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남녀가 함께 자고 나면 ― 외국영화 감상법
강내희 / 2004년07월28일 23시29분
원어청취 기능이 딸린 텔레비전 세트가 없는 처지여서 외국영화를 볼 때는 한국어로 더빙된 상태로 보는 경우가 많은 편이다. 지난 수십 년 간 이런 식으로 수없이 많은 외국영화를 봤을 텐데, 그동안 느껴온 이상하다 싶은 점이 하나 있다. 영상예술 역시 인간사를 다루기 마련이라 어떤 영화에든 남녀관계가 빠지지 않는 법이다. 내가 관찰한 바에 의하면 외국영화의 남녀 주인공들은 함께 잠자리만 갖고 나면 꼭 남자가 여자에게 말을 낮춘다. 90년대, 80년대, 70년대로 거슬러 올라갈수록 이런 현상은 예외가 없었던 것 같고, 근래에 들어와서는 성 평등 의식의 진전 때문인지 간혹 예외가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텔레비전에서 보는 외국 영화는 대부분 이 이상한 공식과 관행을 따르는 편이다.
문제는 분명 한국말 더빙에 있을 터이다. 알다시피 우리말은 존대와 하대의 차이가 뚜렷하다. 하지만 그동안 소개된 외국영화의 주종을 이루는 서양말, 특히 영어에선 그런 차이가 별로 없다. 서양말이라고 막돼먹은 것은 아니어서 영어에도 "Would you∼?"나 "Could you∼?" 같은 공손한 표현이 있긴 하다. 하지만 이 정도라면 사람에 따라 하대, 평대, 존대, 극존대를 세밀하게 구분하는 한국어의 층진 표현과는 비교할 바가 못된다. 문제의 현상은 따라서 외국어에 없는 남녀 차별의 표현을 우리말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만들어낸 것이고, 한국문화의 문제일시 분명하다.
모든 번역은 '통용가능성'을 만드는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외국영화에서 사용된 언어표현은 번역과정에서 한국의 언어와 문화로 통용될 수 있게 만들어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때 적잖은 문제가 발생한다. 여간 조심하지 않으면 한국의 계급적, 인종적, 종족적, 성차적, 세대적 차별이 각인된 문화적 코드가 이 통용가능성을 만드는 과정에 영향을 미치곤 하는 것이다.
그래도 궁금한 것은 언어상의 변화가 왜 꼭 남녀간에 몸을 섞고 난 뒤에 일어나느냐는 점이다. 성관계를 맺고 난 뒤 여자와 남자가 화자로서의 위상이 달라지는 이유는 물론 뻔하다. 남녀간에 거의 보편적으로 나타나는 한국 사회의 불평등한 언어적 관행 때문 아니겠는가. 고백컨대 나 역시 아내에게 낮춰 말하는 습성에서 자유롭지 못한데, 우리 사회의 이런 관습적인 언어적, 나아가서 사회적 불평등이 번역과정에 반영되었으리라 짐작된다. 하지만 그래도 궁금한 것은 왜 이런 변화는 유독 가까운 남녀 사이에 나타나느냐는 점이다.
두 가지 이유가 머리에 떠오른다. 우선, 연인이나 부부처럼 가까운 남녀 관계일수록 사회적 불평등 관계의 '토대'가 되기 쉽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어떤 영화에서건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처음 만난 남녀는 서로 말을 높인다. 이런 그들이 잠자리를 함께 하거나 결혼을 하여 육체적으로나 사회적으로 가까워진 뒤 서로 대화법을 바꾼다는 것은 무엇을 말해주는 것일까?
혹시 각종 불평등의 사회적 메커니즘은 꼭 삶의 가깝고 친근한 곳에서 작동하기 마련임을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그런데 이 메커니즘의 효과는 여자가 말을 낮추는 경우는 상상하기 어렵다는 것으로 보장되는 듯하다. 한국말로 더빙을 한 외국영화에서 여자가 남자에게 말을 낮추는 경우는 매춘여성이나 (1960년대에 나온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Bonnie and Clyde)>와 같은 영화의 주인공 남녀처럼) 범법자 등에 국한된다. 정반대로 여자에게 말을 높이는 남자를 등장시키는 경우도 있지만, 이때의 남성도 역시 귀족이나 부르주아 가정의 남편처럼 모범적일지는 몰라도 드문 경우에 한정된다. 여기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어떤 경우든 남녀차별 구도는 바뀌지 않는다는 점이다. 여자가 남자에게 말을 낮추게 하는 것은 그녀를 더 형편없는 존재로 만들고, 남자가 여자에게 말을 높이게 하는 것은 그를 더 교양 있는 존재로 만들기 때문이다.
