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향리

[평화누리통일누리] 미대사관 앞 반미연대집회 – 10주년 기념집회가 열리던 날…

[평화누리통일누리] 미대사관 앞 반미연대집회 – 10주년 기념집회가 열리던 날…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 말이 있다. 그리고 요즘은 좀 빠르게 변한다고 해서 5년이면 강산이 변한다고들 한다. 미대사관 앞 반미연대집회 10주년! 광화문 열린 시민마당에 걸린 10년의 사진 전시물을 보니 그 시간들이 아주 빠르게 머릿속을 스친다. 10년 동안 참 많이 울었다. 매향리 농섬에서, 효순이와 미선이의 억울한 죽음에 대해 사과를 받기 위해 광화문 네거리에서 촛불을 들고, 기름진 평택 들판을 둘러보며 참 많이도 울었다. 그리고 어김없이 매월 둘째주 화요일이면 미 대사관 앞에 다시 서서 마음을 가다듬고 우리가 가야할 길을 되짚었다. 10년 투쟁의 역사를 써내려간 주역들이 다시 광화문 시민마당에 다시 섰다. 김용한, 추영배, 조주형, 심우근, 신종원. 그분들의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가슴속에 남지만 그 중에서도 신종원 이장(평택미군기지확장반대주민대책위 조직부장이었던 그는 현재 마을 이장이다.)이 미군에게 고향땅을 빼앗기고 주민들이 어떻게 살아가는지를 이야기 할 때는 나도 모르게 두 눈에 눈물이 흐른다. 고향땅을 빼앗긴 농민이, 불평등한 한미동맹으로 인한 국민들의 고통이 어떤지 굳이 말로 표현하지 않아도 대추리 주민들을 보면 알 수 있다. 가끔 투쟁의 현장에서 신종원 이장을 보면 너무나 반가운데 어떻게 반가운 마음을 표현할지 몰라 멋쩍은 웃음이나 손을 한번 잡는 정도이다. 그것은 평택 땅을 지켜내지 못한 나의 회한의 몸짓이다. 집회가 시작되기 전부터 모여든 사람들이 전시물도 보고, 서로 반가운 인사도 나누고 있다. 그동안 각 사안의 투쟁마다 앞장서 투쟁하셨던 주역들도 곳곳에 보인다. 적을 때는 50명이, 많을때는 400명이 집회에 참여했는데, 매달 만나다보니 모두들 친근함이 느껴진다. “조국의 자주통일 염원을 모아 폭우, 폭설에도 오직 한마음으로 10년을 함께 해주신 분들을 모시고 사회를 보게 되어 영광입니다!”는 이야기로 사월혁명회 한찬욱 사무처장이 사회를 보았다. 제일 먼저 평통사 상임대표이신 문규현 신부님이 10주년 기념사를 하셨다. 문규현 신부님은 “10년 전 첫 집회를 연 날로부터 한달 한달 이어져 오늘로 10년이 되었다. 그동안 파주 스토리 사격장에서, 매향리 폭격장에서, 효촌리 여중생 사고 현장에서, 평택 대추리에서, 군산과 직도 등 전국 각지에서 벌어진 미군들의 악행을 고발하기 위해 이곳으로 모였다. 눈이오나 비가 오나 이 집회는 이어졌고, 오늘 집회는 이제 주한미군을 완전히 내보내고 한반도 평화통일 실현을 다짐하는 자리이다. 반미연대 집회를 10년간 지켜온 동지여러분! 모두 수고하셨다”는 인사를 하셨다. 10주년 집회를 맞아 참가한 단체들도 훨씬 많았다. 한국진보연대 이강실 상임대표, 민주노동당 이영순 최고위원, 민주노총 황수영 통일위원장의 축사가 이어졌다. 세 분 모두 더 많은 국민들과 함께 이 집회를 함께 해 나갈수 있도록 노력하자고 하였다. 집회가 시작되고 좀 지나자 인천에 있던 회원이 “인천에서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는 메시지를 보내왔다고 한다. 