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의 미라이 학살
「네이션(The Nation)」10/25 브루스 커밍스
억압된 기억은 역사의 탄약고이며, 한 명이라도 이 기억이 동시대의 자기만족에 구멍을 내리라고 기대할 때 무대로 복귀한다. 미국인들은 1950년 7월 말 노근리 근교 한 다리 아래서 미군들의 자동소총에 살해당한 수백 명의 민간인들의 운명을 충격으로 받아들였다. 이 학살에 관한 연합통신(AP)의 심도깊은 보도는 주요 신문의 헤드라인을 장식했으며 [워싱턴 포스트] 같은 경우 이 중 일부를 커버스토리로 다루기도 하였다. [워싱턴 포스트]는 이 학살을 한국전쟁 초기의 혼란스러운 국면에서 미지의 적에 직면한, 충분한 훈련을 받지 못한 군인들이 낳을 수밖에 없었던 불행한 결과라고 간단히 치부하였다. 그러나 이는 고립된 우발적 사건이 아니었다. 노근리 학살로 인해 미국인들은 이 “잊혀진 전쟁”의 실제 모습을 이해할 수 있다. 한국전쟁은 1950년 6월보다 오래 전에 그 기원을 두는 내전이자 비정규전이었으며, 역사적 진실에 관한 워싱턴과 서울의 공식적 문서고는 반세기 동안 이 전쟁의 기본적 성격에 관해 거짓말로 일관해왔다.
노근리는 영동군 소재지로부터 길을 따라 2, 3마일 떨어진 외딴 산간 지역에 위치하고 있으며, 1945년 8월 한반도에서 일본 제국주의가 붕괴한 직후 자생적인 좌익이 등장한 곳이었다. (당시 한반도 어디에나 존재하고 있던) 군 인민위원회가 일본으로부터 권력을 되찾았지만 그해 가을 미군의 대민사업단들이 자신들로부터 정치권력을 탈취하는 것을 바라볼수밖에 없었다. 대민사업단들은 가증스러운 식민경찰에 몸담았던 인사들을 재빨리 다시 채용했으며, 이들은 이후 3년 간 38선 이남을 통치한 미군정 수립의 일부가 되었다. 2년 간의 정치적 혼란 이후, “한국전쟁”이 발발하기 훨씬 전에 영동군 내외에서 게릴라가 등장하였다. 1947년부터 50년까지 영동에서 구세군병원을 운영한 미국인 의사 클레슨 리차즈에 따르면, “항상 우리 주위에서 게릴라 전투가 벌어졌다. 우리 병원에서도 수많은 빨갱이들이 치료를 받았다.” 경찰은 “이들을 예의주시했고”, 그가 한 기자에게 태연하게 말한 바에 따르면, “그들을 고문하고 정보를 모두 빼낸 후에는 끌어내 총살시켜 버렸다. 총살대는 병원 가까이에 있었다. 우리는 게릴라가 총살당하는 소리를 듣곤 했다.”
미군이 전쟁에 개입한 직후, 제24보병사단은 대전(大田)에서 “엄청난” 패배를 당했다. 전쟁사가(戰爭史家)인 클레이 블레어의 표현을 빌면, 이는 “미 육군 역사에서 가장 커다란 시련”이었다. 후퇴하던 미군은 대전에서 남부지방으로 밀려내려가다가 영동에 이르렀다. 북한측 자료에 따르면 영동은 지역 게릴라들에 의해 “해방”된 상태였으며, 이는 영동 내외의 300여 명의 게릴라가 후퇴하는 미군을 쉴새없이 공격했다고 보도한 [뉴욕타임즈] 월터 설리번 기자의 견해로 뒷받침되는 사실이다. 설리번에 의하면, “미군은 이제 도시나 농촌 지역의 모든 민간인들에 대해 의심의 눈초리를 던지고 있”었다. 한 북한군 병사은 7월 26일자 자신의 일기에 미군 폭격기가 영동 지역을 급습하여 “이 지역을 불바다로 만들어버렸다”고 기록했다.
