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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누리통일누리] 미대사관 앞 반미연대집회 – 10주년 기념집회가 열리던 날…

[평화누리통일누리] 미대사관 앞 반미연대집회 – 10주년 기념집회가 열리던 날…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 말이 있다. 그리고 요즘은 좀 빠르게 변한다고 해서 5년이면 강산이 변한다고들 한다. 미대사관 앞 반미연대집회 10주년! 광화문 열린 시민마당에 걸린 10년의 사진 전시물을 보니 그 시간들이 아주 빠르게 머릿속을 스친다. 10년 동안 참 많이 울었다. 매향리 농섬에서, 효순이와 미선이의 억울한 죽음에 대해 사과를 받기 위해 광화문 네거리에서 촛불을 들고, 기름진 평택 들판을 둘러보며 참 많이도 울었다. 그리고 어김없이 매월 둘째주 화요일이면 미 대사관 앞에 다시 서서 마음을 가다듬고 우리가 가야할 길을 되짚었다. 10년 투쟁의 역사를 써내려간 주역들이 다시 광화문 시민마당에 다시 섰다. 김용한, 추영배, 조주형, 심우근, 신종원. 그분들의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가슴속에 남지만 그 중에서도 신종원 이장(평택미군기지확장반대주민대책위 조직부장이었던 그는 현재 마을 이장이다.)이 미군에게 고향땅을 빼앗기고 주민들이 어떻게 살아가는지를 이야기 할 때는 나도 모르게 두 눈에 눈물이 흐른다. 고향땅을 빼앗긴 농민이, 불평등한 한미동맹으로 인한 국민들의 고통이 어떤지 굳이 말로 표현하지 않아도 대추리 주민들을 보면 알 수 있다. 가끔 투쟁의 현장에서 신종원 이장을 보면 너무나 반가운데 어떻게 반가운 마음을 표현할지 몰라 멋쩍은 웃음이나 손을 한번 잡는 정도이다. 그것은 평택 땅을 지켜내지 못한 나의 회한의 몸짓이다. 집회가 시작되기 전부터 모여든 사람들이 전시물도 보고, 서로 반가운 인사도 나누고 있다. 그동안 각 사안의 투쟁마다 앞장서 투쟁하셨던 주역들도 곳곳에 보인다. 적을 때는 50명이, 많을때는 400명이 집회에 참여했는데, 매달 만나다보니 모두들 친근함이 느껴진다. “조국의 자주통일 염원을 모아 폭우, 폭설에도 오직 한마음으로 10년을 함께 해주신 분들을 모시고 사회를 보게 되어 영광입니다!”는 이야기로 사월혁명회 한찬욱 사무처장이 사회를 보았다. 제일 먼저 평통사 상임대표이신 문규현 신부님이 10주년 기념사를 하셨다. 문규현 신부님은 “10년 전 첫 집회를 연 날로부터 한달 한달 이어져 오늘로 10년이 되었다. 그동안 파주 스토리 사격장에서, 매향리 폭격장에서, 효촌리 여중생 사고 현장에서, 평택 대추리에서, 군산과 직도 등 전국 각지에서 벌어진 미군들의 악행을 고발하기 위해 이곳으로 모였다. 눈이오나 비가 오나 이 집회는 이어졌고, 오늘 집회는 이제 주한미군을 완전히 내보내고 한반도 평화통일 실현을 다짐하는 자리이다. 반미연대 집회를 10년간 지켜온 동지여러분! 모두 수고하셨다”는 인사를 하셨다. 10주년 집회를 맞아 참가한 단체들도 훨씬 많았다. 한국진보연대 이강실 상임대표, 민주노동당 이영순 최고위원, 민주노총 황수영 통일위원장의 축사가 이어졌다. 세 분 모두 더 많은 국민들과 함께 이 집회를 함께 해 나갈수 있도록 노력하자고 하였다. 집회가 시작되고 좀 지나자 인천에 있던 회원이 “인천에서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는 메시지를 보내왔다고 한다. 좀 지나니 부천에 있던 회원이 “부천에도 비가 오기 시작했다. 서울은 어떠냐?”고 묻는 전화가 왔단다. 아니나다를까 축사를 시작할 무렵부터 한두방울씩 비가 오기 시작하였다. 지난 7월 26일 평화협정 실현한마당 뒤풀이가 생갔났다. 그때도 이곳에서 뒤풀이 식사를 막 시작하려는 찰나에 소나기가 쏟아졌었다. 억수같이 내리는 비에 밥말아 먹고, 막걸리와 빗물을 함께 마시곤 했다. 미리 회원들이 알려준 정보 덕분에 그나마 근처 편의점을 뒤져 우비를 마련할 수 있었다. 참여했던 박상희 목사님은 “우리대신 하늘이 눈물을 흘려준 것이다”라며 좋은 의미를 부여하기도 했다. △ 왼쪽부터 신종원, 강찬석, 심우근, 조주형, 김용한, 추영배, 주병준. 반미연대집회 10년의 역사를 만든 사람들. 희망의 노래 꽃다지가 축하 공연을 하였다. 잔잔한 노래에 맞춰 일제히 하얀색 우비를 입은 150여 참가자들이 한반도 모양의 피켓을 들고 흔들었다. 하얀 우비를 입으니 늙고 젊음이 없고, 여성 남성이 구분없이 모두 똑같은 모습, 똑같은 마음이었다. 이어 반미연대 집회 10년의 역사를 써내려간 주역들의 발언이 이어졌다. 무건리 주민대책위 주병준 위원장은 10년동안 이 자리를 지켜준 분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시작으로 “미군을 내보내야만이 우리가 원하는 평화가 올 것이고 가능하다.”는 이야기와 더불어 최근 오현지킴이의 안타까운 소식을 전하며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지만 오현리에 남은 주민들은 꿋꿋하게 투쟁할 것이다.”며 22일 진행될 중앙토지위원회 수용 재결 회의 저지 투쟁에 주민들의 소원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함께 해 줄 것을 호소하였다. 매향리주민대책위 추영배 고문은 “이 자리에 있는 모든 분들과 함께 싸워 매향리에서 미군을 내보냈다. 그러나 아직까지 매향리에는 미군이 버린 폭탄찌꺼기가 그대로 방치되어 있다. 더 노력하여 매향리에서 그랬듯이 우리나라 땅에서 미군을 내보내고 해방세상을 만들자!”고 하였다. 전 SOFA개정국민행동 김용한 공동집행위원장은 “이 자리가 만들어질 수 있게 하셨던 문정현 신부님은 ‘행동으로 보여주자’, ‘낮은 단계부터 만들어가자’고 하셨다. 낮은 단계인 SOFA투쟁부터 시작해서 이제는 미군 철수투쟁까지 제기되고 있는데, 몇 년 후면 환갑이 되는데 미군 없는 세상에서 살고 싶다!”고 하였다. 전 공군차세대전투기 시험평가단장이었던 조주형 대령도 “이 자리를 지켜온 분들에 비하면 본인은 많이 부족하다. 우리나라 국방비의 절반이 무기구입에 사용되고, 구입되는 무기가 거의 대부분이 미국 무기다. 우리 국민들의 세금으로 쓰이는 국방비가 악의 축인 미국의 생명을 연장하는데 쓰여지고 있다. 그 돈이 통일 비용으로 쓰여야 하지 않겠는가? 마음과 뜻을 모아 일궈나가자”고 하였다. 여중생 압살사건 당시 효순, 미선의 언니들이 다니던 의정부 여고의 교사였던 심우근 선생은 “말을 하는 교사지만 이 자리에 계신 선생님들 앞에 서니 많이 떨린다. 미군들이 세워놓은 추모비 앞에서 추모를 하며 많은 분들이 안타까울 것으로 안다. 미군이 진정으로 여중생을 추모한다면 이 땅에서 나가야 하는 것 아닌가? 그렇지 않은 모습을 보니 가증스럽고 울화가 치밀어 오른다. 이승을 떠나지 못하고 떠도는 두 여중생, 이 땅에서 미군으로 인한 피해가 두 여중생이 마지막이 되도록 이 자리에 계신 분들과 국민들의 뜻을 모아 추모비를 세워야 떳떳할 수 있을 것 같다.”며 추모비 건립에 힘을 모아 줄 것을 호소하였다. 덕수궁터 미대사관 건립 반대 운동을 했던 건축가 강찬석 님은 “나는 원래 반미주의자가 아니고 건축가이며 문화재 보호운동을 하는 사람이다. 그런데 덕수궁터 미대사관 건립 반대 투쟁을 4년동안 하다보니 사람들이 나를 반미주의자라고 부른다. 열심히 싸웠더니 덕수궁터 미대사관 건립을 막아냈고 앞으로도 또 이런 일이 생긴다면 더 열심히 싸울 것이다.”라고 밝혀 참가자들의 박수를 받았다. 평택 미군기지 확장 저지투쟁 당시 매번 반미연대집회에 참석해 왔던 평택주민대책위원회 신종원 조직국장은 “자기 땅을 빼앗기고 주민들이 살기위해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직접 찾아와서 봐 주었으면 좋겠다. 많은 분들이 농사를 짓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한시적 공공근로를 통해 살아가고 있는 형편이다. 미군기지로 고향땅을 빼앗긴 주민들이 어떻게 살아가는지를 알려나가 줬으면 한다”고 하였다. 10년의 역사를 써내려갔던 많은 분들의 발언 한마디 한마디가 이후 우리가 더 힘을 모아나가야 함을 느끼게 하였다. 마지막 발언을 하였던 신종원 이장님의 발언은 종속적인 한미동맹으로 인해 우리 국민들의 삶이 어떻게 망가지고 고통받고 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었다. 지금까지의 10년이 눈보라와 비바람을 이겨낸 시간들이었다면 이제 이후 10년은 한반도에 불어올 회오리 바람을 맞아 국민들과 함께 이겨내어 정말 살맛나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모든 힘을 모아야 할 때라고 발언자들은 하나같이 이야기 하고 있다. 일요일 하루를 꼬박 부천평통사 회원들과 정성스레 박을 만들었는데, 바로 그 박을 터트리는 상징의식을 하였다. 참가자들은 미국과의 한판 승부에 새로운 마음과 힘을 모아 나가자면서 오자미를 마구마구 던졌다. 박이 잘 안터지만 어쩔까 걱정했는데, 걱정대로 한참을 버티디가 박이 터졌는데, 사탕도 많이 넣어 두어서인지 대학생 친구들도, 어르신들도 좋아라 하셨다. 박에서는 ‘평화협정 체결’, ‘주한미군 철수’라고 써진 현수막이 내려왔다. 뒤풀이에서는 민대협 대학생들이 율동공연도 하고, 대구, 부산, 광주 등 멀리서 참여한 분들에 대한 간단한 소개가 하였다. 젊은 대학생들이 반미투쟁에 함께 하고 있으니 대견하고 든든했다. 이제 우리는 다가올 10년 안에 주한미군 철수, 평화협정 실현, 조국 통일 모두를 이루자는 결의를 하고 있다. 지난 10년을 가장 자연스럽게 표현한다면 ‘비바람 눈보라에도 굴하지 않고’ 일 것 같다. 이후 10년은 비바람보다 더 큰 폭풍우가 몰아칠 것이다. 폭풍우 뒤 다가올 평화로운 세상, 그 날은 땅을 지켜내지 못한 회한의 몸짓이 아니라 역사를 써내려간 사람들과 기뻐 얼싸안을 수 있는 날일 것이다. 그날이 멀지 않았음을 느낀다. 그냥 오지는 않을 것이다. 10년간 그랬던 것처럼 더 큰 확신으로 실천할 때 가능할 것이다. 10주년 반미연대 집회는 나의 마음을 다지는, 더 많은 동지들의 마음을 모으는 자리가 되지 않았을까?

