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에는 주 5일 근무를!”
노동계가 노동시간 단축 요구를 내걸고 ‘겨울투쟁’에 들어갔다. 현행 주 44시간인 법정 근로시간을 주 40시간으로 바꿔 주 5일제 근무를 시행하자는 것이다.
노동시간 단축 투쟁의 견인차는 민주노총. 민주노총 지도부는 12월 6일부터 서울 여의도 국회 앞에서 텐트농성을 벌이고 있다. 처음에 1개였던 텐트는 어느덧 13개로 늘었다. 단병호 위원장을 비롯한 중앙 임원에 지방에서 올라온 노조원들이 번갈아 합세하고 있다.
민주노총은 일단 12월 18일 정기국회 폐회 때까지 겨울투쟁을 계속하기로 했다. 또 국회에 노동시간 단축 특별법 제정을 요구하는 입법청원서를 제출했다.
노동시간이 단축의 장점은 길게 말할 필요가 없다. 주 5일제로 바뀌면 우리도 선진국 시민들처럼 여가와 문화생활을 충분히 즐길 수 있다. 금요일 저녁에 술집을 기웃거릴 이유도 적어진다. 다음 날 아침부터 주말을 충분히 즐기려면 일찍 귀가하는 게 낫다. 건강과 재충전, 이것이 곧 삶의 질이다.
범여권 곳곳 변화의 기류
노동계는 고용을 늘리는 효과도 있다고 주장한다. 허영구 민주노총 부위원장은 “최근 프랑스가 주 39시간제에서 주 35시간제로 전환한 뒤 250개의 사업장에서 단체협약을 갱신해 12만여명의 신규 고용을 창출한 효과가 확인됐다”며 “경제위기 속에서 고용불안이 심각한 우리나라로서는 노동시간 단축이 더 시급하다”고 말한다.
노동시간 단축의 대의명분에는 사용자쪽도 이의가 없는 편이다. 그러나 과연 지금이 적기인가에 대해서는 생각이 다르다. ‘경제가 IMF 관리체제의 터널을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상황인데, 좀 더 열심히 일해서 경쟁국을 따라잡아야 할 때인데…’ 이런 이유들 때문에 사용자쪽은 노동시간 단축에 대해 극도로 부정적이다. 게다가 노동계가 노조 전임자 임금지급 금지조항을 없애라고 요구하고 있어 신경이 날카로워져 있다.
노동시간 단축 문제를 놓고 노·사가 날카롭게 맞서는 것은 세계 어느 나라에서나 마찬가지다. 프랑스에서는 노동계 요구를 사회당 정부가 수용하자 사용자 단체가 거리시위(99년 10월)에 나선 적도 있다. 이럴 때 중요한 것이 정부 입장이다. 정부가 노·사의 상충하는 이해관계를 어떻게 조정하고 중재하느냐가 열쇠다.
현재 이와 관련한 정부의 공식입장은 “장기적으로 신중하게 검토한다”는 것이다. 명분을 외면할 수 없지만 재계의 반발 등을 우려해 거기서 한발짝도 더 떼려 하지 않는다. 이에 따라 1기 노사정위원회(당시 위원장은 한광옥 현 대통령 비서실장)가 “가칭 근로시간위원회를 98년 상반기중 구성해 근로시간 단축을 통한 고용안정 방안을 강구한다”고 합의했지만, 후속 논의는 진척이 없는 상태다.
그러나 범여권 곳곳에서 조금씩 의미있는 변화의 기류가 나타나고 있다. 김유배 청와대 복지노동수석은 11월 11일 ‘새 천년을 향한 생산적 복지의 길’이라는 보고서를 발표했다. 김대중 대통령의 중산층과 서민을 위한 정책노선(8·15 경축사에서 천명)에 따라 몇 개월의 작업을 거쳐 마련한 것이었다. 거기서 제시한 5대 과제의 하나가 ‘근로 복지’. 보고서는 근로복지 분야의 중요 과제의 하나로 “노동시간을 단축해 삶의 질 향상을 꾀한다”고 밝혔다.
노·사·정 새로운 사회협약을
보고서 작성 실무를 맡은 ‘삶의 질 향상 기획단’은 그 뒤 김 수석의 지휘 아래 노동시간 단축과 관련한 실무 연구를 시작했다. 노동법과 노동경제학을 전공한 교수와 연구원 등으로 태스크포스가 구성돼 연구조사가 진행되고 있다.
기획단의 1차 과제는 노동시간을 단축하되, 시행일정과 이에 따른 사회적 비용 분담방안 등을 연구하는 것이다. 기획단 관계자는 “내년 1/4분기 중 청와대 내부 입장을 정리하는 수준의 방안을 마련하고, 2/4분기에는 경제·사회 부처 등 범정부 차원의 의견조율을 거칠 계획”이라고 밝혔다. 그는 “내년 하반기에 노사정위원회 등을 통해 각 경제주체간에 공식논의를 이끌어내 2000년 안에 노동시간 단축에 관한 사회적 합의를 유도할 방침”이라고 말했다.
