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영화로 고통받는 스리랑카 플랜테이션 노동자들

「세계사회주의 웹사이트」 12/13

찬드리카 쿠마라퉁가 대통령이 당수로 있는 국민동맹(PA)은 집권 5년만에 도시와 농촌의 빈민들은 물론 광범위한 노동계층의 일자리와 생활수준에 대한 체계적인 공격을 수행함으로써 노동자 대중의 적대감이 날로 높아지고 있다. 12월 21일에 있을 선거가 다가오면서 쿠마라퉁가는 자신의 내각과 노동관료들을 지원 삼아 “좌파” 정부의 수장으로써의 자신의 이미지를 회생시키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하고 있다.

노동자 계급 중에서도 가장 착취받는 계층인 타밀족 밀집지역의 노동자들 사이에서 그녀에 대한 지지도는 넝마처럼 갈기갈기 찢겨졌다. 쿠마라퉁가 정부는 이전의 국민연합당(UNP) 정부 하에서 시작된 차 경작지 민영화를 완성했고 불만이 제기되면 분리주의 세력인 타밀엘람해방호랑이(LTTE)의 침투를 막는다는 명분으로 군대를 동원해 경작지에서의 온갖 위협과 테러 행위를 자행했다.

플랜테이션 노동자들을 대표하는 두 개의 주요 노조(실론노동자회의(CWC), 농민전선(UPF))는 이전에 PA를 지지했다. 최근 사망한 CWC의 오랜 지도자 쏜다만은 장관을 지냈고 UPF의 지도자 찬드라세카란은 차관을 역임했다. 최근 선거에서 UPF는 쿠마라퉁가에 대한 지지를 포기해야 했고 12월 5일 야당인 UNP의 후보를 지지하겠다고 선언했다. CWC는 세 개의 분파로 나뉘어져 있으면 한 개의 분파만이 PA 정부를 지지하고 있다.

10월 말, 행정·내무·플랜테이션 산업 장관인 라트나시리 위크라마나야크는 공개적인 회의에서 “이익을 뽑아내는 데에만 급급해”질 수 있기 때문에 “차 경작지의 민영화를 처음부터 줄곧 반대”해왔다고 말했다. 그는 덧붙여서 “대부분의 경작지가 얼마 안 있어 손실을 볼게 될 것이고 일부 기업들은 근로자 기금을 지불하지 않는 등 부정 행위에 의지하게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의 논평은 플랜테이션 노동자들의 곤경을 이해하는 척하면서 PA 정부에 대한 지지를 다시 끌어들이기 위한 조잡한 시도에 불과하다. 이 장관은 플랜테이션 민영화의 최종 단계를 진두지휘했던 인물로 그는 반타밀 인종주의자로 유명하며 플랜테이션 노동자들에 대한 물리적 공격을 몸소 이끌고 있다. 더욱이 그가 “손실”에 대해 언급한 것은 이윤을 끌어올리기 위한 목적으로 플랜테이션에 더욱 혹독한 조치들이 도입될 것임을 알려주는 신호이다.

지난 5년에 걸친 어떠한 기록들을 살펴보더라도, 플랜테이션 노동자들이 왜 그렇게 쿠마라퉁카와 그녀의 PA 정부에 대한 배신감을 갖게되었는지는 의심할 여지없이 분명해진다. PA 정부는 플랜테이션의 민영화에 반대하며 플랜테이션 노동자들의 노동조건을 회복시키겠다고 약속하면서 1994년 집권한 바 있다. 1975년 쿠마라퉁가의 어머니인 S. 반다라나이크가 이끈 “좌파” 연정은 플랜테이션을 국유화했다.

그러나 몇 달 지나지 않아, PA 정부는 이 약속을 헌신짝처럼 내던지고 1977년 UNP 정부하에 시작된 플랜테이션의 민영화를 완결짓는 데 찬성했다. PA 정부는 첫 예산안 발표에서 “플랜테이션을 유지하기 위해 재정을 조달하는 데 있어 국가와 국민이 부담을 덜기 위해서 수익성 있게 플랜테이션을 운영할 책임을 민간 기업에 귀속시켜야 한다. 정부 재원에 부담이 되고 유지 불가능했던 플랜테이션이 현금으로 팔릴 것이다”라고 선언했다.

이전의 UNP 정부는 플랜테이션 경영을 처음에는 9개로, 그 다음에는 12개로 분할된 토지구역으로 분산시켰다. 그 이후 1992년부터는 이 토지구역들은 민간 기업에 경영권을 임대해주었다. 연간 1에이커 당 500루피(미화 7달러)라는 헐값으로 23개의 회사에 장기임대(99년)를 해주었고 임대 기간은 5년마다 갱신된다.