[평화누리통일누리] 반미연대집회 10주년을 맞는 우리의 결의

[평화누리통일누리] 반미연대집회 10주년을 맞는 우리의 결의

1999년 10월 21일, 노근리 양민학살 및 조중필 피살사건 진상규명과 불평등한 한미SOFA 개정을 요구하면서 처음 시작한 미대사관 반미연대집회가 만 10년을 맞았다. 반미연대집회는 이 땅의 모든 반미 사안이 다뤄지고 확산되는 반미투쟁의 산실이었다. 한미SOFA 개정운동, 조중필피살사건 등 미군범죄관련투쟁, 매향리폭격장 폐쇄투쟁, MD 저지투쟁, F-15K 도입반대투쟁, 여중생압사사건투쟁, 덕수궁터미대사관건립반대운동, 주한미군 전략적유연성 반대투쟁, 한미상호방위조약 개폐투쟁, 굴욕적 용산미군기지이전협상 저지투쟁 및 평택미군기지확장 저지투쟁, 무건리훈련장확장 저지투쟁, 한미연합전쟁연습 반대투쟁 등 수많은 사안들이 반미연대집회를 통해 제기되고 확산되었다. 이 사안들은 하나같이 냉전과 한국 전쟁을 배경으로 형성된 한미동맹과 주한미군 주둔으로부터 비롯된 것으로, 우리의 주권을 침해하고 한반도 평화를 위협하며 주민의 생존권을 파괴하고 우리 국민의 고혈을 짜내는 문제들이다. 반미연대집회는 매향리미군폭격장 폐쇄투쟁 승리와 한미SOFA 일부 개정, MD 저지에 기여하고, 두 여중생의 부모님이 반미연대집회에 여러 차례 참여하여 여론을 불러일으켰으며, 대추리 현장에서 집회를 개최하는 등으로 평택미군기지확장저지투쟁에 힘을 보태기도 했다. 무엇보다도 반미연대집회를 통해 한미동맹을 폐기시켜야 한다는 점을 널리 알리고 대중의 반미자주의식 성장에도 기여한 것은 큰 성과라 할 것이다. 반미연대집회의 지난 10년을 돌이켜보면 정권의 모진 물리적·법적 탄압과 이에 대한 처절하고도 끈질긴 저항으로 점철된 기간이었다. 외교공관 100m 이내 지역 집회 금지라는 위헌적인 근거를 들어 경찰은 집회 참가자에 대한 고착과 폭행, 오지 격리조치, 연행과 구금을 일삼았다. 하지만 집회 참가자들은 결코 이에 굴하지 않았다. 멀리 내던져지면 늦은 시간에 다시 돌아와서 집회를 기어코 마무리했고, 연행과 구금에는 쇠사슬로 서로의 몸을 동여매거나 비바람이 치는 가운데 밤샘 농성을 벌이는 등으로 격렬히 저항했다. 3년여에 걸친 강고한 저항과 법적 투쟁 끝에 우리는 마침내 집회의 합법성을 쟁취해 냈다. 그러나 민주주의를 말살하고 있는 이명박 정권은 광화문 KT 앞으로 옮겨 진행하고 있는 집회를 다시 가로 막았다. 그러나 이 또한 우리의 법적투쟁으로 무력화시킴으로써 집회의 자유를 수호하는데 기여하기도 했다. 정권은 한사코 막으려 하고, 집회 참가자들은 기어이 성사시켜왔던 반미연대집회의 의미는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우리 사회에서 미국의 패권을 영구화하느냐 아니면 민족 자주를 이루느냐하는 투쟁이 미대사관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서의 집회 개최 여부로 표현되었던 것이다. 바로 이런 점에서 이곳은 반미자주투쟁의 최전선의 하나였으며, 그래서 반미투쟁의 성지라고 불렸던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지난 10년 동안 반미연대집회를 지키고, 이를 통해 대중의 반미자주의식 성장에 기여한 것으로 만족할 수 없다. 역사와 민족이 우리에게 근본적이고 절실한 문제를 당면 과제로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 한반도에 공고한 평화를 이루고 자주적 통일을 성취하는 일이다. 지금 정세는 지체와 곡절을 겪으면서도 한반도 비핵화와 평화체제, 북미·북일관계 정상화, 평화군축과 통일의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이제 북미당국 사이의 대화와 협상이 본격화되면 북핵 포기와 미군철수, 한미동맹 폐기, 미국의 핵우산 제거 등이 논의될 것이다. 60여 년간 지속되면서 남북을 통틀어 주권 침해를 비롯하여 온 사회에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과 피해를 강요했던 분단과 정전체제를 마감할 수 있는 다시 오기 어려운 기회를 맞고 있는 것이다. 우리 반미연대집회 참가자들은 한반도의 지각변동이 예상되는 정세 속에서 지난 10년의 성과를 계승하여 새로운 10년의 역사를 써 나갈 것이다. 늦어도 새로운 10년 안에 우리는 북미양국이 북핵 포기와 미국의 핵우산 철회를 교환하여 한반도 핵문제를 해결하고, 반세기 넘게 이어져온 정전체제를 빌미로 주둔하고 있는 미군을 내보내고 군축을 실현하여 공고한 평화체제를 이루며, 북미간의 적대관계를 청산하여 관계를 정상화함으로써 마침내 조국통일의 탄탄대로를 여는 일에 모든 힘을 기울일 것이다. 우리는 이와 같은 근본적 과제 해결을 촉진하기 위해 군사주권을 빼앗기고 있는 작전통제권문제, 대북 선제공격적인 작전계획과 전쟁연습문제, 미군기지와 훈련장 확장문제, 미제무기도입과 미군주둔비용 부담문제, 미군범죄와 환경문제, 경제적 종속을 더욱 고착화하는 한미FTA문제 등에 대해서도 힘과 지혜를 모아 투쟁해 나아갈 것이다. 이를 위해 우리는 다부진 각오와 새로운 모습으로 반미연대집회를 더 크고 대중적인 집회로 만듦으로써 우리 사회에는 더욱 큰 영향력을 끼치고 우리에게 부당한 지배와 간섭을 일삼고 있는 미국에는 더욱 큰 압력을 행사할 수 있는 집회로 만들어 나아갈 것이다. - 우리의 결의 - - 우리는 늦어도 향후 10년 안에 한반도 평화협정 체결, 주한미군 철수, 한미동맹 폐기, 한반도 비핵화, 조국통일을 모두 이뤄낼 것을 결의한다! - 우리는 우리의 주권을 침해하고 한반도 평화를 위협하며 주민 피해와 국민 부담을 가중시키는 모든 미군과 미국 관련 사안에 대해서도 적극 투쟁해 나갈 것을 결의한다! - 우리는 반미연대집회를 더욱 대중적인 집회로 키워 우리나라를 자국 패권의 도구로 삼는 미국을 강력히 압박하는 집회로 만들어 나아갈 것을 결의한다! 2009. 10. 13. 미대사관 앞 반미연대집회 10주년 기념 121차 집회 참가자 일동

