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9년 11월 29일 ∼ 1999년 12월 5일 : 제316호
“삶의 알갱이를 시 속에 담고 싶습니다”
그의 시속엔 농촌과 실향민의 삶 서려있어
개인상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은 제9회 민족예술상 단체상에 기록영화제작소
‘보임’의 「낮은 목소리 1·2·3」, 개인상에 시인 이상국씨의 시집
「집은 아직 따뜻하다」를 최근 선정했다. 기록영화제작소 보임은 지
난 7년간 줄기차게 종군위안부 문제를 추적, 역사의 진실을 드러냈다
는 점, 이상국씨의 시집은 ‘강원도 속초’라는 지역의 특성을 바탕으
로 실향민들의 삶을 그려냈다는 점을 높이사 민족예술상을 수여했다
고 민예총은 선정 이유를 밝혔다. 올해 민족예술상을 수상한 이상국
시인의 시(詩) 세계와 내년 개봉을 앞둔 「낮은 목소리3, 숨결」에 담
긴 이야기를 소개한다.
너나할 것 없이 서울로 모여든 지금도 변방을 지키는 시인이 있다. 올
해 제1회 백석문학상과 제9회 민족예술상을 수상한 시인 이상국씨
(53)는 이제껏 고향땅을 떠나지 않은 강원도 토박이. 백석문학상과 민
족예술상은 입을 모아 강원도의 자연과 삶에 뿌리박고 민족의 정서와
분단현실을 노래하는 시인이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
“속초는 실향민들의 도시입니다. 원래 지명만 있고 사는 사람도 거의
없었는데 휴전과 함께 고향으로 돌아가려는 피난민들이 모여들며 생
긴 도시죠. 함경북도 사람들이 특히 많아 원산시민회니 북청시민회니
하는 간판을 지금도 흔히 볼 수 있습니다.” 그는 태어난 양양이 농촌
이고 살고있는 속초가 실향민들의 도시니 농촌과 분단문제에 관심이
가는 것은 당연하다며 과분한 칭찬이라는 눈치. 하지만 동해안에 흔하
디 흔한 오징어 말리는 풍경조차 쉽게 흘려보내지 않는 섬세한 눈을
시인이 아니면 또 누가 가졌을까.
“혹시 청호동에 가본 적이 있는지/ 집집마다 걸려 있는 오징어를 본
적이 있는지/ 오징어 배를 가르면/ 원산이나 청진의 아침햇살이/ 퍼들
쩍거리며 튀어오르는 걸 본 적이 있는지/…”
이상국씨가 고향인 양양을 떠나 속초에 자리잡은 지도 벌써 20여년.
20년째 아파트살이지만 그는 아직도 아파트에 정이 안간다. “여름이
면 더해요. 더워서 문을 열면 빼곡이 들어찬 자동차들만 보이고, 더워
도 옷을 갖춰 입지 않으면 문 밖으로 한 발짝도 못 나가죠.” 웃옷을
벗고 마당에 나가서도 손가락질 받을 일 없고 나무밑둥에 볼 일도 보
고, 손만 뻗으면 흙이며 나무가 잡히는 시골집에 살던 시절이 제일 편
했다고 회상한다.
국적 모를 장식물로 치장한 ‘모텔’ ‘가든’이 많이 들어섰지만, 그
가 사는 속초는 여전히 차로 10분만 내달리면 산·강·호수·바다를
볼 수 있는 곳. 그런 곳에 뿌리내리고 사는 이에게 서울은 어떤 곳일
까. “비행기를 타고 서울 상공에 닿으면 노르스름한 기분 나쁜 구름
이 도시를 덮고 있습니다. 사는 일에 쫓겨 서울사람들은 그런 것에 신
경도 못쓰겠지요.” 시인은 서울에 첫 발을 딛으면 매캐한 공기 때문
에 눈물이 난다며 고개를 절래절래 흔든다.
“모두들 다시 돌아오겠다고 합니다. 아이들 학교 마치면, 결혼시키면
돌아온다고. 그러다보면 늙고 기운 빠져서 결국 도시에 남게 되더라구
요.” 늦깍이 결혼으로 이제 첫아이가 11살 된 시인 자신도 ‘흙으로
돌아가는 길’은 요원하다. “아이들 출생지는 도립병원입니다. 병원
이 고향이죠. 아이들은 양양 형님댁에 가는 것도 달가워하지 않아요.
시골집에선 ‘썩는 내가 난다’나요.”
「내일로 가는 소」 「우리는 읍으로 간다」 등 이상국 시인의 시집
에는 해체되는 농촌의 현실에 대한 애정과 통한이 깊게 서려있다. 4번
째 시집인 「집은 아직 따뜻하다」는 전작에 비해 자연에 대한 관심
과 서정성에 무게가 실려있다. 시의 변화에 대해 이상국 시인은 “향
가나 고려가요 같은 고대의 시들이 지금처럼 문단이나 시잡지를 위해
서 나오지 않았을 것”이라며 “누구를 그리워하거나 삶의 애환이 담
긴 시들이 여태까지 남아있다”며 삶의 절실한 얘기들을 시에 담아내
겠다는 각오를 보인다.
“어찌보면 저도 이제 삶을 돌아볼 나이입니다. 돈 버는 일 외에 추구
해야 할 무엇도 보이지 않는 세상이니 공허감도 들어요. 삶에 알갱이
가 없다는 느낌이죠.”
시인은 얼마전에 ‘좋은 시 한편을 읽으니 세상이 넓어지는 것 같습
니다’라는 독자의 편지를 받고서 어떤 시를 써야할 지 새삼 느꼈다
고 한다. “한 편 읽고나면 정신이 번쩍 들고, 세상이 달라보이는 시,
거기에 도달하기 위해 힘써야죠.”
물론 이상국 시인의 시에 ‘자연’과 ‘서정’만 남은 것은 아니다.
그의 시 속에 있는 자연이 처연하게 아름다운 것은 분단이라는 역사
의 현실에 기반하고 있기 때문이다.
“추위 속에/ 잠들면 죽는다고/ 물결이 갈대들의 종아리를 친다/ 하늘
에도 검문소가 있는지/ 북으로 가는 청둥오리 수천마리/ 서로의 죽지
에 부리를 묻고 연좌하고 있다// 이미 죽은 주인을 기다리며/ 반세기
가까이 마주 보고 선/ 저 역사의 무허가 건물들/ 이승만과 김일성 별
장 사이 물빛은 화엄인데/ 새떼들만 가끔 힘찬 활주 끝에 떠오르며/
물 속의 산을 허문다” <이소영 기자 sylee@kng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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