남녀가 잠자리를 함께 한 뒤 언어관계가 바뀌는 또 다른 이유는 성관계를 맺은 남녀는 반드시 결혼을 해야 한다는 인식이 우리 사회에서 유난히 강하게 작용하는 데서 찾을 수 있을 듯싶다. 육체관계를 맺었다 하여 바로 부부관계로 발전하는 것은 아니련만 잠을 함께 잔 뒤엔 통상 (한국의) 부부 사이에서 자주 보이는 대화법을 따르게 하는 것은 잠자리를 함께 한 남녀는 실질적인 부부가 되었음을, 혹은 그렇게 되어야 함을 넌지시 암시한다.
성관계를 맺으면 결혼을 해야 한다고 믿는 것은 한국의 지배문화에서는 당연할지 모르나 인류사회에서 보편적이라 할 수 없으며, 따라서 이데올로기라 할 수 있다. 문제는 이런 이데올로기가 지배하면 남녀관계에 영향을 미치게 마련이고, 특히 여성에게 큰 압박으로 작용한다는 것이다. 결혼 상대가 아닌 남성과 육체적 관계를 맺은 여성을 흔히 "몸을 버렸다"고 치부하고 하는 것도 그 때문이 아닐까?
남녀간의 언어적 불평등이 별로 나타나지 않는 외국영화를 한국어로 더빙하는 과정에서 번역상의 통용가능성을 만드는 것은 따라서 한국문화가 반영된 것이다. 하지만 외국영화를 한국말로 더빙할 때 이런 식의 이데올로기 영향을 받는다고 하는 것은 이런 더빙문화를 통해 언어적 불평등을 조장하는 대중매체, 특히 텔레비전에 면죄부를 주는 것일 수 있다. 함께 잠을 잔 모습을 보여준 뒤 남자가 여자에게 말을 놓게 하는 것은 한국에서 남녀간의 언어적 불평등이 그만큼 보편적임을 반영한 것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매체문화를 생산하는 사람들이 알게 모르게 그런 이데올로기를 재생산하는 때문이기도 하다. 사실 불평등한 언어적 실천을 재생산하는 영향력의 견지에서 보면 이 점이 더 큰 문제인지도 모른다.
다른 많은 사회적 불평등과 마찬가지로 언어적 불평등 관계를 재생산하는 데도 대중매체의 책임이 크다. 같은 외국영화라도 극장에서 보는 것과 집안에서 텔레비전으로 보는 것은 효과가 다르다. 극장에서 상영하는 영화는 사운드트랙은 원음 그대로 두고 화면 아래나 옆에 한국어 번역을 자막으로 처리한다. 이렇게 외국영화를 보면 대부분의 관객은 번역 자막을 통해 영화의 이야기를 이해하겠지만 그래도 외국어 원음을 계속 듣기 때문에 그에 따른 이질성을 느끼게 된다. 반면 텔레비전에서는 번역한 말을 성우들이 발성하여 녹음한 것을 듣기 때문에 외국영화 자체가 주는 이질감은 사라져 버린다. 혹시 번역 문장에 어떤 이질감이 전달된다면 이것조차도 한국의 문화적 코드로 만들어낸 경우일 것이다.
남녀간, 부부간에 퍼져 있는 불평등한 언어관습이 외국영화의 한국어 더빙에서도 그대로 나타난다는 점을 깨닫고 있는 이는 드문 것 같다. 주변의 여성들에게 문제의 현상을 아느냐고 물어본 적이 있으나 그 점을 미리 눈치채고 있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그만큼 우리가 가까운 곳의 불평등에 무관심하다는 증거일 것이다. 사회적 불평등을 하나라도 없애려면 말도 되지 않는 외국영화의 이런 한국말 더빙 관행을 고칠 준비를 해야 하겠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는 물론 토론의 대상이다. 혹시 복잡할지도 모르겠지만 사회적 불평등에 대한 감수성을 높이려면 이런 토론이 꼭 필요하다.