[평화누리통일누리] 대중적 반미투쟁의 산실, 반미연대집회 10년의 기록

[평화누리통일누리] 대중적 반미투쟁의 산실, 반미연대집회 10년의 기록

노근리 양민학살 진상규명과 피해배상, 조중필 피살사건 진상규명, 불평등한 한미SOFA 전면개정 등을 요구하면서 처음 시작한 미대사관 반미연대집회가 만 10년을 맞았다. 반미연대집회는 이 땅의 모든 반미 사안이 다뤄지고 확산되는 반미투쟁의 산실이었다. 반미연대집회는 매향리 미군폭격장 폐쇄 투쟁 승리와 한미 SOFA 부분 개정, MD저지에 기여하고, 조중필 피살사건과 여중생압사사건을 널리 알려내며, 평택 미군기지 확장 저지 투쟁에 힘을 보태는 등 많은 성과를 내었다. 무엇보다도 가장 큰 성과는 국민들의 반미자주의식 성장에 기여한 것이라 하겠다. 반미연대집회는 정권의 물리적·법적 탄압으로 폭행과 연행, 구금, 밤샘농성 등 모진 시련을 겪었지만, 이에 굴하지 않고 10년의 역사를 이어왔다. 이제 반미연대집회 참가자들은 지난 10년의 성과를 기념하고 계승하여 새로운 10년의 역사를 써 나가야 할 것이다. 새로운 10년 안에 평화협정 체결, 주한미군 철수, 한미동맹 폐기, 한반도 비핵화, 조국 통일을 모두 이루기 위한 운동을 힘차게 전개해 나가야 한다. 그동안 반미연대집회에서 주요하게 다뤄졌던 사안을 정리해 보았다. 불평등한 한미소파(SOFA) 전면개정운동 한미SOFA 1차 개정(1991년) 직후 윤금이 씨 피살사건(1992년)이 일어나 개정 요구가 다시 제기되었다. 그러나 미국의 회피로 개정협상은 지체되었다. 2000년 이태원 한국인 여종업원 피살사건 등을 계기로 다시 국민적인 SOFA 개정 요구가 분출하였다. 당시 반미연대집회는 147개 단체가 참여한 ‘SOFA개정 국민행동’이 주최했는데 이 집회를 계기로 ‘범국민 행동의 날’을 여는 등으로 한미SOFA 개정에 앞장섰다. 김판태 SOFA개정국민행동 사무처장(군산평통사 사무국장)은 SOFA 개정안에 대한 심의가 이뤄지는 국회 상임위 회의실에서 할복을 하기도 했다. 결국, 2001년 12개 중대범죄에 대해 기소와 동시에 미군 범죄자의 신병을 인도받도록 한 것을 비롯하여 노무, 공동검역, 공여지 합동 실사, 민사소송 절차 등 일부 전향적인 개정이 이뤄졌다. 그러나 기소 후 심문 금지, 공여지 침해 방지 등 일부 개악 규정마저 신설되는 등 그 불평등성은 근본적으로 해소되지 않은 채 지금에 이르고 있다. 매향리 미군폭격장 폐쇄투쟁 경기도 화성시 우정읍 매향리 미군 폭격장은 아시아 유일의 국제 폭격장으로, 전쟁 중인 1952년에 주한미군이 주민들의 땅과 어장을 빼앗아 만들었다. 그 후 반세기동안 주민들은 끊임없이 소음피해의 고통을 받아왔고 심지어 오폭으로 목숨을 잃기도 했다. 그동안 주민들의 격렬한 투쟁이 있었지만 고립된 투쟁으로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2000년 5월 8일, A-10기 폭탄 투하 사건을 계기로 시민사회단체가 대책위를 결성하여 사격이 진행되는 농섬에 최종수 신부가 목숨을 걸고 들어가는 등 주민들과 함께 강력한 투쟁을 전개하였다. 반미연대집회에서도 전만규 위원장 등 주민들이 참여하여 폭격장 폐쇄를 요구하고 청와대 외교안보수석도 면담했다. 투쟁 과정에서 전만규 주민대책위원장, 김종일 매향리범대위 공동집행위원장(평통사 사무처장) 등이 구속되기도 했다. 그 결과 2000년 8월 육상사격장이 폐쇄됐고, 2005년 8월 해상사격장까지 완전 폐쇄되는 쾌거를 이뤘다. 하지만, 문제는 여전히 남아있다. 불발탄과 녹슨 폭탄들이 아직까지 농섬 곳곳을 오염시키고 있는 것. 주한미군은 한국 정부에 책임을 떠넘기고, 국방부는 예산 부족 등을 핑계로 농섬을 방치하고 있다. F-15K 도입 반대투쟁 2000년대 들어 국방부가 ‘차세대전투기도입사업’을 본격 추진했다. 국방부 고위관계자들이 미국의 압력에 따라 가격이 비싼 반면 성능도 떨어지고 기술이전도 인색한 보잉사의 F-15K를 선정하도록 당시 시험평가단장인 조주형 공군대령(평통사 지도위원) 등에게 부당한 압력을 행사했다. 이에 평통사는 국방부 앞 농성과 국방부 진입투쟁, ‘신문고 두드리기’ 등의 완강한 반대투쟁으로 국민적 비난 여론을 불러 일으켜 정부를 궁지에 몰아넣었다. 이 과정에서 국방부 진입투쟁을 주도한 이형수 국장이 구속되기도 했다. 반미연대집회에서도 F-15K 도입의 부당성과 양심선언으로 구속된 조 대령의 재판 소식 등을 다뤄 반대 여론을 높이는데 기여했다. 미사일방어(MD)체제 도입 반대투쟁 2000년 부시 정부 들어서서 한국에 대한 미국의 MD 참여 요구가 노골화되었다. 한국의 시민사회단체들은 MD저지공대위를 구성하여 미국의 MD 참여 강요에 반대하는 투쟁을 전개하였다. 최병수 화백이 반미연대집회 장소인 광화문 열린시민공원에 세워져 있는 기둥을 이용하여 MD 반대 상징물을 설치하는 등 집회를 통하여 MD의 위험성을 알려냈다. 여중생압살사건 진상규명투쟁 2002년 6월 13일, 두 여중생 신효순, 심미선이 미군 궤도차량에 처참하게 깔려 죽었다. 온 나라가 2002년 월드컵 열기에 빠져있었지만 반미연대집회는 이 사건 직후부터 적극적이고 끈질기게 다뤄 가장 대중적인 반미투쟁이 되도록 하는데 기여했다. ‘반미면 어떠냐’는 노무현 대통령이 당선될 수 있었던 것도 이 같은 범국민적 반미투쟁의 열기에 힘입은 바 크다. 두 여중생의 부모님은 여러 차례 반미연대집회에 참여하여 발언했으며, 집회 후 사회단체 대표들과 함께 주한미국대사를 면담하여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요구하기도 했다. 이후 해마다 두 여중생이 죽은 6월 반미연대집회 때는 추모의식을 거행하고 있다. 평택미군기지 확장저지투쟁 평택미군기지확장은 미군의 전략적 유연성 확보를 위한 물리적 토대를 마련하려는 것이다. 즉, 대북 선제공격과 중국 포위, 전 세계 전력 투사의 유리한 조건을 만들려는 것이다. 이로 인해 주민은 자기 땅에서 쫓겨나고 우리 국민은 기지이전비용을 대부분 부담할 뿐만 아니라 한반도 평화는 더욱 심각한 위험에 빠지게 된다. 이에 평택미군기지 확장저지투쟁 초기에는 주민들이 미대사관 앞 열린시민마당에서 열리는 집회에 참석했고, 후기에는 집회 장소를 여러 차례 평택 대추리 현지로 옮겨 주민들과 연대하는 등 투쟁이 전개되는 내내 이 문제를 중심 주제로 다뤄 투쟁에 힘을 보탰다. 무건리한미공용훈련장 확장저지투쟁 한미 군당국이 무기체계 발달로 인한 사정거리 확대 등을 이유로 무건리 한미공용훈련장 확장을 강행하고 있다. 훈련장이 확장되면 평택과 마찬가지로 주민들이 쫓겨나 생존권을 잃고 휴전선에 인접한 접경지역의 특성상 남북 간 군사적 긴장이 더욱 높아지게 된다. 주민들이 거의 매번 집회에 참가하고 있고, 여러 차례 발언을 통해 훈련장 확장의 문제점을 알리고 있다. 참가자들은 이들의 투쟁에 대한 지지와 성원을 보내고 있으며 연대투쟁에 함께하고 있다.

