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더블린에서 열린 ‘마르크스주의 2025’(Marxism 2025) 행사에서 생태사회주의에 대해 발표해 달라는 초대를 받았다. 하고 싶은 말이 많았기 때문에, 전달하고자 하는 핵심 내용을 미리 정리해두기로 했다. 다음은 그 발표문이다.
1. 생태사회주의는 미래를 위한 이론이자 정책이지만, 여전히 과거의 몇몇 문제에 시달리고 있다.
오늘날 생태사회주의(ecosocialism, 생태학적 지속 가능성과 사회주의적 경제·정치 체제의 결합을 지향하는 이념) 내부에서 나타나는 ‘생태근대주의’(eco-modernism, 기술 발전과 산업 현대화를 통해 생태위기를 해결할 수 있다는 입장)와 ‘탈성장’ 사이의 양극화는 문제다. 직설적으로 말하자면, 생태근대주의자들에게 근대 산업화는 기본적으로 진보적이며, 이들은 ‘성장’이라는 개념에 대해 비교적 긍정적인 시각을 가지는 경향이 있는 반면, 탈성장 운동은 이러한 아이디어 자체를 근본적으로 비판한다. 이들은 이단적 전통이라는 공통점을 가지지만, 동시에 전혀 다른 정치적 사고와 실천의 출발점을 보여주는 논쟁의 양극을 대표한다.
생태근대주의는 마르크스주의 내부에서 줄곧 지배적인 입장을 차지해왔다. 예전에는 생태마르크스주의가 주로 생태에 관심 있는 개인들이 연구하는 하위 학문 분야로 존재했기 때문에, 이 사실이 덜 분명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특히 지난 10년간 기후변화가 본격화되면서 상황은 달라졌다. 이제는 진지하게 받아들여지고 싶어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기후에 대한 입장을 가져야 한다. 마르크스주의의 주요 흐름이 생태 문제를 다루게 되면서, 우리는 ‘사회주의적 생태근대주의’라는 형태를 보게 되었다.
2. 사회주의적 생태근대주의와 탈성장 사이의 날 선 이분법은 우리가 필요한 복잡성을 가린다.
맷 후버(Matt Huber)는 자신의 저서 ⟪기후변화는 계급전쟁이다⟫(Climate Change as Class War)에서 흥미로운 질문을 던진다. 우리는 ‘덜 소비하는 정치’를 원하는가, 아니면 ‘더 많이 누리는 정치’를 원하는가? 우리는 생산에 집중해야 하는가, 아니면 소비에 집중해야 하는가? 지구 온난화를 멈출 정치적 주체는 ‘노동계급’인가, 아니면 ‘전문관리계급(PMC)’인가? 이런 질문들은 흥미롭지만, 문제는 그 질문을 구성하는 방식이다.
우리는 분명히 어떤 것들은 더 많이 필요하고, 어떤 것들은 더 적게 필요하다. 나는 여러 면에서 생산이 소비보다 더 중요하다는 데 동의하지만, 그렇다고 소비가 분석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중요하지 않다는 뜻은 아니다.
우리가 선택하라고 강요받는 중심 이분법은 바로 ‘성장’이다. 이것은 문제적일 뿐만 아니라 혼란스럽기도 하다. 사람들은 ‘성장’이라는 말을 사용할 때 여전히 매우 다양한 의미를 지칭한다. 그리고 그 연장선상에서 ‘탈성장’ 역시 다양한 의미를 갖게 된다. ‘성장’이 의미하는 것은 생물물리적 혹은 물질적 처리량, 에너지 소비, 인간 잠재력, 자본 축적, 인간개발지수(HDI) 중 어떤 것인가? 대부분의 경우, 우리는 국내총생산(GDP)의 증가를 의미한다고 가정하지만, 그렇다면 우리는 그것을 어떻게 측정하는가?
3. ‘성장’—이를 GDP나 생물물리적 처리량의 지속적 증가로 이해할 경우—은 실제로 문제지만, 우리는 성장을 직접 겨냥하는 것으로 시작할 수 없다.
새로운 인프라에 대한 투자는 단기적으로 경제활동의 증가, 즉 GDP의 증가로 이어질 것이다.
물론 이것이 이러한 정책에 반대할 근거는 되지 않는다. 우리는 오히려 어떤 부문, 지역, 산업이 더 많은 경제활동을 해야 하며, 어떤 부문은 축소되거나 폐쇄되어야 하는지를 비판적으로 논의해야 한다. 이것은 복잡한 질문이다. 지식인 소수집단을 넘어 더 넓은 대중을 동원하고자 하는 생태사회주의 운동은 구체적이고 장소 기반의 해답을 제시해야 한다.
