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 네트워크]
눈과 귀를 막는다고 농민들의 절규와 분노가 감추어지는가!
신인철
12월 10일 정오가 지나면서 서울역에는 전국 각지에서 성난 농민들이 속속 모
여들고 있었다. “뼈빠지게 농사 지어봐야 손해만 보니 어떻게 살란 말이야!”
“농가부채가 해결된 것처럼 떠들어대고 있지만 다 말뿐이제.” “이제는 아스팔트
농사로 정부에게 농꾼들의 힘을 보여주어야 해!” 대회가 시작되면서 서울역 광
장에는 농민들의 성난 목소리가 메아리쳤다. 그리고 농민들의 분노는 대회 후
김대중 정권 등장 이후 가장 격렬한 대규모 시위로 이어졌다. 신문에서는 도심
한복판에서 난투극이 벌어졌다고 호들갑을 떨었고, 경찰은 ‘폭력시위’에도 불구
하고 최루탄을 쏘지 않아서 부상자가 많이 났다고, 그렇지만 어떤 희생을 치르
더라도 최루탄을 쏘지 않을 것이라고 떠들어대고 있다.
그런데 참 이상한 일이다. 이날 저녁 텔레비전 뉴스부터 시작해서 다음날 각
일간지에 이르기까지 모든 언론매체들은 하나같이 민주노총이 이날 민중대회를
주도하고 전임자 임금지급을 요구하며 싸운 것처럼 호도하고 있다. 이날 2만5천
명의 참가자 중에서 주 대오는 2만 명이 넘게 참가한 농민들이었다. 이날 대회
도 농민대회가 중심이 되었고 민중대회는 짤막하게 진행되었을 뿐이다. 그런데
농민을 비롯한 참가자들이 목청이 떠나가라고 외쳤던 “김대중 대통령이 공약한
농가부채 해결! WTO 수입개방 반대!”의 구호는 아예 언급도 하지 않거나 요구사
항 맨 뒤에 한 구절 끼워 넣어졌다. 반면 이날 참가자 중 단 한 사람도 거론하
지 않은 노조 전임자 임금 지급이 가장 중요한 요구로 도배되었다. 농민대회가
있었다는 기사는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노조 전임자 임금을 지급하라고
제주도에서까지 농민들이 상경해 연대투쟁을 벌였단 말인가? 그래서 9명의 농민
이 연행되고 2명이 구속되었단 말인가? 새벽별을 보면서 채비를 차려 올라온 농
민들로서는 참으로 기가 막힌 일이 아닐 수 없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
단 말인가?
그런데 바로 이런 일을 보면서 우리는 역으로 지금 우리 농촌과 농민의 상황
이 어느 정도인지를 짐작해 볼 수 있다. 폭동 직전까지 이른 농민들의 절망과
분노를! 그리고 이 정부도 그러한 농민들의 분노가 터져 나오는 것을 정말로 두
려워하고 있다는 것을!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려는 무모한 시도는 여기에서 비
롯된 것이다.
무너지는 농업, 죽어 가는 농민들
UR협상 이후 김영삼 정부는 경쟁력 강화를 위해 시설 현대화, 규모화를 해야
한다면서 30대에서 50대까지 청 장년 농민들에게 수천만 원에서 수억 원에 달하
는 자금을 빌려주었다. UR 협상에 대한 농민들의 불만을 무마하기 위한 것이었
다.
그런데 UR 협상 결과에 따라 무차별적인 수입개방이 진행되고 저농축산물 가
격정책으로 오히려 빚만 늘어갔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IMF 사태로 인해 농자
재 값이 폭등하면서 농민들은 생산비도 건지지 못하고 융자금의 이자도 갚지 못
하는 상황으로 내몰려 왔다. IMF로 이후 몰락하는 농민들의 실상은 98년 한 해
만 소득이 12.7% 감소했고 농가부채는 30.7%나 증가했다는 99년 국정감사 자료
에도 잘 나타나 있다.
전국농민회총연맹이 발표한 농가부채 현황을 보면, 97년 12월 현재 가구당
5,753만 원에 달하고 있다. 이중 정책자금은 61.2%이고 상호금융이 30.2%를 차
지하고 있다. 농민들의 부채 중 특히 원금과 이자상환을 위한 부채만도 가구당 1,066만 원에 달한다. 그리고 부채의 70%가 단기 고금리 부채이다.
게다가 IMF 이후 13%대의 고금리 속에서 이를 감당하지 못한 농민들은 이자라
도 갚기 위하여 고금리의 상호금융자금을 빌려야 했다. 그런데 정책자금과 상호
금융자금은 연대보증을 세워야 대출을 받을 수 있다. 그래서 한 두 농가가 파산
하면 연대보증한 농가들까지 굴비 엮듯이 줄줄이 파산하면서 마을 공동체마저
통째로 무너지는 사태가 벌어지고 있다. 빚을 갚으라는 독촉 때문에 전화받기가
두려운 것이 요즘 농민들의 실정이다.
한 번 속지 두 번 속냐? 김대중은 사기꾼이여!
지난 97년 대통령 선거 때 김대중 대통령은 대선 후보 초청 토론회에 나와 농
가부채만큼은 정부가 책임지고 해결해야 한다고 열변을 토했다. 농민들은 이런
김대중 대통령 후보에게 희망을 걸고 표를 던졌다. 그러나 믿었던 도끼에 발등
을 찍힌다고 김대중 정권은 농민들을 철저하게 농락하고 있다. 김대중 정권은
세 차례에 걸쳐 농가부채 대책을 발표했다. 그리고 언론을 통해서 농가부채 문
제가 거의 해결되고 있는 것처럼 호도했다. 그러나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다.
