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회 원 구성 논란: 민주주의 '맥락' 이해하기

국회가 또 난리다. 10일 본회의에서 더불어민주당이 11명의 상임위원장을 일방 선출한 것이다. 정상적으로 절차가 진행됐더라면 18명의 상임위원장을 모두 뽑았을 것이다. 그러나 법사위, 운영위 등의 배분을 놓고 합의가 되지 않은 상태에서 국회의장이 국민의힘 의원들을 임의로 각 상임위에 배정한 채 절차가 이뤄졌기 때문에, 여당은 이에 반발해 전원 사임계(상임위)를 제출하고 본회의장에서 퇴장했다. 더불어민주당은 7개의 상임위원장 자리를 놓고 추가 협상을 이어간다는 방침이지만 여당의 태도가 달라지긴 어려운 조건이기 때문에, 결국 이번에도 지난 국회처럼 18명의 상임위원장을 전부 더불어민주당이 독식하는 사태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

 출처: Unsplash, Hansjörg Keller

국민의힘의 논리는 원내 1당이 국회의장, 소수당이 법사위원장, 여당이 운영위원장을 맡는 것이 참여정부 이후 확립된 국회 운영의 관례라는 거다. 이러한 주장은 애매한 대목이 있지만 대체로 사실이다. 여기서 ‘애매한 대목’은 원 구성의 관례를 논한 이래 대통령 임기 중에 치러진 총선에서 야당이 단독으로 과반 이상의 의석을 점한 사례가 처음이라는 데에서 나오는 문제다. 이전엔 법사위는 야당이 맡는 게 관례라는 주장도 있었기 때문이다. 대체로 총선 직후 1당은 여당, 소수당은 야당이었으므로 법사위는 야당 몫이라고 소수당 몫이라고 하든 상관없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의미가 달라졌기 때문에 달리 해석할 여지가 있다.

21세기의 극우 포퓰리즘 등을 비판하면서 민주주의 담론을 논할 때 종종 인용되는 스티븐 레비츠키와 대니얼 지블렛의 저서 <어떻게 민주주의는 무너지는가>는 민주주의가 비공식적 규범, 즉 상호관용과 제도적 자제 등에 의존하는 것으로 유지될 때 성공할 수 있다는 취지의 주장을 내놓는다. 이러한 주장의 연장선에서 보면 비민주주의자는 현행 제도를 부정하고 공격하면서 경쟁자를 인정하지 않는 전략을 주로 편다. 그렇다면 오히려 비민주주의자는 제도를 자신에게 유리하게 바꾸려 하고, 이러한 시도의 정당성을 그럴듯한 포장지로 감싸는데 익숙할 것이다. 이런 잣대를 들이댄다면 관례를 파괴하고 개혁이니 견제니 하면서 상임위원장을 독식하는 더불어민주당은 민주주의를 파괴하고 있는 것일지 모른다. 이와 유사한 관점은 지난 대선 때도 중도보수적 유권자층과 진보 이탈층에서 주되게 관찰되었다. 이러한 인식을 공유하는 유권자 집단은 더불어민주당을 연성독재, 포퓰리즘 등의 규정 안에 집어넣고 이의 여집합으로서의 ‘정상적 정치’를 상정했다. 이런 맥락에서 국민의힘과 윤석열 당시 후보는 이러한 ‘정상적 정치’를 펼칠 가능성이 있는 주체로 간주되었다.

그런데 이러한 시각의 한계는, 가령 바로 그 상호관용과 제도적 자제를 내세우는 이상적 정치 집단이라는 관념의 상정이 비민주주의자를 길러내는 토양이기도 하다는 점을 외면한다는 것이다. 단순한 도식으로 말하자면 엘리트주의가 있기에 포퓰리즘이 가능한 것이고, 동시에 포퓰리즘이 있기에 엘리트주의가 자기 자리를 되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트럼프가 집권했기에 바이든이 권력을 잡을 수 있었고, 바이든이 대통령이 됐기에 트럼프가 반격을 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어떻게 민주주의는 무너지는가>를 단순하게 읽는다면 결론은 정치인들에게 어떤 양식을 요구하는 것으로 귀결될 것이다. 양식있는, 지킬 것은 지키며 선을 넘지 않는 신사들이 주도하는 현실 정치! 그러나 바로 그 정치가 빚어내는 현실의 고통은 사라지지 않고 심지어 정당화하기 때문에, ‘선출된 독재자’가 되기를 원하는 이들을 위한 자리는 다시 마련된다. 상호관용, 제도적 자제와 극우포퓰리즘적 행동 양식은 동전의 양면이면서 한 몸이다. 따라서 누가 독재자, 포퓰리스트고 누가 신사인가를 찾아 딱지를 붙이는 것으로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어떤 맥락에서의 어떤 정치냐가 그래서 중요하다. 다시 상임위원장 배분 문제로 돌아가면, 여당이 더불어민주당을 향해 “왜 관례를 무시하느냐”, “너희는 민주주의 파괴범이다”라고 해봐야 소용이 없다는 거다. 여당이 국회 관례의 존중을 통해 관철하고 싶은 일이 용산의 방탄 전략을 충실히 이행하는 것임을 부정할 수 없는 상황에선 확실히 그렇다.

