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정치 무대를 조금이라도 지켜본 사람이라면, 소련 해체 이후 러시아가 심각한 ‘이념적 자기정의의 위기’에 처해 있다는 사실을 쉽게 눈치챘을 것이다. 이는 놀랄 일이 아니다. 지난 한 세기 동안 러시아는 정치적으로 극적인 변화를 겪어왔으며, 그 모든 단계마다 새로운 이념적 정립이 요구되었다.
100년이 채 안 되는 기간 동안, 러시아는 동로마 제국에서 이념적 영감을 얻었던 수백 년 된 군주제를 전복했다. 그리고 이론적으로는 모든 사회가 공산주의를 채택하면 참여할 수 있는 보편적 무계급 국가의 씨앗을 만들었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이 ‘세계주의적’ 프로젝트는 러시아화 되었고, 러시아는 암묵적으로 연방의 ‘상급 파트너’로 간주했다. (하지만 상급 파트너라는 지위가 항상 이익만을 의미한 것은 아니었다. 러시아는 공산당과 과학아카데미를 자체적으로 갖지 않은 유일한 소비에트 공화국이었다.)
그런 다음 러시아는 연방을 ‘짐’으로 여기고 파괴하기로 결정했다. 특히 일부 인구와 지도자는 이를 부담으로 여겼고, 그 결과 러시아는 훨씬 더 영토적으로 축소된 대규모 과두공화국을 창조했다. 그러나 그 짧은 존재 기간 동안, 러시아는 무정부 상태와 ‘사업가이자 암살자’들에 의한 통치 사이를 오갔다. 이후 정보기관이 권력의 정점에 오르면서 완전히 새로운 상황이 만들어졌고, 이에 대한 이념적 정당화가 필요해졌다.
정보기관이 권력의 정점에 오른 러시아의 특수성은 종종 제대로 평가되지 않는다. 제국 시절이든 소비에트 시절이든, 정보기관은 언제나 막강했지만 ‘결정자’는 아니었다. 오흐라나(Okhrana, 러시아 제국 시대의 비밀경찰 기관)는 형식적으로, 그리고 대체로 효과적으로 차르와 그 측근의 통제 아래 있었다. 물론 모든 정보기관이 그렇듯, 때로는 독자적으로 작전을 수행하기도 했다. 가장 악명 높은 예는 노동자 불만을 조장해 ‘가짜’ 노동조합을 만들려 했던 사건이다(결국 이 작전은 완전히 역효과를 냈다). 하지만 오흐라나는 나라를 통치하지는 않았다. 마찬가지로, 체카(ЧК), GPU, NKVD, MVD, KGB의 권력 역시 정치국(폴리트뷰로)으로부터 나왔다. 심지어 스탈린 사후, 소비에트 말기 안드로포프 시기까지도 권력의 원천은 정치국이었다.
최근 한 저자는 NKVD(소비에트 연방의 비밀경찰이자 내무 행정을 담당한 기관)의 ‘전능함’을 대숙청 시기의 대규모 처형으로 입증하려 했다. 그러나 이는 NKVD의 ‘권력’을 잘못 해석한 것이다. NKVD는 단지 스탈린의 명령을 집행했을 뿐이었다. 즉 도구였지, 결정권자가 아니었다. 베리아(Beria, 스탈린 시대 소련의 비밀경찰 수장)조차도 막강한 권력을 가졌지만, 결국 ‘지시받은 대로’ 행동했다. 즉, ‘칼과 방패’(체카 문장에 새겨진 상징)를 모두 통제한 것은 당이었다.
지난 100년 동안 이어진 이런 급격한 변화의 연속은 지적 혼란을 낳았다. 러시아의 ‘국가적 사상’ 혹은 존재 이유는 무엇인가? 옐친은 순진하게도, ‘국가적 이념 공모전’을 열면 이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 믿었다. 러시아는 제국인가, 다민족 연방인가, 특정 민족 기반의 국가인가, 아니면 전 세계 러시아인 공동체(русский мир)인가? 인류의 등불인가, 아니면 이익만 추구하는 제국주의 강국인가?
이런 이념적 혼란은 1990년대 이후 현재 정보기관 정권하에서 절정에 달했다. 러시아 정보기관은 마치 이념이 ‘법령으로 공표될 수 있다’고 믿는 듯하다. 이념이란, 마치 고위직 임명이나 ‘외국 대리인’ 지정과 같은 행정 절차에 불과한 것으로 여겨진다. 즉, 비밀경찰 세 명과 대학 교수 세 명을 사흘간 한 방에 가두면, 그들이 새 ‘국가 이념’을 만들어 대통령 칙령(우카즈)으로 선포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셈이다.
그 결과 푸틴은 서로 양립할 수 없는 두 개의 다른 이념을 만들어냈다. 국내적으로는 러시아를 ‘위대한 제국 민족’으로 규정하며, 공산주의 특히 레닌주의 통치가 러시아의 본질을 훼손했다고 주장하는 이념이다. 푸틴은 2021년 여름 발표한 장문의 역사적 논문에서 러시아 볼셰비키, 특히 레닌을 비판하며, 레닌이 ‘러시아 동부 혁명 정권’(도네츠크-크리보이로크 공화국)을 본래 의사와 달리 우크라이나 공화국의 일부로 편입시켰다고 주장했다. 그 결과 ‘레닌주의 국경’이 인위적으로 ‘러시아인 다수 지역’을 러시아로부터 떼어놓았다는 것이다.