98년 10월에 중장기 정책자금을 2년 상환유예할 수 있게 1조 4천억 원을 지원
한다고 발표했지만 실제로 상환유예된 것은 2,358억 원에 불과하다. 올 3월에는
특별경영자금 7,000억 원을 지원한다고 했으나 부채대책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것이었다. 또 올 8월에 발표한, 1조 4,500억 원을 지원하고 연대보증을 농림수
산업자 신용보증기금(농신보)으로 대체한다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지원금 1조
4,500억 원 중 4,500억 원은 태풍피해에 대한 보상이지 부채대책이 아니다. 그
나마 1조 원 지원의 내용도 그 자격을 자산이 부채보다 많은 농민으로 제한하
고, 보증을 농신보로 대체한다는 것도 순 사기였다. 원리금과 이자를 정상적으로 상
환하고 있는 농민에 대해서만 연대보증을 농신보로 대체할 수 있게 한 것이다.
연대보증 문제에서 가장 시급한 것은 이미 파산했거나 파산 직전의 농가부채를
가진 농민들이다. 이미 이자와 원금을 잘 내고 있다면 무엇 때문에 연대보증을
농신보로 대체하겠는가? 결국 그럴 듯한 대책을 발표하고 농가부채를 거의 다
해결했다고 하는데 해결된 것은 아무 것도 없는 것이다.
말만 번지르르하게 하는 사기꾼이라고 입을 모으고 있다. 예천에서 올라온 한
농민은 “구조조정 한다면서 대우와 은행에는 국민들 세금을 100조 넘게 쏟아 붓
는다는데 농가부채는 해결하려고 마음만 먹으면 몇 조만 투입하면 해결될 수 있
다”, “농민들을 죽이려고 작정하지 않고서는 어떻게 이럴 수 있냐”고 울분을 토
해냈다.
농가부채만이 아니다. 김대중 정권은 농업재해보상법 제정, 농민 조합원이 주
인되는 협동조합 개혁, 통합의료보험법 즉각 실시, 직접지불제 실시 등 농민들
에게 공약한 것을 어느 것 하나 지키지 않고 있다. UR 협상을 타결하면서 협상
의 범위 안에서나마 농업 경쟁력을 보호한다고 제정한 WTO이행 특별법은 아직까
지 시행령조차 만들어지지 않고 있다. 김대중 정부는 시행령을 제정하겠다는 공
약해 놓고 이제 와서는 시행령이 필요 없다고 강변하고 있다.
이제는 아스팔트 농사밖에 없다!
농가부채 때문에 차압이 들어오고 경매에 들어가 생존의 벼랑 끝으로 몰리고
있는 농민들에게 더욱 절망으로 다가오고 있는 것은 최근 시작되고 있는 WTO 뉴
라운드 협상이다. 이미 UR로 인한 시장개방으로 94년에서 97년 사이에 농산물
수입은 29%나 증가했다. 수입농산물의 급증으로 생산기반이 붕괴되고, 농가소득
은 하락하면서(-17%) 농가부채는 급증하는(30%) 악순환이 계속되고 있다. UR이
시작된 지 몇 년 지나지 않았는데 우리나라의 식량자급도는 30% 밑으로 떨어졌
다.
상황이 이러한데도 WTO 뉴라운드 협상을 마치고 돌아온 한덕수 통상교섭 본부
장은 “농업부분을 점진적으로 자유화하고 보조금을 감축한다”고 합의한 것을 성
과라고 자랑하고 있다. 한덕수 본부장은 한술 더 떠 “정부가 언제까지 국내농업
에 영원히 보호막을 제공해 줄 수는 없다”, “농업보호는 세계화 추세에 역행한
다”면서 산업과 인구에서 농업이 차지하는 비중이 줄어들고 있기 때문에 국가적
산업발전 전략 차원에서 농업은 포기할 수밖에 없다는 논리를 공공연하게 이야
기하고 있다. 농민에게 한 공약은 져버리면서 이에 대한 사과는커녕, 농업을 포
기할 수밖에 없다고 떠들어대고 있는 김대중 정권의 반농업-반농민 정책이 농민
들의 분노에 불을 지르고 있는 것이다.
농민들은 11월 한 달 내내 전국 각지에서 시 단위, 군 단위로 농민대회를 열
면서 투쟁을 전개해 왔다. 추수가 끝나자마자 다시 ‘아스팔트 농사’에 매달려
온 것이다. 충청도에서 올라온 한 농민은 단호히 말했다. “오늘 농민대회는 시
작일 뿐이다. 내려가서 시 단위와 군 단위에서 줄기차게 싸워나갈 것이다”라고.
지금 전농의 지도부들은 폭력적인 진압과 계속되는 탄압에 항의하고, 언론에
의해 왜곡.은폐된 진실을 투쟁으로 알려내기 위해 명동성당에서 농성에 들어갔
다. 13일부터는 지역에서 다시 상경하여 농성투쟁을 대규모로 전개하기로 했다.
그리고 17일에는 2차 전국농민대회를 준비하고 있다.
농민들의 투쟁은 이제 시작일 뿐이다. 김대중 정권이 언론을 통해 왜곡하고
은폐하는 것을 보면서 농민들의 분노는 깊어지고 있다. 아무리 억압하고 왜곡한
다고 해도 생존의 벼랑 끝으로 내몰리고 있는 농민들의 분노와 투쟁의 파고를
막을 수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김대중 정부와 WTO-초국적 자본에 정면으로 맞
서서 싸우는 농민들의 투쟁에는 결코 농민들만의 외로운 투쟁이 아니다. 노동
자, 빈민, 학생을 비롯한 이 땅의 모든 양심세력, 나아가 초국적 자본-신자유주
의에 저항하는 전 세계의 민중이 함께하고 있으며 그러한 연대는 더욱 넓고 강
고해 질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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