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남성적’ 문화에 대한 뼈저린 반성이 안 보인다
[기고] 여성에 대한 몰이해, 보수와 진보 따로 없어
이선민(미디어오늘) / 2006년03월10일 14시56분
최연희 한나라당 전 사무총장의 성추행 사건이 일어난 지 11일이 지났다. 예상대로 비판 여론이 잠잠해진 틈을 타 동정론이 고개를 들고 있고, 때마침 이해찬 총리의 3․1절 골프건이 발생해 주류 언론에서는 최연희 의원에 대한 비판은 찾아보기 어렵게 됐다. 최 의원은 동정론과 무관심에 힘입어 못이기는 척 ‘버티기’에 들어간 듯 하다. 악재는 또 다른 악재에 의해 사라진다는 것을 확인받는 순간이다. 그리고 ‘3․1절 골프건이 더 일찍 발생했다면’하는 끔찍한 상상과 함께 가슴을 쓸어내리게 된다. 잠시나마 최 의원에 대한 완벽한 비판여론이 형성된 것을 고맙게 생각해야 하나?
최연희 의원의 성추행이 부각될 수 있었던 이유
이런 정치적 상황과 별개로 용산 어린이 성폭력 살해사건, 교도관의 재소자 성폭력 사건 등 일련의 성폭력 사건에 이어 일어난 이번 사건은 조용히 묻힐 수도 있었다. 성폭력 사건을 보도하는데 있어서 물리적 피해가 얼마나 심각한가, 한마디로 얼마나 엽기적이고 선정적이냐가 보도 여부를 결정짓는 상황 속에서 이 정도의(?) 성추행은 이른바 ‘뉴스’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천만다행히도 피해자가 ‘글을 쓸 수 있는 권력을 갖고 있는’ 기자였기에 이 사건은 공론화될 수 있었다. 끔찍한 가정이지만(그러나 이것은 현실이다) 최 의원이 저지른 성추행이 조그마한 기업의 남성 상사와 여성 직원 사이에서 일어났다면 아마 지금처럼 의제화되지 못했을 것이다. 지난해 12월 한나라당 임인배 의원이 국회 여직원들에게 “버르장머리 없는 X들”, “싸가지없는 X들” 등의 입에 담기조차 어려운 욕설을 쏟아낸 것이 공론화되지 못하지 않았는가.
“권력을 감시하는 기자조차 성희롱의 위험 앞에서 안전하지 않다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성적 괴롭힘에 시달리면서도 말 못하는 여성들이 얼마나 많을 지를 절감한다”는 동아일보 여기자들의 지적처럼 많은 여성들이 성폭력을 당하고도 말조차 못한다. 피해자가 강하게 항의할 수 있었고, 사회 전체가 그 항의에 귀를 기울여주었다는 점에서 이번 사건은 ‘특수’했다. 하지만 이 사건을 바라보는 시각은 성추행에 대한 일반적인 시각과 다를 바 없었다. 이 사건에 대한 논의는 한국사회 곳곳에 만연한 성폭력에 대한 통념을 확인시켜주었다.
“음식점 여주인인 줄 알았다”는 최 의원의 변명과 젊은 여성들의 시중(?)을 받으며 술과 밥을 먹었던 것은 이번 사건이 왜 일어났는지를 단적으로 드러낸다. 여성에 대한 잘못된 의식과 ‘친남성적인’ 술자리 문화. 성추행은 예정된 것이었다. ‘보수’, ‘진보’를 막론하고 성추행을 비판했지만 이에 대한 근본적인 비판과 성찰은 보이지 않았다. ‘보수’는 말할 것도 없고, 일부 ‘진보’도 피해자의 입장에서 이 사건을 접근하기 보다 자신들의 정치적 입장이나 남성적 시각에서 해석했다.
권언유착은 권언유착이고 성추행은 성추행이다
“‘신권언유착’이 성추행 불렀다”(전국언론노조․민언련 2월28일 기자회견). 지방선거를 앞두고 한나라당의 당 대표 이하 지도부와 동아일보의 편집국장 이하 정치부 기자들이 집단으로 만난 것은 ‘권언유착’으로 볼 여지가 충분하다. 하지만 권언유착은 성추행과 별개로 비판받아야 할 사안이지 성추행의 ‘원인’이 아니다. 그러나 이 구호는 “여기자가 ‘권언유착’의 자리에 참석하지 않았더라면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 텐데”라는 한탄에서 머물지 않고 “그 자리에 참석한 여기자가 원인을 제공했다”는 해석까지 가능하게 한다. 최 의원 성추행 사건의 본질은 그 날 그 자리에 여기자가 참석했는지 여부가 아니다. 최 의원의 잘못된 의식이 문제의 본질이다.