더불어민주당의 논리는 이런 거다. 윤석열 정권과 여당은 해병대원 특검, 김건희 특검 등에 대해 또다시 거부권을 행사하고 방탄 전략으로 일관할 것이다. 그런데 해병대원 특검의 경우 7월이 지나면 주요 전자 기록 정보의 보존 연한이 만료된다. 따라서 약 9개월의 시일이 필요한 국회법의 패스트트랙에 의존해서는 목적을 달성할 수 없다. 법사위를 해병대원 특검에 동의하는 세력이 장악해야 한다.

이게 바람직한 방식인지에 대해선 논란이 있을 수 있다. 다만 현실 정치의 맥락에서 더불어민주당을 중심으로 한 범야권의 이러한 주장은 설득력이 없지 않다. 만일 여당이 정치적 제스추어를 통해 더불어민주당의 주장을 논파하려면 해병대원 특검이라는 쟁점을 해소해야 한다. 가령 특검을 수용하거나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 자제를 설득하겠다고 약속하면서 “원 구성은 국회 운영이라는 맥락에 한정해 논의하자”고 제안할 수 있다는 것이다.

운영위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더불어민주당은 영부인 문제 등 대통령실 운영의 문제를 들어 운영위 장악의 필요성을 주장했다. 그러면 적어도 여당은 제2부속실 당장 설치(대통령이 검토를 약속했으나 아직까지도 조짐이 없다)나 특별감찰관 추천을 약속하면서 제도적 자제와 상호관용의 필요성을 논해야 한다. 이렇게 해야 원 구성을 둘러싼 협상에서 ‘관례를 지키라’고 주장하는 데 대한 명분을 확보할 수 있다. 그런데 여당은 총선 대패에도 유지되는 수직적 당정관계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없었다. 그렇게 할 수 없으니, 더불어민주당의 상임위 독식이 여론에 의해 용인되는 조건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최근 더불어민주당의 타락을 시사하는 또 하나의 사실로 회자된 것은 국회의장 선출 문제인데, 이것 역시 마찬가지 맥락 안에 있다. 여당을 비롯한 보수적 논자들은 더불어민주당 의원들이 국회의장 후보로 우원식 의원을 선출한 이후 강성 당원들의 반발이 이어지자 향후 국회의장 후보 선출 시 당원의 의사를 일정 비율 이상 반영하기로 한 데 대해서도 대의민주주의가 파괴되고 있다는 취지의 평가를 이어가고 있다. 이러한 평가에는 국회의장은 국민을 대표(국민의 대표자를 대표하므로)하는 사람이지 특정 당 소속의 당원을 대표하는 이는 아니라는 논리가 가장 많이 등장한다.

그런데 국회의장을 더불어민주당 소속 국회의원들이 사실상 선출하면 ‘국민의 대표’가 되고, 더불어민주당 소속 당원들의 의향이 일부 반영되면 ‘당원의 대표’가 된다는 논리는 따지고 보면 합리적으로 받아들이기 어렵다. 애초에 국회의원이든 아니든 더불어민주당에 소속된 구성원이 국회의장을 정하는 결과가 되는 건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는 이유는 국회의원이냐 당원이냐의 문제가 아니라 ‘국회의장은 원내 1당이 한다’는 관례를 따랐기 때문이다. 국회법은 국회의장을 단지 국회에서 선출하도록 하고 있을 뿐이다. 관례를 신경쓰지 않고 국회법을 그대로 적용한다면 의향이 있는 국회의원이면 누구나 후보 등록을 할 수 있도록 하도록 하고 소속 당부에 상관없이 국회의원들이 알아서 양심에 따라 자기가 국회의장으로 적합하다고 생각하는 후보에 투표를 하도록 해 다득표자를 선출하면 그만이다.  

하지만 ‘원내 1당이 한다’는 관례에 따르려면 특정 정당의 내부에서 국회의장 후보를 선출하는 경선을 진행할 필요가 생긴다. 그런데 원론적으로, 특정 정당이 후보를 선출하는 방식은 각기 알아서 하면 될 일이다. 어차피 그렇게 선출된 후보는 말 그대로 후보에 불과하고, ‘국회의장은 원내 1당이 한다’는 관례에 따라 국회의장 후보로 단독 입후보할 뿐이며, 관례에 따라 모든 국회의원이 그를 선출하는 것일 뿐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더불어민주당의 국회의장 후보 선출 방식에 대한 논란에 대해 제도적 측면에서 대안적 반론을 제기하려면, 앞서 언급한 것처럼 ‘국회의장은 원내 1당이 한다’는 관례를 없애자고 하는 게 논리적으로는 유일한 해법일 수밖에 없다는 거다. 그런데 이러한 해법은 작게는 여당, 나아가서는 제도적 자제와 상호 관용을 말하는 사람들은 주장하기 어려울 것이다. 왜냐하면 ‘국회의장은 원내 1당이 한다’는 관례를 깨면 법사위, 운영위 등에 대한 관례와 함께 상임위원장을 의석 수 비율로 배분하는 관례도 깨지기 때문이다. 국회법에는 국회의장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상임위원장도 본회의에서 단지 선출하도록 돼 있다.