한편으로, 생태근대주의와 달리 우리는 유한한 지구에서 무한한 경제활동 증가를 계속할 수 없다. 특히 생물물리적 처리량이 수십 년, 혹은 수세기 동안 계속 증가하는 것은 더욱 불가능하다.
다른 한편으로, 탈성장론과는 달리, 우리는 ‘성장을 줄이자’는 구호만으로는 노동계급 하층이나 광범위한 대중을 동원할 수 없다. 구호는 중요하다. 그리고 나는 이 구호만으로 폭넓은 노동계급을 결집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4. 이 논쟁은 단순히 ‘성장’에 관한 것이 아니다 — 훨씬 더 깊은 문제다.
생태근대주의자들과 탈성장론자들 사이의 논쟁은 더 넓은 질문들—즉, 근대화, 산업화, 자본주의 자체가 본질적으로 진보적인가 아니면 반동적인가—에 얽혀 있다.
나는 대규모 산업, 새로운 기술, 생산성 향상, 도시화가, 자본주의 이전 사회들에서는 존재하지 않았던 사회주의의 가능성을 만들어냈다고 주장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본다. 이 관점에서 보면, 우리는 생산력의 발전과 자본주의 자체가 노동계급, 즉 ‘자기 무덤을 파는 자들’을 탄생시켰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 논리를 어디까지 끌고 갈 수 있는가?
오늘날 세계를 보라. 과연 누가 자본주의가 우리를 사회주의로 이끌고 있다고 보겠는가? 자본주의의 진보적 성격을 옹호하는 이들은 분명 마르크스주의 문헌을 읽어왔다. 그것은 현실을 관찰한 결론이 아니라, 책을 읽은 결과다.
자본주의는 사회주의로 나아가고 있지 않다. 그것은 단지 우리를 새로운 지질학적 시대로, 기후 재앙으로, 학살과 전쟁으로, 그리고 끊임없는 새로운 위기로 몰아갈 뿐이다. 계속해서.
21세기의 생태사회주의자들은 ‘성장은 나쁘다’는 단순한 판단을 넘어 생산주의(productivism)나 성장에 대한 무비판적 찬양을 보다 정교하게 비판해야 한다. 우리는 보다 섬세한 비판이 필요하다. 우리는 근대성, 자본주의, ‘발전’, ‘성장’을 본질적으로 진보적이거나 반동적인 것으로 이분법적으로 바라보는 시각을 넘어설 필요가 있다.
5. 칼 마르크스
생태근대주의자들과 탈성장론자들 사이의 논쟁에서 두 진영 모두 카를 마르크스를 자신들의 입장을 정당화하는 데 적극적으로 인용한다는 점은 매우 인상적이다. 생태근대주의자들은 인용할 수 있는 인용문을 바다처럼 가지고 있는 반면, 탈성장론자들은 그보다 적은 자료를 가지고 있지만 그것을 훨씬 더 강하게 활용한다. 새로운 마르크스 연구(Marxological evidence)에 기반해, 사이토 고헤이(Kohei Saito)는 ‘원숙한 시기의 마르크스’가 탈성장 공산주의자였다고 주장한 바 있다.
우리는 다양한 이유에서 여전히 마르크스를 읽어야 한다. 마르크스의 작업은 여전히 기후변화의 뿌리를 이해하는 데 가장 적절한 출발점이다. 우리는 이윤 동기, 자본 축적, 대사 균열(metabolic rift), 계급투쟁과 계급 분파의 역학을 이해하지 않고는 지구온난화를 파악할 수 없다.
그러나 마르크스주의자로서 우리는 마르크스가 어떤 말을 했다고 해서 그것이 자동으로 진실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상기해야 한다. 마르크스가 “진정으로” 이러저러한 의미를 담았다고 주장한 뒤, 우리도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전제하는 수사적 방식에 대해 우리는 경계해야 한다.