좀 지나니 부천에 있던 회원이 “부천에도 비가 오기 시작했다. 서울은 어떠냐?”고 묻는 전화가 왔단다. 아니나다를까 축사를 시작할 무렵부터 한두방울씩 비가 오기 시작하였다. 지난 7월 26일 평화협정 실현한마당 뒤풀이가 생갔났다. 그때도 이곳에서 뒤풀이 식사를 막 시작하려는 찰나에 소나기가 쏟아졌었다. 억수같이 내리는 비에 밥말아 먹고, 막걸리와 빗물을 함께 마시곤 했다. 미리 회원들이 알려준 정보 덕분에 그나마 근처 편의점을 뒤져 우비를 마련할 수 있었다. 참여했던 박상희 목사님은 “우리대신 하늘이 눈물을 흘려준 것이다”라며 좋은 의미를 부여하기도 했다. △ 왼쪽부터 신종원, 강찬석, 심우근, 조주형, 김용한, 추영배, 주병준. 반미연대집회 10년의 역사를 만든 사람들. 희망의 노래 꽃다지가 축하 공연을 하였다. 잔잔한 노래에 맞춰 일제히 하얀색 우비를 입은 150여 참가자들이 한반도 모양의 피켓을 들고 흔들었다. 하얀 우비를 입으니 늙고 젊음이 없고, 여성 남성이 구분없이 모두 똑같은 모습, 똑같은 마음이었다. 이어 반미연대 집회 10년의 역사를 써내려간 주역들의 발언이 이어졌다. 무건리 주민대책위 주병준 위원장은 10년동안 이 자리를 지켜준 분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시작으로 “미군을 내보내야만이 우리가 원하는 평화가 올 것이고 가능하다.”는 이야기와 더불어 최근 오현지킴이의 안타까운 소식을 전하며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지만 오현리에 남은 주민들은 꿋꿋하게 투쟁할 것이다.”며 22일 진행될 중앙토지위원회 수용 재결 회의 저지 투쟁에 주민들의 소원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함께 해 줄 것을 호소하였다. 매향리주민대책위 추영배 고문은 “이 자리에 있는 모든 분들과 함께 싸워 매향리에서 미군을 내보냈다. 그러나 아직까지 매향리에는 미군이 버린 폭탄찌꺼기가 그대로 방치되어 있다. 더 노력하여 매향리에서 그랬듯이 우리나라 땅에서 미군을 내보내고 해방세상을 만들자!”고 하였다. 전 SOFA개정국민행동 김용한 공동집행위원장은 “이 자리가 만들어질 수 있게 하셨던 문정현 신부님은 ‘행동으로 보여주자’, ‘낮은 단계부터 만들어가자’고 하셨다. 낮은 단계인 SOFA투쟁부터 시작해서 이제는 미군 철수투쟁까지 제기되고 있는데, 몇 년 후면 환갑이 되는데 미군 없는 세상에서 살고 싶다!”고 하였다. 전 공군차세대전투기 시험평가단장이었던 조주형 대령도 “이 자리를 지켜온 분들에 비하면 본인은 많이 부족하다. 우리나라 국방비의 절반이 무기구입에 사용되고, 구입되는 무기가 거의 대부분이 미국 무기다. 우리 국민들의 세금으로 쓰이는 국방비가 악의 축인 미국의 생명을 연장하는데 쓰여지고 있다. 그 돈이 통일 비용으로 쓰여야 하지 않겠는가? 마음과 뜻을 모아 일궈나가자”고 하였다. 여중생 압살사건 당시 효순, 미선의 언니들이 다니던 의정부 여고의 교사였던 심우근 선생은 “말을 하는 교사지만 이 자리에 계신 선생님들 앞에 서니 많이 떨린다. 미군들이 세워놓은 추모비 앞에서 추모를 하며 많은 분들이 안타까울 것으로 안다. 미군이 진정으로 여중생을 추모한다면 이 땅에서 나가야 하는 것 아닌가? 그렇지 않은 모습을 보니 가증스럽고 울화가 치밀어 오른다. 