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9년 11월19일. 언론은 연세대학교에서 여성 총학생회장이 당선되었다는 소식을 일제히 보도했다. 4년제 남녀공학 대학에서 최초라고 한다. 이 소식에 기뻐해야 할지, 아니면 슬퍼해야 할지 모르겠다. 다른 나라에서는 여성 총리와 여성 대통령이 나온지가 언제인데, 이 나라에서는 이제야 이 정도인가 하고 생각하니 한숨마저 나온다. 한숨이 나오는 것은 단지 그 이유 때문만은 아니다. 남녀공학에서 여자가 대표로 인정받는다는 것은 확실히 쉬운 일이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몇몇 교수들은 여학생이 많아지면서 학교 수준이 떨어졌다는 발언도 서슴지 않는가 하면 그나마 진보적이라고 여겨지는 학생운동권 안에서조차 때때로 여성활동가에 대해 탐탁하지 않은 견해를 피력하곤 하는 상황이다. 언론의 태도 역시 사뭇 의심스럽다. 심지어 한 일간지에서는 옷로비 사건과 여성 총학생회장을 연결시켜 `세상말세’라는 투로 사설을 달아놓기도 하고, 어떤 신문에서는 같이 활동하는 다른 남학생을 인터뷰하며 자질을 묻는다.

여기까지만 봐도 벌써 여성 총학생회장이 앞으로 치러야 할 곤욕이 훤히 내다 보인다. 얼마나 말들이 많을 것인가. 힘들어서 얼굴이라도 찌뿌리면 신경질적이라는 소리를 들을 테고, 추진력 있게 일을 진행하다보면 지나치게 권력지향적이라는 비난을 받을 것이다. 단 한 차례도 삼각형 조직구조의 꼭대기에 여성이 있어본 적이 없는 상황에서, 처음으로 대표자가 된 여성에게는 그 자리에 걸맞는 권위나 책임, 혹은 존경이 함께 주어지기보다는 의심과 불편함을 극복하기 위한 엄청난 책임감만 앙상하게 남게 되기 쉽다.

내가 평소에 가장 무서워 하는 말 가운데 하나는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는 말이다. 이 말은 누구라도 그 자리에 올라가면 자리가 주는 역할이 그 사람을 훈련시킨다는 민주적인 의미일 수도 있지만, 다시 해석하면 꼭대기에 있는 사람에게 관습적으로 기대되는 역할이 있고, 그 관습은 그 사람의 개성보다 강력하게 강제력을 발휘한다는 의미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같은 관습과 문화를 생성하는 과정에 참여하지 않았던 사회적 소수자들이 대표의 자리에 앉았을 때 그 사람한테 기대되는 것은 기존의 사회적 다수파들이 만들어놓은 형상일 뿐이다.

나는 이번에 당선된 여성 총학생회장에게 사람들이 너무 많은 것을 기대하지 않기를 바란다. 다만 자기를 성역할에 끼워맞추려는 의심스러운 도끼눈의 강박에 질리지 말고, 첫 시도에 대해 영웅으로 만들려고 하는 속임수에 넘어가지 말고, 총학생회장이라는 자리의 권위에 짓눌리지도 말고, 자기가 여성이라는 사실도 잊지 말고, 책임에 가위눌리지 말고 책임을 분배하는 지혜로움을 발휘하길 바랄 뿐이다.

권김현영/나우누리 여성통신동호회 `미즈’ 운영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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