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의 정치세력화' 참 좋은 말이다"

[기고] 38 여성의 날 행사와 여성운동을 보는 단상

이황현아(노기연)  / 2006년03월08일 11시40분

여성의 정치세력화, 상상만 해도 이 얼마나 좋은 일인가

‘정치세력화’, 참 좋은 말이다. 그것도 ‘여성’의 정치세력화라면 더욱 좋게 들린다. 왜? 여성이 그간 너무도 억눌리고 소외되었기 때문에 ‘여성’의 ‘정치세력화’라는 말을 들으며 일종의 희열을 맛보게 된다. 한국에서도 머지않아 영국이나 독일에서처럼 여성총리가 나오게 될 것이고, 누가 아는가? 많은 이들이 기대하듯 조만간 여성대통령이 나오게 될지? 노동자의 정치세력화가 당을 만들었듯이, 어느 나란가 에서처럼 여성의 당이 현실화될지도 모를 일이다. 상상이라지만, 이 얼마나 좋은 일인가? ‘여성!’의 ‘정치세력화!’

여성의 이름으로 대표된 여성들은 정말 많은 일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우선, 성평등 정치를 할 것이고, 그래서 아직 30%에 머무르고 있는 할당제를 대폭 늘려 공무원 뿐 아니라 모든 기업에까지 50% 여성할당제를 도입하게 할 것이다. 물론 자본가들은 반발하겠지만 어쩔 수 없다. 국민의 손으로 뽑힌 국회의원들이 사기업과 공공부문에 50% 할당제와 같은 법안을 입법화시키는데.

다음 이 여성들은 재생산노동의 사회화를 할 것이다. 여성노동을 이중노동으로 만드는 원천인 가사, 출산, 양육, 보살핌 노동을 사회화하기 위해 애쓸 것이다. 가사노동의 사회화, 양육의 사회화라, 밥공장, 반찬공장이 만들어지고, 동네마다 커다란 빨래방이 생기고, 공동육아를 할 수 있는 탁아소에, 아픈 노인들을 하루 종일 보살펴 줄 수 있는 마을회관까지. 여성들이 실현하는 재생산노동의 사회화 프로그램은 여성들이 집안 걱정 안하는 수준에까지 이를 것이다.

지금처럼 직장에 나와 일하면서도 집에 쌓아둔 설거지 거리 생각에, 감기 걸린 아이 걱정에, 치매로 고생하는 시어머니 염려까지 안 해도 된다. 아니 집안 걱정을 할 필요가 없게 되는 것이다. 국가가 재생산노동의 가치를 사회적으로 인정하고, 사회프로그램을 운영하는 주체들과 노동자들이 공공을 최우선으로 하는 가치를 가지고 있다면, 그들에게 무엇을 누굴 맡긴들 걱정할 일이 생기겠는가?

한 가지 더, 미선이 효순이가 미군장갑차에 깔려 죽었을 때부터 떠오른 생각이다. 왜 내 갈길 가는데 차에 치어 죽어야 하는가. 여성이 정치를 한다면 또는 사회주의를 만든다면, 제일 먼저 할 일은 바로 길을 넓히는 것이다. 물론 지금처럼 도룡뇽 죽여 가며 산을 뚫거나 예산 집행해야 한다며 멀쩡한 보도블록 뒤엎는 것이 아니라, 도시에는 자전거 도로를, 농촌에는 경운기 도로를, 전국의 도시와 농촌 길을 차가 아니라 사람 위주를 바꾸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보행자가 맘 놓고 다닐 수 있다.

2006년 3월 8일, 여성은 고달프다

이런 게 여성의 천국이 아닐까? 아마조네스는 아닐지라도 여성의 공적, 사회적 진출이 확장되고 여성의 정치가 작동될 수 있는 날엔 아마도 이런 일들이 현실화될 수 있으리라. 하지만 지금 당장은 꿈 깨자! 오늘은 2006년 3월 8일. 여성은 고달프다. 정규남성노동자들이 파업을 접어도 비정규여성노동자들까지 파업을 접을 수는 없는 상황, 생존권을 지키기 위해 물대포까지 맞아야 하는 상황.

희망한국을 만든다며 정부가 내놓은 저출산-고령화대책은 또 어떤가? 국가는 여성을 한낱 아이 낳는 기계로 본다. 여성들이 출산파업을 할 수밖에 없는 가정과 직장의 양립, 신자유주의 여성인력활용정책 등 직접적인 원인에 손을 대기 보다는 불임부부 3백만 원 지급이니, 셋째 아이 수당이니 하는 출산에 대한 인센티브 접근으로 무마한다. 오늘 이 땅의 여성들은 괴롭다.

