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9년 12월 6일 ∼ 1999년 12월 12일 : 제317호

“발품팔아 서민들의 애환 카메라에 담죠”

■ 인터뷰 – 「골목안풍경」에 담은 30년 인생, 사진작가 김기찬씨

“골목은 어릴적 향수이며 엄마의 품과 같이 늘 포근한 곳입니다.”

30여년 동안 골목안 풍경을 카메라 렌즈에 담아온 이가 있다. 사진작

가 김기찬씨(62). 「골목안풍경」이란 제목으로 낸 사진집만 4권째. 66

년부터 카메라를 들기 시작해 같은 주제로 계속 찍어왔지만, 그래도

그는 늘 아쉽기만 하다. 재개발은 ‘골목’을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추억의 장소로 내몰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서울 토박이다. 사직동에서 태어나 ‘골목’에서 딱지치고 숨박

꼭질했던 체험이 나이가 들어선 ‘향수’란 이름으로 골목을 찾아들

게 했다. 가난했지만 따스한 정이 넘실거렸던 기억을 되살리면서 일요

일마다 중림동, 도화동, 행촌동, 공덕동을 누비고 다녔다. 그곳은 「골

목안풍경」의 사진배경이 된 주무대. 서울역과 염천교에서 만난 행상

들을 쫓아 들어온 것이 인연이 됐다.

“어렸을 때의 느낌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곳이죠. 사람들은 이곳을

‘달동네’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맨처음엔 가난한 사람들의 고단한

생활터전이라 셔터를 누를 때도 송구스럽고 죄송한 마음이 이만저만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 모습은 제가 어렸을 때만 해도 자연스러운

일상이였죠.” 그가 이들 지역을 ‘달동네’라 부르지 않고 ‘골목동

네’라고 부르는 이유다.

“지금 아파트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그런 시절이 있었는지도 모르

고 살아갑니다. 골목길 안에서 주민들 간에 공동체 삶과 훈훈한 인간

애가 있는지도 모르고 있죠. 그 기록을 남겨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늦가을이 되면 어김없이 김장철이 다가오고, 이맘때면 중림동 골목은

부산하다. 동네 주민들이 모두 나와 경동시장에서 함께 장만한 김장채

소를 씻고 다듬느라 복닥거리기 때문. 양지바른 곳에 고추를 다듬어

말려놓은 풍경은 옛 골목동네의 모습 그대로다.

그러나 점차 시간이 지나면서 골목안 풍경도 변해갔다. 80년대 초반만

해도 여름이면 더위를 식히려는 주민들이 골목길 응달에 옹기종기 모

여 들었지만 80년대 말이 되자, 선풍기·냉장고 등 가전제품이 생기면

서 골목길은 그야말로 ‘썰렁’해진 것. 골목길에 신문지를 깔아놓고

숙제를 하는 아이들의 모습을 볼 수 있는 것도 이젠 그의 사진 속에

서나 가능한 일이 됐다.

그의 작품 대부분은 순간포착의 ‘운좋은’ 사진들이 아니다. 대야에

물받아 목욕하는 아이들의 거리낌없는 표정을 담기까지 30년 동안 계

속해서 ‘발품’을 팔았기에 가능했다. 그래서 중림동 왕초할머니의

잔뜩 쭈그린 이마엔 사십 넘도록 장가 못간 막내아들 걱정이 묻어있

고, 선글라스를 끼고 한낮 정적을 깨뜨리며 깔깔깔 웃어대는 아줌마의

웃음소리 뒤엔 노점상 단속으로 안경장사를 접어야 했던 가슴아픈 사

연들이 담길 수 있었다.

“처음에는 카메라를 들고 다니니까, 의심쩍은 눈으로 주민들이 경계

를 하더군요. 사진찍기가 살벌할 정도였죠. 간첩으로 오인받아 경찰서

에도 여러번 가야 했습니다. 지금은 하나의 에피소드로 남아있지만은

요.”

자주 가서 익숙해질 무렵에서야 주민들 역시 경계의 벽을 허물기 시

작했다. 그의 사진에서 카메라를 정면으로 응시하는 모습들이 심심찮

게 발견되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브라운관을 뺀 흑백 텔레비전 수상

기 앞에서 TV 출연자 마냥 환하게 웃고 있는 아이들은 이젠 “예쁘

게 찍어달라”고 주문까지 한다.

웬만한 기념일이 아니면 사진찍기도 어려운 이들에게 김씨의 사진 한

장은 소중한 보물이다. 마을사람들을 위해 찍어준 사진이 때론 돌아가

신 할머니의 유일한 영정사진으로 쓰이기도 한다. 그는 세상을 뜬 할

아버지, 할머니의 모습을 지금은 어른으로 성장한 두 아들의 모습에서

발견한다. 돌아가신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얼굴을 모르는 손자들은 거

꾸로 김씨의 사진을 통해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모습을 되새긴다. 3대

의 역사가 김씨의 사진을 통해 고스란히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렇듯 ‘골목’을 삶의 터전으로 살아온 사람들. 그러나 89년 도화동

재개발을 시작으로 아파트가 밀려들어 골목을 잠식하자 결국엔 97년

중림동을 끝으로 그의 골목안 풍경도 과거의 향수로 머물게 됐다. 5일

출간된 5번째 「골목안풍경」(눈빛)이 골목역사의 마지막 기록인 셈이

다.

그는 현재 젊은 시절의 생활근거지였던 종로를 찍고 있다. 도시인들이

무덤덤하게 지나가는 이길 또한 그에게는 예사롭지 않은 곳이기 때문

이다. 여기에 그는 다른 계획 하나를 더 보탰다. 이제는 추억으로 잠

긴 골목 대신 「골목안풍경」에서 살아 숨쉬는 ‘그때 그시절’의 주

인공들을 찾아 세월의 변화를 담을 계획이다. “그때의 골목안 풍경의

주인공들을 찾고 있죠. 어릴 때 엄마 등에 업혀 자랐던 꼬마가 부쩍

커서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는지가 앞으로 「골목안풍경」을 이

어나갈 새로운 테마입니다.”

그는 현재 진행중인 골목길 살리기 운동에 대해서도 따끔한 충고를

잊지 않았다. “외형만 골목길을 만들면 뭐합니까. 우리 마음속에 다

른 사람을 배려하는 공동체 의식이 없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김혜균 기자 nana@kng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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