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9년 11월 29일 ∼ 1999년 12월 5일 : 제316호
해외통신원 리포트
김정호
<뉴욕·재미 언론인>
최근 한인동포들의 대규모
반인종 차별집회는 이민사의 새이정표
평소 분열된 모습 극복하고
뉴저지 지역 시당국의
인종차별정책 강력대응
한국언론에서는 거의 보도되지 않았지만 지난 11월 23일은 한국인들
의 미국 이민사에 새로운 이정표가 세워진 날이다. 뉴욕에서 차로 30
분 밖에 떨어지지 않은 뉴저지주의 작은 도시 팰리세이즈 파크에서
약 1천5백명의 한국인들이 모여 인종차별에 항의하는 시위를 2시간
동안 벌인 것이다.
사건의 발단은 사소했다. 작지만 2백년의 역사를 지닌 이 도시 주민의
대부분은 이탈리아계 백인들이다. 그런데 한국인들이 약 10년 전부터
시청 앞을 중심으로 상권을 형성하기 시작했다. 흑인들이 거의 없는
백인중심의 이 도시에서 커뮤니티에 동화되기보다는 세력을 확장해가
는 한인들에 대한 반감이 주민들 사이에 묘한 공감대가 형성되었다.
반감으로 불충분했던지 시에서는 한인들에 대해 구체적인 제재조치를
모색했다. 주민들의 호응을 업고 시장은 모든 술집, 노래방, 식당들의
영업시간을 새벽 3시까지, 다른 소매업소들은 저녁 9시까지로 제한하
는 조례를 상정했다. 그 이유는 유흥업소 고객들이 새벽녘까지 술을
마시고 고성방가 등의 소란을 일으켜 주민들의 불편을 야기하고 각종
치안문제를 야기한다는 것이었다. 표면적으로는 주민들의 평안과 도시
의 치안을 위해서라지만 이 조례에 직접 영향을 받는 것은 새벽까지
영업을 해서 먹고사는 한인업소들이다.
“돈은 우리 마을에서 벌고 마을의 발전을 위해서는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얄미운 한국인”이라는 인종적인 편견까지 곁들여진 이 규제조
치에 한인들이 반발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측간의 영업시간 규제문제로 끝날 수 있었던 것이 대규모 시위로 확
대된 것은 시청 간부들의 인종차별적인 언행과 낙서 때문이었다. 이
문제로 한인 상공회의소 측과 시청 관계자들이 모임을 갖는 자리에서
시장이 한인들을 향해 상스러운 행동으로 “가운데 손가락”을 보여
준 것이다. 게다가 이 문제를 주도하고 있던 한인상공회의소 회장 소
유의 컴퓨터 가게 유리창에 “한국으로 돌아가라”(Go Home)는 낙서
가 발견되었다.
사실 그 정도 모욕이야 종종 경험했던 것이라 새로울 것도 없었지만
이번에는 그냥 넘어가지 않았다. 한인업소들의 강력한 반발에도 기세
가 꺾이지 않았던 시장과 시청 간부들이 깜짝 놀랄만한 일이 벌어졌
다. 23일 정오, 시청 앞 도로에는 뉴욕과 뉴저지 일원의 한국계 대학
생들과 상인, 주민들이 학업과 생계를 중단하고서 1천5백여명이나 모
였다. 동포 대학생 풍물패 리듬에 맞춰서 70대 노인부터 10대 청소년
들까지 구호를 외치며 자신들의 요구사항을 분명히 알린 것이었다. 자
신에게 직접 영향을 미치는 일이 아니면 무관심으로 일관하고 84년
LA폭동 때도 정치적인 메시지를 강력하게 담은 행동이 없었던 점을
고려한다면 이번 시위는 큰 의미를 갖는 것이다.
미국 주류 언론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벌어진 이 시위는 더 이상 침묵
하는 소수로 존재하지 않겠다는 교포들의 힘찬 선언이었다. 인종차별
문제는 다인종으로 구성된 뉴욕, 뉴저지 일원에서는 폭팔적인 사안이
기에 미국 언론과 시관계자들도 문제가 크게 비화되지 않도록 애를
썼지만 교포들은 이번 사안의 핵심을 정확하게 보고 있었다. 시장은
이번 시위가 소수의 탐욕스러운 한인 상인들이 선동한 것이라고 둘러
댔다. 하지만 이번 시위는 중간고사 기간임에도 인근의 아이비리그 교
포 학생들이 주도했다는 점을 볼 때 동포들이 이 사안을 어떤 눈으로
보고 있는지 분명해 진다.
이런 종류의 정치적인 집회에서 나타날 수 있는 여러 문제점에도 불
구하고 이번 시위를 통해 미국 동포들은 미국사회의 당당한 주인이라
는 자각과 세대간의 단결, 미 주류사회를 합리적으로 움직이려는 현명
함, 사회적인 이슈에 대한 2세들의 전면적인 등장이라는 큰 열매를 얻
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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