노동시간 단축의 시행방안과 관련해선 크게 대기업과 중소·영세기업을 구분해 적용하는 방식이 거론되는 것으로 알려진다. 대기업의 경우 노와 사, 그리고 정부가 비용을 분담함으로써 충격을 완화하는, 즉 노동자가 임금인상을 자제하고 정부가 사회보장 부담금 등을 일부 감면하는 방안 등을 고려할 수 있다는 것이다.
중소·영세기업은 상대적으로 충격이 클 수밖에 없다. 따라서 정부가 세제혜택을 늘려 부담을 보전해주는 폭을 늘리거나, 노동시간 단축을 한동안 유예하는 방안도 검토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청와대쪽은 그러나 공개적 논의는 아직 꺼리는 분위기다. 경총 등 경제5단체가 노조 전임자 임금 문제가 불거지자 “독자 정치활동 불사”를 외치는 상황에서 재계를 자극할 가능성을 부담스러워하기 때문이다. 또 어디까지나 노·사·정 경제주체들이 함께 논의할 문제인 만큼 정부가 앞서간다는 인상을 주는 것도 피하고 싶어한다. 기획단 관계자는 “복지노동수석실쪽의 작업은 분명히 노동시간 단축을 큰 방향으로 설정했지만, 논의 여건이 성숙될 경우에 대비해 준비작업을 해나가는 성격”이라고 말한다.
노동시간 단축과 관련해선 김대중 대통령의 의지도 간접적으로 확인되고 있다. 10월 19일 김호진 노사정위원장은 김 대통령에게 ‘고용·복지·성장에 관한 협약’ 추진방안을 보고했다. 이는 고용안정과 경제성장을 함께 달성하기 위해 노·사·정 각 경제주체가 할 일을 새로운 사회협약으로 맺자는 것이다.
당시 보고된 협약안의 핵심은 주 44시간 노동체제를 주 40시간체제로 전환하자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역시 노·사·정 경제주체들이 분담해야 할 비용들을 명시했다고 한다. 협약 체결의 목표시점으로 2000년 상반기 3월이 거론된 것으로 알려진다. 내년 4월 13일 총선을 앞두고 노동계의 요구와 삶의 질 향상을 향한 국민적 열망을 일거에 충족시킴으로써 정치지형의 변화를 꾀하는 그랜드 디자인인 셈이다.
내년 초 임금인상 투쟁과 연계
김 대통령에 보고된 ‘고용·복지·성장에 관한 협약’은 독일 사민당 정권의 예를 본뜬 것이기도 했다. 슈뢰더 총리는 집권 이후 ‘고용·훈련·경쟁력에 관한 연대'(한국 노사정위원회와 같은 성격의 기구)를 발족해 7월 1차 기본합의를 끌어냈다.
김 대통령은 당시 보고를 받고 “사회협약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매우 좋은 방안”이라며 열심히 추진해보라고 주문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김 대통령은 98년 2월 당선자 시절 외자유치가 급박한 시점에 정리해고 법제화 등을 뼈대로 하는 1기 노사정 협약을 끌어냈다. 그는 사회협약 방식을 ‘참여 민주주의’의 중요한 형태로 이해하고 있다.
주 40시간 노동제는 적어도 현재는 노동계만의 외로운 주장으로 비치고 있다. 그러나 여권의 안팎 흐름들 들여다 보면 꼭 그런 것만은 아니다. 내년 초부터 정국의 핵심 이슈로 떠오르면서 급물살을 탈 가능성도 적지않다.
민주노총은 겨울투쟁에 이어 내년 2∼3월부터 4·13 총선에 나설 국회의원 후보와 정당에 노동시간 단축을 공약에 반영해줄 것을 요구하기로 했다. 또 4∼5월에는 임금인상 투쟁과 노동시간 단축 문제를 연계해 중앙조직 차원의 핵심 이슈로 제기한다는 방침을 세워놓고 있다.
그 경우 정치권도 이 이슈를 외면하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당장 여야 정당들은 한국노총이 주도적으로 제기한 노조 전임자 임금 문제에 대해 민감한 반응을 보이고 있다. 주 5일제는 노사문제를 넘어 학교교육과 금융, 공공서비스 등 사회 전 영역에 걸쳐 국민생활의 근본적 변화를 가져올 폭발성을 지닌 것이다. 여권의 한 관계자는 “김 대통령의 8·15 경축사에도 불구하고 그에 걸맞은 중산층과 서민 위주 정책 개발을 제대로 못하고 있는 여권으로서는 매력을 느낄 만한 이슈임에 분명하다”고 말한다.
– 박창식 기자(cspcsp@hanimail.com) 조성곤 기자(cs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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