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48년 6월 28일, 소비에트 정보국(코민포름)을 대표해 이오시프 스탈린(Joseph Stalin)이 유고슬라비아 공산주의자들에게 ‘티토파 집단’(스탈린주의 노선과 결별하고 독자적인 사회주의 노선을 추구한 요시프 브로즈 티토(Josip Broz Tito)의 사상과 정치노선을 따르는 공산주의자를 의미)을 제거하고 ‘올바른 길’로 돌아오라고 요청하는 서한을 보냈을 때, 이 서한을 거부한 유고슬라비아 공산주의자들에게 문제는 단지 소련의 지원 없이 어떻게 생존할 것인가뿐만 아니라 자신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스스로와 세계에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였다. 공산주의자들에게 이데올로기는 매우 중요했다(이 주제는 다음 글에서 오늘날 중국을 배경으로 다룰 예정이다). 공산주의 정책은 경제나 다른 사회 영역에서 단순한 정책으로 보일 수 없었고, 항상 더 높은 목적에 의해 정당화되어야 했다.
따라서 만약 공산주의 운동의 유일한 중심지가 모스크바라면, 유고슬라비아의 공산주의자들은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었던 것일까? 그들은 이 문제를 서한의 충격이 어느 정도 가신 3~4년 뒤에 해결하기 시작했다. 국유화와 중앙 계획 대신, 그들은 사회주의(공산주의 사회의 첫 단계)가 마르크스의 예측에 따라 국가의 소멸과 노동자 집단이 공장들을 소유하거나 적어도 운영하는 체계로 특징지어진다고 판단했다. 이 접근은 그들의 운동에 의미를 부여했다. 단순히 또 다른 공산주의 정권이 아니라 소련 체제보다 마르크스에 훨씬 더 가까운 미래의 체제였기 때문이다.
노동자 경영의 점진적 도입과 노동자 평의회의 설립 등은 1950년대 초에 시작되었다. 여기서 몇 가지 명백한 질문들이 제기되었다. 만약 노동자들이 생산할 품목, 가격 책정 등을 스스로 결정한다면, 그 경제는 시장경제가 되는 것인가? 노동자 집단은 단순한 ‘재화’가 아니라 ‘상품’을 생산하는 것인가? 가치법칙은 여전히 적용되는가? 이 질문에 대한 그들의 대답은 유고슬라비아 체제가 ‘사회주의적 상품 생산’ 체제라는 것이었다. 이는 신고전주의 용어로는 ‘사회주의 시장경제’를 의미한다. 그러나 경제가 시장 기반이라면, 이들 기업의 목적 함수는 무엇인가? 이들은 무엇을 극대화하려고 하는가? 다시 말해, 마르크스주의 용어로 이 체제에서의 정상 가격은 무엇인가?
이에 대한 신고전주의적 해답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풀브라이트 장학생으로 유고슬라비아에 체류 중이던 젊은 미국 경제학자 벤자민 워드(Benjamin Ward)는 1958년에 발표한 기념비적인 논문에서 해답을 제시했다. 그는 기업들이 ‘사회’가 공식적으로 소유한 자본 자산에 대해 고정된 임대료를 지불하면서 노동자 1인당 소득을 극대화한다고 설명했다. 이 임대료는 실질적으로 기업이 사용하는 고정 자산의 가치에 부과되는 세금이었다. 워드의 논문은 이러한 협동조합의 행동에 대해 여러 가지 함의를 제시했다. 이들은 자본주의 기업보다 노동자를 적게 고용하고, 가격이 상승하면 오히려 생산량을 줄이며(‘후방굴절 노동공급곡선’, backward-bending supply curve), 소득을 임금으로 분배하는 것을 선호해 투자에 소극적일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결국 유고슬라비아 및 외국 경제학자들(후자가 압도적이었다)에 의해 이러한 사회주의(노동자 경영) 분권화 기업의 행동에 대한 방대한 문헌이 생성되었고, 이는 표준 신고전주의 틀 안에서 연구되었다. 이 가운데 가장 야심찬 저작은 아마도 야로슬라프 바넥(Jaroslav Vanek)이 1970년에 발표한 2권짜리 『노동자 경영 시장경제의 일반 이론』( General Theory of Labor-Managed Market Economies)일 것이다. 필자도 과거 글에서 이 문헌에 대해 다룬 바 있으며, 젊었을 때는 이에 아주 소박하게 기여하기도 했다.
하지만 크로아티아의 젊은 경제학자이자 정치학자인 마르코 그르데시치(Marko Grdešić)와 미슬라브 지트코(Mislav Žitko)는 그들의 훌륭하고 잘 쓰여진 신간 『유고슬라비아의 사회주의 경제학: 비판적 역사』(Socialist economics in Yugoslavia: A Critical History)에서 이러한 경제사상 흐름에는 관심이 없다. 그들의 관심은 서구 독자들에게는 거의 알려지지 않은 완전히 다른 문헌에 있다. 그것은 많은 유고슬라비아 경제학자들, 그중에서도 권력과 매우 밀접한 이들이 유고슬라비아 체제를 어떻게 상상했는지에 관한 것이다.
