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나는 그 당시의 상황을 설명하기 위해 ‘폴리크라이시스(polycrisis)’라는 표현을 처음 사용했다. 이 개념에는 처음부터 비판도 따랐지만, 일정한 설득력을 얻었다.
오늘날의 상황은 여러 면에서, 그리고 몇몇 지역에서는 그때보다 더 극단적으로 전개되고 있다. 폴리크라이시스라는 개념은 여전히 특정 맥락에서 사용되고 있으며 의미를 지닌다. 2025년 세계은행(World Bank)은 ‘취약하고 분쟁의 영향을 받는 상황(Fragile and Conflict-Affected Situations)’을 묘사하기 위해 폴리크라이시스를 연상시키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가자지구에서 본 폭력과 역개발의 악순환/ 가자를 출발점으로 삼아, 그 외 어디에서 사람들이 굶주리고 목숨을 걸고 싸우고 있는지를 묻는 일은 시급하고 생산적인 과제다. 나는 몇 주 전 이 질문에 대해 글을 썼다. 이번에 다시 이 주제로 돌아오게 된 계기는 세계은행(World Bank) 소속 한 팀이 발표한 새로운 보고서 때문이다.
나는 그동안 차트북에서 몇몇 “상황들”을 다루어 왔다:
서아시아(West Asia) – 차트북 56 (2021년 12월)
남아시아(South Asia) – 차트북 153 (2022년 9월)
아프리카의 부채 위기 – 차트북 181 (2022년 12월)
아이티(Haiti) – 차트북 167 (2022년 11월)
미얀마(Myanmar) – 차트북 256 (2023년 9월)
유럽(Europe) – 차트북 262 (2024년 1월)
아프리카의 뿔 지역(Horn of Africa) – 차트북 281 (2024년 5월) 콩고민주공화국에서 예멘까지, 위기의 1억 3,700만 인구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Sub-Saharan Africa) – 차트북 313, 330 (2024년 8월 & 10월) 우리는 우리가 처한 위기를 제대로 인식하는가?, '폴리크라이시스' 시대의 아프리카와 절대 빈곤
동남아시아(South East Asia) – 차트북 333 (2024년 11월)
하지만 현재의 전반적인 상황을 설명하는 말로서 ‘폴리크라이시스(polycrisis)’는 이제 그다지 적절해 보이지 않는다. 이번 주말에 실릴 나의 파이낸셜타임스(FT) 칼럼에서는 이 개념을 다시 들여다보고, 왜 그런지를 질문한다.
이 논의는 두 가지 측면으로 나뉜다.
하나는 위기를 유발하는 요인들이고, 다른 하나는 그 위기를 바라보는 관점이다.
1. 위기의 동인(drivers)
위기의 원인에 관해서는, 나는 한동안 차트북에서 이 주제를 붙잡고 고민해 왔다.
특정한 원인이나 그 상대적 비중을 명확히 밝히지 않은 채 ‘위기’라는 말만 던지면, 상황을 더 혼란스럽게 만들 수 있다. 그런 접근은 공포에 찬 손짓으로 비칠 수 있고, 결국엔 폭력적인 포퓰리즘적 대응을 부추긴다. 나는 2023년 여름 베를린에서 퍼져 있던 흐릿하고 암울한 분위기 속에서 이 점을 뼈저리게 느꼈다.
반면에 다른 맥락도 있다. 나는 특히 가자(Gaza)를 떠올린다. 그곳에서 ‘위기(crisis)’라는 익명적인 표현을 사용하는 것은, 집단학살이나 인종청소라는 말을 회피하는 끔찍한 완곡어법일 뿐이다.
위기가 아니라 학살이다: 가자지구 전쟁범죄 재정 해부/ 수개월에 걸쳐, 이스라엘 정부와 군, 이스라엘 정치 및 사회의 일부 세력, 그리고 그들을 해외에서 지지하고 돕는 이들까지 포함해, 이들이 가자(Gaza) 주민들을 고의로 굶주리게 하고 있다는 점은 더 이상 합리적인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이들은 가자 주민들이 도망치거나, 그렇지 않으면 점점 더 극심해지는 고통과 결국은 극심한 고통 속 죽음을 감내하게 만들려는 목적을 가지고 행동해 왔다.