6. 생태사회주의와 계급
탈성장과 생태근대주의 사이의 양극화가 낳는 가장 큰 문제는, 계급투쟁에 관한 생산적인 논의를 가로막는다는 점이다. 일부 생태근대주의자들은 전문관리계급(PMC, Professional-Managerial Class)과 ‘노동계급’ 사이에 적대적 관계가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PMC가 환경운동을 점령해왔고, 오직 노동계급만이 세상을 실제로 변화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진보적 노동계급’과 ‘반동적 전문계급’ 사이의 적대관계는 탈성장론자들에 의해 거꾸로 뒤집히거나 반영된다. 뛰어난 독일 활동가인 타드지오 뮐러(Tadzio Müller)는, 글로벌 북반구의 산업 노동자들은 우리의 적일 뿐만 아니라 “가장 효과적인 적”이 될 것이라고 주장한 바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는, 계급에 관한 대화는 북반구 노동자들이 ‘제국적 생활양식’을 가지고 있다는 지적에서 시작해 그 지점에서 끝난다.
그리고 그렇다, 실제로 많은 노동조합들과 환경운동 사이에는 긴장이 존재한다. 그러나 그것을 ‘적대적 관계’로 묘사하는 것은 잘못이다. 만약 그것이 적대라면, ‘노동계급’과 환경운동을 점령했다는 ‘계급’ 사이에 계급투쟁이 벌어진다고 할 수 있을까? 그렇지 않다.
노동자들과 기후정치 사이의 긴장, 그리고 인종주의나 제국주의 문제를 무시하는 것은 지적으로 부정직한 일이다. 하지만 이러한 긴장이 너무 크기 때문에 노동계급—그 정의가 어떻든 간에—이 기후위기에 맞선 투쟁의 주체가 될 수 없다고 전제하는 것 또한 정치적으로 절망적인 접근이다.
조직된 노동운동(때때로 탈성장론자들에 의해 소외되었고)과 환경운동(때때로 생태근대주의자들에 의해 소외되었음)이 급진화되고 강화되며, 함께 연대하는 것은 여전히 생태사회주의의 절대적 전제가 되어야 한다.
7. 기후 행동은 곧 계급투쟁이다
우리가 거리에서 목격하는 기후운동, 탄광을 점거하고 학교 파업을 조직하는 기후운동은—내가 추정하건대—99.9%가 생산수단을 소유하지 않은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다.
물론 그들 중 다수는 피아노와 책장이 있는 집에서 자랐을 수도 있다. 하지만 피에르 부르디외(Pierre Bourdieu)에 집착하다가 명확한 계급 분석을 놓쳐서는 안 된다. 계급은 미학, 취향, 문화, 교육에 의해 결정되지 않는다. 물론 취향, 미학, 문화는—세상을 바꾸고자 할 때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중요하지만, 그것들은 계급 그 자체를 구성하지 않는다.
우리는 고전적 마르크스주의의 입장에서 출발한다. 즉, 자본을 축적하지 않는 사람들은 광범위하고 이질적인 노동계급에 속한다. 이 논의는 더 깊이 들어갈수록 훨씬 복잡해질 것이고, 예외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출발점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리고 그 출발점은 중요하다.
노동조합에 속한 사람들과 환경운동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모두 넓고 이질적인 하나의 노동계급에 속한다. 그리고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기후운동이 지목하는 주요 적은 바로 화석연료 산업—즉 자본가 계급의 일파라는 점이다. 이것은 곧 계급투쟁이다.
(우리는 기후변화를 간접적인 계급투쟁으로 간주한다. 이는 노동자가 상사에게 직접 맞서는 대결이 아니라, 보다 간접적인 투쟁이다. 이는 민영화에 대한 저항을 계급투쟁으로 보는 방식과 유사하다.)
기후운동 내부에 계급의식이 낮거나 때로는 극히 낮다는 사실은 분명 문제다. 그리고 이러한 문제는, 갈등을 담론적으로 재생산하고 미화하는 생태근대주의자들과 탈성장론자들에 의해 더 악화된다. 생태사회주의자로서, 우리는 할 일이 많다.
지구온난화를 막기 위한 투쟁이, 그 잠재력을 발휘하고 진정한 계급투쟁으로 표현되고 이해될 수 있을지는, 운동 내부의 정치적 투쟁에 달려 있다.
광범위한 노동계급을 하나로 모으는 일은 결코 쉬운 과제가 아니다. 우리가 놀랄 일도 아니다—이것은 지난 200년 동안 줄곧 그래왔다. 우리는 때때로 역사를 낭만화하며, 노동계급의 역사를 실제보다 더 동질적인 것으로 상상하곤 한다. 그러나 젠더, 인종주의, 성적 지향, 민족주의 등의 문제는 언제나—그리고 지금도 여전히—반동적 세력들이 노동계급을 분열시키는 데 사용하는 수단이었다. 노동계급을 하나로 단결시키는 일은 어려운 과제다—그러나 그것이 바로 우리의 과제다.