애초에 상임위원장을 의석 수 비율로 배분하는 관례가 지켜져 온 것은 국회 운영의 책임을 공동으로 지도록 한다는 취지도 있겠지만 이해관계의 문제, 즉 ‘떡고물’을 나눈다는 취지 역시도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알짜 상임위’란 표현이 원 구성 협상 때마다 중요한 쟁점으로 등장하는 걸 보면 그렇다. ‘관례를 지켜야 한다’는 게 단순히 지켜야 할 당위일 수만은 없다는 거다.

그렇다면 더불어민주당의 국회의장 후보 선출 방식 변경이나 상임위 배분과 관련한 관례 무시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일까? 그런 얘기는 아니다. 그게 어떤 맥락, 어떤 정치인지가 중요하고, 그걸 통해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게 어떤 민주주의인지가 중요하다는 거다. 가령 더불어민주당이 보다 나은 제도적 대안을 찾는 과정에서 국회의장 후보 선출에 당원의 의사를 반영하기로 한 거였다면 평가 기준은 달랐을 수 있다. 그러나 주지하다시피 더불어민주당의 조치는 일부 강성 당원들의, 비합리적 태도를 달래기 위한 미봉적 조치로서 제기된 것이다. 이것은 민주주의의 작동이라기 보다는 소비자와 공급자의 관계에서 벌어지는 일을 떠올리게 한다.

민주주의의 구현을 책임있게 하기 위해서는 지지자와 국회의원이 소비자와 공급자의 관계가 아니라 민주주주의의 구성원으로서 서로 대등한 참여자로서의 역할을 각자 해야 한다. 왜 추미애가 아니라 우원식인지를 말하고 설득하고 책임지는 게 필요했다는 거다. 상임위원장 독식도 마찬가지다. 앞서 논한 것처럼 18개 상임위원장 독식 자체보다는, 그것을 통해 관철하려는 정치가 무엇인가를 제대로 설명하는 게 중요하다. 상임위원장을 맡은 이들의 면면을 보면 ‘상임위원장은 대체로 3선이 한다’는 자기들끼리의 관례를 깬 사례가 보이는데, 이 역시 강성 지지층의 요구와 무관해 보이지 않는다.

더불어민주당의 강성 지지층이 추미애 의원을 국회의장 후보로 지지한 이유는 윤석열 대통령을 가장 세게 혼내줄 것 같아서일 거다. ‘검찰 독재 정권’ 등을 말하는 사람은 많지만, 정치인이 자기 입으로 말하는 걸 사람들이 믿지 못하게 된 지는 오래 됐다. 그런데 추미애 의원은 장관 시절 실제 정치적 손해를 보면서까지 윤석열 당시 검찰총장을 혼내주려 하지 않았느냐는 식의 논리다. 지난 총선에서 조국혁신당이 예상 외의 선전을 한 것도 비슷한 맥락 속에 있다. 당해본 사람이 확실하게 혼내주지 않겠느냐는 것.

그러나 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하려면 이런 식의 ‘묻지 마 반대’가 중심이 된 정치로부터 탈출하는 것부터 시작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먼저 경계하시라. 누군가 어떤 정치를 ‘독재’라고 평가할 수 있고 ‘포퓰리즘’이라고 평가할 수도 있다. 그런 것은 각자의 근거를 갖춰 얼마든지 해도 되고, 어떤 면에선 오히려 권장된다. 하지만 ‘독재를 막기 위해 작은 차이는 접어두고 뭉치자’라든지, ‘포퓰리즘에 반대한다면 정파불문 손부터 잡자’는 식의 주장에 대해선 그게 맞는지 우선 따져보는 태도가 필요하다. 이런 주장이 오히려 그들이 주장하는 ‘독재’와 ‘포퓰리즘’의 친구인 경우가 비일비재하기 때문이다. 특히 요즘 같은 때라면 더더욱 그렇다.

덧붙이는 말

김민하는 정치·사회 평론가, 칼럼니스트다. 민주노동당, 진보신당 등에서 일하며 한국의 진보정치가 현실적 대안으로 자리 잡는 데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고자 했으나 무엇이 잘못됐는지 기대만큼 잘되지 않았다. 지은 책으로는 『저쪽이 싫어서 투표하는 민주주의』, 『냉소 사회』, 『레닌을 사랑한 오타쿠』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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