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스크바의 권력이행, 그 정치적 궤도의 의미
세계사회주의 웹사이트」 1/8 피터 슈워츠
푸틴은 무엇을 표상하는가? 이것은 보리스 옐친 러시아 대통령의 갑작스러운 사임 이후 신문의 칼럼들마다 제기했던 질문이다. 옐친은 12월 31일 자신이 지명한 후계자, 블라디미르 푸틴에게 권력을 이양했다.
푸틴은 지난 5개월 동안 정부를 이끌어왔지만 그의 정치적 목적이나 성향은 아직 널리 알려져 있지 않다. 소비에트 첩보기관인 KGB(국가안보위원회)에서 전문적이고 정치적인 훈련을 쌓았다는 것만이 알려져 있을 뿐이다. 그는 옐친 대통령의 정권 장악을 절대적으로 지지했고 총리로 임명되자, 현재 벌어지고 있는 전쟁의 과정에서 체첸 시민들에 대한 무자비한 공격을 진두지휘했다.
푸틴은 1952년 레닌그라드(현재의 페테르스부르크)에서 출생했으며 법학을 공부했고 공부를 마치자마자(1975년) KGB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그는 KGB 해외 정보국의 주요 요원으로 드레스덴에 주재하면서 동독 지역에서 10년 넘게 활동 했다. KGB 요원으로서의 그의 활동에 대한 정확한 성격은 그의 일대기를 담은 전기에도 담겨져 있지 않다.
푸틴은 급진적인 자본주의 시장 “개혁자주의들”인 아나톨리 소브차크와 아나톨리 추바이스의 추종자로 1990∼91년 격동의 시기에 정치 무대에 처음 등장했다. 그는 페테르tm부르크 시장인 소브차크의 보좌관으로 일하다 결국 부시장까지 역임했다. 그는 배후에 남아 대중적인 자리에 모습을 잘 드러내지 않았지만 시 행정부에서는 “숨은 실력자”로 간주되었다. 그 당시 페테르스부르크는 살인청부가 기업 생존의 자연스러운 요소였을 만큼 부패와 스캔들의 도시로 평판을 받았었다.
1996년 푸틴은 추바이스의 추천으로 모스크바 크렘린 행정부에 참여하게 되었다. 그는 얼만 안 있어 크렘린 비서실 차장직에 올랐다. 1998년 옐친은 국가 정보기관인 FSB(연방보안국, KGB의 후신)의 국장으로 푸틴을 지명했고 1999년 3월 국가안보위원회(NSC)의 비서로 임명했다.
이런 자리에 앉아 푸틴이 주요하게 활동했던 것은 무수하게 쏟아지는 스캔들로부터 옐친을 보호하는 것이었다. 특별히 주목받았던 한가지 사건을 소개해 보겠다. 유리 스쿠라토프 검찰총장은 옐친 일가와 그들의 주요 후원자인 보리스 베레조프스키의 금융 거래에 관한 조사를 단행했다. FSB는 스쿠라토프가 매춘을 하는 현장을 잡아 비디오로 보여주며 스쿠라토프를 압박했다. 이 사건은 덮어졌고, 스쿠라토프는 해임되었다.
이러한 배경에서 크렘린 업무는 옐친의 편으로 교묘히 이동시키는 변화를 추진했고, 이러한 변화는 부유한 과두 정치의 독재자들로 이루어진 옐친의 일가 및 측근들의 영향력과 특혜를 향후 5년 더 보장하기 위한 것이었다. 옐친의 사임으로 6월로 예정되었던 대통령 선거는 3월 26일로 석 달이 당겨졌다.
바로 이 지점에서 푸틴의 선거 승리는 확실히 보장된 것으로 간주되고 있고, 게다가 그가 대통령 직무 대행이라는 자신의 지위로부터 발생하는 이점을 활용할 수 있는 조건이 완비되어 있는 것이다. 독일의「쉬트도이체 차이퉁」은 러시아의 권력 이행을 “짜르의 체제에서의 군주 계승 체제 구축”에 비유했다.
푸틴의 대통령으로서의 첫 공식 활동은 이러한 해설을 뒷받침한다. 그는 옐친이 평생 형사고발을 받지 않고 수많은 유형의 특권을 누릴 수 있는 법령에 서명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옐친이 정치활동의 무대에서 사라짐에 따라 제기되는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다. “푸틴은 그 자신을 무엇으로 표상하고 있는가? 대통령의 변화가 단지 인물의 변화에 불과한가? 혹은 이 변화가 새로운 정치노선의 도입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일까?
