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 첫 장을 장식한 에콰도르 민중봉기

「사회주의자의 외침(Socialist Appeal)」 1/23 조지 마트

“더 이상 구질서를 견뎌낼 수 없는 그 중요한 순간에, 대중들은 정치적 무대에서 자신들을 배제시키고 있는 장벽들을 깨부수고 기존의 대표자들을 뿌리치며, 새로운 체제를 위한 최초의 기반을 그들 스스로의 힘을 통해 창조해 낸다.”

트로츠키,「러시아 혁명사」

대중적인 동원, 시위, 파업, 그리고 충돌의 한 주가 지나고 난 1월 21일 금요일, 에콰도르에서는 수십만 명의 원주민, 농민, 노동자, 학생들이 국회의사당, 대법원, 대통령궁을 하나씩 접수하면서 대안 정부를 수립했다.

그러자 한 주 내내 침묵으로 일관했던 세계 언론들은 군사 쿠테타로 하밀 마와드 정부가 붕괴되었다며 그제서야 떠들썩하게 보도를 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분명히 해야할 것은 지난 주 에콰도르에서 일어난 사건은 하나의 혁명으로서, 트로츠키의 설명대로 “역사적 사건에 대한 대중의 직접적인 개입”이라는 중요한 특징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지난 며칠간 에콰도르에서 일어났던 이 장엄한 대중운동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파건 “좌파”건 들어선 정부마다 IMF의 구조조정을 성실히 이행하기 시작했던 1990년대 초반으로 거슬러 올라가지 않을 수 없다. 그 결과는 모두가 보는 바와 같이 명약관화하다. 전체 국민의 3분의 2가 빈곤선 이하에서 생활하고 있고 고인플레이션과 대량 실업으로 인해 에콰도르는 만신창이가 되어버렸다.

1995년 에콰도르는 사회적 문제에 대한 국민들의 불만을 민족주의 열병으로 전환시키기 위해 페루와 전쟁을 벌였다. 경제 정책에 대한 노동자들의 시위가 빗발치자 전쟁을 벌였지만 단 몇 개월만에 전쟁은 끝이 났다. 노동자, 농민 사이에 널리 퍼져 있던 불만은 1996년 대선에서 그대로 표출되었다. 압달라 부카람의 대중 선동적인 공약에 몰표를 던졌던 것이다. 몇 달 지나지 않아 부카람은 모든 공약을 저버렸고 전임자들과 같이 모든 생활필수품에 대한 물가인상을 포함해 IMF에 의해 강요된 구조조정을 단행하기 시작했다. 하룻밤 사이에 전기세가 500%, 가스가 340%, 전화세가 700%가 인상되었다. 이것들은 그동안 쌓여왔던 불만을 터져나오게 한 발단이 되었다. 1997년 노조들은 2월 5·6일 전국 총파업을 선언했으며 이는 무기한 총파업으로 이어졌다. 부카람은 긴급사태를 선포하고 진압군을 동원하는 등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갖은 탄압을 했지만 국민들의 항의시위를 멈추게 할 수는 없었다. 그제서야 전반적인 경제 정책들을 폐기하는 데 급급했지만 제대로 진행되지 못했고 결국 “미치광이” 부카람은 해외로 추방당했다.

거대한 운동에 인해 당황하면서 탄압으로 이를 멈추게 하기에는 역부족이었던 에콰도르 부르주아 세력들은 즉시 타협안을 제시해 사건을 수습하면서 파비아 알라르카를 임시 대통령으로 임명했다. 그 당시 노조는 이미 파업의 목적이 대통령의 사임이 아니라 경제 정책에 대한 거부라는 것을 분명히 경고했었다.

신임 알라르카 정부는 부카람이나 1998년에 당선된 마와드가 했던 똑같은 정책을 폈다. 에콰도르와 같이 엄청난 외채를 가진 가난한 국가는 경제 정책으로만 문제를 해결하려 하는 한 궤도수정을 할 여지가 없다. 자본의 논리가 적용되면 탈출의 방법은 단 한가지뿐이다. 노동자와 농민들의 어깨 위해 위기의 책임을 지우는 것이다. 그들은 생존권에 대한 정부의 공격들에 하나하나 저항했고 많은 경우 승리를 얻을 수 있었다. 지난 해 3월 48시간 총파업이 벌어지자 정부는 구조조정 계획을 철회할 수밖에

없었고 같은 해 8월에도 같이 일이 일어났다.