문제는 분명 한국말 더빙에 있을 터이다. 알다시피 우리말은 존대와 하대의 차이가 뚜렷하다. 하지만 그동안 소개된 외국영화의 주종을 이루는 서양말, 특히 영어에선 그런 차이가 별로 없다. 서양말이라고 막돼먹은 것은 아니어서 영어에도 "Would you∼?"나 "Could you∼?" 같은 공손한 표현이 있긴 하다. 하지만 이 정도라면 사람에 따라 하대, 평대, 존대, 극존대를 세밀하게 구분하는 한국어의 층진 표현과는 비교할 바가 못된다. 문제의 현상은 따라서 외국어에 없는 남녀 차별의 표현을 우리말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만들어낸 것이고, 한국문화의 문제일시 분명하다.
모든 번역은 '통용가능성'을 만드는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외국영화에서 사용된 언어표현은 번역과정에서 한국의 언어와 문화로 통용될 수 있게 만들어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때 적잖은 문제가 발생한다. 여간 조심하지 않으면 한국의 계급적, 인종적, 종족적, 성차적, 세대적 차별이 각인된 문화적 코드가 이 통용가능성을 만드는 과정에 영향을 미치곤 하는 것이다.
그래도 궁금한 것은 언어상의 변화가 왜 꼭 남녀간에 몸을 섞고 난 뒤에 일어나느냐는 점이다. 성관계를 맺고 난 뒤 여자와 남자가 화자로서의 위상이 달라지는 이유는 물론 뻔하다. 남녀간에 거의 보편적으로 나타나는 한국 사회의 불평등한 언어적 관행 때문 아니겠는가. 고백컨대 나 역시 아내에게 낮춰 말하는 습성에서 자유롭지 못한데, 우리 사회의 이런 관습적인 언어적, 나아가서 사회적 불평등이 번역과정에 반영되었으리라 짐작된다. 하지만 그래도 궁금한 것은 왜 이런 변화는 유독 가까운 남녀 사이에 나타나느냐는 점이다.
두 가지 이유가 머리에 떠오른다. 우선, 연인이나 부부처럼 가까운 남녀 관계일수록 사회적 불평등 관계의 '토대'가 되기 쉽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어떤 영화에서건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처음 만난 남녀는 서로 말을 높인다. 이런 그들이 잠자리를 함께 하거나 결혼을 하여 육체적으로나 사회적으로 가까워진 뒤 서로 대화법을 바꾼다는 것은 무엇을 말해주는 것일까?
혹시 각종 불평등의 사회적 메커니즘은 꼭 삶의 가깝고 친근한 곳에서 작동하기 마련임을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그런데 이 메커니즘의 효과는 여자가 말을 낮추는 경우는 상상하기 어렵다는 것으로 보장되는 듯하다. 한국말로 더빙을 한 외국영화에서 여자가 남자에게 말을 낮추는 경우는 매춘여성이나 (1960년대에 나온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Bonnie and Clyde)>와 같은 영화의 주인공 남녀처럼) 범법자 등에 국한된다. 정반대로 여자에게 말을 높이는 남자를 등장시키는 경우도 있지만, 이때의 남성도 역시 귀족이나 부르주아 가정의 남편처럼 모범적일지는 몰라도 드문 경우에 한정된다. 여기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어떤 경우든 남녀차별 구도는 바뀌지 않는다는 점이다. 여자가 남자에게 말을 낮추게 하는 것은 그녀를 더 형편없는 존재로 만들고, 남자가 여자에게 말을 높이게 하는 것은 그를 더 교양 있는 존재로 만들기 때문이다.