‘위기(crisis)’라는 말은 그리스 의학 담론에서 유래했다. 그것은 열병의 경과 중 전환점이 되는 순간을 의미한다. 이 단어는 특정한 자연화된 성격을 지닌 병이나 질환, 또는 신원을 알 수 없는 맹목적인 힘들, 혹은 그 힘들의 결합이 한 존재의 통합성, 일관성, 생존 가능성을 흔드는 상황을 암시한다. 위기란 회복으로도, 죽음으로도 향할 수 있는 분기점이다.
이러한 자연화된 묘사는 때로 적절하다. 그것은 근대성의 혼란을 포착하는 데 유용한 도구로 오랫동안 활용됐다. 자연주의는 대부분의 사회과학적 세계 묘사의 기반이 되며, 마르크스주의는 이러한 자연화된 서사가 어떤 역사적 맥락에서 설득력을 가지는지를 설명하는 메타 이론을 처음으로 제시했다. 마르크스주의는 부르주아 철학과 경제학이 놓치는 지점을 꿰뚫는 통찰을, 시대에 기반해 제공하겠다는 약속을 내걸었다.
하지만 자연화된 발전 서사와 자연화된 위기 서사는, 특정한 행위자에게 의도와 효능을 부여하는 방식의 설명과 늘 일정한 긴장 관계를 유지해 왔다. 행위자 중심의 서사는 익명화된 사회적, 정치적, 문화적 힘이라는 틀을 깨고, 구체적인 인물과 아이디어, 정체성, 전략, 이해관계를 가진 존재들을 지목함으로써 힘을 얻는다.
그러나 행위자 기반 이론도 한계가 있다.
의인화(personification) 또한 하나의 자연화 방식이다. "트럼프가 x, y, z를 지시했다"고 말하는 것이 분명하게 들릴 수 있지만, 우리는 그 문장에서 정말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질문할 수 있다. “트럼프”란 무엇인가? 한 남자인가? 그의 늙은 몸인가? 아니면 그의 돈인가, 인맥인가, 그가 상징하는 어떤 것인가? 이 질문은 우리를 다시 사회적 힘의 영역으로, 그리고 결국 폴리크라이시스로 돌아가게 만든다. 트럼프는 한 국가 안의 '폴리크라이시스가 인격화된 존재’다. 트럼프는 일인 다중위기체다.
또는 우리는 한 명의 행위자에서 다수의 행위자로 초점을 옮길 수도 있다. MAGA 진영 전체와 그 뒤에 숨어 있는 어두운 세력들 말이다. 그 경우 우리는 네트워크의 세계로 진입하게 되며, 이는 새로운 형태의 집합적 행위자에 대한 시각을 제공한다. 이 시각은 대단히 통찰력을 줄 수도 있지만, 아주 쉽게 음모론으로 미끄러질 수도 있다.
이처럼 불완전한 현실 속에서, 나의 메타 이론적 입장은 다음과 같다: 단 하나의 정답, 단 하나의 방법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설령 존재한다고 해도, 우리가 그 정답에 접근할 수 있는 위치에 있지는 않다. 위기든 범죄든, 행위자든 네트워크든 사회적 힘이든, 이 모든 틀이 문제를 사고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상황에 따라 적절한 도구를 선택하고, 그 이유를 제시하며, 비판에 열려 있는 태도다. 이런 사고와 선택, 지적 모험이 바로 ‘현 상황의 지반을 파고드는 작업’이다. 그 지반은 스튜어트 홀(Stuart Hall)의 유명한 표현처럼 ‘돌투성이(stony)’일 수도 있고, 트럼프의 세계처럼 ‘미끄럽고 표면적’일 수도 있다.