여기에서 참고할 만한 좋은 사례도 있다. 노르웨이의 싱크탱크 ‘마니페스트’(Manifest)가 추진한 ‘커플 상담(couples therapy)’이라는 프로젝트는, 진보적인 환경단체들과 석유산업에 조직된 노동조합을 한 자리에 불러 모아, 노르웨이의 미래 산업정책이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에 대해 논의하게 했다.
그러나 노동운동과 기후운동을 하나로 결합시키는 문제에 있어, 우리가 시도한 대부분의 노력은 실패로 끝났다. 우리는 지난 수십 년 동안 너무 많은 실패를 겪었기에, 포기하고 싶어질 때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왜냐하면 이것이야말로 생태사회주의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8. 자본주의는 기후변화를 멈추지 않을 것이며, 기후변화 역시 자본주의를 멈추지 못할 것이다
지구온난화가 자본주의의 종말을 불러올 것이라고 흔히 가정된다. 나는 오히려 그 반대가 더 가능성 높다고 생각한다. 기후위기는 자본주의가 자기 자신을 재생산하기 위해 필요한 바로 그 ‘창조적 파괴’ 유형이다.
일부는 역사적으로 생태적 변화가 기존 체제에 큰 도전을 안겨주었으며, 따라서 기후변화 역시 자본주의에 같은 역할을 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 관점은 결정적인 사실 하나를 간과한다. 기존의 생산양식과 달리, 자본주의는 변화 그 자체를 근본으로 한다는 점이다.
또 다른 가정은, 기후변화가 식량 부족, 인프라 붕괴, 대량 사망 등 너무도 심각한 문제를 야기해 자본주의가 대응하지 못하게 될 것이라는 주장이다. 그러나 자본주의는 항상 죽음을 세계 곳곳의 구석으로 밀어넣는 데 능숙했고, 그 덕분에 다른 곳에서는 삶—그리고 이윤—이 계속될 수 있었다. 대량 사망은 자본주의에 본질적인 문제가 아니었다. 자본주의 체제는 식민주의, 전쟁, 학살을 기반으로 형성되었다.
또 어떤 이들은 이렇게 주장한다. 화석 인프라에 고정 자본이 지나치게 많이 투자되어 있기 때문에, 재생에너지로의 급속한 전환은 대규모 가치 평가절하를 야기해 자본주의의 종말로 이어질 경제위기를 초래할 것이라고. 첫째, 이 주장은 어쩌면 사실일 수도 있다. 하지만 대규모 평가절하가 자동으로 경제위기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둘째, 그러한 위기가 발생한다 해도, 우리는 자본주의가 역사적으로 위기를 통해 재생산되어왔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자본주의는 경제위기 때문에 존재하는 것이다. 경제위기에도 불구하고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자본주의의 유연성을 결코 과소평가해서는 안 된다. 오늘날 우리는 화석자본과 ‘녹색 자본’이 아무런 마찰 없이 동시에 작동하는 모습을 보고 있다. 자본은 동시에 지구를 파괴하면서 지구를 ‘구하고자’ 시도하고 있다. 이것은 말의 모순이 아니다—왜냐하면 이슈는 지구가 아니라 이윤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당신이 지구를 구하려다 지구를 파괴하면, 결국 지구는 파괴된다는 점이다.
9. 기후변화는 파시즘의 부상을 부를 수 있다
20세기 파시즘의 핵심적 특징은 ‘위기’였다. 이러한 부상의 원인에 대한 논의에서, 니코스 풀란차스(Nicos Poulantzas) 같은 사상가들은 경제적, 이데올로기적, 정치적 격변을 지목했다.
그렇다면 지구온난화가 또 하나의 위기로 작용해 파시즘을 촉진할 가능성은 있는가? 이에 “그렇다”고 대답할 수 있는 세 가지 방식이 있다.
첫째, 진보운동에 대한 방어 수단으로서이다. 만약 대중의 압력이 충분히 커져 정치 지도자들이 지구 평균기온 상승을 1.5도 또는 2도로 제한하기 위해 필요한 조치—석유 시추 시설과 탄광 폐쇄, 항공산업 중단, 산림 파괴 금지—를 시행해야만 하는 상황이 오면 어떻게 될까? 이 경우 화석연료 산업의 이해관계자들은 극우와 손을 잡을 가능성이 크고, 이미 감지되고 있는 ‘화석 파시즘(fossil fascism)’이 더욱 발전할 것이다.