공산주의는 ‘러시아와 러시아다움’을 파괴한 존재로 비난받는다. 대신, 정교회 사제와 수도원장, 성직자 행렬 등 19세기 제정 시대의 종교적 장식들이 부활해, 전선으로 떠나는 병사들을 축복하고, 기념일이나 장례식 때마다 등장한다. 푸틴은 노골적으로 국가(그리고 어쩌면 자신)를 차르 시대의 세 기둥—전제정(autocracy), 범슬라브주의, 정교(orthodoxy)—에 빗대고 있다. 그러나 이 기둥들은 로마노프 왕조 시절에는 나름의 의미가 있었지만, 오늘날에는 ‘전제정’을 제외하면 거의 아무 의미도 없다.
러시아가 ‘슬라브와 정교의 수호자’를 자처하면서 동시에 같은 슬라브·정교 문화를 공유한 우크라이나와 전쟁을 벌이는 것은 자가당착이다. 차르들도 우크라이나 민족주의(당시엔 미미한 정치 세력이었다)를 억눌렀지만, 키이우에 드론을 보내지는 않았다. 전제정조차도 현재 체제와의 유사점은 불안정하다. 제정은 수백 년의 전통과 비잔틴 제정교황주의(caesaro-papism)에 뿌리를 두었으나, 현재 체제에는 그러한 역사적·문화적 기반이 전혀 없다.
하지만 혼란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핵심이다. 푸틴은 해외용으로 완전히 다른 이념을 만들어냈다. 이는 2022년 이후, 우크라이나 전쟁과 함께 더 강화되었다. 그 국제적 서사에 따르면, 러시아는 ‘글로벌 다수’의 새로운 지도자로서, 세계에서 가장 부유하고 강력한 국가들의 패권에 맞서 싸우는 인류의 선봉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1920년대 레닌이 제시한 ‘마르크스주의와 반식민주의 투쟁의 결합’을 어설프게 흉내 낸 희극적인 대체물처럼 보인다. 하지만 레닌은 진지한 이론가였던 반면, 현재의 지도자들은 그렇지 않다. 레닌은 소비에트 연방을 마르크스주의의 핵심 원칙에 따라 계급이 없는 세계주의적 국가의 시초로 보았다. 그런 국가라면 자연스럽게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신흥 민족들이 제국주의로부터 독립하려는 반식민 투쟁의 동맹국이 되었을 것이다. 그렇기에 인도와 중국의 반식민 투쟁을 지원하는 것은 완전히 이념적으로 일관된 행위였다. 비록 그 나라들 내부의 주요 정치세력이 부르주아였더라도, 소비에트 연방은 국제주의와 식민 착취의 종식을 지향하는 국가였기 때문이다.
반면 오늘날 러시아가 국내적으로는 부정하면서 국제적으로는 그 이념을 주장하는 것은 터무니없는 일이다. 스스로 전제주의와 민족주의의 수호자라고 규정하는 나라가, 어떻게 “글로벌 사우스”의 평등한 세계를 향한 투쟁을 이끌 수 있단 말인가? 제국주의와 민족주의의 원칙을 아침에는 한 청중에게 설파하고, 오후에는 다른 청중 앞에서 국제주의자이자 모든 민족의 평등을 옹호하는 사람인 척하는 일은 불가능하다.
이처럼 러시아는 이념적으로 완전한 교착 상태에 빠져 있다. 국내적으로는 이데올로기의 전개 과정에서 차르 체제와 공산주의 체제의 경험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라는 모순이 여전히 존재한다(여기서는 자세히 논하지 않지만). 예컨대 스탈린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승리했기 때문에 위대한 인물인가, 아니면 수백 개의 러시아 정교회 성당을 폭파 악인인가라는 질문이 그 대표적 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결정적인 것은 국내에서는 민족주의를, 대외적으로는 (소위) 국제주의를 내세우는 모순이 전면적으로 드러나고 있다는 점이다. 이 두 입장이 서로 충돌하면서, 러시아의 이데올로기는 그 본질적 모순과 역설적 성격을 완전히 드러내고 있다.
이 문제가 러시아가 어떤 소규모 국가였다면 그리 중요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그러한 경우라면 이념적 모순이 그 나라 내부의 문제로만 머물고, 세계에 큰 영향을 미치지 않았을 것이다(세르비아나 크로아티아가 그 예다). 그러나 러시아에서 지배적인 이념이 무엇인지, 그리고 러시아가 자국의 역사와 세계를 어떻게 인식하느냐는 문제는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 몇 년 안에도 훨씬 더 중대한 의미가 있을 수 있다. 왜냐하면 그것이 더 큰 전쟁과 갈등, 심지어 핵 파멸로 이어질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권력 자체가 언제나 중요하긴 하지만, 그 권력을 어떻게 사용하는가는 국가와 지도자들이 자신들이 무엇을 위해 싸우는가, 그리고 자국민을 무엇을 위해 죽을 수 있다고 설득할 수 있는가에 달려 있다. 바로 그래서 이념의 역할은 과거와 마찬가지로, 오늘날 모든 현대 사회에서도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출처] Russia: An ideology for domestic purposes and another for foreign
[번역] 이꽃맘
- 덧붙이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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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랑코 밀라노비치(Branko Milanovic)는 경제학자로 불평등과 경제정의 문제를 연구한다. 룩셈부르크 소득연구센터(LIS)의 선임 학자이며 뉴욕시립대학교(CUNY) 대학원의 객원석좌교수다. 세계은행(World Bank) 연구소 수석 경제학자로 활동한 바 있으며, 메릴랜드대학과 존스홉킨스대학 초빙교수를 역임했다. 참세상은 이 글을 공동 게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