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들바위를 떨어뜨리는 법, 〈오, 발렌타인〉

다큐멘터리 <오, 발렌타인>의 포스터. (주)시네마 달 제공.

홍진훤 감독의 장편 다큐멘터리 <오, 발렌타인>이 지난 11일 극장 개봉했다.

<오, 발렌타인>은 2004년 2월 14일, 박일수 열사의 죽음에서 시작된다. 성 발렌티노가 순교 후 매장되었던 날, 발렌타인데이였다. 당시는 IMF 이후 파견법 도입으로 비정규직 체제가 빠르게 자리 잡던 때였다. 현장에서는 어용과 민주의 경계가 흐려지고, 원청과 하청 노동자 간의 갈등이 분출했다. 영화에는 현대중공업 노조가 하청노조 박일수 열사의 영안실을 침탈하는 등의 장면이 그대로 담겼다.

곧이어 영화는 두 인물의 이야기로 초점을 옮긴다. 부울경 지역에서 노래해 온 민중가수 우창수와 전 현대중공업 하청노조 위원장 조성웅이다. 지금은 공장지대를 떠난 두 사람은 각각 동요와 시라는 예술로서 운동의 여정을 이어간다. 영화는 박일수 열사를 기억하는 두 사람의 현재를 나란히 배치하며, 과거 울산의 투쟁현장과 지금 그들이 살아가는 자연을 교차시킨다.

<오, 발렌타인>은 2025년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프런티어 섹션에 초청되었으며, 같은 해 부산다큐필름페스티벌 폐막작으로 상영된 바 있다. 이번 극장 개봉은 제작·배급사 시네마 달이 지난 2월 텀블벅에서 개봉 프로젝트를 통해 목표 금액을 초과 달성하며 이루어졌다.

영화 초입부터 등장하는 거대한 흔들바위는 모두가 애써 흔들어보지만, 정말로 떨어지지는 않을 것 또한 알고 있는 모순의 존재다. 감독의 시선에서 자본주의 체제에 맞선다는 노동운동의 모순, ‘민주노조’ 내부의 "명령화된 질서”는 이 흔들바위로 연결된다. 한 노동자의 죽음에서 출발한 질문은, 영화가 진행될 수록 다른 방향으로 뻗어 나간다. 노동자는 '한마음'이 될 수 있을까. 노동 계급은 흔들바위를 떨어뜨릴 수 있을까. 

<오, 발렌타인> 스틸이미지. (주)시네마 달 제공.

아래는 홍진훤 감독과의 일문일답.

Q. 박일수 열사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제작하게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2004년에 박일수 열사가 분신하셨다는 소식을 들었어요. 저는 2000년대 초반부터 집회장을 들락날락하면서 사진을 찍던 사람이었고요. 당시에는 노동자들이 많이 돌아가시던 시기였기 때문에, 또 한 분의 하청 노동자가 돌아가셨구나 정도로 생각했어요.

그런데 이후 뉴스에서 나오는 이야기들이, 한 번도 상상해보지 못했던 내용들이더라고요. 정규직 노동조합이 하청 비정규직 노동조합을 탄압했고, 영안실을 침탈했고.. 그때만 해도 ‘노동자 계급’이라든지, 하나 된 노동자의 힘이 세계를 변혁하는 주체가 될 것이라는 믿음이 꽤 공고했던 것 같은데, 그 믿음이 무너지는 풍경을 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 믿음이 무너진 이후의 운동은 어떻게 가능할까 하는 생각도 들었고요. 저에게는 굉장히 충격적인 일이었고, 그때부터 언젠가는 이 이야기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20년이 걸렸네요.”

Q. 영화가 박일수 열사에서 시작해 인터뷰이들의 삶으로 초점이 옮겨지는데, 어느 정도 계획된 구성이었나요.

“박일수 열사 투쟁에 대한 다큐멘터리 영화가 이미 두 편 있어요. <죽음의 공장>과 <유언>이라는 영화인데, 그 영화들이 열사 투쟁의 의미와 당시의 시국성을 충분히 잘 기록해놓으셨더라고요. 저는 20년의 시차를 두고 이 이야기를 하는 것이기도 해서요. 아까 말씀드린 ‘믿음이 붕괴된 사건’ 이후에 노동운동도 변화하기 시작했고, 노동운동을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도 달라졌고, 어떤 이념이 세계를 바꿔낼 수 있다는 믿음도 점점 상실되어 갔고요.

그래서 이 영화에서 박일수 열사 투쟁은 작업의 입구로 작용하고, 결국에는 ‘지금 살고 있는 사람들은 어떤 가능성을 품을 수 있는가’를 이야기하기 위해 기획했던 것이었어요. 특히 조성웅, 우창수 두 분은 박일수 열사 투쟁을 함께 하셨던 분들이고, 그분들 표현대로라면 그 싸움에서 패배한 이후 각자의 삶으로 들어가신 분들이거든요. 산으로 들어가시고, 늪으로 들어가시듯이요. 그런데 그 이후에도 운동의 한계, 현장의 한계, 이념의 한계 같은 것들을 놓지 않고 계속 고민하시면서 새로운 가능성을 찾으려고 하고 계시더라고요.