이승을 떠나지 못하고 떠도는 두 여중생, 이 땅에서 미군으로 인한 피해가 두 여중생이 마지막이 되도록 이 자리에 계신 분들과 국민들의 뜻을 모아 추모비를 세워야 떳떳할 수 있을 것 같다.”며 추모비 건립에 힘을 모아 줄 것을 호소하였다. 덕수궁터 미대사관 건립 반대 운동을 했던 건축가 강찬석 님은 “나는 원래 반미주의자가 아니고 건축가이며 문화재 보호운동을 하는 사람이다. 그런데 덕수궁터 미대사관 건립 반대 투쟁을 4년동안 하다보니 사람들이 나를 반미주의자라고 부른다. 열심히 싸웠더니 덕수궁터 미대사관 건립을 막아냈고 앞으로도 또 이런 일이 생긴다면 더 열심히 싸울 것이다.”라고 밝혀 참가자들의 박수를 받았다. 평택 미군기지 확장 저지투쟁 당시 매번 반미연대집회에 참석해 왔던 평택주민대책위원회 신종원 조직국장은 “자기 땅을 빼앗기고 주민들이 살기위해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직접 찾아와서 봐 주었으면 좋겠다. 많은 분들이 농사를 짓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한시적 공공근로를 통해 살아가고 있는 형편이다. 미군기지로 고향땅을 빼앗긴 주민들이 어떻게 살아가는지를 알려나가 줬으면 한다”고 하였다. 10년의 역사를 써내려갔던 많은 분들의 발언 한마디 한마디가 이후 우리가 더 힘을 모아나가야 함을 느끼게 하였다. 마지막 발언을 하였던 신종원 이장님의 발언은 종속적인 한미동맹으로 인해 우리 국민들의 삶이 어떻게 망가지고 고통받고 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었다. 지금까지의 10년이 눈보라와 비바람을 이겨낸 시간들이었다면 이제 이후 10년은 한반도에 불어올 회오리 바람을 맞아 국민들과 함께 이겨내어 정말 살맛나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모든 힘을 모아야 할 때라고 발언자들은 하나같이 이야기 하고 있다. 일요일 하루를 꼬박 부천평통사 회원들과 정성스레 박을 만들었는데, 바로 그 박을 터트리는 상징의식을 하였다. 참가자들은 미국과의 한판 승부에 새로운 마음과 힘을 모아 나가자면서 오자미를 마구마구 던졌다. 박이 잘 안터지만 어쩔까 걱정했는데, 걱정대로 한참을 버티디가 박이 터졌는데, 사탕도 많이 넣어 두어서인지 대학생 친구들도, 어르신들도 좋아라 하셨다. 박에서는 ‘평화협정 체결’, ‘주한미군 철수’라고 써진 현수막이 내려왔다. 뒤풀이에서는 민대협 대학생들이 율동공연도 하고, 대구, 부산, 광주 등 멀리서 참여한 분들에 대한 간단한 소개가 하였다. 젊은 대학생들이 반미투쟁에 함께 하고 있으니 대견하고 든든했다. 이제 우리는 다가올 10년 안에 주한미군 철수, 평화협정 실현, 조국 통일 모두를 이루자는 결의를 하고 있다. 지난 10년을 가장 자연스럽게 표현한다면 ‘비바람 눈보라에도 굴하지 않고’ 일 것 같다. 이후 10년은 비바람보다 더 큰 폭풍우가 몰아칠 것이다. 폭풍우 뒤 다가올 평화로운 세상, 그 날은 땅을 지켜내지 못한 회한의 몸짓이 아니라 역사를 써내려간 사람들과 기뻐 얼싸안을 수 있는 날일 것이다. 그날이 멀지 않았음을 느낀다. 그냥 오지는 않을 것이다. 10년간 그랬던 것처럼 더 큰 확신으로 실천할 때 가능할 것이다. 10주년 반미연대 집회는 나의 마음을 다지는, 더 많은 동지들의 마음을 모으는 자리가 되지 않았을까?