성추행 때문에 동아일보의 명예 훼손됐다?
“동아일보는 오랜 역사 속에서 민족 정론지라고 자부하며 오로지 올바른 보도로 오늘에 이르렀다고 한다. 그러나 이번 사건으로 동아의 명예는 큰 상처를 입었다. 성추행이 친고죄라서 본인이 아니면 고소가 안 된다고 합니다만 동아일보가 당한 명예훼손이야 명백한 일이 아닌가”(데일리서프라이즈 이기명 국민참여연대 상임고문 3월9일자 칼럼).
여기자가 성추행 피해를 입었는데 왜 ‘민족정론지’ 동아일보의 명예가 훼손당했다고 생각하는 걸까? 최 의원의 성추행은 기자 개인의 인권을 침해한 것이지, 동아일보의 명예를 훼손한 것이 아니다. 이는 남성적 감수성이 충만한 민족주의자들이 일제시대 일본군의 집단성폭력에 대해 ‘일본놈이 민족정기를 훼손했다’며 분개하는 것만큼이나 위험하다. 이 주장들은 겉보기엔 성폭력을 규탄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정신대 할머니에 대해 ‘나라 망신이다’며 할머니들을 비난하는 것이나 ‘집안의 명예를 실추시켰다’며 성폭력을 당한 여자형제를 살해하는 이슬람의 ‘명예살인’과 똑같은 논리구조를 지니고 있다.
여기자가 성추행을 당함으로써 신문사의 명예가 훼손됐다는 것은 결국 피해 여기자에게 이중의 굴레를 씌우는 것이다. ‘성폭력 사건은 가족․회사․조직의 명예를 떨어뜨린다’는 편견 때문에 여성들은 성폭력을 당하고도 신고하지 못하고, 결국 피해 여성들은 두 번 죽는다.
동아일보의 명예가 훼손됐다면, 이는 ‘권언유착’의 소지가 있는 ‘반여성적인’ 술자리에 ‘자발적으로’ 참여했기 때문일 것이다.
기득권층이어서 성추행을 했다니
“사고 끊이지 않는 한나라당, 출신성분이 원인? 60%가 법조계, 학계, 관계 등 기득권층 편중”(민중의소리 3월 2일자). 성추행도 한나라당이 저지른 일련의 잘못된 행태 중 하나이지만 이 기사는 성추행을 기득권층 남성의 문제로 한정짓고 만다. 과연 기득권이 없는 집단, 이른바 ‘진보’를 표방한 노조, 학생운동 조직에서는 성폭력이 일어나지 않을까? 여성에 대한 몰이해, 성폭력 문제에 대한 둔감함, ‘친남성적’ 분위기는 진보와 보수가 따로 없다. 오십보의 차이가 있을지는 몰라도.
그런가하면 “(최 의원의 성추행은) 여성권리 신장을 위해 온갖 노고를 다하고 있는 여성단체와 부인의 경력에 대해 누를 끼치지 않게 될 것”이라는 민주노동당의 논평(2월27일)도 읽는 이를 불편하게 만든다. 이 논평은 최 의원의 성추행과 직접 관련이 없는 부인을 언급, 결과적으로 최 의원의 성추행에 부인을 엮이게 만든다.
성추행한 사람은 간데 없고 술잔만 나부껴
“평소 술이 약한 편이지만 사무총장이 된 후 의원, 기자들과 접촉을 자주 했고 사건 당일도 만취 상태였던 것으로 알려졌다”(조선일보 2월28일자), “그는 애연가였으나, 술은 잘 마시지 못하는 편인 것으로 전해졌다”(한국일보 2월28일자), “그 분은 지자체 선거를 앞두고…엄청난 심적 스트레스를 받아 왔다… 술도 약한 분이 이순의 나이에 주량을 훨씬 넘게 과음함으로써 급성 알코올 중독 증세로 돌이킬 수 없는 잘못을 했다고 유추된다”(한나라당 정의화 의원), “한나라당의 왜곡된 폭탄주 문화가 사리지지 않는 한 제2, 제3의 최연희 사건이 일어날 것이다”(박진 의원).