경제의 달러화

2000년의 에콰도르는 국민의 62%가 빈곤선 이하에서 허덕이고 노동력의 70%가 실업 혹은 불완전 고용상태에 놓여, -7.2%의 경제성장과 70%에 이르는 인플레이션으로 고통받는 처참한 몰골을 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마와드 정부는 달러당 2만 5천 수크레의 비율로 경제를 달러화에 고정시키기로 결정했다.

아르헨티나에도 이미 적용된 바 있는 경제의 달러화는 탈출구를 찾으려는 라틴아메리카 부르주아 세력의 필사적인 시도를 나타내는 것이다. 달러화가 외국인 투자자들의 “신뢰”를 높일 것이라는 점이 이 정책을 추진하는 근거이다.

그러나 달러화는 이 나라의 경제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책과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깊은 침체에 빠져있는 경제를 미국에 연계함으로써 긴축 정책을 더욱 강화하는 결과를 낳을 뿐이다. 통화정책의 자율성을 상실함으로써 정부가 위기 탈출의 방법으로 이용할 수 있는 단 한가지의 대안은 공공 서비스 지출을 줄이고 민영화에 더욱 박차를 가하며 임금과 그 밖의 보조금들을 삭감하는 길뿐이다. 이는 경제 회복을 위한 처방이 되기는커녕 오히려 국내 시장을 더욱 위축시켜 이 나라를 더 깊은 경제 침

체의 수렁으로 빠져들게 할 것이다. 단기적인 측면에서 달러화는 인플레이션을 조절하는 데 효과를 가져올 수도 있겠지만 그것은 경제 활동을 거의 완전히 마비시킴으로써만이 가능한 일이다. 경기가 침체되어 있을 때 물가인상이 어렵다는 것은 분명한 일이다.

에콰도르의 구체적인 상황에서 보자면 달러당 2만 5천 수크레로의 고정은 달러당 1만 5천 수크레로 사들여 계좌를 채워놓은 자본가와 은행가들에게 더없이 좋은 선물이다.

에콰도르 노동자, 농민들의 운동은 자들의 과거 경험에 기초해 이번 주 봉기를 결심하게 된 것이다. 에콰도르원주민연맹(CONAIE)과 사회운동연합(CMS)은 민중의회를 건설하고 1월 15일부터 무기한 전국 봉기를 선언했으며, 수천 명의 원주민 농민들이 전국 각지에서 키토로 몰려왔다.

이 운동의 성격은 질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투쟁은 더 이상 대통령을 갈아치우거나 선거를 다시 하자는 요구에 머무르지 않았다. 투쟁의 공개적인 목표는 “전국 봉기”이자, 독자적인 권력기구인 민중 의회를 전국과 각 지방에서 건설하는 것이었으며, 국가의 3권(행정, 사법, 입법)을 폐절하는 것이었다.

에콰도르 신문「엘 코메르시오」는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원주민운동과 사회운동은 1990년대 초 저항세력으로 처음 등장한 이래 국가의 지도계층과 정치적 강령을 변화시켜왔다. 이 변화는 현재 봉기의 형태에서 기존 권력의 모든 형식들을 완전히 깨트리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들은 자신들의 룰과 대표를 가진 수평적인 국가를 건설하려 하고 있다…

이 운동의 궁극적인 목표는 마와드 대통령을 하야시키거나 기존 의회를 통해 자신들의 요구를 관철시키려는 것이 아니다. 과거에 이렇게 했지만 어떠한 성과도 얻지 못했다… 이것이 바로 그대로운 새로운 형태의 조직건설을 필요로 하는 이유이다. 그들이 선택한 길은 소위 지방과 전국 의회의 존속이 아니라 국가적 수준에서 새로운 의회를 창조하는 것이다. 그들이 말하는 민주화는 누구의 허락도 요청하지 않고, 중개자에게 의지하지도 않는 것이다. 과거에 이미 그들은 이러한 시도를 했지만 어떠한 결과