[평화누리통일누리] 대중적 반미투쟁의 산실, 반미연대집회 10년의 기록

[평화누리통일누리] 대중적 반미투쟁의 산실, 반미연대집회 10년의 기록

노근리 양민학살 진상규명과 피해배상, 조중필 피살사건 진상규명, 불평등한 한미SOFA 전면개정 등을 요구하면서 처음 시작한 미대사관 반미연대집회가 만 10년을 맞았다. 반미연대집회는 이 땅의 모든 반미 사안이 다뤄지고 확산되는 반미투쟁의 산실이었다. 반미연대집회는 매향리 미군폭격장 폐쇄 투쟁 승리와 한미 SOFA 부분 개정, MD저지에 기여하고, 조중필 피살사건과 여중생압사사건을 널리 알려내며, 평택 미군기지 확장 저지 투쟁에 힘을 보태는 등 많은 성과를 내었다. 무엇보다도 가장 큰 성과는 국민들의 반미자주의식 성장에 기여한 것이라 하겠다. 반미연대집회는 정권의 물리적·법적 탄압으로 폭행과 연행, 구금, 밤샘농성 등 모진 시련을 겪었지만, 이에 굴하지 않고 10년의 역사를 이어왔다. 이제 반미연대집회 참가자들은 지난 10년의 성과를 기념하고 계승하여 새로운 10년의 역사를 써 나가야 할 것이다. 새로운 10년 안에 평화협정 체결, 주한미군 철수, 한미동맹 폐기, 한반도 비핵화, 조국 통일을 모두 이루기 위한 운동을 힘차게 전개해 나가야 한다. 그동안 반미연대집회에서 주요하게 다뤄졌던 사안을 정리해 보았다. 불평등한 한미소파(SOFA) 전면개정운동 한미SOFA 1차 개정(1991년) 직후 윤금이 씨 피살사건(1992년)이 일어나 개정 요구가 다시 제기되었다. 그러나 미국의 회피로 개정협상은 지체되었다. 2000년 이태원 한국인 여종업원 피살사건 등을 계기로 다시 국민적인 SOFA 개정 요구가 분출하였다. 당시 반미연대집회는 147개 단체가 참여한 ‘SOFA개정 국민행동’이 주최했는데 이 집회를 계기로 ‘범국민 행동의 날’을 여는 등으로 한미SOFA 개정에 앞장섰다. 김판태 SOFA개정국민행동 사무처장(군산평통사 사무국장)은 SOFA 개정안에 대한 심의가 이뤄지는 국회 상임위 회의실에서 할복을 하기도 했다. 결국, 2001년 12개 중대범죄에 대해 기소와 동시에 미군 범죄자의 신병을 인도받도록 한 것을 비롯하여 노무, 공동검역, 공여지 합동 실사, 민사소송 절차 등 일부 전향적인 개정이 이뤄졌다. 그러나 기소 후 심문 금지, 공여지 침해 방지 등 일부 개악 규정마저 신설되는 등 그 불평등성은 근본적으로 해소되지 않은 채 지금에 이르고 있다. 매향리 미군폭격장 폐쇄투쟁 경기도 화성시 우정읍 매향리 미군 폭격장은 아시아 유일의 국제 폭격장으로, 전쟁 중인 1952년에 주한미군이 주민들의 땅과 어장을 빼앗아 만들었다. 그 후 반세기동안 주민들은 끊임없이 소음피해의 고통을 받아왔고 심지어 오폭으로 목숨을 잃기도 했다. 그동안 주민들의 격렬한 투쟁이 있었지만 고립된 투쟁으로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2000년 5월 8일, A-10기 폭탄 투하 사건을 계기로 시민사회단체가 대책위를 결성하여 사격이 진행되는 농섬에 최종수 신부가 목숨을 걸고 들어가는 등 주민들과 함께 강력한 투쟁을 전개하였다. 반미연대집회에서도 전만규 위원장 등 주민들이 참여하여 폭격장 폐쇄를 요구하고 청와대 외교안보수석도 면담했다. 투쟁 과정에서 전만규 주민대책위원장, 김종일 매향리범대위 공동집행위원장(평통사 사무처장) 등이 구속되기도 했다. 그 결과 2000년 8월 육상사격장이 폐쇄됐고, 2005년 8월 해상사격장까지 완전 폐쇄되는 쾌거를 이뤘다. 