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운동을 소유하는가?

「Z넷(www.zmag.org)」마이클 앨버트

누가 운동을 소유하는가? 아니, 어느 누구도 운동을 소유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어떻게 다양한 이슈와 전술의 운동을 상호 존중하고 구성원의 정체성들이 보존되도록 할 것인가?

시애틀은 많은 문제를 제기하였다. 사회변화를 진지하게 옹호하는 사람들에게는 많은 문제들이 논의의 여지가 없다. WTO는 무엇이 문제인가? 우리는 WTO 대신에 무엇을 원하는가? 인류의 필요를 보다 더 효율적으로 충족시키면서도 환경을 보호하는 평등한 국제적 협력이 그것이다.

그러나 몇몇은 논쟁적이며 보다 많은 관심을 필요로 한다.

■ 평화적으로 행진하는 사람들과 불법적인 시민불복종에 참여하는 사람들, 기업의 자산을 파괴하는 불법적 행동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어떻게 서로를 공격하거나 서로의 노력이 가지는 힘을 헐뜯지 않으면서 공존할 수 있는가?

■ 어떠한 한 조직도 자신이 운동을 소유할 권리를 가진다고 생각하지 않고 오히려 -어느 누구도 모두에 의해 지지받지 않으며 모두에게 활동공간이 열려진- 다양한 반대 양식의 공간이 열려있는 광범위한 운동을 어떻게 전개할 것인가?

■ 전략과 전술에 관해 각기 다른 견해를 가진 상이한 구성원들이 자신의 열망과 실험을 억제당하지 않으며 자신의 선택에 의해 다른 이들을 침해하지 않으면서 어떻게 하나의 커다란 운동에 속할 수 있는가?

■ 실제로, 어떻게 이러한 유형의 상호보완적 공간을 우리 운동의 중심에 위치지우고 서로를 존중할 것인가?

시애틀에 한 그룹이 있었다고 상상해보라. 이들을 창발적 혁명가들이라고 부르자. 또한 항의를 전하는 과정에서 이들이 운동의 전개 궤적을 엘리트들에게 전달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고 해보자. 이들은 행진이 훌륭한 방법이긴 하지만 이는 억압적 법률의 붕괴를 예시하는 시민불복종으로부터 날카로움을 얻는다고 생각하였다. 또한 이들은 시민불복종이 훌륭한 방법이긴 하지만 이는 반격하는 침묵의 붕괴를 예시하는, 적극적이고 심지어 공격적이기까지 한 불복종과 봉기의 유령으로부터 날카로움을 얻는다고 생각하였다. 따라서 이들은 다양한 전술과 다양한 이슈의 전략을 옹호한다. 이들은 사회변화가 복합적이라는 점, 즉각적인 승리의 획득은 엘리트들에게 그들이 감당할 수 없는 사회적 비용(압력에 굴복하여 정책을 철회하지 않을 경우 특권적 지위가 끝날 것이라는 위협으로 표상되는 비용)을 부과하는 것에 달려있다는 점, 반대파 공동체들은 상이한 정책적 우선 순위와 필요, 경향-이는 집합적으로 작용하여 전반적인 영향력을 강화시킬 수 있다-을 가진다는 점을 이해하고 있다. 그러나 창발적인 혁명가들은 또한 자신들이 전혀 좌파의 다수가 아니라는 점을 알고 있다. 이들은 또한 자신들이 존중해마지 않는 다른 이들이 모든 전략, 전술적 문제에서 그들과 동의하지는 않는다는 점을, 그리고 전투성과 관련된 선택들이나 외부로부터 부과된 행동들에 의해 침해받지 않은 채 자신들이 선호하는 의제를 수행할 수 있기를 바란다는 점을 알고 있다. 따라서 창발적 혁명가들은 시애틀 시위를 조직하는 과정에서 다른이들과 소통하고 자신들은 보다 많은 전투적 전술을 행사하고자 한다는 점을 전달하며 다른이들의 의제를 침해하지 않으면서 어떻게 이러한 일을 할 수 있는가에 관해 협상을 요청한다.

우리는 이제 이 회의가 진행되고 하나의 계획을 제안하는 상황을 상상할 수 있다. 또는 다른 세력들이 창발적 혁명가들을 배제하고 자기들끼리 호혜적인 선택지를 입안, 실행하는 데 있어 이들을 거부하는 것을 상상할 수도 있다(내가 보기에 이는 심각한 잘못이다). 어떤 경우건 간에, 창발적 혁명가들이