그렇다면 이렇게 고통스러운 여성의 현실을 바꿔낼 희망의 도구는 여성의 정치세력화인가? 한 번 의문을 가져보자. 지난 3월 4일 “가라! 빈곤 차별 퍼져라! 풀뿌리 여성정치” 3.8 세계여성의 날 98주년 기념 여성대회는 그런 희망을 가질 수 없게 만들었다. 물론 3.8은 기념의 날이긴 하지만, 정확히 말해 ‘투쟁’으로 ‘기념’하는 날이다. 여성의 얼굴을 한 신자유주의에 대한 기만성을 낱낱이 폭로하고, 오로지 생존권 노동권을 위해 투쟁하는 여성노동자들을 탄압하는 자본과 정권에 대해 한판 투쟁을 결의하는 장이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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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노동자조차 성주류화전략에 포섭되는데

그러나 입추의 여지없이 회관을 꽉 메운 여성노동자, 여성농민, 여성학생들은 ‘여성정치실현’이라는 정치선동에 박수부대로 전락하고 말았다. “여성후보 많이 내서 5.31 지자체 승리하고 여성정치 실현하자!” 어떻게 보면 현장에서 이런 구호를 외치지 않은 것만도 다행이다.

주최 쪽인 민주노동당, 민주노총, 전국여성농민회총연합은 여연을 불러 ‘지방정치는 여성의 힘으로 하자’는 축사를 들을 것이 아니라, 2006년 한 해 동안 자신들의 여성정치를 어떻게 실현할 것인가를 놓고 선언하고, 2006년 우리 앞에 놓인 여성쟁점들 - 저출산 고령화대책, 건강가족, 여성‘가족’부, 비정규노동개악법, 난자추출, 성매매방지법, 할당제 적극적 조치 등의 성주류화전략, 여성의 정치세력화 따위 - 에 대해 어떤 입장을 가지고 있는가를 밝혀야 했다. 대중과 함께 호흡하는 모습은 토론하는 것이고 이것이 곧 정치다.

투쟁하는 노동자들의 노래와 춤, 연극이 어우러진 갖가지 문화공연은 물론 좋았다. 특히 ‘심텽뎐’은 그중 백미였다. “6.15공동성명 거북이가 한미FTA 인당수에 빠진 심텽이를 구하는” 장면은 정말이지 배꼽을 잡아 뺐다. 이 속에 담겨있는 정치적 메시지는 차지하고서라도.

그런데 왜 ‘심텽이’까지 남자여야 했지? 의문도 남는다. 그래도 문화공연은 문화공연이니까 하고 넘어갈 수 있다. 하지만 전교조, 보육노조, 여성연맹, 보건의료노조, 서비스연맹 등 이른바 여성들이 많이 조직화되어있는 이들 노조에서는 문화공연으로 말고도 할 말이 많았을 것이다. 이들의 투쟁은 공연 끄트머리에 배치된 몇 자 구호 가지고는 다 설명될 수 없는 것이고, 그것으로 투쟁을 다 결의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갇힌 공간에서의 문화적 정치선동으로 어우러진 3월 4일 대회는 밖으로 나와야 했다. 아르헨티나의 삐께테로스처럼, 서비스연맹에서 준비한 노란 양은냄비와 뚜껑을 맞부딪히며 냄비 바닥의 ‘여성 정치세력화’를 시민들에게 보여주며 광장의 정치를 했어야 했다.

'여성의 정치세력화' 광장의 정치가 아니라면...

신자유주의 의회정치가 한계를 드러내고 있는 마당에 왜 우리는 또 다시 의회주의인가? 혹여 여성을 등용하는 여성정치, 광장의 정치 대신 미디어정치가 지금의 의회주의는 아닐까? 여성정치, 미디어정치로 포장된 신자유주의 정치는 노동자 민중을 기만한다. 마치 붕어빵 속에 붕어가 없듯, ‘여성정치’ 속에 ‘여성’이 없는 격이다. 여성노동자들조차 성주류화전략에 포섭되는 이유는 할당제, 적극적 조치 등을 한편의 ‘기회’라고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기회가 ‘여성의 정치세력화’로 ‘과잉’되는 건 문제다. 여성의 대표성이 평등 요구의 성격을 띠고, 이러한 평등이 대부분 ‘기회평등’인 경우라면, 남성의 지위를 여성이 도달해야 하는 그것으로 만들게 된다.

여성의 정치가 여기에 갇혀서야 되겠는가? 여성은 대의제에 입각한 대표성에 갇히지 않고, 여성들 스스로 자신의 주장과 요구를 명확히 해야 한다. 만약 우리 모두가 주체로 나서야만 한다면, 여성 모두는 스스로를 대표하기 위해 한 사람 한 사람 나서야 한다. 할당제가 문제가 아니다. 여성들 스스로가 자신을 동수 대표해 나서야 하지 않을까?

‘동수의 여성대표’는 여성 스스로를 대표하기 위한 것인 동시에 성별화된 권리로서 제시된 것이다. 여성의 이익, 여성의 이해를 위한다는 것은 오히려 모호하다. 성별화된 권리 없이 남녀평등은 없다. 양성의 사회윤리는 서로 다른 존재로서 각각의 성에 따른 권리와 의무를 다시 쓰지 않고서는 얻어질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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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임

이황현아 님은 노동조합기업경영연구소 연구원으로 일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