하지만, 문제는 여전히 남아있다. 불발탄과 녹슨 폭탄들이 아직까지 농섬 곳곳을 오염시키고 있는 것. 주한미군은 한국 정부에 책임을 떠넘기고, 국방부는 예산 부족 등을 핑계로 농섬을 방치하고 있다. F-15K 도입 반대투쟁 2000년대 들어 국방부가 ‘차세대전투기도입사업’을 본격 추진했다. 국방부 고위관계자들이 미국의 압력에 따라 가격이 비싼 반면 성능도 떨어지고 기술이전도 인색한 보잉사의 F-15K를 선정하도록 당시 시험평가단장인 조주형 공군대령(평통사 지도위원) 등에게 부당한 압력을 행사했다. 이에 평통사는 국방부 앞 농성과 국방부 진입투쟁, ‘신문고 두드리기’ 등의 완강한 반대투쟁으로 국민적 비난 여론을 불러 일으켜 정부를 궁지에 몰아넣었다. 이 과정에서 국방부 진입투쟁을 주도한 이형수 국장이 구속되기도 했다. 반미연대집회에서도 F-15K 도입의 부당성과 양심선언으로 구속된 조 대령의 재판 소식 등을 다뤄 반대 여론을 높이는데 기여했다. 미사일방어(MD)체제 도입 반대투쟁 2000년 부시 정부 들어서서 한국에 대한 미국의 MD 참여 요구가 노골화되었다. 한국의 시민사회단체들은 MD저지공대위를 구성하여 미국의 MD 참여 강요에 반대하는 투쟁을 전개하였다. 최병수 화백이 반미연대집회 장소인 광화문 열린시민공원에 세워져 있는 기둥을 이용하여 MD 반대 상징물을 설치하는 등 집회를 통하여 MD의 위험성을 알려냈다. 여중생압살사건 진상규명투쟁 2002년 6월 13일, 두 여중생 신효순, 심미선이 미군 궤도차량에 처참하게 깔려 죽었다. 온 나라가 2002년 월드컵 열기에 빠져있었지만 반미연대집회는 이 사건 직후부터 적극적이고 끈질기게 다뤄 가장 대중적인 반미투쟁이 되도록 하는데 기여했다. ‘반미면 어떠냐’는 노무현 대통령이 당선될 수 있었던 것도 이 같은 범국민적 반미투쟁의 열기에 힘입은 바 크다. 두 여중생의 부모님은 여러 차례 반미연대집회에 참여하여 발언했으며, 집회 후 사회단체 대표들과 함께 주한미국대사를 면담하여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요구하기도 했다. 이후 해마다 두 여중생이 죽은 6월 반미연대집회 때는 추모의식을 거행하고 있다. 평택미군기지 확장저지투쟁 평택미군기지확장은 미군의 전략적 유연성 확보를 위한 물리적 토대를 마련하려는 것이다. 즉, 대북 선제공격과 중국 포위, 전 세계 전력 투사의 유리한 조건을 만들려는 것이다. 이로 인해 주민은 자기 땅에서 쫓겨나고 우리 국민은 기지이전비용을 대부분 부담할 뿐만 아니라 한반도 평화는 더욱 심각한 위험에 빠지게 된다. 이에 평택미군기지 확장저지투쟁 초기에는 주민들이 미대사관 앞 열린시민마당에서 열리는 집회에 참석했고, 후기에는 집회 장소를 여러 차례 평택 대추리 현지로 옮겨 주민들과 연대하는 등 투쟁이 전개되는 내내 이 문제를 중심 주제로 다뤄 투쟁에 힘을 보탰다. 무건리한미공용훈련장 확장저지투쟁 한미 군당국이 무기체계 발달로 인한 사정거리 확대 등을 이유로 무건리 한미공용훈련장 확장을 강행하고 있다. 훈련장이 확장되면 평택과 마찬가지로 주민들이 쫓겨나 생존권을 잃고 휴전선에 인접한 접경지역의 특성상 남북 간 군사적 긴장이 더욱 높아지게 된다. 주민들이 거의 매번 집회에 참가하고 있고, 여러 차례 발언을 통해 훈련장 확장의 문제점을 알리고 있다. 참가자들은 이들의 투쟁에 대한 지지와 성원을 보내고 있으며 연대투쟁에 함께하고 있다.