한마디로 ‘부드러운 성품의’ 최 의원이 성추행을 한 것은 ‘죽일 놈의 술’ 때문이다. 성추행을 하는 이유도 가지가지다. “딸 같아서” “친근감의 표시로” “귀여워서” 하는 성추행이 있는가 하면, 최 의원처럼 “음식점 주인인 줄 알아서” “술을 너무 많이 마셔서”하는 성추행도 있다. 술에 취한 사람 모두가 성추행을 하는 것도 아닐텐데 말이다. 또 술에 취했다고 해서 ‘형법상 10년 이하의 징역 또는 1500만원 이하의 벌금형이 가능한 죄’를 용서해야한단 말인가?
“최 의원은 평소 모나지 않은 일처리와 부드러운 성품으로 주변에서 좋지 않은 소리를 들은 적이 없다는 것이 동료 의원들의 평가다. 이 때문에 성추행의 당사자가 최 의원이라는 데 대해 열린우리당 의원들조차 의아해하는 분위기다”(조선일보 2월28일자), “한나라당 최연희 의원은 평소 온화한 성품과 합리적 일 처리로 동료 의원들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아왔지만, 이번 성추행 사건으로 최악의 정치적 위기에 직면했다”(한국일보 2월28일자).
특정한 타입의 성폭력 가해자가 있는 것이 아니다. 최근 보도된 모 사건처럼 가해자는 친아버지일 수도 있고, 대전 연쇄 성폭력 사건처럼 남매를 둔 조용한 성격의 가장일 수도 있다. 성폭력의 77%가 친족, 동네사람, 데이트상대, 상사, 직장동료, 교사, 동급생, 선후배 등 아는 사람에 의해 일어난다는 통계는(한국성폭력상담소, 2000년) 성폭력의 ‘일상성’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흔히 보도되는 것처럼, 성폭력 가해자는 사회적으로 봤을 때 문제가 있는 사람이 아니다. ‘최 전 총장이 평소 좋은 평가를 받았다’ 등의 언급은 최 전 총장을 두둔하는 것과 동시에, 그를 예외적인 인물로 그림으로써 ‘존재하지도 않는’ 성폭력 가해자의 전형적인 모습의 이미지를 더 강화시킨다.
‘친남성적’ 문화에 대한 뼈저린 반성있어야
“우리는 그간 사회 곳곳에 만연한 성추행과 성폭력의 문제를 피해자의 처지에서 충분히 고민해 왔는지, 언론 본연의 의무인 사회적 주의 환기에 부족함이 없었는지를 되돌아본다”(동아일보 편집국 기자 입장, 2월28일). 동아일보 기자들의 성찰을 환영한다. 동시에 동아일보 기자들이 이 말을 실천할지 기대해본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언론계에 만연한, 그리고 당일 사건을 가능하게 했던 ‘친남성적’ 술자리 문화에 대한 반성은 없다. 설마 젊은 여자들이 시중 든 술자리에 참석한, 그리고 미래에 이런 자리에 참석할 자신들은 반성할 게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겠지?
최연희 의원의 성추행이 부각될 수 있었던 이유
이런 정치적 상황과 별개로 용산 어린이 성폭력 살해사건, 교도관의 재소자 성폭력 사건 등 일련의 성폭력 사건에 이어 일어난 이번 사건은 조용히 묻힐 수도 있었다. 성폭력 사건을 보도하는데 있어서 물리적 피해가 얼마나 심각한가, 한마디로 얼마나 엽기적이고 선정적이냐가 보도 여부를 결정짓는 상황 속에서 이 정도의(?) 성추행은 이른바 ‘뉴스’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천만다행히도 피해자가 ‘글을 쓸 수 있는 권력을 갖고 있는’ 기자였기에 이 사건은 공론화될 수 있었다. 끔찍한 가정이지만(그러나 이것은 현실이다) 최 의원이 저지른 성추행이 조그마한 기업의 남성 상사와 여성 직원 사이에서 일어났다면 아마 지금처럼 의제화되지 못했을 것이다. 지난해 12월 한나라당 임인배 의원이 국회 여직원들에게 “버르장머리 없는 X들”, “싸가지없는 X들” 등의 입에 담기조차 어려운 욕설을 쏟아낸 것이 공론화되지 못하지 않았는가.
“권력을 감시하는 기자조차 성희롱의 위험 앞에서 안전하지 않다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성적 괴롭힘에 시달리면서도 말 못하는 여성들이 얼마나 많을 지를 절감한다”는 동아일보 여기자들의 지적처럼 많은 여성들이 성폭력을 당하고도 말조차 못한다. 피해자가 강하게 항의할 수 있었고, 사회 전체가 그 항의에 귀를 기울여주었다는 점에서 이번 사건은 ‘특수’했다. 하지만 이 사건을 바라보는 시각은 성추행에 대한 일반적인 시각과 다를 바 없었다. 이 사건에 대한 논의는 한국사회 곳곳에 만연한 성폭력에 대한 통념을 확인시켜주었다.
