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2일 서울 영등포 산업선교회. “이제는 더이상 노조위원장도, 아니 조합원도 아닙니다.” 현대중기산업 박복찬(40) 전 노조위원장의 말이 계속되는 동안 숙연했던 장내에선 조금씩 비탄이 흘렀다. 50대의 건설 노동자 110명과 가족, 노동단체 관계자 등 250여명의 얼굴은 `눈물’과 `분노’로 얼룩졌다.
고용승계를 요구하며 싸워온 450일간의 기나긴 투쟁, 그러나 회사의 막무가내식 버티기에 밀려 `패배’를 확인하는 자리였기에 더욱 그랬다. 지난해 7월 고용승계를 요구하며 시작된 농성은 이날까지 장장 450일간이나 이어졌다. 한국노동운동사에 기록될 투쟁이었다.
이들의 해단식 서막은 현대건설에서 분사한 현대중기산업이 지난해 6월 구제금융 한파로 퇴출기업으로 선정되면서였다. 이때부터 이들은 고단한 가시밭길을 걷지 않으면 안되었다.
박 위원장은 “현대건설에 입사해 해외 건설현장을 누볐던 조합원들을 현대건설로 고용계승해 달라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요구였다”며 “하루아침에 길거리로 쫓겨난 노동자들은 일자리를 되찾기 위한 싸움을 시작했다”고 회고했다.
천안 공장에서 올라와 근거지도 없는 서울에서 `떠돌이 생활’을 하며 이들은 쉼도 없이 외쳤다. 한강시민공원은 물론 서울 종로구 계동 현대 본사, 조계사, 영등포산업선교회 등 가보지 않은 곳이 없었다. 지난 6월에는 집회 중 일어난 폭행사태에 대한 현대쪽의 사과를 받기 위해 계동 현대 본사 앞에서 19일 동안 천막도 없이 길바닥에서 밤샘 노숙농성을 벌이기도 했다.
대부분이 50대인 조합원들은 계속된 노숙생활에 건강을 잃고 쓰러지기도 했다. 지난 1월 조합원 육경원(56)씨가 위암으로 유명을 달리했고, 김병학(57)씨는 식도암으로 서울대병원에 입원해 있으나 병원쪽은 “힘들겠다”는 말을 하고 있다.
농성 해단식에 참석했던 조합원 김주연(48)씨는 “동료들은 취업전선에 복귀하고 있으나 평생 마음의 짐을 지고 살 수는 없었다”고 말했다.
농성이 계속되고 현대건설쪽의 완강한 태도가 이어지자 조합원들의 생계문제도 심각했다. 지난달 21일 건설연맹의 중재로 조합은 위로금 1200만원씩을 받고 고소고발을 취하한다는 조건으로 현대건설과 합의했다. 고용승계는 물거품이 됐으며, 97년 명퇴 위로금이 2500만원이었음에 비해 위로금 또한 크지 않았다.
“예전에 나이든 부모를 고려장 시켰다고 하는데 지금도 기업 고려장 있는 줄 몰랐다. 길거리에서 신문지 깔고 자던 남편은 이제 다시 일자리를 알아봐야 한다. 피폐해진 감정을 추슬러 다시 건강하게 만나자.” 이날 노조 해단식에서 조합원 김주연씨의 부인 김효연(44)씨가 남편한테 보낸 편지다.
이제는 각자 흩어져 공사 현장에서 다시금 일자리를 찾아야 하는 이들은 이날 `450동지회’를 만들며 다시 만날 것을 약속했다.
박 위원장과 조합원들은 “기나긴 싸움 속에서 깊은 이해와 정을 나눈 조합원들이 있기에 더 이상 두려움은 없다”고 다함께 힘주어 말했다.
안창현 기자blue@hani.co.kr
이 기사가 마음에 들었다면, 좋아요를 눌러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