그르데시치와 지트코가 연구한 유고슬라비아 경제학자들의 출발점은 방금 설명한 신고전주의 노동자 경영 학파와는 매우 달랐다. 그들은 유고슬라비아를 새로운 세계사적 사회의 선구자로 보았다. 유고슬라비아는 마르크스와 엥겔스에게 영국이 그러했듯, 그들에게 그런 존재였다. 그들의 임무는 마르크스와 동일했다. 새로운 체제와 그 체제의 ‘운동 법칙’을 관찰하고 분석하며, ‘상품을 생산하는 사회주의 기업’이 어떻게 행동하는지를 규명하는 것이었다. 그들의 출발점은 어떤 의미에서 마르크스의 『자본론』이 제기한 전환 문제(transformation problem)였다. 이 문제는 경제가 노동 투입에 따라 가격이 형성되는 단순한 상품 생산 체계에서, 자본 집약도가 다른 생산 부문 간 이윤율이 균등화되는 자본주의 체계로 이동할 때 발생한다. 이때 마르크스의 ‘생산가격’이 새로운 균형 가격이 된다. (이 ‘정상 가격’ 또는 ‘균형 가격’은 참고로 마셜의 장기 가격과 같다. 그러나 여기서 그 점은 중요하지 않다.)
이에 따라 유고슬라비아 경제학자들은 자신들에게 이렇게 물었다. “노동자가 자본가 대신 의사결정을 내리는 우리 체제에서, 자본주의처럼 가치법칙이 적용된다면 새로운 ‘정상 가격’은 무엇인가?” 그르데시치와 지트코는 이렇게 썼다. “사회적 소유와 노동자 평의회를 도입한 유고슬라비아에서 상품 생산은 다르게 작동하는가? 이 나라는 임금 노동을 연대된 생산자 공동체로 전환하려는 시도를 하고 있는가?” (30쪽) 마르크스라면 이 새로운 전환 문제를 어떻게 해결했을까?
유고슬라비아 경제학자들의 자율적 사회주의에 대한 논의는 그렇게 신고전주의 경제학과 완전히 독립된 영역이 되었고, 자본주의만을 연구한 서구의 마르크스주의 경제학과도 대체로 무관했다. 그르데시치와 지트코는 유고슬라비아 경제학의 고립성을 정확히 지적했다. 유고슬라비아의 주요 경제학자들은 워드-바넥-미드 접근 방식에 무관심했을 뿐만 아니라, 랑게-러너의 시장 사회주의나 코르나이의 후기 연구에도 거의 주목하지 않았다. 그들은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의 연장선상에서 비자본주의적 생산양식에 적용된 새로운 접근을 개발하고 있었다. 이는 그들이 서구의 신고전주의 발전을 몰랐기 때문이 아니라, 유고슬라비아 체제를 인류가 보다 효율적이고 정의로운 사회로 이행하는 과정의 연속으로 보았기 때문이었다. 즉, 봉건주의 다음에 자본주의가 있었고, 이제는 유고슬라비아처럼 기업의 민주적 경영 체계가 등장한 것이다. 이것은 매우 단순하고도 강력한 틀이었다. “우리는 이 새로운 체제를 연구함으로써 미래 세계가 어떤 모습일지를 알아야 한다.” 그르데시치와 지트코는 서문에서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유고슬라비아 지식인의 특이한 성격, 즉 매우 이례적인 우월감에 대한 논의를 시도한다. 유고슬라비아인들은 점차 거대한 서사를 구축했다. 마르크스주의적 용어를 빌리자면, 그들의 사회는 세계에서 유일하게 사회주의적 자유를 실현한 등불이었다… 유고슬라비아는 파리 코뮌과 러시아 혁명의 초기 소비에트의 유일한 진정한 계승자였다.” (4쪽)
이러한 논의 속에서 두 가지 주요 학파가 등장했다. 하나는 1970년대에 마르크스를 모방해 노동자 경영 경제에 관한 3권짜리 저작을 출간한 밀로라드 코라치(Milorad Korać)가 주도한 ‘소득 가격(income price)’ 학파였고, 다른 하나는 ‘특수 생산가격(specific price of production)’을 정상 가격으로 제시한 조란 피야니치(Zoran Pjanić)가 이끈 ‘이윤 학파’였다. 오늘날의 시점에서는 이 두 학파 사이에 어떤 실질적인 차이가 있었는지 분간하기 어려울 때도 많다. 코라치는 논리적으로 더 일관되었지만 더 순진하고 교조적인 면도 있었다. 그는 분권적 사회주의 체제에서 생산자의 목적 함수는 자본주의 기업과 같을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의 관점에서 노동자는 순소득을 극대화한다. 다른 ‘상품 생산자’처럼 자신들의 생산 과정 내 위치를 반영하는 어떤 변수를 극대화하지만, 그 변수는 자본주의 하에서와는 다르다. 슘페터식 자본가 기업가는 총이윤을 극대화하지만, 노동자 기업가는 자본 감가상각 이후 남는 순소득을 극대화한다.