내게는 분명하게 느껴진다. 2022년과 달리, 지금 이 순간은 추상적 개념이나 일반화된 힘의 언어가 공허하게 울리는 시기다. 네타냐후는 바이러스가 아니다. 트럼프와 MAGA는 케인스(Keynes)가 투자 심리를 묘사할 때 사용한 ‘동물적 본능(animal spirits)’과 같은 것이 아니다. 마라라고(Mar-a-Lago)의 수영장 주변에서 벌어지는 기묘한 일들은 실제로 중요할 수 있다.
일반화된 설명이 사람과 네트워크라는 구체성으로 붕괴하는 상황은 감당하기 어려운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내가 FT 칼럼에서 주장했듯, 많은 사람들에게는 차라리 국채 시장이 대대적인 매도세에 빠져주는 편이 더 나을지도 모른다. 그러면 우리는 다시금 익명화된 자연주의적 언어(재정 균형, 국채 유동성, 대차대조표)로 돌아가 편안하게 이야기할 수 있다. 하지만 바로 그 순간이, 우리 같은 사람들이 자신의 분석적 편견을 점검해야 할 타이밍이다. 왜 나는 마라라고의 실제 현실보다 ‘마라라고 계획(PLAN)’을 더 이야기하고 싶어 하는가?
이번 FT 칼럼을 쓰게 만든 것도, 금융 전문가들의 초조함 <“대체 언제쯤 국채 시장이 트럼프를 응징할 위기를 보여줄까?”>이었다.
물론 금융 붕괴는 나쁜 일이다. 하지만, 적어도 그것이 일어나면 우리는 여전히 지구 위에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문제는 중력이 사라졌다면 어떻게 되는가? 우리는 이제 어디에 있는가? 우주 공간 속인가?
나는 2024년 11월 ‘마에더 강연(Maeder Lecture)’에서 이런 ‘중력 없는 상태’를 ‘초과행위(hyper-agency)’라는 개념으로 설명하고자 했다.

과도기(Interregnum): 기존 질서가 붕괴하고 새로운 질서가 아직 등장하지 않은 과도기 /초과행위성(Hyperagency): 통제 불가능한 과도한 행위성, 모든 것이 특정 행위자에게 집중되는 상태/허무주의, 쓰레기 시간(garbage time): 의미 없는 시간, 질서나 구조가 무너진 상태(스포츠에서 유래된 용어)
질리언 테트(Gillian Tett)는 최근 비즈니스 로비의 침묵을 다룬 글에서, 인공지능(AI)이 CEO들에게 현재 발생 중인 피해를 외면하고 미래의 초성장(hyper-growth)이라는 전망에 집중하게 해주는 강력한 담론을 제공한다고 지적했다.
이에 비해, 익숙한 국채 시장 위기(bond market crisis)는 우리를 다시 현실로 끌어내릴 수 있다. 그런 위기는 사회적 힘의 논리를 다시 부각하고, 비록 경제적·금융적 스트레스를 감수하더라도 역사의 일관된 흐름이라는 감각을 회복시켜줄 수 있다.
2. 몸(body)
‘위기(crisis)’라는 개념은 그리스어에서 유래하며, 한때 건강하고 일관된 상태였던 몸이 질병에 의해 파괴되는 상황을 떠올리게 만든다. 그런데 지금 이 순간이 질병이나 다른 자연화된 고통으로 사고하기에 적합하지 않다면, 그렇다면 '몸' 자체는 어떤가? 세계를 하나의 통합된 유기체로 상상하고, 의사나 간호사의 도움으로 회복 가능하다고 여기는 사고는 여전히 유효한가?