그래서 그분들의 말을 그대로 전달하기보다는, 박일수 열사의 투쟁과 이 두 분이 고민하고 계신 풍경과 방법을 통해 관객들이 각자의 자리에서 스스로 어떤 가능성을 찾아보는 게 중요하겠다 싶었어요. 그래서 박일수 열사에서 그 두 분의 이야기로, 또 나중에는 점점 어떤 이미지가 서로 충돌하면서 생기는 힘의 작용 같은 것에 집중하기도 하고. 그러면서 영화가 어디론가 가게 되었네요.


<오, 발렌타인> 스틸이미지. (주)시네마 달 제공.

Q. 영화를 보면서 ‘독하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민주노총에 대한 비판이라던지, 원청노조 조합원들의 얼굴이 모자이크 없이 그대로 나오는 장면 등에서 부담은 없으셨나요.

“누군가는 화를 낼 수밖에 없는 영화라고 생각했고, 전 작업인 ‘멜팅 아이스크림’도 마찬가지였어요.

저는 예술이 지금 사회에서 해야 하는 일 중 하나가 어떤 사회의 실재적인 '위험'을 만들어내는 것이라고 생각하는데요. 그 위험이 만들어져야 그 지점에서부터 생각과 논의가 시작될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러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불편은 만들어질 수밖에 없다고도 생각하고요.

이번 영화에는 88~89년 현대중공업 128일 투쟁 사진들이 슬라이드 쇼로 나오는데, 그 투쟁이 한국 노동운동사에서 가장 영웅적인 투쟁으로 묘사되곤 하잖아요. 그런데 그 주체들이 박일수 하청 노동자의 투쟁을 탄압하는 주체로 이어지는 과정 자체가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했어요. 그걸 드러내지 않고서는 이 이야기를 하기가 어렵다고 봤습니다. 그래서 누군가는 욕을 할 것이고 불편해하시겠지만, 그것은 제가 감내해야 하는 부분이고 모든 작업에는 그런 부분들이 있다고 생각하는 편이라, 네 그렇게까지 크게 생각하진 않았습니다.”

Q. 민중언론 참세상과의 인연도 있다고 들었습니다.

“저는 운동을 했던 사람은 아니고요. 집회나 투쟁의 시공간 자체를 좋아해서 그곳을 찾아다니던 사람이었어요.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사진도 찍고 작업도 하게 됐고요. 그런데 모든 집회를 다 갈 수는 없으니까, 거의 매일 참세상에서 올려주는 영상들을 보면서 현장을 접했어요. 그래서 참세상이라는 매체가 제 세계관을 만드는 데 굉장히 큰 영향을 줬습니다. 저에게는 일종의 버팀목 같은 존재였어요.

저번 ‘멜팅 아이스크림’이라는 작업을 하면서요.—그 영화는 민주화 운동 때 찍힌 사진이 손상되고, 그 손상된 필름을 복원하는 과정에서 욕망이나 영웅주의와 같은 것을 발견하게 되며 그것을 비판하는 영화인데요—민주화 운동의 영웅들이 권력자가 된 세상, 그 세상에 맞서 싸웠던 비정규직 투쟁의 이미지들이 삭제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있었어요. 그래서 그때 참세상의 비정규직 투쟁 푸티지들을 선명해지고 복원되어가는 민주화 운동 사진의 대척점에 세워서 작업을 했었거든요. 참세상이 카피레프트 정책을 써주셨기 때문에 가능한 것도 있고, 그래서 그런 고마움과 리스펙이 늘 있기 때문에 참세상은 늘 마음 한켠에 있는 곳이죠.”


<오, 발렌타인> 스틸이미지. (주)시네마 달 제공.

Q. 어깨가 무거워지는 답변이네요. 더 열심히 취재하겠습니다. 마지막으로 관객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요.

“이 영화가 워낙 복잡하고 혼란스럽기 때문에, 관객마다 느끼시는 지점이 다 다르더라고요. 저는 그게 중요한 것 같아요. 감독의 생각이나 인터뷰이의 생각이 잘 전달되는 것보다, 영화를 통해 각자의 삶이 재인식되고, 주변의 상태들이 다시 맥락화되거나 재확인되는 상황이 발견되기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굳이 이야기하자면.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가 지옥처럼 보일 수 있지만, 그 지옥은 자연스럽게 생겨난 것이 아니라 그것을 막기 위해 싸웠던 사람들이 분명히 있었고, 그 싸움은 목숨을 내놓을 정도로 뜨거운 사랑과 투쟁이었다고 생각해요. 우리는 그 싸움에서 패배했고, 그 결과가 지금의 현실이라면, 지금 우리가 하는 선택과 실천이 또 어떤 결과를 만들어낼 것인지—지옥을 더 만들 것인지, 아니면 막아낼 것인지—를 각자 고민해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덧붙이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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