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네시아의 ‘새로운’ 대통령

「주간녹색좌파」 10/27 맥스 레인

10월 20일, 이슬람 조직 나흐들라툴 울라마의 의장 압두라흐만 와히드가 인도네시아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인도네시아 민주투쟁당 당수 메가와티 수카르노푸트리는 패배하였다. 와히드는 메가와티를 60표차로 꺾었다(국민협의회 의원 수는 700명이다).

다음 날 메가와티는 부통령으로 선출되었으나, 700표 중 322표만을 얻었을 뿐이다. 이슬람 연합개발당의 의장이자 나흐들라툴 울라마 소속인 함자 하즈는 180표를 얻었다. 거의 200명이나 되는 의원들이 기권하였다.

10월 19일, 하비비 전 대통령은 33표라는 근소한 차이로 정책소명 연설을 거부당했다. 이 패배 후 하비비는 대통령 입후보를 철회하였다.

하비비의 연설에 대한 거부는 국민협의회 개원 이래 처음 있는 충격적인 일이다. 발언자를 둘러싼 국민협의회와 의회 투표에서, 국민협의회는 두 블록으로 나뉘어졌다.

두 개의 블록

한 블록은 정치적 조직이 수하르토 독재 기구와 근사하다. 이들은 하비비의 골카르당과 군 일부, 중추 정당들(Central Axis parties)로 구성된다.

중추 정당들로는 수하르토 정권이 세우고 키운 연합개발당, 전직 수하르토 연설 집필가가 이끄는 별과 초승달의 당(Star and Crescent Party), 아미엔 라이스의 국민수권당과 정의당으로 이루어진 개혁연합으로 이루어진다.

이 블록에 속하는 정당들 중, 국민수권당과 정의당은 수하르토 집권기에는 가장 약소했다. 둘 다 수하르토와 수하르토의 시대에 영합하는 사람들을 비판했다(특히 1997년 이전에).

다른 하나의 블록은 메가와티의 민주투쟁당, 군소 민족주의 정당, 민족각성당이다. 민족각성당은 1998년 나흐들라툴 울라마에서 빠져나왔다.

민주투쟁당은 국민협의회에서 153석을 보유하고 있는 이 블록의 주요 구성 인자이다(53석을 보유하고 있는 민족각성당과 비교해 보았을 때). 민주투쟁당은 1990년 어용 인도네시아 민주당 내부에서 수하르토 독재와 선을 긋는 대안적 지도세력으로서 등장하였다. 민주투쟁당은 수하르토 독재 정권이 메가와티 수카르노푸트리를 인도네시아 민주당 당수로 인정하기를 거부한 1996년 7월, 분리된 실체가 되었다.

메가와티는 독재 정권 하에서 소외된 존재였다. 민주투쟁당은 소외받은 사회 각처(소상인, 지방상인, 불만에 가득찬 지식인, 도시 빈민의 일군)에서 지지를 획득했다.

하비비의 패배

골카르당-군부-주요 정당 블록은 약 100에서 26표 정도의 차이로 국민협의회의 모든 선거에서 승리해 왔다. 유일한 패배는 하비비의 국정보고 연설 거부 투표였다.

이 패배는 골카르당의 의장 악바르 탄중이 골카르당 국민협의회 의원들은 양심적으로 투표할 것이라고 말한 직후 이루어진 것이었다. 70명 정도의 골카르당 국민협의회 의원들이 하비비 반대표를 던진 것으로 보인다.

탄중의 그러한 발언은 하비비의 동티모르 정책을 강하게 비판한 이후의 일이다. 또한 그 이전에 학생과 사무직 노동자들은 반(反)하비비 가두투쟁을 벌였고, 주요 신문과 여론이 하비비 재선 반대에 거의 만장일치된 모습을 보였다.

하비비는 자신이 수하르토 독재를 끝낸 인물로 묘사될 수 있도록 애썼고, 의회에서의 비판과 차기 대통령 직선제 요구에 대해 답변하려 했다. 수하르토는 이런 행동을 한 적이 없었다. 그러나 주요 언론들, 10월 17∼19일에 절정에 오른 학생과 여론의 하비비 입후보 거부는 골카르당에서의 하비비 지지기반을 무너뜨렸다. 수하르토 시대와 긴밀하게 연계된 입후보자는 존재할 수 없었다.

하비비의 패배는 골카르당-군부-중추 정당으로 이뤄진 수하르토 블록이 다른 입후보자를 필요로 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국민수권당과 정의당은 이미 압두라흐만 와히드를 지명하고 있었다. 와히드 자신은 수하르토 블록의 정책 대부분을 지지하고 있었다.

수하르토 블록에겐 메가와티와 접전을 벌일 만한 권위 있는 다른 입후보자가 없음이 곧 분명해졌다. 그들은 와히드를 지지해야만 했다.

골카르당은 악바르 탄중을 지명했으나, 이후에 취소했다. 와히드는 건강이 나쁘고, 시력을 거의 잃었기 때문에 입후보하리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와히드 득표의 핵심은 수하르토 블록이었다. 와히드는 비이슬람 골카르당의 표를 좀 잃었지만, 메가와티가 아닌 와히드로 제휴 상대를 바꾼 민족각성당(와히드는 민족각성당을 배출한 조직의 의장이다)의 표를 얻었다.