[평화누리통일누리] 반미연대집회 10년 개근, 변연식 공동대표를 만나다

[평화누리통일누리] 반미연대집회 10년 개근, 변연식 공동대표를 만나다

처음 시작... 문정현 신부님이 군산미군기지 민항공기 활주로 사용료 문제 등으로 소파(SOFA)개정운동을 시작하면서 ‘미 대사관 앞에서 집회 한번 해 보자’고 각 단체에 제안할 때였어요. 1999년 10월에 오두희 선생, 박순희 대표, 천주교 성심회 수녀님들과 자통협(평통사)과 미대사관 뒤편에서 집회를 했죠. 당시에는 시내에서, 더구나 미대사관 앞에서 집회를 한다는 게 상상도 못하던 시절이라, 경찰들의 탄압이 엄청 났죠. 집회를 시작하자마다 모두 연행됐지요. 한번은 무척이나 추운 겨울이었는데, 길바닥이 얼음으로 덮혀 있었어요. 집회를 하려다가 모두 연행되어서 신설동 사거리에 내버려졌는데, 얼음 바닥에 나동그라지고 문정현 신부님은 안경도 깨지고요. 정신을 추스리고 또 대사관 앞으로 와서 정리집회를 한다고 했지요. 그러다가 또 광화문 사거리까지 끌려서 밀려나고요. 집회 시작전부터 광화문 열린공원 입구를 경찰들이 가로막고 출입을 통제하는 바람에 조금 늦게 온 사람들은 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었어요. 미리 안에 들어간 사람들은 경찰들에게 빙 둘러싸여 고착을 당하고요. 그러던 중 2002년 봄에는 사람들이 모두 연행이 되었고, 문정현 신부님과 늦게 온 몇 몇만 남았어요. 신부님이 “잡혀간 사람들이 풀려날 때까지 자리를 뜨지 않겠다”고 하시고, 결국 밤을 새워 새벽을 지나 다음날 오후까지 있었지요. 미대사관 근처라고 집회를 못하게 하니, (집회보다 더 강력한) 밤샘 농성을 해버린 것이죠. 그 뒤로도 몇 달을 더 고생했어요. 사람들이 잡혀가면 밤새워서 기다리고, 쇠사슬로 서로를 엮어서 연행에 저항하기도 했지요. 이런 저런 고생 끝에 집회 장소를 합법화할 수 있었어요. 투쟁하지 않았다면 어림없는 일이지요. 반미연대집회 10년, 돌아보니 내가 바뀌었구나 문정현 신부님이 <불평등한소파개정운동본부>를 꾸리고 활동을 하시다보니 자연스럽게 같이 하게 되었어요. 그때 처음 자통협-평통사와 인연을 맺은 것이죠. 사실 그때가 개인적으로는 큰 수술을 받아서 집에서 누워있을 때였어요. 무기력하게 정체된 느낌으로 누워서, 오한이 오면 진통제로 버티고 있는데 이미 내 나이 중년을 넘고 있었죠. 이제 뭔가를 해야한다면, 평화를 위한 일, 분단 극복을 위한 일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딱 때가 맞아 떨어진 거죠. 집회 경험이 많지 않아서 반미연대집회 하면서 ‘원봉(원천봉쇄)’이라는 말도 처음으로 들어봤어요. 그러니, 경찰들이 얼마나 무서웠겠어요. 어벙하게 집회 참가 하러 갔다가 경찰들로 꽉 둘러싸이니까 어디 숨을 데도 없고, 너무 무서워서 천주교 후배들에게 ‘나 좀 사람들 가운데에 넣어줘’ 그랬다니까..(웃음) 반미연대집회 10년이 지났다고 하는데, 가장 변화된 점이 무엇이냐면 글쎄 난 잘 실감이 안나요. (잠시 생각) 그러고보니 나 자신이 제일 많이 변했네요. 10년동안.... 반미투쟁의 산실.. 제일 감동적이었던 것은 2002년 효순 미선이 투쟁때 시청광장에서 수많은 시민들이 촛불을 들고 “소파개정”을 외쳤을 때였어요. 그해 여름 우리 엄청 싸웠잖아. 초겨울에 미군들에게 무죄판결이 내려지고, 동두천 미군부대 앞에서 경찰에 깔리면서 싸웠구요. 그날 우리 장도정 동지가 분한 마음에 뜨거운 눈물을 흘리는게 인상적이었죠. TV에도 나오고요. 그렇게 싸워서 온 국민이 촛불을 드는 것을 보니 3년간 광화문 공원에서 싸워온 게 주마등처럼 흘러가는 거야. 그때 ‘한 3년 열심히 싸우니까 되는 구나’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광화문 공원에서 소파개정을 요구하며 신부님들이 천막농성을 하는데, 대통령 후보들이 찾아오곤 했죠. 미국 관련 모든 사안들이 적어도 한번씩은 반미연대집회를 거쳐 갔어요. 집회가 하나의 통로가 된거야. 매향리 투쟁 같은 경우도 천주교 평화지기들하고 최종수 신부님, 김용한 선생, 자통협 사람들하고 집회에서 다달이 보면서 정붙이던 사람들이 매향리 현장에서도 엄청 큰 시너지를 발휘해서 투쟁했어요. 서로베르토 신부님도 그렇고.. 농로를 따라 경찰들과 싸워가면서 옷도 다 찢어지고 그러면서 매향리도 들어갔던거, 기총 사격 연습 현장을 목격하고, 농섬이 내려보이는 언덕까지 올라가니 해가 지더라구... 그때 거기서 자장면 시켜먹던 거, 주민들이 밥을 솥단지째 해 갖고 오던 게 얼마나 인상적이었는지 잊혀지지가 않아요. 제가 마티즈 차를 1999년 1월에 샀는데, 그것도 인연이었나 봐요. 사건 현장이 매향리, 평택, 동두천, 용산, 의정부 등 집에서 한두시간 거리니까 ‘아, 이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다. 현장으로 찾아가자’ 생각하고 막 찾아 다닌 거죠. 미대사관 반미연대집회는 정보를 얻고 공부하는 자리이고, 박순희 대표(천주교정의구현전국연합)가 표현대로 황금마차(마티즈) 타고 현장을 돌아다녔어요. 누가 얘기하던데, 제 차에 캠코더를 달아놨으면, 그대로 10년동안 투쟁의 역사를 기록했겠다고요. 매향리에선 앞뒤유리도 왕창 깨졌고, 용산에서 맥팔랜드 수사하라고 농성할 때는 이틀 연속으로 견인되기도 하고, 외교통상부 앞에서 차량 채로 경찰에 고착되어 피켓을 들었더니 신문 1면에도 나고 했죠. 쉽지 않은 10년, “영혼이 맑은 사람들” 10년이라니, 정말 쉽지 않아요. 매월 둘째주 화요일마다 집회를 연다는 것이... 물론 군 위안부 문제해결을 위한 수요집회나 민가협 엄마들의 목요집회도 있지만요. 아무튼, 정기적으로 열리는 게 중요해요. 매향리, 무건리, 대추리, 군산 등 미군의 피해 당사자들과 함께 친구가 되는 것, 그것이 연대라고 생각해요. 집회가 아니면, 이 사람들을 어디가서 만나겠어요? 천주교 신부님들, 수사님들, 성심회 수녀님들, 양비안네 수녀님, 임기란 어머님와 민가협 어머님들 너무너무 감사해요. 항상 열성적으로 참여해주시는 통일광장 선생님들도요. 집회 얘기를 하다보니, 평통사 사람들 얘기를 안할 수가 없네요. 10년을 이끌어 온 사람들(실무자)들의 진정성이 느껴져요. 영혼이 맑은 사람들이라는 것을요. 저도 자연스레 평통사 일을 하고 있지만, 평통사 사람들을 만난 게 삶의 큰 기쁨이에요. 자랑스럽고요. 그러니까 제가 여기에 붙어있고 함께 하죠(웃음) 앞으로 더 열심히 해야 해요. 지금은 경찰들과 막 옥신각신 안하고 평화롭게 집회를 하다보니까 그림을 더 잘 만들어야 하는 거죠. 용어도 쉽게 써서 사람들이 더 잘 알 수 있게 하고, 피켓도, 상징의식도, 참여하는 사람들도 더 적극적으로 해야 해요. 앞으로도 재미있는 집회, 내용있는 집회를 해야 더 많은 사람들이 참여할 거에요.