한국전쟁의 인민적, 게릴라적 요소는 집단적 기억으로부터 사라졌으며, 마치 미라이 학살같은 사건이 벌어진 군사적 개입은 베트남에서만 이루어진 듯이 기억되었다. 그러나 1950년에만 해도 미국인의 분노를 자극한 “흰 옷”의 인민들은 이발소 탁자에서도 볼 수 있었다. 국방성이 찾을 수 없었던 사실들은 [라이프]의 존 오스본같은 이들에 의해 보도되었다. 1950년 8월 21일자를 읽은 독자들에게 그는, 미군 장교들이 사병들에게 한 무리의 민간인에 총격을 가하라고 명령했다고 전하였다. 한 군인은 오스본에게 “우린 심지어 어린아이들을 사살하기도 했습니다”라고 말했다. 오스본이 보기에는 이는 새로운 형태의 전쟁이었으며, “적이 암약할 가능성이 있는 촌락을 몰살시키고 북한인이 포함되어 있을 수 있는 피난민들에게 폭격을 가하였다”. 24사단 사단장인 존 처치 장군은 2차대전 당시에 유럽에서 진행된 전투들과 다르다고 말하였다. “이 전쟁은 완전히 다른 종류의 전쟁이다. 이는 진정한 게릴라 전쟁이며…본질적으로 험준한 지역에서 전개되는 게릴라 전투이다”.
미국의 공식적인 자료들은 이 3년 간의 전쟁에서 어떠한 민간인 학살도 발생하지 않았다고 계속해서 주장해왔다. 영동군 사건에 관한 미국측 관료들의 틀에 박힌 부인에는 모든 잔학행위의 책임을 북한측에 떠넘기는 것과 더불어 이후 수년 간에 걸친 두 정부 사이의 논란이 뒤따랐다. 지난 2년 간만 해도 국방성의 주장은 줄곧 “학살을 실질적으로 입증하는 증거를 찾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국방성은 양민학살 혐의를 받고 있는 제1기갑사단은 당시 그 곳에 있지도 않았다고 주장하곤 하였다. 그러나 필자가, 7월 22일 “제1기갑사단은 영동에서 산산히 분쇄된 24사단을 구조하였다”다는, 공개 문서에 근거하여 서술된 {잊혀진 전쟁}의 클레이 블레어의 진술을 찾아내는 데는 5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클린턴 대통령의 압력 하에 결국 국방성이 한국전쟁의 진정한 역사를 공개하기로 결정할 경우, 나는 두세 가지 출발점을 지적할 수 있겠다. 7월 20일 도착한 북한군 파견대에 진술을 한 10명의 증인에 따르면, 미군은 노근리 학살사건 1주일 전 2천여 명의 민간인을 영동 근교 산악지대로 몰아넣고 주로 공습을 통해 학살했으며, 이 보고에 의하면 몇몇 여성은 총격을 당하기 전에 강간당하였다. 두 달 뒤 클라크 러프너 소장에게 전달된 정보국 내부 비망록은 “게릴라 지도자들에 대한 ‘궐석’ 재판을 통해 남한 정부가 내린 사형선고를 집행하기 위해 암살대”를 조직해서 전국적으로 퍼져있는 게릴라들을 처리하라고 건의하고 있다.
남아공의 진실화해위원회(TRC)는 “진실”이라는 곤란한 용어를 네 가지 방식으로 규정한 바 있다. 사실적 혹은 법리적 진실, 개인적 혹은 발화적 진실, 사회적 혹은 “대화적” 진실, 치유적 혹은 복원적 진실이 그것이다. 노근리 학살사건이 드러남으로써 그 모든 역경에도 불구하고 몇십년 간 자신들의 사건을 호소해온 용기있는 생존자들에게 진실의 이 모든 의미가 되찾아졌다. 미군이 “소년들이 파리를 갖고 놀 듯이 우리의 목숨을 가지고 놀았다”고 증언한 당시 12세 소녀였던 전춘자씨 같은 사람이 바로 그들이다. 미국인들에게 있어 법리적 진실은 지난 반세기 동안 저질러진 모든 거짓을 입증했지만, 다른 한편으로 (위원회의 말을 빌리자면) “공적 담론에서 무난히 유포될 수 있는 거짓말의 수를 줄이기”도 하였다. 생존자들의 개인적 진실을 받아들이고 이를 복원적 진실로 전환시키는 일은 이제 다른이들의 몫이다. 딘 러스크[당시 미국무장관]가 1945년 8월 최초로 38선을 그은 이래 한반도의 두 나라 모두 부정해온 화해를 마침내 이룰 수 있는, “잊혀진 전쟁”을 위한 위령곡을 연주하는 일 말이다.
<브루스 커밍스(Bruce Cumings) – 시카고대학 교수. 최근 저서로는 『관점들의 시차: 세기말 미국-동아시아 관계에 관한 이성적 이해(Parallax Visions: Making Sense of American-East Asian Relations at the End of the Century, Duke)}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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