[평화누리통일누리] 반미연대집회 10년 개근, 변연식 공동대표를 만나다

[평화누리통일누리] 반미연대집회 10년 개근, 변연식 공동대표를 만나다

처음 시작... 문정현 신부님이 군산미군기지 민항공기 활주로 사용료 문제 등으로 소파(SOFA)개정운동을 시작하면서 ‘미 대사관 앞에서 집회 한번 해 보자’고 각 단체에 제안할 때였어요. 1999년 10월에 오두희 선생, 박순희 대표, 천주교 성심회 수녀님들과 자통협(평통사)과 미대사관 뒤편에서 집회를 했죠. 당시에는 시내에서, 더구나 미대사관 앞에서 집회를 한다는 게 상상도 못하던 시절이라, 경찰들의 탄압이 엄청 났죠. 집회를 시작하자마다 모두 연행됐지요. 한번은 무척이나 추운 겨울이었는데, 길바닥이 얼음으로 덮혀 있었어요. 집회를 하려다가 모두 연행되어서 신설동 사거리에 내버려졌는데, 얼음 바닥에 나동그라지고 문정현 신부님은 안경도 깨지고요. 정신을 추스리고 또 대사관 앞으로 와서 정리집회를 한다고 했지요. 그러다가 또 광화문 사거리까지 끌려서 밀려나고요. 집회 시작전부터 광화문 열린공원 입구를 경찰들이 가로막고 출입을 통제하는 바람에 조금 늦게 온 사람들은 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었어요. 미리 안에 들어간 사람들은 경찰들에게 빙 둘러싸여 고착을 당하고요. 그러던 중 2002년 봄에는 사람들이 모두 연행이 되었고, 문정현 신부님과 늦게 온 몇 몇만 남았어요. 신부님이 “잡혀간 사람들이 풀려날 때까지 자리를 뜨지 않겠다”고 하시고, 결국 밤을 새워 새벽을 지나 다음날 오후까지 있었지요. 미대사관 근처라고 집회를 못하게 하니, (집회보다 더 강력한) 밤샘 농성을 해버린 것이죠. 그 뒤로도 몇 달을 더 고생했어요. 사람들이 잡혀가면 밤새워서 기다리고, 쇠사슬로 서로를 엮어서 연행에 저항하기도 했지요. 이런 저런 고생 끝에 집회 장소를 합법화할 수 있었어요. 투쟁하지 않았다면 어림없는 일이지요. 반미연대집회 10년, 돌아보니 내가 바뀌었구나 문정현 신부님이 <불평등한소파개정운동본부>를 꾸리고 활동을 하시다보니 자연스럽게 같이 하게 되었어요. 그때 처음 자통협-평통사와 인연을 맺은 것이죠. 사실 그때가 개인적으로는 큰 수술을 받아서 집에서 누워있을 때였어요. 무기력하게 정체된 느낌으로 누워서, 오한이 오면 진통제로 버티고 있는데 이미 내 나이 중년을 넘고 있었죠. 이제 뭔가를 해야한다면, 평화를 위한 일, 분단 극복을 위한 일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딱 때가 맞아 떨어진 거죠. 집회 경험이 많지 않아서 반미연대집회 하면서 ‘원봉(원천봉쇄)’이라는 말도 처음으로 들어봤어요. 그러니, 경찰들이 얼마나 무서웠겠어요. 어벙하게 집회 참가 하러 갔다가 경찰들로 꽉 둘러싸이니까 어디 숨을 데도 없고, 너무 무서워서 천주교 후배들에게 ‘나 좀 사람들 가운데에 넣어줘’ 그랬다니까..(웃음) 반미연대집회 10년이 지났다고 하는데, 가장 변화된 점이 무엇이냐면 글쎄 난 잘 실감이 안나요. (잠시 생각) 그러고보니 나 자신이 제일 많이 변했네요. 10년동안.... 반미투쟁의 산실.. 제일 감동적이었던 것은 2002년 효순 미선이 투쟁때 시청광장에서 수많은 시민들이 촛불을 들고 “소파개정”을 외쳤을 때였어요. 그해 여름 우리 엄청 싸웠잖아. 초겨울에 미군들에게 무죄판결이 내려지고, 동두천 미군부대 앞에서 경찰에 깔리면서 싸웠구요. 