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9년 안면도, 영광 등 핵폐기장 건설 저지 투쟁에 나선 지역 주민들(왼쪽) 반핵평화운동연합의 기관지<반핵평화> 창간호(오른쪽) △1991년 5월 18일 반핵평화운동연합 회원들(왼쪽) 1991년 6우러 3일 농섬쪽을 바라보며 설명하는 매향리 주민대책위 전만규 위원장(오른쪽) 1990년 6월부터 공해추방운동연합 반핵평화위원회 위원들을 중심으로 한 준비모임이 수차례 열렸고, 1991년 초에는 미-이라크 전쟁(걸프전)에 대한 반전활동을 전개하면서 590명이 발기인으로 참가하여 창립하게 된 것이다. 초대 공동의장은 김남주 시인과 김현 원불교 총무가 맡았다. 지도위원 명단에서는 반가운 이름 임종철 공동대표를 찾을 수 있다. 반핵평화운동연합은 1991년부터 1992년까지 핵폐기장, 핵발전소 건설 저지 투쟁. 주한미군의 핵무기 폐기 촉구 투쟁, 일본 군국주의 부활 저지와 위안부 문제의 해결을 요구하는 투쟁 등을 과제로 삼고, 일본 자위대의 PKO 파병, 한국군의 PKO 파병, 한미전시접수국 지원협정을 주요 사안으로 공청회, 집회, 국회비준 반대 투쟁 등 실천 활동을 활발히 전개하였다. (*한미전시접수국지원협정(WHNS)은 91년 7월 한미 정부사이에 가서명 되고, 91년 11월 한미연례안보협의회(SCM)에서 정식 조인한 협정이다.) 또한 기관지 <반핵평화>를 발간하였고(창간호~8호), 3차례의 반핵평화 시민교실을 열었으며, 회원의 날 행사와 기지탐방, 시민 캠페인도 활발히 하였다. 그러나 1992년 말, 대선을 거치며 김낙중 선생과 손병선 선생 등 반핵평화운동연합의 지도부가 구속되는 등 공안탄압을 받으면서 반핵평화운동연합은 “조직 자체가 존망의 위기에 놓”인다. 반핵평화운동연합의 회지 <반핵평화> 8호에서는 실무자 명의로 “설령 저희 단체가 발전적 해체를 겨냥하여 간판을 내릴지라도 그것은 ‘반핵평화’의 사상-조직적 기반을 오히려 넓히기 위한 잠정적인 ‘깃발내림’일 뿐입니다. 분단 상황이 지속되는 한, 반핵평화운동연합이 지향했던 ‘비핵’, ‘군축’, ‘평화’, ‘통일’의 이념은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비장한 각오를 밝혔다. 그 이념은 1993년~1994년의 평화와 통일을 위한 연대회의와 새로운 평화운동단체 준비모임 등을 거쳐 평통사로 이어지게 된다. △1991년 10월 17일 한반도 비핵군축 실현과 전시접수국 지원 협정 저지를 위한 결의대회 △1992년 7월 29일 일본 군국주의 부활과 동북아의 평화문제 공청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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