그에 대한 대답은 “상황에 따라 다르다”이다. 우리가 먼저 던져야 할 합리적인 질문은 이것이다: 누가 그런 방식으로 세계를 바라보려 하는가?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 중 하나는 ‘자신감 넘치는 사회 이론가들’이다. 이들은 거시경제학자, 세계체제 이론가, 마르크스주의 이론가들처럼, 자신이 가진 대서사(master logic)를 통해 세계 전체를 이해할 수 있다고 믿는 이들이다. 근대성이라는 불안정한 토대 위에서 어떻게 그런 이론을 정립할 수 있다고 믿게 되었는지는 또 다른 문제지만, 그들은 그렇게 믿고 있고, 그 믿음은 현실 세계에 실제로 영향을 끼친다.
거시 이론가들과 가까운 친척은 ‘사회적 의사들’이다. 관리자, 헤게모니 기술관료, 즉 세계는 관리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다. 바이든 팀, 그리고 전문 관리자 계층(PMC)이 그 예다. 이들에게(아니, 우리에게) 트럼프와 그 추종자들은 단순한 “문제(problem)”가 아니라, 우리가 세계를 이해하는 가장 기본적인 방식 자체를 부정하는 실존적 도전이다.
기묘하게도, 바로 이틀 전 내 친구들이 운영하는 팟캐스트 AufhebungaBunga가 다시 이 주제로 돌아왔다. 그들은 폴리크라이시스 담론을 신자유주의 질서 붕괴 증후군(Neoliberal Order Breakdown Syndrome)에 시달리는 관리 이데올로기(managerial ideology)의 시각으로 진단했다.
나는 이 해석에 줄곧 공감해 왔다. 다만 한 가지 단서를 붙이자면, 폴리크라이시스에 대한 인식은 관리 이데올로기(managerial ideology)가 자신의 한계를 자각하게 되었음을 의미하며, 이에 따라 그 이데올로기는 되돌릴 수 없이 변화했다는 점이다.
나는 2023년 2월, 나이얼 퍼거슨(Niall Ferguson)과의 특히 상징적인 대화를 나눈 직후, 이 생각을 이렇게 정리했다.
“폴리크라이시스라는 개념은 그 충격을 포착하고, 일종의 변증법적 ‘해결’을 제시한다. 물론 약한 형태의 해결일지라도 말이다.”
‘현 체제 유지’를 주장하는 이들은 여전히 “문제는 경제야, 이 멍청아(it’s the economy, stupid)”라는 구호를 내세우고, 신냉전론자들은 “민주주의 대 독재”라는 기치를 들고 집결한다. 그에 반해, 제3의 입장은 혼란이라는 현실을 직시한다. 그리고 ‘폴리크라이시스’라는 용어는 바로 그 혼란의 감각을 담아낸다.
폴리크라이시스 개념은 변증법의 제3의 순간(thesis–antithesis–synthesis)에 해당한다. 그것은 새로운 세계에 대한 강력한 개념을 제시하거나, 민주주의 대 독재처럼 단일한 긴장 구조로 회고적으로 재구성된 대립에 근거해 과거와 단절을 시도하는 방식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이 개념은, 지난 30년간 낙관과 환멸이 롤러코스터처럼 오가던 역사적 흐름을 “그게 바로 역사다”(퍼거슨)라는 증기기관차 같은 서사로 납작하게 눌러버리는 것을 거부함으로써, 약하지만 변증법적인 해결의 형태를 제시한다.
폴리크라이시스 개념은 실망과 혼란이 현재를 짓누르고 있다는 감각을 지우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명시적으로 드러낸다.
“이건 내가 지난 40년 동안 이런 문제들에 주목해 온 이래로 기억할 수 있는 가장 복잡하고, 서로 다른 요소들이 얽히고 교차하는 도전 과제들의 집합이다.” — 래리 서머스(Larry Summers), 워싱턴 포스트 2022년 10월 14일
LS: “나는 역사학자 애덤 투즈(Adam Tooze)와 많은 점에서 의견이 다르지만, 이번 상황을 설명하기 위해 ‘폴리크라이시스(polycrisis)’라는 용어를 쓴 것은 적절했다고 생각한다. 나는 세계 경제에 있어 이와 비슷하거나 심지어 더 중대한 시기들도 기억하고 있다. 하지만 지금처럼 서로 분리된 여러 측면들과 교차하는 흐름들이 이토록 많은 순간은 기억할 수 없다.” — 래리 서머스(Larry Summers), 파이낸셜 타임스 2022년 10월 7일
나에게 있어 폴리크라이시스는, (2023년 2월의 표현을 빌리자면) 아우프헤붕(Aufhebung, 지양)의 역할을 수행한다.