그날 우리 장도정 동지가 분한 마음에 뜨거운 눈물을 흘리는게 인상적이었죠. TV에도 나오고요. 그렇게 싸워서 온 국민이 촛불을 드는 것을 보니 3년간 광화문 공원에서 싸워온 게 주마등처럼 흘러가는 거야. 그때 ‘한 3년 열심히 싸우니까 되는 구나’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광화문 공원에서 소파개정을 요구하며 신부님들이 천막농성을 하는데, 대통령 후보들이 찾아오곤 했죠. 미국 관련 모든 사안들이 적어도 한번씩은 반미연대집회를 거쳐 갔어요. 집회가 하나의 통로가 된거야. 매향리 투쟁 같은 경우도 천주교 평화지기들하고 최종수 신부님, 김용한 선생, 자통협 사람들하고 집회에서 다달이 보면서 정붙이던 사람들이 매향리 현장에서도 엄청 큰 시너지를 발휘해서 투쟁했어요. 서로베르토 신부님도 그렇고.. 농로를 따라 경찰들과 싸워가면서 옷도 다 찢어지고 그러면서 매향리도 들어갔던거, 기총 사격 연습 현장을 목격하고, 농섬이 내려보이는 언덕까지 올라가니 해가 지더라구... 그때 거기서 자장면 시켜먹던 거, 주민들이 밥을 솥단지째 해 갖고 오던 게 얼마나 인상적이었는지 잊혀지지가 않아요. 제가 마티즈 차를 1999년 1월에 샀는데, 그것도 인연이었나 봐요. 사건 현장이 매향리, 평택, 동두천, 용산, 의정부 등 집에서 한두시간 거리니까 ‘아, 이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다. 현장으로 찾아가자’ 생각하고 막 찾아 다닌 거죠. 미대사관 반미연대집회는 정보를 얻고 공부하는 자리이고, 박순희 대표(천주교정의구현전국연합)가 표현대로 황금마차(마티즈) 타고 현장을 돌아다녔어요. 누가 얘기하던데, 제 차에 캠코더를 달아놨으면, 그대로 10년동안 투쟁의 역사를 기록했겠다고요. 매향리에선 앞뒤유리도 왕창 깨졌고, 용산에서 맥팔랜드 수사하라고 농성할 때는 이틀 연속으로 견인되기도 하고, 외교통상부 앞에서 차량 채로 경찰에 고착되어 피켓을 들었더니 신문 1면에도 나고 했죠. 쉽지 않은 10년, “영혼이 맑은 사람들” 10년이라니, 정말 쉽지 않아요. 매월 둘째주 화요일마다 집회를 연다는 것이... 물론 군 위안부 문제해결을 위한 수요집회나 민가협 엄마들의 목요집회도 있지만요. 아무튼, 정기적으로 열리는 게 중요해요. 매향리, 무건리, 대추리, 군산 등 미군의 피해 당사자들과 함께 친구가 되는 것, 그것이 연대라고 생각해요. 집회가 아니면, 이 사람들을 어디가서 만나겠어요? 천주교 신부님들, 수사님들, 성심회 수녀님들, 양비안네 수녀님, 임기란 어머님와 민가협 어머님들 너무너무 감사해요. 항상 열성적으로 참여해주시는 통일광장 선생님들도요. 집회 얘기를 하다보니, 평통사 사람들 얘기를 안할 수가 없네요. 10년을 이끌어 온 사람들(실무자)들의 진정성이 느껴져요. 영혼이 맑은 사람들이라는 것을요. 저도 자연스레 평통사 일을 하고 있지만, 평통사 사람들을 만난 게 삶의 큰 기쁨이에요. 자랑스럽고요. 그러니까 제가 여기에 붙어있고 함께 하죠(웃음) 앞으로 더 열심히 해야 해요. 지금은 경찰들과 막 옥신각신 안하고 평화롭게 집회를 하다보니까 그림을 더 잘 만들어야 하는 거죠. 용어도 쉽게 써서 사람들이 더 잘 알 수 있게 하고, 피켓도, 상징의식도, 참여하는 사람들도 더 적극적으로 해야 해요. 앞으로도 재미있는 집회, 내용있는 집회를 해야 더 많은 사람들이 참여할 거에요.

