연합통신에서 보도된 바에 따르면 북한은 미군의 양민학살의 대표적 사례로
황해남도 신천군 양민학살사건을 들고 있다. 북측이 제시한 자료에 따르면
북한군이 유엔군에 밀려 퇴각하던 시기인 50년 10월 17일 미군이 신천 지역을
점령했고 이들은 50여 일 동안에 당시 신천군 인구의 4분의 1에 해당하는 3만5
천383명의 무고한 주민을 학살했다. 또 황해남도 은률군에서 1만3천여 명,
평안북도 정주군 창도에서 580명의 섬 주민 전체를 학살했으며, 평양에서
도 1만5천 명, 황해남도 안악군에서 1만9천72명 등이 학살되었다. 그리고 그
학살의 잔인무도함은 차마 지면에 옮길 수 없을 정도로 처참한 것이었다.
한국전쟁이 끝난 후 50년 가까이 흘렀지만 남북이 분단되어 대치하고 있고,
남쪽에 여전히 수만 명의 미군이 주둔하고 있는 상황에서 미군의 양민학살에 대
한 진실은 철저히 은폐되어 왔다. 3만여 명의 도민이 학살된 제주 4.3항쟁의 경
우에도 미군의 개입 사실을 보여주는 문건들이 미국은 이를 외면하고 있다.
이번 노근리 학살 보도를 계기로 한국전쟁을 전후하여 미군에 의해 자행된 양
민학살의 진실이 일부나마 밝혀지고 있다는 것은 뒤늦게나마 다행이 아닐 수 없
다. 노근리 사건은 그야말로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 미국은 그 많은 양민학살
의 진실을 묻어둔 채 노근리 사건에 대해서만 상징적으로 해결하면서 마치 과거
의 잘못을 모두 청산한 것처럼 호도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반세기 동안 깊은
상처를 안고 숨죽여 흐느껴온 수많은 양민학살의 피해자들과 그 유족들의 가슴
에 또 한 번 못을 박는 범죄행위가 될 것이다. 세계의 양심은 자신이 저지른 양
민학살들을 적당히 덮어둔 채 21세기 세계 인권의 수호자로 행세하는 미국의 기
만성을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미국은 이번 기회에 한국전쟁을 전후하여 자행된
모든 양민학살의 전모를 낱낱이 밝혀 책임자를 처벌하고 사죄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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