“의견일치”를 보고 “엘리트들의 사회적 비용을 증대”시키며, 몇몇 기관-이는 보잉사의 지부 사무실일 수도 있고 상공회의소일 수도 있다-에 대한 하나의 캠페인과 계속적인 직접행동에 초점을 맞춤으로써 “다른 저항 양식을 실천으로 가르쳐주는” 상황을 가정해보라. 따라서 이들은 초점을 맞춘 이 기관과 WTO라는 광범위한 이슈들 사이의 연계를 시사하는 교육을 시작하면서, 시애틀의 행사 기간 동안 이 기관에서 시위를 갖고 이에 관한 명료한 정치적 교육 자료를 배포하며 자신이 선호하는 직접행동을 벌인다. 이들은 주요 대규모 시위장소 바로 옆이 아니라 여기로부터 충분히 떨어져 있는, 분명히 독립적인 자신들의 장소를 선택하며 따라서 이를 침해하지 않는다. 창발적 혁명가들은 또한 대규모 행사를 돕는 데 많은 시간을 할애하며 창의적이고 정력적인 순간들을 제공한다. 이들은 시민불복종에도 적극적이며 최고의 활기와 확신을 갖고 활동한다. 또한 주요 시위에서 경찰의 공격이 이루어질 시 이에 미처 준비하지 못한 동료들을 돕는다.

내 생각에 이러한 가설적인 창발적 혁명가들은 환상적인 모범이 될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론 시애틀의 난동을 비판하는 사람들은 이와 대조적으로 이들 가설적인 창발적 혁명가들이 시애틀에서 유리창을 깨뜨렸던 이들보다도 무가치하다고, 심지어 자신들의 조직화와 응집력에 나쁜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이들은 이런 식의 활동을 바라지 않는다. 이들은 이런 식의 활동을 운동으로부터 잘라내야 한다고, 그리고 이러한 활동이 벌어질 경우 이를 비난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는 판단과 과정 모두에 있어 좌파에게 심각한 문제이다.

물론 현재의 사회적 투쟁은 안무처럼 완벽하게 구성되고 있지 않으며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다. 그러나 이를 위해 조금만 노력한다면 우리는 투쟁의 과정과 내용에 대해 공통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폭넓은 가치와 규범을 갖게 될 것이다. 이러한 가치와 규범은 다양성에 개방적이며 동시에 각 구성요소를 존중한다. 시애틀 이후의 으뜸가는 문제는 이러한 가치와 규범이 무엇인가하는 것이다.

내가 보기에 매우 타당한 하나의 규범은 우리가 건설하고자 하는 사회를 지탱할 수 있는 그것이다. 우리가 이를 감당할 수 있는 정도만큼, 사람들은 결정된 행사들이 그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것에 비례하여 그러한 결정에 영향을 미쳐야 한다. 따라서 첫째, 수만 명의 사람들이 어떤 전술을 기대하면서-왜냐하면 이는 이 행사의 앞선 결정이자 주창이기 때문이다- 하나의 시위에 참여할 경우, 상대적으로 적은 수의 사람들이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행사를 일방적으로 바꾸는 것은 잘못된 일이다. 그러나 둘째로 대다수의 사람들조차 자신이 “모든 시위 공간”을 소유한다는 결론에 이르는 것 역시 잘못된 일이다. 가령 WTO는 자주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시애틀이나 미국의 국민 대다수가 시위 여부를 명령할 수 있다는 말이 표면화될 때 대규모 시위 군중이 WTO에 맞서 사람들이 조직할 수 있는 모든 방식을 명령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이제 더 이상 타당하지 않다. 내 추측으로는, 다수 좌파가 직접행동을 “금지”할 권리를 갖는다고 생각하는 어느 누구도 시애틀이나 미국 국민의 대다수가 모든 반대를 불법화할 권리를 갖는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해답은 어떠한 다수도 도덕적으로나 구조적으로 이러한 권리를 갖지 않는 것이다. 전세계 모든 국민의 이해가 달려있다는 이유로 시애틀에는 거대한 복합성이 존재했다. 문제는 WTO가 닫힌 문 뒤에서 (극소수의 이해만을 위해) 수십억 인구의 삶과 미래를 결정한다는 것이었다. 이는 잘못된 내용일뿐만 아니라 절차이다. 그러나 우리의 활동에 대해서도 공정하고 정당한 규범들이 적용되어야 한다. 참가한 모든 사람들과 심지어 멀리 연결된 모든 사람들의 일인일표제가 항상 최선의 결정방식은 아니다. 그러나 자신들이 영향받는 정도에 비례하여 발언권을 가질 수 있도록 모든 사람들이 어떻게 영향받는지를 평가하고자 노력하는 것은 항상 현명한 일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들처럼 끔찍하게 조직되어 있는 사회에서 많은 경우 이것이 매우 어렵기는 하지만 말이다. 우리는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을 해야 한다.

