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 그 벅찬 전사(前史)

[특별기획 : 굿바이 한겨레](1)- "민주화는 한판의 승부가 아닙니다"


세계 언론사에 기록될 만한 한겨레의 탄생

자산규모 580억, 연간매출액 805억, 주주수 6만1천여명에 자본금 311억, 60만 독자와 동종업계 영향력 3위. 5실5국3사업단 35부의 조직규모와 4개매체를 발행하는 주식회사 한겨레신문이 내놓은 자신들의 2004년 성적표다. 조중동한테야 한참 모자라지만 재벌신문 3곳의 다음 자리를 한겨레가 차지하고 있다는 데는 이론의 여지가 없을 듯 하다. 민주인사 3천5백여명이 발기인으로 참여했고 2만7천여명의 소액주주가 50억원의 종잣돈을 모아 양평동 허름한 건물에서 중고 윤전기로 창간호를 찍어낸 88년 5월 15일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다.

한겨레의 탄생은 세계 언론사에 기록될 만 한다. 해직기자들이 주축이 되어 그야말로 전국민을 대상으로 창간기금을 모아 전국적 규모의 일간신문을 창간한 예는 한겨레 이전에도 없었고 아마 그 이후에도 힘들 것이라는 전망이 지배적이다. 외국의 경우 노동조합의 조직적 지원이나 정당 기관지로 출발한 진보적 매체들을 찾아보기는 어렵지 않지만 한겨레 처럼 '맨땅에 헤딩'해서 창간한 곳은 찾기가 힘들다.

조선투위와 동아투위라는 창간의 양대 축

70년대부터 진행된 언론민주화 운동의 양대축인 조선투위와 동아투위를 기반으로 1987년 7월 '새언론 창설연구위원회'를 구성해 동아일보 편집국장을 지내다 언론탄압에 반발해 사표를 던진 존경받는 언론인 송건호를 새 신문 창간의 전면에 내세웠다. 창간 기획 3인방으로 정태기, 이병주, 김태홍이 꼽히는데 이들은 현재 각각 한겨레신문사 사장, 한국광고연구원 회장, 열린우리당 국회의원을 지내고 있다.

6월 항쟁이 열어젖힌 공간을 놓치지 않은 '새언론 창설연구위원회'는 일사천리로 작업을 진행해 나갔다. △87.9 창간발의자대회 개최, 창간발의문 발표 △87.10 새 신문 제호 '한겨레 신문'으로 결정 △87.11 창간발기인 3,342명 명단발표 창간기금 모금 시작 △87.12 한겨레신문주식회사 창립총회 대표이사 송건호 선임.

주식회사 설립을 마친 한겨레는 88년 1월 신입사원 및 경력사원 공채모집 공개를 냈다. 지금이야 언론고시다, 입사경쟁률이 1:100을 넘는다는 소식은 뉴스 거리도 아니지만 웬만한 학교를 나오면 다들 대기업에 가던 그 시절 한겨레 신입기자 공채 시험에는 33명 모집에 8천명이 넘는 인원이 응시했다.

경력사원 공채도 만만치 않았던 것이 월급이 절반 이상 깎이는 것을 감수하고 중앙언론사와 지방신문사에서 젊은 기자 48명이 경력기자로 합류했다. 지금은 유려한 문체를 자랑하는 리버럴리스트로 잘 알려졌지만 당시에는 코리아 타임즈의 젊은 기자에 불과했던 고종석, 한겨레 창간사무국을 불쑥 찾아와 보태 쓰라고 돈봉투를 내밀었던 그 또한 멀쩡히 잘 다니던 자기 회사에 사표를 던지고 한겨레에 합류했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한겨레는 공채 1기를 뽑을 떄부터 학력과 성적에 제한을 두지는 않았다.

"오늘의 제도언론은 국민을 오도할 수 밖에 없을 것"

한겨레의 창간발기선언문은 "오늘 우리는 언론사상 유례를 찾아보기 어려운 범국민적인 모금에 의한 새 신문의 창간을 선언합니다"로 시작된다. "우리가 굳이 새 신문을 창간하고자 하는 것은 국민의 목소리와 민족의 양심을 대변하는 바르고 용기 있는 언론이 없기 때문"이라고 창간 이유를 밝힌 한겨레는 "오늘의 언론현실의 탄압과 결과라기보다는 많은 경우 자진 협조의 결과로 볼 수 밖에 없다"며 권력에 스스로 굴복하는 언론현실을 고발했다.

또한 "오늘의 제도언론은 그 기업구조로 보아 비록 이 땅에 민주화의 꽃이 핀다 해도 정치적, 경제적 자주성을 견지하지 못한 채 필경은 권력의 입장에서 국민에게 진실을 전하지 못하고 그들을 오도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며 이미 88년에 오늘의 언론현실을 경고했다.

6월 항쟁의 결과물인 대통령 직선제에도 불구하고 전두환의 후계자 노태우가 13대 대통령으로 당선됐다. '민주진영'을 엄습한 허탈감이 창간 작업에 악영향을 끼치리라는 부정적 전망을 한겨레는 보기좋게 뒤집었다.