PA 정부 하에서 기업들은 5년이 아니라 50년마다 임대계약을 갱신할 수 있도록 했다. 국내 및 해외 기업들은 플랜테이션 주식의 51%까지 살 수 있도록 허용되었다. 정부는 플랜테이션 주식의 19%만을 보유하고 있고 20%는 공개시장에 상장되었으며 나머

지 10%는 플랜테이션 노동자들에게 배당되었다. 그러나 모든 주식이 양도가능하기 때문에 결국 대기업의 수중에 들어갈 수밖에 없게 되었다. 이 정책은 IMF와 세계은행으로부터 전폭적인 승인을 얻었다.

민영화는 노동조건의 철저한 하락을 가져왔다. 우선 노동자들의 장기간 투쟁으로 1989년에 쟁취해낸 연간 300일 노동(한달 25일)이 보장되지 못했다. 이전에 플랜테이션 노동자들은 월 단위 임금을 받지 못했으며 요구가 들어올 때마다 일을 해야 했다. 결국 임금을 지급받는 노동일수가 한달 평균 15일∼18일까지, 어떤 경우에는 10일 정도에 머무는 등 농장별로 편차가 심했다.

또한 1993년 단체협상의 하나였던 최저생계비 8루피(미화 10센트)를 노동자의 일당에서 삭감시켰다.

동시에 기업들은 새로운 목표량을 세우고 작업량을 증가시켰다. 여성 노동자들은 매일 13∼ 15㎏의 차잎을 손으로 수확했다. 목표량은 18㎏으로 늘어났다. 노동자들은 휴일 근무의 대가로 평상치의 한배 반의 임금을 받지만 휴일에 일을 하지 않을 경우, 이에 대한 보상으로 24㎏의 차잎을 따야만 한다.

새로운 작업 방식과 기술은 고용인을 대폭 삭감시키면서 생산성을 향상시켰다. 이 기술에는 농화학품, 잡초 제거 장비 이용, 차나무를 수확하고 가지치는 작업을 포함한다. 플랜테이션에서의 노동은 또한 더욱 기계화되었다.

비용을 줄임으로써 고용주들은 엄청난 이익을 끌어모을 수 있었다. 1993년과 1994년에 차산업은 각각 14억 루피와 9억 7천 4백만 달러의 적자를 봤다. 그러나 1996년에는 5억 루피의 흑자로 돌아섰다. 1995년과 1998년 사이의 생산 수준은 2억 4천 6백만에서 2억 8천만㎏까지 매년 증가했으며 이 기간에는 수출도 2억 4천 1맥만에서 2억 7천 2백만㎏까지 늘어났다. 1997년 미화 4억 8천만 달러였던 수출 수입은 다음해 7억 8천만 달러로 늘어났다. 스리랑카 중앙은행은 이 같은 수익성이 “민영화된 플랜테이션 기업의 경영 수준의 향상”로 인한 것이라고 말했다.

민영화와 싸움을 벌이고 있는 노동자들

민영화와 그와 관련된 임금 및 노동조건에 대한 공격은 플랜테이션 노동자들의 광범위한 저항에 불을 당겼다. 몇몇 주요한 투쟁들은 PA 정부와 긴밀히 연계된 노조 지도부에 반발해 혁명적 성격을 갖기 시작했다.

1995년 9·10월 우바 웨스트 플랜테이션의 1만 7천 명의 노동자들이 연간 300일 노동을 보장할 것과, 플랜테이션에 있는 청년 실업자들을 미래의 노동자로 등록시킬 것을 요구하면서 파업을 벌였다. 노조 지도부는 처음에는 파업에 반대했으며, 이 파업이 다른 플랜테이션 노동자들의 지지를 끌어들이자 모든 파업을 통제하고 차단시키기 위해 단지 논쟁에만 참여했다.

1996년 4월 실론노동자회의(CWC) 소속 노동자들은 민영화로 인한 영향들에 맞서 5일간 파업을 했다. CWC는 그 이전에 노동자들의 불만을 기도회 같은 말뿐인 항의시위로 수습하려 들었다. 그 당시 정부의 장관을 지내고 있던 CWC 지도자 쏜다만은 노조의 목적이 “노동자들 사이의 점증하는 불만을 억제하는 것”이라고 공개적으로 선언했다.

CWC는 전체 플랜테이션 노동자들 중 단 6만 명의 조합원을 가지고 있지만 정부는 이 파업이 다른 플랜테이션으로 급격히 확산되고, 민영화의 또다른 피해자인 도시 노동자들을 끌어들일 것이라는 점에서 불안해했다. 4월 4일 정부는 파업 참가자들을 위협하기 위해 이 나라 전역에 비상사태를 선포했다. 그러나 다른 노조에서 온 6십만 명의 플랜테이션 노동자들이 투쟁에 합세했다. 당혹스러워진 CWC 지도부와 LJEWU(UNP가 지배하고 있는 노조)는 정부와 서둘러 협상을 벌였고 파업을 중단했다.