첫 번째 대답은 푸틴의 이름 하에 러시아 정부의 웹사이트에 올려져 있는 한 문서가 제공한다. 이 문서의 전반적인 기조는 ‘강하고 권위 있는 국가’라는 한가지 주제로 관통하고 있다.
푸틴은 옐친 정권하에서 황폐해지다시피한 경제발전의 불안정성을 기술하는 것으로 이 문서를 시작하고 있다. 1990년대 러시아의 국내총생산(GDP)은 거의 반으로 줄어들었고 국민총생산(GNP)은 상대국인 미국의 9분의 1에 불과하며, 중국의 4분의 1로 떨어졌다. 원료와 에너지 부문을 제외하면 러시아의 생산력은 미국의 20∼24%에 불과하다.
생산의 질에 필수적인 장비와 기술은 말도 못하게 낙후되어 있다. 현재 러시아 내 기계의 단 5%만이 5년 이내에 만들어진 것으로 10년 전에 이 수치는 29%였다. 해외 직접투자액은 115억 달러로 중국의 430억에 비해서도 턱없이 낮다. 연구와 개발에는 투자가 거의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실질 소득은 자본주의적 개혁이 시작된 이래 지속적으로 낮아지고 있다. 러시아 국민들의 전체 소득은 미국 국민들의 총소득의 10%도 안된다. 건강과 평균 수명기대치 또한 극적인 수준으로 하락했다.
푸틴이 인용하는 수치들은 모두 소위 개혁의 시대, 측 소련의 붕괴 이후의 것이지만 그는 현재 러시아의 경제, 사회적 상황을 “소련으로부터 상속받은 경제에 대한 대가를 치뤄야 하는 값”으로 설명하고 있다. 그는 계산착오와 경험부족로 인해 개혁의 시대에 실수가 있었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시장주의적 경제 개혁을 위해서는 “대안이 없다”고 결론 내린다.
그는 “우리 조국과 국민들에 대한 가격을 메길 수 밖에 없는 이 무자비한 상황은 볼셰비키 경험에 대한 대가였다”고 말하면서 소련에 대해서 갖는 어떠한 향수도 거부하고 있다. 그는 소비에트 “공산주의”를 문명의 주류에서 벗어난 막다른 골목으로 칭
하고 있다.
이러한 기반에서 푸틴은 현재의 정치, 경제적 과정의 수정 보완을 주장한다. 그는 러시아가 “정치적, 그리고 사회 경제적 혼란과 격변, 급진적 개혁의 한계”를 넘어섰다고 쓰고 있다. 그는 계속해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우리 국민과 조국은 공산주의든, 민족적 애국주의든, 혹은 급진자유주의든간에 앞으로는 새로운 급격한 붕괴를 겪지 않을 것이다.” 필요한 것은 “진화적이고 단계적이며 조심스러운 방식”이다.
푸틴에 따르면 “러시아의 진정한 갱생은 외국의 교본에서 모델과 설계안을 모방하고 이를 러시아 조건에서 실험하는 것으로는 보증되는 것이 아님”을 1990년대의 경험이 선명하게 보여준다. 러시아는 “갱생을 위해 스스로의 방식을 찾아야 한다… 시장 경제와 민주화의 보편적인 원칙을 러시아 현실에 결합시키면서…”
구체적인 맥락에서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다음 페이지에 분명해진다. 푸틴의 전망은 광범위한 대중의 편에 선 진정한 민주 항쟁을 가장 증오하는 국가 정보기관 출신의 권력주의자다운 관점을 드러내내는 것이다. 자유주의적 경제 계획을 이행하기 위해 그가 목적하는 두 개의 가장 중요한 필수조건은 권력이 막강한 국가와 강하고 고귀한 민족주의 이데올로기이다.
보나파르트가 막 움트려는 바로 그 시점에서 그는 에너지를 “러시아의 갱신을 위한 구체적인 임무들을 다루는 데 쓰는 것이 아니라 정치적 당파 싸움에 너무나 많이 소비하고 있다”고 한탄하고 있다.
그는 “러시아 사회의 단결”을 위한 기반으로 “전통적인 러시아의 가치”를 선동하고 있다. 그러한 가치들 중에 포함된 것이 “애국심”, “대(大) 러시아에 대한 신념”, “강력한 국가”, 그리고 “사회적 연대”이다. 강력한 국가를 위해 필요한 것을 그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러시아에 있어 강력한 국가는 제거되어야 할 예외가 아니다. 아니 반대로, 그것은 질서의 근원이자 보증인이며, 어떤 변화의 선창자이자 주도세력이다.”