'민주화는 한판의 승부가 아닙니다'

'민주화는 한판의 승부가 아닙니다'라는 명카피와 함께 실린 창간 모금기금 광고는 대성공을 거뒀다. 6월 항쟁이 열어놓은 공간을 발빠르게 치고 들어갔듯이 대선 이후 허탈감을 새신문에 대한 기대로 연결 시킨 것이다. 대선 전 1달 동안 10억원 모금에 그쳤던 것이 대선 이후 두달 동안 40억이 모여 88년 2월 말 한겨레는 50억의 창간기금 모금을 완료했다. 그해 4월에는 악명높은 언론기본법의 장벽을 뚫고 정기간행물 등록증을 교부 받았고 드디어 5월 15일 일요일, 역사적인 한겨레 창간호 50만부가 발행됐다.

조선 '오륜행실도' 본문의 목판 글씨체로 '한겨레신문'이라는 다섯자의 도안이 선정되고 목판화가 유연복의 '백두산천지도'가 배경 그림으로 정해진 제호 아래 발행된 창간호는 1면에 백두산 천지의 사진을 크게 실었다.

한겨레 창간을 목이 빠져라 기다리던 사람이던, '저런게 무슨 신문이냐'고 폄하하던 사람이던 관심이 집중되었던 탓에 한겨레 창간호는 불티 나게 팔렸다. 두 부류의 독자 모두 한겨레를 '또 하나의 신문'이 아니라 '전혀 다른 신문'으로 인식했다.

그야말로 '혁명적'이었던 한겨레 창간호

한겨레 창간호는 그야말로 '혁명적'이었다. 한자병용과 세로쓰기가 대세였던 당시 한겨레는 한글전용과 가로쓰기를 채택했다. 당시는 물론이고 오늘날 까지도 정치부, 사회부, 경제부 식의 부편성에 청와대 출입기자, 경찰 출입기자, 국회 출입기자 식의 출입처 중심 편재를 과감히 거부한 한겨레는 '정치경제부' '민권사회부' '민족국제부' '생활환경부'등 낯선 이름으로 부서를 나눴고 임명식 편집국장 체제가 아닌 선거를 통한 편집위원회 체계를 갖췄다. 물론 지금 한겨레는 일반 신문들과 대동소이한 편재를 갖추고 있다.

내용면에서도 스포츠면을 두지 않았을뿐더러 주식시세표를 싣지도 않았다. 부편성이 일반 언론을 닮아간 것과 마찬가지로 오늘날 한겨레는 스포츠면은 물론 골프기획을 싣고 있고 주식시세표가 안 나오는 월요일에는 아파트 시세표를 싣고 있다. 또한 한겨레 창간호에서는 현대건설 노조설립추진위원장 서정의 실종사건에 대한 검찰 수사 속보가 특종으로 실렸고 '한국언론 국민의 대변자인가, 카멜레온 인가?'라는 기획기사를 비롯한 한겨레에서만 볼 수 있는 기사의 전주곡을 전했다.

공안당국, 한겨레 안착의 일등공신

이러한 색깔 탓인지 어린 한겨레는 권력과 자본으로부터 수많은 탄압을 받았다. 청와대는 '기자실이 좁다'는 말도 안되는 이유를 들어 창간 이후 2년이 넘게 한겨레의 청와대 취재를 막았고 '촌지거부'를 윤리강령으로 채택한 한겨레 기자들은 자신들의 출입처 기자단으로부터 노골적인 왕따를 당해야 했다. 마침내 한겨레는 창간 1년만에 노태우 정권으로부터 '편집국 압수수색'이라는 한국 언론 사상 초유의 탄압을 당해야만 했다.

이유인즉슨, 밀입북 혐의로 체포된 국회의원 서경원이 방북하기전 당시 한겨레 윤재걸 기자가 그를 단독인터뷰 했다는 사실이었다. 공안당국은 '불고지죄' 혐의로 윤재걸에게 사전 구속영장을 발부했고 취재수첩을 빼앗기 위해 안기부 수사관, 사복체포조, 전경, 소방차, 구급차등을 동원해 한겨레 직원들을 끌어내고 압수수색을 강행했다.

그런데 공안당국의 이런 무리수는 결국 한겨레에게는 전화위복으로 다가왔다. 한겨레는 89년의 이 공안정국 동안 창간기금의 두배가 넘는 117억의 발전기금을 국민들로부터 모금해 완전히 언론시장에 안착했다. 안기부와 경찰이 한겨레의 일등공신이 된 셈이다.

[특별기획 : 굿바이 한겨레]

(프롤로그) - 88년의 운동권 신문, 2004년 업계 4위로
1회 - 한겨레, 그 벅찬 전사(前史)
2회 - ‘민주화’의 도래 그리고 시작된 변모
3회 - 새로운 이너서클
4회 - 상생? 상생!
5회 - 인간의 얼굴을 한 신자유주의 가능한가?
6회 - 노동운동을 순치시켜라!
7회 -‘그들’과 ‘우리’ 변하는 것과 변하지 않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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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소리

    대갈빵이 아닌 발로 뛰는 기사로 진정한 매체비평이 되길 바라오. 진보라는 이름으로 비평의 영역에서 자유로워서는 안되니. 정확하고 적확한 비평을 바라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