[평화누리통일누리] 오현리 주민들의 작은 소망!

[평화누리통일누리] 오현리 주민들의 작은 소망!

오현리 주민들의 땅이 기어이 빼앗기게 생겼다. 국방부가 무건리 훈련장을 확장하면서 주민들의 땅을 수용하기 위해 중앙토지수용위원회에 수용재결 신청을 한 것이다. 10월 22일에 열릴 예정인 중앙토지수용위원회 수용재결 회의는 2차 수용재결 회의로 훈련장 확장에 반대하는 160여 가구의 땅이 재결 대상이다. 일단, 수용재결이 결정되면, 평택 미군기지 확장 당시 대추리, 도두리 땅과 마찬가지로 국방부는 주민들의 의사와 상관없이 토지를 수용할 수 있게 된다. 주민들이 애가 탈 수 밖에 없는 상황이다. 이런 와중에 지난 7일 주민대책위 활동에 애썼던 주민 남창희 님이 스스로 목을 매 숨졌다. 반미연대집회에 나서와 발언도 했던 분이었다. 평소 조울증을 앓고 있었다고 하지만, 작년 파주경찰서 앞 촛불집회에서 연행된 이후 증상이 부쩍 심해졌다고 하니, 훈련장 확장으로 인한 심리적 압박이 직간접 원인으로 추정된다. 무건리 훈련장 확장 저지 주민대책위 주병준 위원장의 호소문을 싣는다. 국민들과 국방부를 향한 것이다. 무건리 훈련장 확장의 문제점에 대해서는 [평화누리 통일누리] 77호, 80호, 85호 등에서 자세한 내용을 볼 수 있다. - 편집자 주 - “국방부가 계획의 3%만 양보하면 주민들도 같이 살 수 있다” 매년 8월 15일이면 광복절을 기념하여 개최되는 오현·직천 주민 체육대회가 올해로 43주년이 되었습니다. 아마도 전국에서 이렇게 긴 역사를 가진 주민체육대회가 열리는 곳은 흔치 않을듯 싶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 기억으로는 여름방학이면 초등학교 운동장에 천막을 치고 국수를 삶아 먹으면서 배구연습을 하느라 합숙훈련을 했던 기억이 납니다. 매년 체육대회가 열리는 날이면 각 리마다 아이, 어른 할 것 없이 모두모여 각종 게임도 하고 막걸리도 한잔 하면서 세상사는 이야기로 하루를 보내는 아주 기대가 되는 자랑스런 행사입니다. 그러나 80년대 초 군사정권시절에 적성면 무건리, 법원읍 직천리 일대 250여 가구를 강제로 몰아내고 550만평이라고 하는 엄청난 면적의 땅을 군사훈련장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그때 당시의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도 조상님들께서는 함께 살다가 헤어지는 마음이야 가슴 아프지만 후손들을 위해서라도 학교만큼은 꼭 있어야 한다며 지금의 오현리로 이전을 하였습니다. 경운기로 책걸상과 돌, 나무 등을 몇날 며칠을 실어 나르며 누구 할 것 없이 서로 협심해서 학교도 옮겼으니 마음 변치 말고 열심히 살자고 맹세하였습니다. 직천리에서 쫓겨나신 분들도 여러 가구가 함께 살고 있지요. 그 학교가 지금은 폐교가 되어 도자기 체험장으로 활용되다가 국방부의 압력에 의해 흉물이 되어 버렸습니다. 우리 조상의 얼이 담긴 도자기를 빗고 체험하는 어린 꿈나무들이 년 3만명 이상 다녀가고 있는 훌륭한 교육사업을 정부에서 오히려 권장하고 지원을 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지난 96년도에 확장 발표가 된 후에 지금까지 협의 매수라는 미명하에 저희 마을은 고립된 절망의 마을로 변해버렸습니다. 그것도 모자라 현재는 중앙토지수용위원회에 수용재결을 신청한 상태입니다.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고 하는데 30년 동안 이렇게 뚜렷한 계획도 없이 허무한 세월을 살아온 것입니다. 수십 년 전에 세워놓은 계획을 무조건 실행해야 된다는 국방부의 처사가 도저히 저희 주민들로서는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아무리 국가안보라고 해도 30년의 고통을 감내하며 살아온 주민들의 작은 요구도 이제는 들어줄 때가 됐다고 봅니다. 지난해 국방부장관의 발표에 의하면 ‘훈련장으로서의 기동공간은 충분히 확보가 됐다.’ ‘다만 주민의 안전을 위하여 이주를 시키려고 하는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지난 수십 년간 훈련을 하면서도 어떠한 안전에 대한 예고도 없었습니다. 저희 마을은 사격 포물선도 아니고 지금 56번 국지도를 고속화도로로 건설 중에 있으며 기존 도로 뿐만 아니라 마을에는 군부대도 있습니다. 수만대의 차량이 통행하는 2개의 도로를 가로지르는 사격을 하면서도 오직 주민들이 살고 있는 마을만 ‘주민의 안전’ 운운하며 쫓아내려는 것 또한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좁은 면적의 우리나라 전체에 4,000여개의 훈련장이 있다고 하는 것은 아마도 국민들은 거의 모를 것입니다. 이제 세월이 흐르고 변한만큼 국방부도 변화해야 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저희 농민들은 가족을 부양하며 자식들을 공부시키기 위해 열심히 일하며 살아온 죄 밖에 없습니다. 대한민국이 비인권국가임을 이미 체험을 했고 협의 매수에 의한 농토를 자기들 땅이라고 마구 파헤치고 있는데, 농민에게 농토는 피와 같은 존재이거늘 이렇게 훈련장으로 사용도 안하면서 놀리는 땅이 100만평이 넘습니다. 저희 주민들의 소망은 기존 훈련장을 내놓으라는 것도 아니요 훈련을 못하게 하는 것도 아닙니다. 평생 동안 농사만 지어온 농민들과 축산업을 하는 주민들이 생존권을 보장할 수 있게 한쪽으로 몰아서 마을을 형성하며 살 수 있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국방부가 계획의 3%만 양보를 하면 국민들도 같이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국가안보를 위한 국방사업의 일환이라 하더라도 국민들이 얼마만큼 공감을 하는지 무엇을 원하는지 여론을 수렴해서 들어줄 수 있는 것은 들어줘야 국가와 국민을 위하는 것이요 국가가 발전하는 것이지 일방적인 회유와 협박으로 희생을 강요한다면 국가와 국민 모두에게 불행이요 역사에 반하는 것임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평화누리통일누리] 태산 영남-대구를 흔들어 깨우자! 대구평통사 결성 비나리