코라치의 관점에서는 심지어 고정 자산에 대한 수익도(국가는 점차 이에 대한 임대료 부과를 중단했다) 노동 집단의 몫이었다. 소득 학파의 전반적 접근은 상당히 자유방임적이었다. 특히 임금과 축적 사이의 균형이라는 주제에 있어 더욱 그러했다. 많은 경제학자들이 노동자들이 높은 임금을 받고 축적을 희생할 것을 우려했지만, 코라치는 이 주장을 반박하는 데 많은 세월을 보냈다(57쪽). 사실상, 소득 학파는 좌파 자유지상주의 또는 아나키즘적 입장에 근접해 있었다. 노동자 평의회가 어떤 결정을 내리든 그 결정은 정당했다. 그들이 모든 소득을 고임금으로 나누고 투자를 전혀 하지 않기로 해도, 그것이 옳은 결정이었다. 일부 영향력 있는 정치인인 스베토자르 부크마노비치 템포(Svetozar Vukmanović-Tempo) 같은 인물은 임금에 상한을 두어서는 안 되며, 세금도 최소한이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만약 집단의 소득이 그들의 노동의 산물이라면, 세금으로 이를 줄여야 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소득 학파는 결국 노동 집단을 신성시하는 데까지 나아갔다. 그들은 잘못을 저지를 수 없는 존재로 여겨졌다.
반면 피야니치의 관점에서는 노동자 집단도 자본가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들은 감가상각과 임대료를 제하고 난 뒤의 ‘이윤’을 극대화하고자 했다. 따라서 피야니치는 시장 사회주의 체제에서의 정상 가격이 자본주의 하에서의 생산가격과 구성 요소 면에서 다르지 않은 ‘특수 생산가격’이라고 보았다. 이윤 학파는 노동자들이 투자를 포기하고, 혁신을 외면하며, 고임금을 자처하고, 휴가를 즐기고, 비용 인상에 의한 인플레이션을 일으키는 현상에 대해 실제로 걱정했다. 이는 1960~70년대에 유고슬라비아 경제가 실질적으로 매우 강한 형태로 보여준 모습들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소득 학파가 거의 포기한 거시경제 정책에도 더 많은 관심을 가졌다. 소득 학파는 “노동자”가 스스로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에 더 집중했다.
이 책은 또한 브란코 호르바트(Branko Horvat)와 알렉산데르 바이트(Aleksander Bajt) 같은 두 주요 학파에 속하지 않은 저명한 유고슬라비아 경제학자들의 입장도 함께 다룬다. 호르바트는 마르크스주의와 좌파 케인스주의를 결합해 연방정부 기능을 강화하고 예측 가능한 틀 안에서 기업이 번영하도록 해야 한다고 보았다. 그는 노동자 경영 경제가 항상 자본주의 경제를 능가할 것이라고 믿었다. 바이트는 거시경제 운용에 훨씬 더 관심이 있었고, 약 30년간 지속된 월간 경제 동향 보고서를 통해 유고슬라비아 경제를 누구보다 잘 이해한 인물이었다.
이러한 ‘소득 학파’와 ‘이윤 학파’ 간의 논쟁은 유고슬라비아의 파국적 해체, 노동자 경영 체제의 해체, 자본주의 경제학으로의 복귀와 함께 완전히 무의미해졌다. 그르데시치와 지트코는 1989년 이후 자그레브 대학교 도서관에서 이 두 학파와 많은 유고슬라비아 경제학자들이 논쟁했던 방대한 저작물들을 아무도 대출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르데시치와 지트코의 책이 가진 가장 큰 미덕은 이 저작들을 엥겔스의 표현대로 35년간 “쥐의 비판적 갉아먹기”에 노출된 상태에서 되살려, 상세하고, 통찰력 있고, 공정한 비판에 부쳐 경제학의 지적 역사라는 한 부분을 보존했다는 것이다. 이는 오늘날에는 대부분 구시대의 유물로 여겨질지 몰라도, 그 미래가 우리를 다시 놀라게 할지도 모른다.
[출처] From under the rubble - by Branko Milanovic
[번역] 하주영
- 덧붙이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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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랑코 밀라노비치(Branko Milanovic)는 경제학자로 불평등과 경제정의 문제를 연구한다. 룩셈부르크 소득연구센터(LIS)의 선임 학자이며 뉴욕시립대학교(CUNY) 대학원의 객원석좌교수다. 세계은행(World Bank) 연구소 수석 경제학자로 활동한 바 있으며, 메릴랜드대학과 존스홉킨스대학 초빙교수를 역임했다. 참세상은 이 글을 공동 게재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