둘째, 위기 그 자체를 통해—즉 새로운 차원의 충격 교리(shock doctrine)를 통해. 위기는 인종주의의 기회를 낳고, 기후 재난은 그런 기회를 대량으로 만들어낼 것이다. 사람들을 죽이고 농작물을 파괴하는 폭염, 식량 부족, 수백만 명의 난민—이 모든 조건이 반동적 정치를 자극할 수 있다. 만약 사회주의 정부가 그 부담을 공평하게 나누자고 제안한다면 어떨까? 정치학자 카라 대깃(Cara Daggett)은 석유 남성성(petro-masculinity)에 관한 훌륭한 저작에서, 기후위기가 파시스트적 생존공간(Lebensraum)을 향한 욕망을 촉진할 수 있는지를 묻는다.
셋째, 이른바 생태파시즘(eco-fascism)의 변종을 통해. 만약 극우가 방향을 180도 틀어, 지구온난화가 인간의 책임이라는 사실을 전면적으로 인정하게 된다면 어떨까? 그들은 누구를 탓할 것인가? 글로벌 북반구의 기업인들이 아니라, “이민자들”—무슬림, 유대인, 중국인, 혹은 증오와 인종차별을 자극할 수 있는 다른 어떤 집단이 희생양이 될 것이다.
그러나 이런 일이 반드시 일어나야 할 필요는 없다—왜냐하면 우리가 여기 있기 때문이다.
10. 생태사회주의는 파시즘을 분쇄할 것이다—그리고 그들이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다
인간지리학자 로라 풀리도(Laura Pulido)와 동료들은 도널드 트럼프 첫 임기에서 한 가지 흥미로운 차이를 지적했다. 그것은 그의 노골적이고 과장된 인종주의와, 환경규제 완화 이후의 침묵 사이의 차이였다. 그들은 전자가—의도했든 아니든—후자를 가리는 데 도움이 되었다고 주장한다. 이 점은 흥미롭다. 기후부정론은 여전히 일정한 설득력을 가지며, 음모론과 가짜 뉴스는 극우의 핵심 도구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기후 이슈는 그들 입장에서 불편한 과제이기도 하다. 그들은 이 주제를 논의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가? 우리는 지구온난화에 맞선 투쟁을 더욱 강화해야 한다.
사미라 알리(Samira Ali)가 금요일 이 회의에서 효과적으로 지적했듯이, 반파시즘 투쟁은 방어적이면서 동시에 공세적이어야 한다. 우리는 지킬 가치가 있는 것을 방어하면서도, 우리의 투쟁을 더욱 격렬하고 넓게 확장해야 한다—특히 극우가 마주하고 싶어하지 않는 문제들을 중심으로. 생태사회주의를 위한 투쟁은 바로 그런 투쟁이다.
광범위한 노동계급을 하나로 결집시키는 것은 언제나 어떤 사회주의 전략에서도 중심에 있어야 한다. 하지만 솔직해지자—우리가 모여 대화를 시작하면, 종종 의견 차이는 해소되기보다 오히려 더 깊어진다. 때로는 외부의 압력이 선의보다 더 효과적으로 단결을 이끌어 낸다.
아마도 바로 이 지점에서 파시즘이 뜻밖에도 우리에게 도움을 줄 수도 있다. 정부 안이든 거리 위든, 극우는 앞으로도 계속해서 진보적 제도들, 노동조합, 페미니즘 및 반인종주의 운동, 그리고 물론 환경운동을 공격할 것이다. 여기에는 순진한 낙관주의가 설 자리가 없다. 하지만 이러한 공격은 광범위한 노동계급을 하나로 묶는 데 있어 오히려 공통의 지점을 더 분명하게 보여줄 수도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 기회를 반드시 붙잡아야 한다.
그러니, 노동조합과 환경운동을 하나로 결집시키자. 아니, 이렇게 말하자—파시스트들이 우리를 하나로 묶도록 내버려두자. 그러면 우리는 강해질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젠장, 반드시 이길 것이다. 고맙다.
[출처] Growth or Degrowth? Ecosocialism confronts a false dichotomy
[번역] 이꽃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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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탈레 홀거센(Ståle Holgersen)은 스톡홀름 대학교 인간지리학과의 선임 강사다. 그는 ⟪위기에 맞서: 불타는 세계에서의 경제와 생태⟫(Against the Crisis: Economy and Ecology in a Burning World)의 저자이다. 참세상은 이 글을 공동 게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