[평화누리통일누리] 태산 영남-대구를 흔들어 깨우자! 대구평통사 결성 비나리

2009년 10월 7일, 열 네 사람의 평통사 회원들이 대구평통사 결성 준비위원회를 세웠다. 드디어 내년초에 대구평통사가 결성된다. 대구에 평통사를 결성하기 위한 발걸음을 내디딘 지 8년 만이다. 대구평통사 결성은 지난 5월 부산평통사 결성에 이어 영남지역에 평통사 뿌리를 내리는 숙원이 이루어지는 쾌거다. 어느 지역 평통사인들 소중하지 않을까마는 대구평통사 결성을 앞둔 감회가 남다르다. 대구에서 평통사를 조직하기 위한 시도는 2001년에 시작되었다. 한 회원이 직장을 대구로 옮기게 되었는데, 그는 대구에서 평통사 활동을 만들어보겠다고 의욕적으로 나섰다. 그렇지만 수구냉전적인 대구지역과 회사 분위기를 돌파해내기엔 역부족이었다. 2002년, 대구에서도 여중생 촛불이 켜졌다. 많은 시민들이 촛불을 들고 시내로 나왔고 대구에서는 일반 시민들이 동참하는 이 같은 촛불 시위가 참으로 오랜 만에 있는 일이었다. 중앙사무처에서 여중생 추모 대구백화점 앞 집회에 내려가 사진전과 캠페인을 벌이기도 했다. 이런 분위기에서 홍근수 목사님의 소개로 대구 지역 목회자들게 연락을 넣어 간담회를 열었다. 대구에서 평통사를 해보자는 제안은 의외로 선뜻 받아들여졌다. 그리하어 2002년 12월 15일, 영남신학대학교 정경호 교수와 구민교회 김경태(대구 외국인노동상담소장) 목사 등이 중심이 되어 결성한 것이 ‘(대구 경북)지구촌의 평화와통일을일구는사람들(약칭 지통사)’이다. 당시 이라크 전쟁 반대 운동에 나서고 있던 정경호 교수는 대구의 정서를 고려하고, 한반도 뿐 아니라 전 지구의 평화에도 나서는 것이 필요하다는 주장을 폈다. ‘지통사’라는 명칭이 어색하긴 했지만 평통사는 지역평통사 결성과 활동에서 해당 지역의 실정과 주체적인 조건, 요구를 기본으로 하고 있기에 정경호 교수와 대구분들의 의견을 존중했다. 지통사는 2003년 6월 재창립 평통사 총회에 대표단을 파견하여 평통사 재창립의 의의를 높이는데 기여했지만 창립 이후 중앙운영위 참가나 평통사 실천 과제에 대한 동참을 하지 않는 등 조직적인 활동에서 문제점을 보였다. “대구를 ‘지역’이라 하지 말고 ‘중앙’이라는 표현을 쓰지 마라” 하고 중앙사무처에서 대구를 방문하는 일을 부담스러워 했다. 이에 홍근수 상임대표가 직접 대구에 내려가 조직적인 활동을 독려하는 자리를 갖기도 했지만 결국 지통사는 평통사 활동을 제대로 전개하지 못하고 아무런 대안을 마련하지 못한 채 해소되었다. 지통사가 해소된 후에도 몇 몇 회원들은 포기하지 않고 대구평통사를 다시 시작해야 한다고 용기를 주셨다. 그 분들이야말로 대구평통사 결성의 동력이다. 누군가 나서주어야 하는 상황이었지만 별다른 방법을 찾지 못해 늘 속만 태우던 중 2007년, 놀랍게도 백창욱 목사가 대구평통사를 해보겠다고 자원하였다. 목정평(전국목회자정의평화실천협의회) 활동을 하면서 평택 미군기지 확장저지투쟁에 나섰던 백 목사는 대추리 싸움 과정에서 평통사를 알게 되었고 평통사에 대한 애정과 신뢰를 높이게 되었다. 마침 대구로 내려가 목회를 하게 된 백 목사가 대구평통사 재결성해 나서겠노라고 한 것이다. 진심으로 기다리면 이런 일도 생기는가 싶었다. 2007년 9월, 한반도 평화협정 실현에 나서기로 결의한 광주 일꾼 전진대회에 수줍은 듯 머쓱한 모습으로 나타난 백창욱 목사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백 목사는 아무런 연고도 없는 대구에서 가족들과 함께 평화협정 캠페인을 벌여 길잡이 수 백 명을 조직해내고 대구평통사의 이름을 대구지역 단체와 활동가들에게 알려내었다. 평통사는 2008년 그에게 모범회원상을 시상하여 노고를 치하하고 더 적극적인 활동을 독려하였다. 지금은 수구보수의 아성의 대명사가 된 대구는 한 때 정치적으로 ‘남한의 모스크바’라고 불리며 남한 진보운동의 중추였다고 한다. 해방직후인 1946년 미군정의 폭압에 맞서 일어난 10월의 대구 인민항쟁은 1948년 제주 4·3항쟁과 10월 여순항쟁으로 이어지게 된다. 자유당 독재에 맞선 투쟁에서도 대구는 중심적 역할을 한다. 1960년 2월 28일, 대구 학생의거는 3·15 마산항거의 기폭제가 되었으며 이 항쟁의 흐름은 전국으로 확산되어 4.19혁명에서 정점에 이르고 4월 26일 이승만을 하야시켰다. 박정희는 학생, 교사, 언론이 높은 결합력을 갖고 민주화 투쟁을 선도해온 대구, 자신의 과거를 잘 알고 있는 대구가 두려웠다. 그는 1964년 굴욕적인 한일회담에 반대해나선 6.3학생투쟁 직후 1차 인혁당 사건을 조작했고, 1975년 민청학련 사건의 배후로 2차 인혁당 사건을 조작하고 8명을 즉각 처형함으로써 반유신세력을 거세하고 투쟁을 잠재우려 했다. 대구에서 4.9인혁재단 활동을 하는 김찬수 대구평통사 결성 준비위원은 “‘인혁 학살’로 공포감을 느낀 대구 시민들은 보수화의 길을 걷게 되었다. 박정희는 영호남차별전략을 통해 대구인재들을 중앙정부에 등용하여 지역민심을 장악했다. 인혁당 사건에서 살아남은 이재문 선생이 남민전을 결성, 다시 탄압받으면서 대구 진보세력의 불씨는 괴멸직전에 놓이게 되었다.1)”고 평가한다. 현대사의 질곡 속에서 진보운동의 중추 기지에서 수구보수의 아성으로 변해버린 대구. 이 대구에 미군은 캠프 헨리, 캠프 워커, K2 공항 등을 두고 대구를 주한미군의 병참기지, 정보통신첨단기지로 사용하고 있다. 전 전농회장 윤정석 회원은 “예전부터 영남을 태산명월이라 칭송했지만 말도 안 되는 얘기다. 박정희 때부터 잘못되어 문딩이 같이 되었다. 영남 출신이란 게 부끄럽고 답답해서 속에 불이난다....하긴 태산은 태산이지 한 번 자리 잡으면 꿈쩍도 않는 태산이지...”하며 한탄하였다. 32년 전 참혹한 죽음을 당한 인혁당 희생자들이 지난 2007년 1월 무죄판결을 받았다. 우연일까? 대구에서 평통사가 오랜 침묵을 깨고 활동에 나선 것도 2007년이다. 이제 대구평통사가 각계각층의 동참아래 제대로 허리 펴 일어서면 태산같이 꿈쩍않는 수구보수의 아성, 미군들의 병참기지가 되어버린 대구도 긴 잠에서 깨어나리라. 비나리.