1998년 2월 5일, 플랜테이션 노동자들은 플랜테이

션 산업의 국유화를 주장하며 또다시 파업에 돌입했다. 처음에 파업 지원을 거부했던 CWC와 다른 플랜테이션 노조들은 파업을 임금 요구로 제한하고 PA 정부와의 정면대결을 봉쇄하기 위해 분쟁에 참여했다. 국가의 테러행위와 잔인한 살인이 자행됐지만 해톤과 마스켈리야의 노동자 수천 명은 거리 시위를 조직하면서 자신들의 투쟁의 의지를 보여주었다.

CWC 지도부는 2월 13일 쿠마라퉁가 대통령과의 비밀 회담이후 노동자들의 어떠한 요구는 해결된 것 없이 파업을 중단하라고 지시했다. 수천 명의 노동자들은 파업을 이틀 더 연장했지만 대안적인 전망이 부재함으로 인해 결국 일자리로 돌아갈 수 밖에 없었다. 해톤과 마스켈리야, 그리고 쌀라베켈리의 노동자들은 노조의 배신에 치를 떨면서 노조 지도부의 초상을 불지르고 배신을 비난하는 포스터를 붙였다.

노조들은 PA 정부의 계획에 동의했기 때문에 싸우기를 거부했다. 1994년 2월 22일 CWC는 플랜테이션·산업 장관에게 다음과 같은 서신을 보냈다. “우리는 민영화-탈국유화되고 있는 플랜테이션에 정부 소유의 공유지가 없다는 것에 대해서는 받아들일 수 있다. 그러나 노동자의 고용 기간과 조건은 여러 기업과 두 개의 주요 노조 사이에서 논의되는 단체협상에서 기본적으로 다뤄져야 한다…”

CWC는 서신에서 플랜테이션 소유주들의 “관리 방식”으로 인해 분출될 수 있는 “비정규직, 비조직 노동자들의 투쟁”을 경고했다. 또한 플랜테이션 노동자들 사이에서 “좌절, 불안정, 환멸, 그리고 파업 의식이 널리 퍼지고 있다”고 지적하고 저항이 “노동 소요의 새로운 양식들 속에서 스스로 모습을 드러낼지도 모른다”는 우려를 제기했다.

이 우려는 노동자의 이해를 옹호하는 것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으며 민영화 과정에서 노조의 지위를 보장받는 데 그 목적이 있는 것이다. 사실 CWC와 LJEWU는 노동조건을 열악하게 만든 거래를 중개하는 데 중심에 있어왔다. 결국 노조 조직율은 대폭 하락해서 CWC의 경우 약 325,000명에 이르렀던 노조원이 1997년에는 60,000으로 감소했다.

차산업의 위기

선거에서 누가 이기든지 간에 플랜테이션 노동자들에게는 일자리와 노동조건에 대한 새로운 공격이 감행될 것이다. 몇 년 동안 고수익을 내온 차산업은 전세계 차 가격이 급격히 하락하면서 다시 심각한 위기 상태로 빨려 들어갔다. 1998년 5월까지 12달 동안 차 가격은 1㎏ 당 191.53에서 156.4 루피까지 내려갔다. 같은 기간 수출량은 1억 3천 3백만 7억㎏에서 1억 3천 1백 8십만㎏으로 감소했으며 수출 소득 또한 256억 루비에서 206억 루피로 하락했다.

거의 예외 없이 콜롬보 차경매소(CTA)에 나간 차의 10%가 팔리지 못한 채 1998년의 잉여분으로 남겨졌다. 스리랑카의 최대 시장 중 하나인 러시아로 1998년에 팔려나간 차는 4천만㎏이었지만 러시아 루블화가 미국 달러에 비해 50% 평가절하 되면서 결국 차 가격은 10% 하락하게 되었다.

스리랑카에 영향을 주는 또다른 주요 요소는 인도, 중국, 케냐를 포함한 차 생산 국가들과의 치열한 경쟁이다. 1977∼97년 사이 전세계 차 시장에서 스리랑카의 지분은 22% 혹은 23% 정도를 유지했다. 같은 기간 케냐와 중국의 시장 지분은 9%에서 17%로, 10%에서 18%로 각각 증가했다.

올 해초 발표된 성명서에서 실론농장주연합(CPA)은 “차와 루블화의 하락, 부가가치세와 채무부담, 그리고 유지불가능한 임금 방안으로 인해 스리랑카 플랜테이션 산업은 위기에 처해 있다. 스리랑카가 경제에 심각한 영향을 미칠 위기 절정의 상태를 피하기 위해서는 긴급 조치가 수행되어져야 할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CPA 성명서는 이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정부, 기업, 노조의 공동 노력”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플랜테이션 소유주들은 생산비용의 50%가 임금으로 나가고 있다고 불평하면서 내년 초에 협상을 벌일 새로운 노동협정에서 임금율의 삭감을 주장했다. 현재 플랜테이션 노동자 한 명이 받고 있는 일당은 미화 1달러 30센트에 불과하다.

대통령 선거에서 누가 집권하든지 간에 플랜테이션 노동자들은 정부와 노조 관료들을 등에 업은 경영주들에 의해 임금과 노동조건의 엄청난 하락에 또다시 직면하게 될 것임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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