“음식점 여주인인 줄 알았다”는 최 의원의 변명과 젊은 여성들의 시중(?)을 받으며 술과 밥을 먹었던 것은 이번 사건이 왜 일어났는지를 단적으로 드러낸다. 여성에 대한 잘못된 의식과 ‘친남성적인’ 술자리 문화. 성추행은 예정된 것이었다. ‘보수’, ‘진보’를 막론하고 성추행을 비판했지만 이에 대한 근본적인 비판과 성찰은 보이지 않았다. ‘보수’는 말할 것도 없고, 일부 ‘진보’도 피해자의 입장에서 이 사건을 접근하기 보다 자신들의 정치적 입장이나 남성적 시각에서 해석했다.
권언유착은 권언유착이고 성추행은 성추행이다
“‘신권언유착’이 성추행 불렀다”(전국언론노조․민언련 2월28일 기자회견). 지방선거를 앞두고 한나라당의 당 대표 이하 지도부와 동아일보의 편집국장 이하 정치부 기자들이 집단으로 만난 것은 ‘권언유착’으로 볼 여지가 충분하다. 하지만 권언유착은 성추행과 별개로 비판받아야 할 사안이지 성추행의 ‘원인’이 아니다. 그러나 이 구호는 “여기자가 ‘권언유착’의 자리에 참석하지 않았더라면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 텐데”라는 한탄에서 머물지 않고 “그 자리에 참석한 여기자가 원인을 제공했다”는 해석까지 가능하게 한다. 최 의원 성추행 사건의 본질은 그 날 그 자리에 여기자가 참석했는지 여부가 아니다. 최 의원의 잘못된 의식이 문제의 본질이다.
성추행 때문에 동아일보의 명예 훼손됐다?
“동아일보는 오랜 역사 속에서 민족 정론지라고 자부하며 오로지 올바른 보도로 오늘에 이르렀다고 한다. 그러나 이번 사건으로 동아의 명예는 큰 상처를 입었다. 성추행이 친고죄라서 본인이 아니면 고소가 안 된다고 합니다만 동아일보가 당한 명예훼손이야 명백한 일이 아닌가”(데일리서프라이즈 이기명 국민참여연대 상임고문 3월9일자 칼럼).
여기자가 성추행 피해를 입었는데 왜 ‘민족정론지’ 동아일보의 명예가 훼손당했다고 생각하는 걸까? 최 의원의 성추행은 기자 개인의 인권을 침해한 것이지, 동아일보의 명예를 훼손한 것이 아니다. 이는 남성적 감수성이 충만한 민족주의자들이 일제시대 일본군의 집단성폭력에 대해 ‘일본놈이 민족정기를 훼손했다’며 분개하는 것만큼이나 위험하다. 이 주장들은 겉보기엔 성폭력을 규탄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정신대 할머니에 대해 ‘나라 망신이다’며 할머니들을 비난하는 것이나 ‘집안의 명예를 실추시켰다’며 성폭력을 당한 여자형제를 살해하는 이슬람의 ‘명예살인’과 똑같은 논리구조를 지니고 있다.
여기자가 성추행을 당함으로써 신문사의 명예가 훼손됐다는 것은 결국 피해 여기자에게 이중의 굴레를 씌우는 것이다. ‘성폭력 사건은 가족․회사․조직의 명예를 떨어뜨린다’는 편견 때문에 여성들은 성폭력을 당하고도 신고하지 못하고, 결국 피해 여성들은 두 번 죽는다.
동아일보의 명예가 훼손됐다면, 이는 ‘권언유착’의 소지가 있는 ‘반여성적인’ 술자리에 ‘자발적으로’ 참여했기 때문일 것이다.
기득권층이어서 성추행을 했다니
“사고 끊이지 않는 한나라당, 출신성분이 원인? 60%가 법조계, 학계, 관계 등 기득권층 편중”(민중의소리 3월 2일자). 성추행도 한나라당이 저지른 일련의 잘못된 행태 중 하나이지만 이 기사는 성추행을 기득권층 남성의 문제로 한정짓고 만다. 과연 기득권이 없는 집단, 이른바 ‘진보’를 표방한 노조, 학생운동 조직에서는 성폭력이 일어나지 않을까? 여성에 대한 몰이해, 성폭력 문제에 대한 둔감함, ‘친남성적’ 분위기는 진보와 보수가 따로 없다. 오십보의 차이가 있을지는 몰라도.