[평화누리통일누리] 쌍용자동차 조합원들과의 만남

[평화누리통일누리] 쌍용자동차 조합원들과의 만남

현재 쌍용차 사건으로 구속자는 70여명을 넘어서고 있다. 그중에서 쌍용자동차 조합원은 55명이다. 이틀 전(6일)에도 조합원 2명이 긴급 체포되었고, 구속노동자후원회 인권팀장도 구속되었다. 앞으로도 구속자가 늘어나지 않으리란 보장이 없다. 구속자 중에서 재판을 받은 3명은 전부 실형을 선고 받았다. 불구속 재판을 받은 조합원도 집행유예 선고를 받았다. 경찰은 앞으로도 수십 명이 추가로 구속영장 실질 심사를 받게 될 것이라고 했다. “해고는 살인이다”를 외치며 대규모 정리해고를 막아내고자 한 쌍용자동차 노동자들의 공장점거 투쟁은 끝났지만, 노동자들의 조합 활동을 무력화하기 위한 정부와 자본의 탄압은 집요하게 계속되고 있다. 안타깝게도 한상균 지부장을 비롯한 평통사 회원인 조합원은 6명중 5명이 구속되어 있다. 구속된 이들과, 해고된 쌍용차동차 노동자들에 대한 관심과 지원이 필요한 때이다. 오늘(10월 8일) 아침 8시 평택시내에 위치한 쌍용자동차 정리해고특별위원회 사무실에서 류충현 조합원과 원성재 선전부장을 만났다. 원성재 선전부장이 조금 일찍 나오고 류충현 조합원은 조금 늦게 출근을 하여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박금석 지부장 직무대행과 박대권 조합원이 출근하여 사과를 깎아주며 우리의 대화를 도왔다. 원성재 부장은 평화협정 실현운동 추진위원이고 평택 미군기지 확장 저지투쟁에 함께 하다 경찰 폭행에 부상당한 적도 있다. 주민 촛불집회에도 꾸준히 참가하고 2006년 3월부터 5월까지는 야간 일을 마치고 아침에 퇴근하면 대추 초등학교 민주노총 천막에서 잠을 자면서 미군기지 확장 저지 투쟁에 열심히 참여했었다. 원성재 부장이 말이 별로 없어서 인터뷰하는 동안 내내 류충현 조합원은 “얘(원성재 부장)는 원래 말이 없어요, 물어보면 예, 아니요, 뭐 이런 정도에요.”라고 하였다. 그러다 보니 류충현 조합원이 실상 대화의 주인공이 되었다. 류 조합원은 그동안의 심정을 솔직하고 자신 있게 말했다. 인터뷰, 정리 현호헌 자신의 소개를 간략히 원성재(이하 원) : 노동조합 선전부장이고 2001년 말에 입사하여 8년 근무하였다. 미혼이지만 애인은 있다. 류충현(이하 류) : 89년 3월에 입사하여 39개월 만에 조장을 다는 기록을 세웠다. 1년에 800건의 넘는 제안을 회사에 하는 기록을 세웠고 경기도 개선활동상 등 다양한 상을 수상하였다. 노동운동은 한상균 지부장을 만나면서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지부장의 인간 됨됨이에 감동받았다. 요즘 일상은 어떻게? (원) 9월 30일부로 쌍용자동차 지부의 회계를 정리하고 있다. 구속자 면회 등은 정특위(노동조합내 정리해고 특별위원회)에서 관리하고 있다. 안성병원 등에는 부상자들이 있어 이들을 지원하는 일도 한다. 공권력의 진압작전으로 인한 후유증이 심하다던데 (류) 지금도 귀가 멍해질 때가 있다. 자다가도 잠꼬대를 하고 큰 소리를 치는 조합원들도 있다고 한다. 저번에는 비가 오는 데, 나도 모르게 갑자기 비옷을 입고 나가려고 한 기억도 있다. 현재 회사내 사정? (류) 현장의 기계가 된 것 같다. 17잡에서 24잡(24대/1시간)생산으로 노동강도가 세졌고, 1개 라인에서 4종을 생산한다고 한다. 차량 종류마다 다시 수출용, 내수용 등 4가지의 용도로 나누어 생산을 하는데 파업 이전에는 2종의 차량만 1개 라인에서 생산이 되었다. 현재 16개 테파(4종 × 4용도)가 생산되니 사람들은 70여개의 생산에 대한 부품과 조립 방식 등의 항목을 모두 외어야 한다. 예전보다 훨씬 많은 종류의 차를 만들어 내야 하니, 정신이 없다고들 한다. 생산대수도 늘어나서 불량이 나지 않는 게 다행 아닐까?. 그래서 나는 현장 조합원들에게 “참 대단한 일들을 한다”라고 말해준다. 회사 전망이 없다고 하는 사람들에게 (류) 승용차는 고부가가치 산업이다. 쌍용자동차는 엔진과 후레임 분야에서는 국내 최고의 기술을 가지고 있다. 정부가 공적자금을 투입한다면 살아 날 수가 있다. 어떤 심정으로 이번 투쟁에 참여했는지? (류) 우선 지도부를 신뢰할 수 있었다. 그리고 열심히 근무하던 사람들을 많이 해고하였다. 이것도 많은 반감을 가지게 하였고 해고가 부당하다고 생각하였다. 해고되지 않는 사람들 중에는 일을 열심히 하지 않는 사람들도 많았다. 한상균 지부장이나 간부들은 8월 15일까지 버티자, 그러면 해결 될 수 있을 것이다 하여 다수는 그럴 것이라 생각하였다. 투쟁 당시에는 에어콘에서 나오는 조금의 물로 씻기도 하고, 조합원들 간의 단결로 버티어 낼 수 있었다. ‘2번 최류탄을 뒤집어 쓰면 하루가 간다’고 생각하면서 버텼다. 이후 계획은 무엇? 국민들게 호소하고 싶은말이 있다면? (원) 빨리 지부 선거를 해야 한다. 안정을 찾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회사가 소위 말하는 외부세력의 도움이 컸다. 앞으로도 많은 관심과 지지를 바란다. (류) 파업이전까지 현장활동가네, 조합활동가네 하던 사람들이 투쟁에 함께 하지 않고 현장을 떠나는 것을 보면서 실망이 많았다. 그런데 그들이 다시 지금 이 사무실에 나타나 시끄러운 소리들을 하고 있다. 끝까지 남은 사람들은 다수가 성실히 일만 하던 노동자들이다. 열심히 투쟁하여 복직할 것이다.

[평화누리통일누리] \’국가대표\’를 보고 아! 대한민국!

[평화누리통일누리] \’국가대표\’를 보고 아! 대한민국!

국가 대표! 7, 80년대 막 칼라로 바뀐 TV에서 무개차 위에 걸터앉아 어색한 웃음을 날리던 모습? 내게 국가대표란 그 정도가 다다. 그런데 그 ‘국가대표’가 요새 화제란다. 도대체 어떤 ‘국가대표’길래… 하며 누가 떠민 등도 아닌데 등 떠밀리듯 가본다. 드라마 구조는 스포츠 영화가 으레 그렀듯이 각각의 사연을 담은 비행(非行) 청소년들을 스키점프대에 모아다 비행(飛行) 시키는 뻔한 구조를 갖고 있다. 비행(非行) 청소년 출신들이 처음부터 비행(非行) 한 건 아니었지만, 비행(飛行)을 시키기 위해 비행(非行) 청소년을, 천마산 어린이 스키 교사 출신 방코치(성동일 분)가 찾아다니는 것으로 얘기는 시작된다. 어딘가 ‘공포의 외인구단’ 아류를 보는 듯한 느낌이지만…, 그들이 우여곡절 끝에 결국은 대표 팀에 합류하리라고 나도, 관객들도 예상했을 것이다. 그래도 눈을 떼지 못하는 게 관객인가 보다. 그러다가 좌절을 겪을 것이고… 반항하던 비행 청소년들이 개과천선하여 좌절한 코치를 다시 불러내어 결국 승리로 이끌 것이고…. 정말 관객의 심리는 어쩔 수 없다. 아마 소설책이었어도 맨 뒤로 넘겨 결과만 보진 못할 것이다. 약간 걱정을 하기 시작했다. 영화는 ‘독후감’이 됐건, ‘평론’이 됐건 ‘감상평’이 됐건 그런 평가로 완성되는 것이지 평가가 없는 영화는 여전히 미완성이다라고 평소 주장해왔던 나로선 ‘평’을 써야 하기 때문이다. 그냥 빨려 들어가듯 줄거리만 따라가다간 아무 생각도 못하고 평도 못 쓸 것이다. 그래서 딴죽을 걸어보기로 했다. 바로 제목인 ‘국가대표’. 그들이 ‘대표’하는 ‘국가’란 뭘까? ‘국가대표’는 아무리 생각해도 영광스런 지위인 것 같다. 단, 영광된 지위를 약속하지만 그만큼 ‘봉사’와 ‘희생’을 강요한다. 때론 영광된 지위에 관심 없는 자들에겐 ‘봉사’와 ‘희생’만 강요하기도 한다. 대신 물질적이던, 정신적이던 ‘보상’ 주어지니 그런 딜(deal)이 이루어지겠지? 극중 하정우가 분(粉)한 ‘밥’(미국명, 곧 귀화해 차헌태로 불린다)에게 있어서 국가는 경멸의 대상이고 저주의 대상인 것 같다. 어릴 적 동생과 함께 팔려간 그에게 ‘국가’는 없었다. 다만 어머니가 사는 나라로서의 한국을 찾았을 뿐이다. 어머니는 예상과 다르게, 가난에서 아직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고 ‘밥’은 그 어머니를 위해 아파트를 사드리고 싶었다. 그걸 알아챈 방 코치는 자기가 신이라도 된 양, 덜컥 아파트 한 채를 약속 해 버린다. 단, ‘금메달 따면’이란 조건은 걸지만… 연로하신 할머니와 4차원 정신세계의 동생을 부양해야 하는 소년 가장, 칠구(김지석 분)도 방 코치가 군대를 면제시켜 준다는 꼬임에 캠프에 참여하게 된다. 군대에 가면 할머니와 동생을 부양할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아버지에게 순종하며 평생 아버지(이한위 분)가 운영하는 고기 집에서 고기만을 구우며 살 것 같던 마재복(최재환 분)도, 여자를 너무 좋아해 오로지 방 코치의 딸을 작업(?) 하려고 국가대표 캠프에 참여한 최흥철(김동욱 분)에게도 그들이 대표할 ‘국가’는 없는 것 같았다. 단지, 제각기 다른 ‘보상’에만 관심 있을 뿐이다. 심지어 천마산에서 어린이들에게 스키를 가르치며 근근이 살던 방 코치마저도 영광된 ‘지위’에만 관심 있지, 그걸 위한 봉사와 희생에 대한 준비는 없었던 것 같다. 그럼 지금 현재 태능 선수촌에서 열심히 땀을 흘리는 우리의 ‘국가대표’ 선수들에게 ‘국가’는 뭘까? 그들은 바로, 어린 시절 우리가 수없이 들어왔듯 모든 것 다 포기하고 오로지 ‘국가’만을 위해 태어난 사람들이 아니었던가? 가족도 친구도 없이 4년에 한 번씩 돌아오는 올림픽에서 태극기 올리기만을 유일한 희망과 꿈으로 여겨 온 사람들이 아니었던가? 정말 스스로가 대표할 ‘국가’를 위해 봉사와 희생정신으로 똘똘 뭉쳐 있을까? 그래서 그들이 그렇게 갈망하던 금메달을 땄을 때 행복했을까? 아님 행복한 체 했을까? 헌태는 자신을 길러준 미국인 양부모가 위급하신데도 생모를 찾아 한국에 오고 생모를 위해, 아파트를 위해, 자신을 버린 ‘국가’에 기꺼이 국가대표가 된다. 칠구도 다리가 부러져가면서도 끝까지 ‘국가대표’로서 남고, 흥철도 작업 대상(방코치 딸)이 떠나갔음에도, 재복도 아버지에게 다리가 부러지도록 맞아 가면서도 여전히 국가대표로서 모든 열정과 희생을 바친다. 그게 무엇일까? 무엇이 그들을 보호해주지 못하는 ‘국가’의 대표가 되게 한 것일까? 그럼 내게 있어 ‘국가’는 뭘까? 오후 5시가 되면 멈춰 서서 경례하여야 하는 대상? 아님 4절까지 외워야 하는 애국가의 주인공? 우리 어머니, 아버지에게 있어 국가는 뭘까? 용산 참사 희생자와 유족에게 있어 국가는 뭘까? 한미 FTA로 피해 입은 농민들에게 국가는?, 그리고 비정규직 노동자나 철거민들에게 국가는 뭐고 위정자들이나 가진 자들에게 국가는 뭘까?