다를 바가 없는 정책

골카르당은 탄중을 지명하고, 군부가 위란토 장군을 지명했으나 둘 다 취소되었고, 메가와티가 부통령에 당선되었다.

최종 결과는 와히드-메가와티 이두정치, 의회 의장 악바르 탄중, 국민협의회 의장 아미엔 라이스이다. 이 결과는 수하르토 블록과 민주투쟁당, 민주투쟁당의 연합 세력들이 내부적으로 권력 나눠먹기를 했다는 것을 드러내 준다.

10월 21일 와히드 대통령은 새 내각에 대해 논의하기 위한 비공식 회의를 주재했다. 메가와티, 함자 하즈, 악바르 탄중, 위란토가 수하르토 시대와 수하르토 이후 시대 엘리트들을 통합할 수 있는 모든 정당들의 내각(all party-cabinet)을 가능하게 할 수 있는 존재로 지목받고 있다.

그런 내각은 1965년 수하르토의 신질서로 회귀하는 것이다. 공산당과 좌익을 살해하고 탄압하는 정치 정당과 군부가 골카르당, 나흐들라툴 울라마, 이슬람 학생 연합(연합개발당, 국민수권당, 정의당 당수를 배출하였다), 인도네시아 민족주의당의 우익(현재 민주투쟁당 내에 존재한다)과 군부로 전화하였다. 골카르당과 군부는 이들의 연합을 압도적으로 지배해 왔다. 군부가 현재의 연합을 지배할 것인가는 아직 분명하지 않다.

국민협의회는 회기 중에 정책을 둘러싼 분쟁은 거의 없다는 게 특징이다. 민주투쟁당이 동티모르 분리안 비준을 지연시킬 것을 제안하려고 하기는 했으나 하지 않았다. 만약 실제로 제안을 했다면, 공직사회 전반이 분열되었을 것이며, 구질서와 권력을 원하는 배제된 엘리트들 사이에 분쟁이 일어났을 것이다.

압두라흐만 와히드

와히드가 1980년대 중반 연합개발당에서 나흐들라툴 울라마를 만들었을 때, 수하르토 정권 하의 연합개발당은 나흐들라툴 울라마를 멀리했다. 약 10년 동안 와히드는 자유 민주주의자로서의 이미지, 서구 학계, NGO들과의 연계를 발전시킨다는 이미지를 키웠다.

1990년 와히드는 민주주의 포럼(지금은 사멸한 보수적 사회민주주의적 기구인 인도네시아 사회주의당과 느슨하게 연계된 지식인들의 느슨한 대화의 장)의 의장 자리를 수임했다. 민주주의 포럼은 무기력하고 영향력이 없었다.

동시에 와히드는 장군 개개인과의 친밀한 관계를 발전시켰다.

와히드는 자유주의적, 개방적 이슬람을 지지하는 자세를 발전시켰다. 와히드는 일상 언어와 기념 행사의 비이슬람화를 지지했다.

그러나 나흐들라툴 울라마는 중세 종교적 실천, 회교 신학의 지루한 학습과 복종의 요새였으며, 원초적 형태의 미신이 지배했다. 와히드 자신은 국민협의회 개회 중반에 할아버지의 무덤을 찾아뵐 필요를 느꼈다. 그의 할아버지는 나흐들라툴 울라마의 설립자이다.

자유주의자로서의 와히드의 명성은 반독재 투쟁이 전투적으로 되기 시작한 1996년 중반 (특히 민주주의 운동가들 사이에서) 추락하기 시작했다. 와히드는 메가와티가 인도네시아 민주당 당수에서 해임된 후 민주투쟁당에게 수하르토와 대결하려 하지 말라고 했다. 그는 1996년 7월 독재체제의 야만적 공격으로부터 당사를 지켜내던 민주당 활동가들을 전투적으로 고무하려했다는 이유로 민중민주당 활동가들을 공격하였다.

반수하르토 감정이 1997년 5월 선거 전에 힘을 받자, 와히드는 골카르당을 위해 캠페인을 벌였다. 와히드는 인도네시아에서 가장 부패한 정치꾼이자 수하르토의 딸 투툿의 개인적 변호자가 되었다.

1998년 5월 학생들이 수하르토를 퇴진시키려고 했을 때, 와히드는 대통령궁에서 수하르토 곁에 있었다. 와히드는 개혁 수행 능력을 보유한 자로서의 자신을 판매하려고 노력하는 독재자였다.

반독재 운동이 고조되었을 때, 와히드는 대부분 시간을 구질서에 정통성을 부여하는 데 보냈다. ‘인민의 힘’에 대한 두려움이 와히드의 그런 행동의 원천이 된다는 것이 점점 분명해졌다. 와히드는 수하르토 이후 시대(정치에서 대중을 떼어놓을 정치 질서를 위협하지 않는 시대)로의 부드러운 이행을 추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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