그런가하면 “(최 의원의 성추행은) 여성권리 신장을 위해 온갖 노고를 다하고 있는 여성단체와 부인의 경력에 대해 누를 끼치지 않게 될 것”이라는 민주노동당의 논평(2월27일)도 읽는 이를 불편하게 만든다. 이 논평은 최 의원의 성추행과 직접 관련이 없는 부인을 언급, 결과적으로 최 의원의 성추행에 부인을 엮이게 만든다.
성추행한 사람은 간데 없고 술잔만 나부껴
“평소 술이 약한 편이지만 사무총장이 된 후 의원, 기자들과 접촉을 자주 했고 사건 당일도 만취 상태였던 것으로 알려졌다”(조선일보 2월28일자), “그는 애연가였으나, 술은 잘 마시지 못하는 편인 것으로 전해졌다”(한국일보 2월28일자), “그 분은 지자체 선거를 앞두고…엄청난 심적 스트레스를 받아 왔다… 술도 약한 분이 이순의 나이에 주량을 훨씬 넘게 과음함으로써 급성 알코올 중독 증세로 돌이킬 수 없는 잘못을 했다고 유추된다”(한나라당 정의화 의원), “한나라당의 왜곡된 폭탄주 문화가 사리지지 않는 한 제2, 제3의 최연희 사건이 일어날 것이다”(박진 의원).
한마디로 ‘부드러운 성품의’ 최 의원이 성추행을 한 것은 ‘죽일 놈의 술’ 때문이다. 성추행을 하는 이유도 가지가지다. “딸 같아서” “친근감의 표시로” “귀여워서” 하는 성추행이 있는가 하면, 최 의원처럼 “음식점 주인인 줄 알아서” “술을 너무 많이 마셔서”하는 성추행도 있다. 술에 취한 사람 모두가 성추행을 하는 것도 아닐텐데 말이다. 또 술에 취했다고 해서 ‘형법상 10년 이하의 징역 또는 1500만원 이하의 벌금형이 가능한 죄’를 용서해야한단 말인가?
“최 의원은 평소 모나지 않은 일처리와 부드러운 성품으로 주변에서 좋지 않은 소리를 들은 적이 없다는 것이 동료 의원들의 평가다. 이 때문에 성추행의 당사자가 최 의원이라는 데 대해 열린우리당 의원들조차 의아해하는 분위기다”(조선일보 2월28일자), “한나라당 최연희 의원은 평소 온화한 성품과 합리적 일 처리로 동료 의원들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아왔지만, 이번 성추행 사건으로 최악의 정치적 위기에 직면했다”(한국일보 2월28일자).
특정한 타입의 성폭력 가해자가 있는 것이 아니다. 최근 보도된 모 사건처럼 가해자는 친아버지일 수도 있고, 대전 연쇄 성폭력 사건처럼 남매를 둔 조용한 성격의 가장일 수도 있다. 성폭력의 77%가 친족, 동네사람, 데이트상대, 상사, 직장동료, 교사, 동급생, 선후배 등 아는 사람에 의해 일어난다는 통계는(한국성폭력상담소, 2000년) 성폭력의 ‘일상성’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흔히 보도되는 것처럼, 성폭력 가해자는 사회적으로 봤을 때 문제가 있는 사람이 아니다. ‘최 전 총장이 평소 좋은 평가를 받았다’ 등의 언급은 최 전 총장을 두둔하는 것과 동시에, 그를 예외적인 인물로 그림으로써 ‘존재하지도 않는’ 성폭력 가해자의 전형적인 모습의 이미지를 더 강화시킨다.
‘친남성적’ 문화에 대한 뼈저린 반성있어야
“우리는 그간 사회 곳곳에 만연한 성추행과 성폭력의 문제를 피해자의 처지에서 충분히 고민해 왔는지, 언론 본연의 의무인 사회적 주의 환기에 부족함이 없었는지를 되돌아본다”(동아일보 편집국 기자 입장, 2월28일). 동아일보 기자들의 성찰을 환영한다. 동시에 동아일보 기자들이 이 말을 실천할지 기대해본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언론계에 만연한, 그리고 당일 사건을 가능하게 했던 ‘친남성적’ 술자리 문화에 대한 반성은 없다. 설마 젊은 여자들이 시중 든 술자리에 참석한, 그리고 미래에 이런 자리에 참석할 자신들은 반성할 게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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