다른 규범들 또한 타당하다. 사람들의 권리로서만이 아니라, 한 순간 동의하지 않는 부분이 장기적으로는 우월함이 입증될 수 있다는 인식에 기반해서, 또한 거의 항상 지루한 동질성보다는 흥미진진한 혼합이 낫다(이는 시애틀의 행진과 시민불복종에서 보여진 폭넓은 스타일과 구성요소들이 보여준 또다른 교훈이다)는 인식에 기반해서 많은 상이한 접근들에

공간을 마련해주려고 노력하는 다양성은 타당하다. 연대 또한 타당하다. 이는 단지 서로에게 정중한 태도를 보이는 것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 우리 모두의 안녕과 상황, 우리 모두가 지지하는 견해와 이들 사이의 상호관계와 효과들을 말 그대로 유념하고 사고하는 것을 의미한다.

시애틀의 참가자들은 명령을 통해 직접행동과 소유물 손상을 효과 없는 것으로 배제하는 것은, (1) 배제되는 것이 귀중하기 때문에 운동의 선택지를 약화시키며 (2) 진정한 참여민주주의와 대립되고 (3) 다양성과 연대의 토대를 침식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내 생각에 그들은 올바르다. 나는 또한 앞서 가정한 창발적인 혁명가들을 위해 요약된 저항의 논리와 같은 다른 정서들에도 공감한다. 마지막으로, 개인들간의 관계와 우호적이고 서로를 환영하는 운동을 만들어내는 측면에 있어서, 이들 이슈를 제기하는 운동가들이 -당연하게도 폭력사태에 흥분한- 일부 개인들이 마치 자신들이 다른이들을 지휘할 수 있고 이에 동의하지 않는 다른이들은 멍청이이거나 무지한 파괴자일 뿐이라고 생각하며, 그리고 이들은 이러한 점에서 매우 교만하게 행동한다고 주장하는 것에 나는 동의한다. “동시대를 살아가는 세대”는 들어보라. 우리는 두 가지 모두를 가질 수는 없다. 나이 많고 우리보다 경험도 많은 이들보다 우리가 어떤 경우에 더욱 날카로울 수 있었다면, 지금 우리보다 젊은 이들은 마찬가지로 우리보다 예리할 수 있다. 그러나 훨씬 중요한 점은 나이가 많다고 해서 지혜가 저절로 생기는 것은 아니며 젊다고 해서 반드시 혁신적은 아니라는 것이다. 어떤 주장이 노련한 베테랑의 것이건 미숙한 신참자의 것이건 이를 반박하는 데 필요한 것은 이름 호명이 아니라 논증이다.

시애틀에서 폭력을 휘두른 어떤 사람이 자신들의 행위에 대해 비판적인 사람은 운동을 억압하려 하는 이들이며 기업에 호의적인 이들이라고, 혹은 CIA 요원이거나 다른 모든 방식을 배제한 채 비폭력만을 신봉하는 사람이라고 주장한다면 이는 그릇된 것이다. 요점을 잡아보자. 나는 시애틀의 폭력사태에 비판적이지만, 운동을 확장시키고 기업을 제자리로 돌려놓기를 원하며 CIA에서 돈을 받지도 않고, 게다가 비폭력주의자도 아니며 다양한 형태의 직접행동을 옹호하는 사람이다. 다른 한편, 폭력사태에 반대했던 누군가가 단지 재산에 손상을 가하는 것은 항상 그릇된 일이고 무지한 파괴자나 바보들만이 창문을 깬다는 이유로 이를 잘못이라고 말한다면, 그리고 이러한 자신의 주장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사회변화를 진지하게 추구하는 것이 아니고 따라서 존중받을 가치가 없다고 말한다면 이 또한 잘못이다. 요점을 잡아보자. 나는 여러 가지 상황에서 창문을 깨뜨릴 수 있지만, 그렇다고 내가 무지한 문명파괴자이거나 바보는 아니며 진지하게 사회변화를 추구하고 존중받을 수 있다.

이제 최근의 시애틀 사태와 일부 부당하게 퍼진 정서들 이면에는 대규모적인 운동을 민주적이고 상호존중적으로, 상이한 규모와 관점을 가진 다양한 구성원들과 함께 벌이는 문제에 관한 중요하고도 매우 어려운 이슈가 자리잡고 있음을 유념하자.

결국 이들 모두는 우리를 어디로 인도하는가? 과거는 제쳐두더라도 미래를 위한 중요한 결론은 무엇인가?

WTO를 둘러싼 광범위한 진보적 좌파 공동체들이 총재회담 장소에서 대규모 시위를 벌이기로 결정했다고 생각해보자. 이는 매우 훌륭한 아이디어일 수 있다. 지금 우리는 WTO 반대 운동, 기업 반대 운동, 녹색 운동, 무미아 아부자말 구명 운동 및 감옥 민주화 운동, 노동착취공장 반대 운동, 인종주의 반대 운동, 여성운동, 동성애자 운동 등등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다. 어떻게 우리의 운동을 벌이면서 다른 편의 운동들도 모든 방식으로 강화시킬 수 있을까?