다음 장은 “강력한 국가”라는 제목이 붙어 있으며 다시 한 번 그것을 강조한다. “러시아는 강력한 국가권력을 필요로 하며 가져야만 한다.”
이 문서의 “효율적인 경제”라는 제목이 달린 한 장에서는 경제적 자유주의의 전통적인 선결조건들(외국인투자에 대한 향상된 분위기, 더욱 효과적인 세금, 금융 시스템, 러시아 경제의 세계 경제로의 통합)에 경의를 표하고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 장에서 그는 경제 분야에 있어 국가의 적극적인 개입을 주장하고 있다. 문서에서 선언하기를 “러시아는 경제, 사회적 영역에 있어 유익한 국가 규제 시스템을 형성할 필요가 있다”.
이 문서에 비추어 푸틴의 집권이 갖는 의미에 대해서 생각해 볼 때 옐친의 사임 이후 전개될 양상은 단지 외관의 변화가 아니라는 점이 분명해진다. 옐친의 국정은 (최소한 그의 집권 초반기에) 소련으로부터 물려받는 국가 기구들을 철폐하고, 역사에 “민영화”로 기술될 사회, 경제적 약탈을 가능케 하는 것으로 이루어졌다. 이것은 1993년 10월 러시아 의회의 폭격뿐만 아니라 1991년 12월 소련 붕괴의 목적이었다.
이전의 동구 국가들과 소련의 남쪽에 대한 미국과 나토의 공세적인 도전과 함께 러시아의 미증유의 경제, 사회적 하락은 이제 러시아 연방 그 자체의 기반을 위협하고 있다. 국내와 해외 모두에서 새로운 통치 집단의 이해를 수호하기 위해서는 다시 한 번 강력한 국가 기구가 필요하다.
이 문서에서 푸틴이 계속적으로 미국이나 중국을 언급하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둘만 하다. 중국의 스탈린주의적 관료화는 러시아의 이전 스탈린주의 체제 만큼이나 단호하게 자본주의적 부활의 경로를 취했다. 그러나 중국은 공산당, 군대, 비밀 경찰 등을
포함한 구시대적인 국각의 억압 기제들을 유지하고 있고 러시아보다 조금 더 적은 문제들에 봉착하고 있을 뿐이다.
푸틴이 약술한 총체적인 방향을 보면 그의 무모한 “튀기” 방식을 처음 드러낸 체첸전에 대한 나름대로의 해석을 내릴 수 있다. 외교 정책에 있어 이 전쟁은 서구 영향력이 계속 확대되고 있는 코카서스와 카스피해 지역에 대한 러시아 통치 집단의 주장을 분명히 해준다.
러시아 국내적으로 이 전쟁은 푸틴의 강력한 국가의 건설을 위해 필요한 애국심을 선동시킬 수 있는 방편이다. 체첸인들에 대해 자행되고 있는 러시아 군대의 잔인성은 러시아 그 자체의 내부에서 사회적 황폐화에 맞선 국민의 단결과 저항에 대해 푸틴 어떤 처리 방식을 가질 것이며, 이 처리 방식에 반감을 갖는 사람들을 또한 어떻게 제압할 것인지를 미리 보여주는 것과 다름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전쟁은 승리하지 못했다. 러시아인들에 의한 엄청난 손실, 혹은 첫 번째 체첸전에서 러시아가 경험한 군대의 패배는 푸틴의 인기를 극적으로 하락시킬 수도 있다.
「프랑크푸르터 룬트샤우」의 칼 그로베는 푸틴은 “군대-비밀경찰이라는 집합체가 약탈을 일삼는 과두 독재정치와 통일된 총체로 권력 이행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인격화된 표현”이라고 설명했다. 이것은 말 그대로 정확한 표현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이 권력 이행이 심오한 사회적 위기와 광범위한 대중들의 점증하는 불만에 맞서 일어났다는 사실을 한시도 잊어서는 안된다. 지금까지 이러한 불만들은 정치적으로 확실한 형태를 갖는 데 실패했다. 그럼으로써 푸틴은 사이비 민주화 경구로 더 강력한 국가를 만들겠다는 그의 계획을 일시적으로 은폐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공개적인 계급 투쟁이 전개된다면 그것은 변화할 것이다.
일반적으로 서방 정부는 푸틴과 좋은 관계를 맺고 긴밀한 협조를 희망한다고 표현했다. 지금까지 어떤 서방 국가도 그의 내정 계획에 반대를 표현하지 않았다. 단지 몇몇 개별 인사들이 푸틴은 그의 전임자보다 더욱 어려운 협상 파트너임이 곧 드러날 것이라는 경고를 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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