남녀가 잠자리를 함께 한 뒤 언어관계가 바뀌는 또 다른 이유는 성관계를 맺은 남녀는 반드시 결혼을 해야 한다는 인식이 우리 사회에서 유난히 강하게 작용하는 데서 찾을 수 있을 듯싶다. 육체관계를 맺었다 하여 바로 부부관계로 발전하는 것은 아니련만 잠을 함께 잔 뒤엔 통상 (한국의) 부부 사이에서 자주 보이는 대화법을 따르게 하는 것은 잠자리를 함께 한 남녀는 실질적인 부부가 되었음을, 혹은 그렇게 되어야 함을 넌지시 암시한다.
성관계를 맺으면 결혼을 해야 한다고 믿는 것은 한국의 지배문화에서는 당연할지 모르나 인류사회에서 보편적이라 할 수 없으며, 따라서 이데올로기라 할 수 있다. 문제는 이런 이데올로기가 지배하면 남녀관계에 영향을 미치게 마련이고, 특히 여성에게 큰 압박으로 작용한다는 것이다. 결혼 상대가 아닌 남성과 육체적 관계를 맺은 여성을 흔히 "몸을 버렸다"고 치부하고 하는 것도 그 때문이 아닐까?
남녀간의 언어적 불평등이 별로 나타나지 않는 외국영화를 한국어로 더빙하는 과정에서 번역상의 통용가능성을 만드는 것은 따라서 한국문화가 반영된 것이다. 하지만 외국영화를 한국말로 더빙할 때 이런 식의 이데올로기 영향을 받는다고 하는 것은 이런 더빙문화를 통해 언어적 불평등을 조장하는 대중매체, 특히 텔레비전에 면죄부를 주는 것일 수 있다. 함께 잠을 잔 모습을 보여준 뒤 남자가 여자에게 말을 놓게 하는 것은 한국에서 남녀간의 언어적 불평등이 그만큼 보편적임을 반영한 것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매체문화를 생산하는 사람들이 알게 모르게 그런 이데올로기를 재생산하는 때문이기도 하다. 사실 불평등한 언어적 실천을 재생산하는 영향력의 견지에서 보면 이 점이 더 큰 문제인지도 모른다.
다른 많은 사회적 불평등과 마찬가지로 언어적 불평등 관계를 재생산하는 데도 대중매체의 책임이 크다. 같은 외국영화라도 극장에서 보는 것과 집안에서 텔레비전으로 보는 것은 효과가 다르다. 극장에서 상영하는 영화는 사운드트랙은 원음 그대로 두고 화면 아래나 옆에 한국어 번역을 자막으로 처리한다. 이렇게 외국영화를 보면 대부분의 관객은 번역 자막을 통해 영화의 이야기를 이해하겠지만 그래도 외국어 원음을 계속 듣기 때문에 그에 따른 이질성을 느끼게 된다. 반면 텔레비전에서는 번역한 말을 성우들이 발성하여 녹음한 것을 듣기 때문에 외국영화 자체가 주는 이질감은 사라져 버린다. 혹시 번역 문장에 어떤 이질감이 전달된다면 이것조차도 한국의 문화적 코드로 만들어낸 경우일 것이다.
남녀간, 부부간에 퍼져 있는 불평등한 언어관습이 외국영화의 한국어 더빙에서도 그대로 나타난다는 점을 깨닫고 있는 이는 드문 것 같다. 주변의 여성들에게 문제의 현상을 아느냐고 물어본 적이 있으나 그 점을 미리 눈치채고 있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그만큼 우리가 가까운 곳의 불평등에 무관심하다는 증거일 것이다. 사회적 불평등을 하나라도 없애려면 말도 되지 않는 외국영화의 이런 한국말 더빙 관행을 고칠 준비를 해야 하겠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는 물론 토론의 대상이다. 혹시 복잡할지도 모르겠지만 사회적 불평등에 대한 감수성을 높이려면 이런 토론이 꼭 필요하다.
참새회원이라면 누구나 참세상 편집국이 생산한 모든 콘텐츠에 태그를 달 수 있습니다. 이 기사의 내용을 잘 드러내줄 수 있는 단어, 또는 내용중 중요한 단어들을 골라서 붙여주세요.
태그:
태그를 한개 입력할 때마다 엔터키를 누르면 새로운 입력창이 나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