한 가지 시나리오는 조직화 시기 동안 풍부한 재정을 갖추고 활동범위가 가장 넓은 그룹들이(설상가상으로 재정지원자들이) 어떤 전술은 허용되고 어떤 것은 안되는지, 누구는 환영받고 누구는 안되는지, 심지어 어떤 슬로건은 용인되고 다른 것은 그렇지 않은지를 선포하게 되는 경우이다. 이는 정치적 반대를 꺼려하는 대규모 조직으로 하여금 모든 결정을 내리도록 용인하여 우리 모두는 결국 집으로 발걸음을 돌릴 수밖에 없게끔 함으로써 진지한 운동의 발전에 자기파괴적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그러나 대규모 운동 그룹에 속해있는, 특히 이를 이끄는 일부 사람들은 과거에도 무수히 그러했듯이 이러한 접근법을 취할 것이 우려된다. 그들이 선택권을 갖고 운전석을 차지하고 있는 한 말이다. 하지만 이는 민주주의와 다양성, 행동 속의 연대와는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이다.

두 번째 시나리오는 상호 합의된 요구안과 구호, 행동 등등의 상세한 목록 주위로 광범위한 연합체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이는 “돈이 나머지 모든 이들을 지배하는” 것보다는 낫지만 결코 이상적이지는 않다. 이 시나리오는 일방통행적인 노선에 순종하는 것보다는 나은 최소한의 공통분모를 가져오겠지만, 다양성과 연대라는 우리의 잠재력을 분출시키지는 못할 것이다. 또한 참여적 자주관리라는 규범을 구현하지도 못할 것이다.

실제로, 위의 두 가지 접근방식에 대한 비판은, 이들이 비록 많은 덕목을 갖추고 있지만 다양성을 존중하지 않고 진정으로 민주적이지 않으며, 연대를 창출하지 않고 사회변화를 위해 우리가 가용할 수 있는 모든 자원을 이용하지 않는다고 시애틀의 수많은 급진주의자들이 지적한 것과 정확히 일치한다. 이 비판자들은 옳다.

따라서 세 번째 시나리오는 소수의 정책을 다른이들에게 강요하거나 모든 사람의 최소한의 공통분모를 찾는 것이 아니라 구성원 모두의 최대 공통합이 될 수 있는 프로젝트/과정을 창출해내는 것이다. 우리는 “상이한 사람들의 상이한 몸짓”을 보장하면서 활동하며 각 구성원들이 자신들의 이상과 논리에 기반하여 행동하는 동시에 다른 이들이 차지한 영역을 침해하거나 다른 이들의 활동에 혼란을 가져오지 않을 것이다. 각 구성원들이 자신만의 독자적 공간을 원한다면 그렇게 하도록 하라. 같은 장소에서 여러 시도들이 함께 행해진다면 그것도 좋을 것이다.

나는 세 번째 접근방식을 전적으로 선호한다. 이것이야말로 가장 동질적이고 개방적이며 민주적인 운동을 창출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우리가 바랄 수 있는 최고의 전술과 집중점의 혼융을 낳을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러한 최선의 혼합이 등장할 수 있을까하는 의문이 들겠지만, 이와 같은 과정이 없이는 전술이나 집중점의 포괄보다 불협화음의 긴장이 훨씬 많은 해를 가져올 것임에 틀림없다.

물론 이러한 유연한 구조조차도 모든 것을 포괄하는 폭넓은 표제를 창출할 수는 없을 것이다. 광기의 배제와 경찰의 도발 같은 문제들은 여전히 남아있다. 그러나 나는 이 시나리오에 내기를 걸고 있다. 세 번째 접근방식은 가장 폭넓은 배치와 가장 흥미로운 집합, 가장 강력한 접합을 가져오는 동시에, 화합할 수 없는 요소들을 고립시킴으로써 이들을 존중받는 파트너에서 배제시킬 것이다.

진정한 참여민주주의는 쉽지 않다. 특히 우리가 괴기할만큼 권위주의적이고 엄격히 통제되는 영역 내부에서 활동할 때는 말이다. 우리 각각은 “사회라는 펜치”에 의해 구부러진 모양이 되었고, 2천년을 바라보면서 희망했을 견해와 가치의 집단적 공유는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진정한 참여민주주의는, 그것이 가지는 위험과 난관에도 불구하고, WTO의 종식과 무미아 아부자말의 석방, 여성에 대한 폭력의 종식, 기업권력의 감축, 그리고 다른 모든 즉각적인 성과의 획득을 위해 우리의 재능과 헌신, 에너지를 효과적으로 활용하는 최고의 기회이다.

이 기사가 마음에 들었다면, 좋아요를 눌러주세요!

댓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