[평화누리통일누리] 평통史(4) 평통사 前史 _ 반핵평화운동연합

[평화누리통일누리] 평통史(4) 평통사 前史 _ 반핵평화운동연합

1991년 3월 13일 오후 5시. 흥사단 3층 강당에서는 한국사회운동 사상 최초로 평화운동단체를 표방한 반핵평화운동연합이 창립한다. “각계각층 대중운동의 비약적 성장을 배경으로 반핵평화운동은 핵발전소 건설 저지를 위한 범국민적인 운동과 송악산, 매향리, 군산, 평 택, 안면도 등 미군기지, 핵관련 시설, 핵폐기물에 대한 민중의 처절한 생존권 투쟁으로 발전해 왔다. ‘반핵평화운동연합’은 이와 같은 평화운동의 자랑스런 전통을 계승하고 평화롭고 해방된 삶의 주체인 민중과 함께 이 땅을 에워싸고 있는 모든 억압과 폭력에 맞서 싸워나갈 것이다” (창립 선언문 중)

[평화누리통일누리] 경기남부 평통사 소식

[평화누리통일누리] 경기남부 평통사 소식

◆2007년 12월 22일, 준비위원 발족 경기남부 평통사 준비위원회가 발족되었습니다. 경기도 오산 다솜교회 장창원 목사님과 평택 전교조 이종필 선생님이 공동준비위원장을 맡으시고 평택지역 노동자 현호헌씨가 사무국장 서리로 보좌하게 되었습니다. 이날 회의에서 2008년 2월 22일 경기남부 평통사 창립총회를 개최하기로 결의하였습니다.

[인권하루소식] 고통의 땅 매향리는 아직도 “뚜두두두-쿵”

[인권하루소식] 고통의 땅 매향리는 아직도 “뚜두두두-쿵”

인권하루소식 창간 10주년 기획 ‘그때 그 사건’ ⑧ 매향리 폭격장 폐쇄 투쟁 “뚜두두두~ 찌익, 쿵.” 기습을 당한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다. 진정시킬 여유도 없이 날카로운 굉음이 귓전을 울리더니 또다시 포탄소리가 난다. “쿵~~”. 주먹을 꽉 움켜진 두 손에 땀이 촉촉이 베었을 때, 펄럭이는 주황색 깃발 뒤로 희미한 연기가 피어오른다. 2003년 8월 다시 찾아간 매향리(경기도 화성군 우정면)는 아직도 전장이다. 날마다 전쟁, 반세기 매향리의 비극 2000년 5월 엔진고장을 일으킨 미군 전투기가 아무런 사전 경고없이 폭탄 6발을 마을에 투하하면서 매향리 주민 6명이 다치고 농가 7백여 가구가 피해를 입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을 통해 반세기에 걸친 매향리의 비극이 우리 사회에 본격적으로 드러났다.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51년 미군 전용 폭격장이 들어선 이래 오폭사고로 사망한 주민만도 10명. 임산부의 잦은 유산은 물론이고 폭격 굉음으로 인한 자살과 극도의 스트레스, 중금속으로 오염된 갯벌 등 매향리는 죽음의 땅으로 변해버린 지 오래였다. “폭격장이 만들어진 이래 반세기동안 공휴일을 제외하곤 단 한번도 폭격이 중단되지 않았습니다. 전투기가 하루 동안 쏟아 부은 포탄만도 9백여 발, 여기에 주민들이 살고있는

[클리핑] 매향리 국제문화제 준비위원회 발족식 개최

[클리핑] 매향리 국제문화제 준비위원회 발족식 개최

- 매향리를 아는 사람들이 함께하는 국제문화제 되어야

[클리핑] 매향리 주민등 200여명, 미군폭격장 폐쇄, MD 포기 촉구

[클리핑] 매향리 주민등 200여명, 미군폭격장 폐쇄, MD 포기 촉구

국내 시민사회단체 모임으로 이루어진, MD저지공동대책위원회'와 매향리 미군국제폭격장폐쇄 범국민대책위원회'는 26일 서울 여의도 63빌딩앞에서 매향리 폭격장 관리업체인 록히드 마틴 규탄집회를 갖고 매향리 미군폭격장 폐쇄와 미국의 MD(미사일방어)포기를 요구했다.

[클리핑] 문정현 신부 뒤늦은 국보법 피소

[클리핑] 문정현 신부 뒤늦은 국보법 피소

4년전 이미 국가안전기획부가 청구한 구속영장이 법원에 의해 기각된 사건을 검찰이 이제와서 문제삼는 것은 무슨 목적일까? 문정현 신부가 상임공동대표로 있는 [소파개정국민행동]의 소파전면개정 투쟁과 매향리 폭격장 완전 폐쇄 투쟁을 방해하기 위한 새로운 기법(?)은 아닐까?

[인권하루소식] 국방부 매향리 종합대책은 미봉책

[인권하루소식] 국방부 매향리 종합대책은 미봉책

국방부가 발표한 '매향리 종합대책'에 대해 매향리 주민들이 미봉책에 불과하다며 반발하고 있다

기사 40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