[평화누리통일누리] 부천 시민들을 만났어요!

[평화누리통일누리] 부천 시민들을 만났어요!

가을이 완연히 느껴지는 곳은 높고 푸른 하늘과 붉은 단풍이 있는 산기슭도 있지만, 도심의 공원 또한 가을을 느끼기 위해 사람들이 쉽게 찾아가는 곳이다. 9월도 이제는 열흘정도만 남은 일요일, 모든 것이 풍요로와 보이는 부천의 도시 내 중앙공원, 가족들과 연인들의 환한 얼굴에서, 그리고 풍선만큼이나 가벼운 걸음걸이에서 가을의 정취가 물씬 풍긴다. 하지만 그 중앙공원을 바라보고 있는 나의 얼굴은 수심 가득한 인상을 물씬 풍기고 있다. 10일전, 박석분 팀장님 교육을 통해 “자신감을 가지고 사람들에게 다가가라”는 얘기도 실컷 듣고, 그것도 모자라 집에서 말하는 연습도 하고, 몇 시간 전에는 사람들이 궁금해 할 수 있는 질문들에 대해서도 대답할 준비를 하고 나섰지만 그것만이 모든 준비를 다 한 것은 아닌 듯싶다. 9월 20일, 오늘은 부천평통사에서 야심차게 준비한 평화협정 캠페인을 하는 날이다. 이곳 부천이라는 도시가 인구는 많으면서 땅은 좁고, 사람들 모이는 곳도 다양해서 처음에는 전철역 앞에서 캠페인을 할 계획이었으나 시민들을 많이 만나지는 못하더라도 한 사람 한 사람 정성을 들여가며 만나볼 요량으로 공원으로 장소를 수정했다. 그러나 이런 경험을 많이 하지 못한 나로서는 이 캠페인이 당연히 어려운 숙제를 푸는 것 만큼이나 힘든 일인 것 같다. 회원들이 많이 참석 했으면 서로 힘이라도 보탤 수 있을텐데 오늘따라 특근이나 개인적인 일이 있는 회원들이 많아서인지 6명이 3팀으로 움직이게 됐다. 오후 4시가 가까워진 시간 나는 공원의 벤치에 앉아 있는, 가족들로 보이는 사람들에게 발걸음을 옮기며 첫마디를 어떻게 할까 고민하다가 그냥 “안녕하세요?” 라고만 하고 가만히 서 있었다. 사무국장님이 답답했는지 먼저 “저희는 부천평화와통일을여는사람들 회원입니다. 잠시 말씀드릴 것이 있어서요.” 라고 웃으면서 다가간다. 내가 가장 어려워하는 부분(사람들이 귀찮아하면 어쩌지?)으로 들어서려는 찰나, 의외로 사람들이 전단지를 받아보며 호기심 있는 표정으로 얘기를 듣는다. 얘기할 때는 사람들과 눈높이를 맞추려 무릎을 굽혀서 대하는 것은 기본. 유일한 분단국가인 우리나라는 아직 전쟁 중인 점, 그 때문에 한미연합전쟁연습이 수시로 벌어지고 있으며 군사비만 늘어나고(1년에 미군에게 주는 돈이 무려 5조5천 억 원), 교육이나 의료, 주택, 서민들 복지정책은 거의 꼴지 수준인 점, 아마도 요즘 초등학생들 무료급식 지원이 줄어든 점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라는 얘기, 최근 들어 북미 사이에 대화가 시작되면 한반도 비핵화는 물론이고 전쟁을 끝내는 평화협정을 맺을 텐데, 자라는 우리 아이들에게는 질 높은 교육이나 급식지원뿐 아니라 통일된 나라에서 살게 해주어야 한다는 것, 그러려면 무엇보다 미군이 주둔하지 않게 해서 환경오염, 미군범죄도 막고 또 새어나가는 세금을 우리가 제대로 써야하지 않겠냐는 것 등을 처음에는 그저 생각나는 대로, 조금 경험을 가진 후부터는 약간씩 조리 있게 얘기하며 사람들을 만나게 되었다. 물론 미군이 나가는 것에 대해 부담을 가지는 사람들이 있었지만 단계적으로 미군이 나갈 수 있도록 하면 된다고 얘기하니 많은 분들이 수긍해주시고, 어떤 시민들은 고생한다고 격려도 해주셨다. 시민들의 반응을 염려했던 처음의 마음은 금세 시원한 가을바람처럼 사라졌다. 생각보다 많이 받은 서명명단을 보면서는 뿌듯한 마음도 든다. 무엇보다 내가 옳은 일을 하고 있으며 그 공감대를 시민들과 조금은 나누었다는 것이 오늘 내가 느낀 점이 아닐까 싶다. 옛말에 ‘아는 것이 힘이다’ 라는 말이 있지만 요즘은 제대로 알고 그것을 표현해야 나도 변하고 사회도 조금씩 변하는 것 같다는 선배의 말이 생각난다. 오늘은 아주 조금 사람들을 만나는 경험, 아니 훈련을 한 것 같다. 며칠 후가 되면 이런 자신감이 조금씩 사라질지도 모르겠지만 그러기 전에 사람들이 궁금해 하는 것을 알아내서 공부하고 다시 준비해야 함을 느낀다.

[평화누리통일누리] [지역평통사 모임과 활동] 서울평통사

[평화누리통일누리] [지역평통사 모임과 활동] 서울평통사

평화협정 실현을 위한 다양한 설명회와 캠페인 진행 서울은 하반기, 평화협정 실현 운동에 박차를 가하고 있습니다. 먼저 변연식 대표님과 남편께서 주변의 지인들을 추진위원으로 세우고 계시고요, 변 대표님 소개로 천주교 여성 공동체의 가을 나들이 자리에서 평화협정 실현운동의 취지를 설명하고 서명을 받았습니다. 기독교장로회 총회 자리와 공공연구노조 대의원대회, 민주노총 대의원대회, 6·15 산악회 산행과 같은 자리에서 본부와 함께 평화협정 캠페인을 진행했습니다. 용산 철거민을 돕기 위한 재정사업을 했습니다 용산 철거민을 돕기 위한 재정사업으로 고구마를 판매했습니다. 이 고구마는 올 초, 충북 괴산으로 귀농한 강우균 회원이 제초제와 화학비료를 전혀 쓰지 않고 재배한 무농약 호박 고구마입니다. 시중 가격에 비해 가격도 괜찮은 편인데다가 용산 철거민을 돕는다는 취지에 공감하시고 많은 분들이 고구마를 사주셨습니다. 수익금은 345,000원입니다. 곧 용산 철거민들께 전달하겠습니다. 어렵게 장기 투쟁을 하는 분들을 돕는 ‘서울평통사 직거래 장터’를 엽니다. 평통사 회원이나 회원의 부모님께서 직접 농사지은 농작물을 판매합니다. 중간 유통과정을 줄여 시중보다 저렴한 가격으로 믿을 수 있는 농작물을 드실 수 있습니다. 게다가 수익금은 어렵게 오랫동안 투쟁을 해오고 계신 분들을 돕는데 쓰이니 일석이조겠지요. 어떤 곳을 도울지는 운영위원회 논의를 통해 정하겠습니다. |황윤미(서울평통사) [알립니다] 충북 영동 포도즙 (한 박스 50봉) 한 박스 : 3만원 두 박스 : 5만5천원 세 박스 : 8만원 네 박스 : 10만5천원 저농약 사과와 배 사과 10킬로 한 박스(50과 내외) : 4만5천원 배 15킬로 한 박스(35과 내외) : 4만5천원 무농약 호박 고구마 10킬로 한 박스 : 3만원 문의 : 02-713-1992/ 사무국장 황윤미 011-495-6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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