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9년 11월 29일 ∼ 1999년 12월 5일 : 제316호

기획 장애인을 위한 ‘문화, 문화시설’

장애인에게 문화는 “사람과 어우러지는 유일한 통로”

청각장애인, 자막없어 한국영화 못 봐

장애인 눈높이서 행사 펼쳐야

장애인들에게 문화행위는 어떤 의미를 가질까. 혹자는 장애인 앞에 산

적해 있는 교육, 인권 등의 문제도 숨가쁘다며 문화라는 건 배부른 이

들의 소일거리라 치부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외출조차 당장 어려운 장

애인들의 경우에 문화는 또다른 의미를 지닌다. 한 장애인이 온종일

방안에만 틀어박혀 있다고 상상해보자. 얼마나 무료하고 답답한 일인

가. 하지만 곁에 책과 음악이 있다면. 문화는 장애인들에겐 삭막한 환

경을 버틸 수 있는 유일한 ‘벗’으로 자리잡을 것이다.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평등한 관계는 문화누리기부터’. 지난 96년부

터 활동한 <그림상자>는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함께 문화를 공유하는

모임이다. 회장 정치우씨(31)는 “다른 사람들과 자연스럽게 만나고

어울릴 수 있는 기회를 주기 위한 것”이라고 <그림상자>가 모인 이

유를 설명한다. 장애인들에게 문화행위는 단순히 즐기는 차원이 아닌,

사람과 사람이 어울릴 수 있는 유일한 통로이기 때문이다.

현재 회원은 30명 정도. 이들은 한달에 한번씩 연극이나 뮤지컬, 극장

영화와 비디오 영화를 번갈아 가면서 보는 정기모임을 갖는다. 관람

후에 편의시설과 감상 등을 토론하고, 나아가 관계부서에 불편 사항을

전달하여 시정을 요구하는 것도 이들이 하는 일이다.

지체장애인 송정아(27)씨는 “장애인들을 위한다고 생각한 것이 오히

려 불편할 때가 많다”고 말한다. 지난번 예술의 전당에서 공연한 <

명성황후>를 보러갔을 때의 일이다. 송씨가 가진 관람표는 1층에서

볼 수 있는 자리가 아니었지만, 주최측은 휠체어를 탄 사람의 편의를

생각해 1층에서 볼 수 있도록 배려했다. 그러나 이들에게 배당된 관람

석은 다름아닌 통로. 사람들이 다니는 길을 막고 있다는 기분이 들어

공연내내 마음이 언짢았다는 송씨는 “통로라서 잘 보이지도 않았을

뿐만 아니라, 차라리 의자에 앉아서 봤다면 좋았을 것”이라며 불만을

토로한다. 그는 또 “장애인을 한쪽에 몰아넣고 따로 격리시키려는 발

상 자체가 문제”라고 지적한다. 아예 휠체어를 타고 볼 수 있는 전용

공간을 바라지만, 상황은 여의치 않다. 통로나 뒤쪽, 아니면 구석진 자

리가 이들에게 주어진 유일한 공간일 뿐이다.

특히, 청각장애인의 경우 소위 ‘뜨고 있는’ 한국영화를 보고 싶어도

볼 수가 없다. 국산영화엔 한글자막이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연유로

35만명에 이르는 청각장애인들은 외국영화로 발길을 돌릴 수 밖에 없

다. 영화계가 스크린쿼터 문제로 ‘우리영화 살리기’에 안간힘을 쓴

다지만, 청각장애인은 여전히 관객에서 예외인 셈이다. 심지어 지난 3

월 내한한 세계적인 타악기 연주자이며 청각장애인인 ‘이블린 글레

니’의 공연 때도 청각장애인들은 대부분 이방인이 되어야 했다. 수화

통역을 어디서도 찾아 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청각장애인 안영회씨

(33)는 “대부분의 공연이 비장애인의 관점에서 진행돼 소외당한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며 아쉬움을 털어놓는다.

이와 관련 보건복지부는 지난 98년 4월부터 ‘장애인·노인·임산부

등의 편의시설증진법’에 따라 공공시설에 대한 편의시설 실태를 조

사하여, 2000년 4월까지 편의시설을 갖추지 않은 곳에 대한 설치 의무

를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실태 조사표를 살펴보면 그 실효성은 의문

이다. ‘어떻게 설치했느냐’와 상관없이 ‘설치여부’에만 의미를 부

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법은 주요출입구 높이차인 턱을 3㎝로 규

정하고 있지만, 지체장애인들은 턱 3㎝ 역시 이동하기 어려운 기준치

라고 입을 모은다. 이미자씨(53)는 “공무원들이 장애체험을 한번만이

라도 했더라면 이런 법안은 나오지 않았을 것”이라며 “실제 지체장

애인들에게 알맞은 턱 기준치는 1㎝이하”라고 지적한다.

그는 지하철 역무원들이 “힘들텐데 뭐하러 돌아다니십니까”라고 할

때 가장 안타깝다는 말도 덧붙였다. 장애인에 대한 인식이 낮은 이유

는 서로에 대한 무관심에서 비롯된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렇듯 이동권이 보장되지 않은 상태에서 장애인 문화행위를 언급한

다는 건 공염불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제는 비장애인들에게 갖는 문

화행위 못지 않게 장애인들의 문화행위 역시 중요한 일임을, 그들의

눈높이에서 바라봐야 할 때다.

<김혜균 기자 nana@kng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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