실제로 구글에 ‘Aufhebung’을 검색해 보면, 다소 유치하지만 내가 생각하는 폴리크라이시스 개념의 또 다른 중요한 특성을 포착한 이미지가 하나 나온다.
“오... 이건 내가 주워야지.”
폴리크라이시스는 단지 복잡한 상황을 묘사하고, 우리가 그 혼란의 깊이에 놀라고 당황하게 되는 지점을 기록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이 개념 자체가 잔해 속에서 발견된 개념이다. 2015/16년 장클로드 융커(Jean-Claude Juncker)가 EU의 상황을 두고 했던 사색 속에서 처음 등장했다. 폴리크라이시스는 지적 보도 위에서 “주워 담은” 개념이자, 개념적 장바구니 속에 집어넣은 아이디어였다.
그렇다면 이 발견된 개념은 무엇을 수행하는가?
물론 폴리크라이시스는 비판도 받아왔고, 2023년 다보스 포럼에선 진부한 클리셰가 될 위험도 있었다. 하지만 이 개념은 키워드로서 세 가지 역할을 수행한다.
첫째, 이 개념은 이전까지는 안정된 것으로 보였던 세계 발전의 궤도를 뒤흔드는 다양하고 낯선 충격을 기록한다.
둘째, 이 충격들 (경제적, 지정학적, 기후적, 전염병적)이 우연히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난 것이 아니라, 누적적이고 내적으로 자기증폭적이라는 사실을 강조한다.
셋째, 이 개념이 널리 사용된다는 사실 자체가, 우리가 미래나 최근의 과거를 해석할 수 있다는 낙관적 자신감이 동시에 피상적이고 구시대적으로 느껴지기 시작했다는 전환의 순간을 나타낸다.
우리가 지금 맞닥뜨린 이 급진적이고 전례 없는 상황을, 단지 낡은 이념적 이분법 ‘독재 대 민주주의’ 으로 단순화하거나, “그게 바로 역사다”라는 지적 곤봉으로 짓눌러버리는 일을 멈추지 않는다면, 우리는 이 상황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고, 상황 속에서 사유하기(in medias res) 역시 불가능해진다.
바로 이것이 오늘 아침 파이낸셜타임스(FT) 칼럼이 계속해서 시도하고 있는 일이다.
상대적인 방향 감각을 다시 잡고, 우리가 2022년 이후 얼마나 멀리 와 있는지를, 그리고 폴리크라이시스라는 개념을 둘러싼 시대착오적 느낌이 왜 지금 이렇게 두드러지는지를 사유하고 설명하는 것이다.
만약 ‘신자유주의 질서 붕괴 증후군(Neoliberal Order Breakdown Syndrome)’이 당시 폴리크라이시스를 규정하는 하나의 방식이었다면, 지금 더 심각한 문제는 상황이 거기서 더 나아가버렸다는 점이다.
결국, 위기(crisis)는 두 가지 결말 중 하나로 이어진다.
하나는 환자가 회복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환자가 죽는 것이다.
[출처] Chartbook 407: Polycrisis revisited: Are we beyond Neoliberal Order Breakdown Syndrome?
[번역] 하주영
- 덧붙이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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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덤 투즈(Adam Tooze)는 컬럼비아대학 교수이며 경제, 지정학 및 역사에 관한 차트북을 발행하고 있다. ⟪붕괴(Crashed)⟫, ⟪대격변(The Deluge)⟫, ⟪셧다운(Shutdown)⟫의 저자이다. 참세상은 이 글을 공동 게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