도 얻지 못한 채 실패하고 말았다”(「엘 코메르시오」, 1월 16일자)

부르주아 국가에 대한 도전과 노동자, 농민 권력 기구의 건설은 에콰도르 민중의 의식이 성장했음을 드러내는 의미심장한 사건이자 이전에 있었던 투쟁들의 직접적인 성과이다. 1월 15일의 봉기는 정부의 비상사태 선포와 수많은 노동자, 학생 지도부의 구속으로 촉발되었다. 이 운동이 원주민운동에 의해 시작되었다는 것은 분명히 중요한 의미가 있는 것이지만 노동자 계급의 지지와 참여가 있었다는 것 또한 명백한 일이다. 국영 석유회사인 페트로에콰도르사의 노동자들은 원주민운동에 대한 지지와 정부의 경제, 사회 정책들에 대한 반기를 들으며 무기한 총파업을 선언했다. 「풀사르」통신에 따르면 “페트로에콰도르 노조 간부 디에고 카노는 거리와 도로에 3만 명 이상의 군인

과 경찰이 진주해 있지만 전혀 두렵지 않으며 하밀 정부가 붕괴되는 그 날까지 투쟁할 생각이라고 말했다”. 노동자연합전선과 에콰도르자유노련 또한 이번 봉기에 동참했다. 사회운동연합의 대변인 살토스 가르사의 말을 빌리자면 “이것은 원주민의 봉기가 아니다. 이것은 인플레이션으로 고통받은 에콰도르 민중, 사회운동, 시민들 전체의 봉기이다”.(「엘 텔레그라포」 1월 16일자)

전국 봉기

봉기는 진실로 전국적인 성격을 취했으며 대중 시위는 전국 곳곳에서 발생했다. 공통적인 특징은 정부 건물을 접수하고 지역 및 지방의 민중 의회를 건설하는 것이었다. 예를 들어 쿠엔카에서는 5만 명의 시위대가 경찰과 군대에 맞서 싸우면서 정부 건물을 점거했다.

에콰도르의 경제적 수도인 과야킬에서는 수천 명의 노동자, 농민, 학생들이 봉기를 지지하며 월요일부터 연일 시위를 벌였다. 시위는 소부르주아 세력(주로 중소기업주들)의 지지를 얻었고 이들도 전국 각지에서 이 운동에 참여했다.

남쪽의 로하에서도 연일 시위가 벌어지고 경찰과의 충돌이 발생했다. 군대는 대학 캠퍼스로 진입해 150명의 학생들을 체포했다.

원주민들의 키토 입성을 저지하기 위해 경찰과 군대가 배치되었지만 수요일이 되자 거리는 2만 명의 원주민들로 채워졌다. CONAIE 지도자 안토니오 바르가스는 “원주민과 도시의 지지자들은 경제, 정치적 권력을 쥐고 흔들면서 노략질을 일삼은 부패한 자들 앞에 결코 무릎꿇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민중 스스로 자신들을 지킬 수 있는 통일전선의 형성을 호소했다. 또한 경찰과 군인들에게 그들이 저격해야 할 대상은 이 나라 전체를 약탈한 자들이지, 자신들의 형제인 원주민이나 민중이 아니라고 호소했다”.(「풀사르」1월 19일자)

침보라소 지방에서는 “약 5만 명의 원주민 농민들이 지역의 모든 도로를 봉쇄했다. 이 지방 원주민들의 전통 의상인 폰초의 색깔 때문에 군인들은 이들을 붉은 물결이라 지칭했다. 그와 동시에 아마존 지역의 민중 의회는 노동자와 원주민들이 유전을 접수했다고 발표했다.봉기는 날이 갈수록 더욱 대중적인 성격을 취했고 탄압에 의해서도 결코 멈추지 않았다. 정부는 심지어 원주민 이외의 모든 이들을 죽이겠다는 위협이 담긴 CONAIE 명의의 거짓 성명서를 뿌려댔지만 이에 아무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목요일, 군대는 에콰도르 최대 산업단지인 에스메랄다스의 정유소에 난입해 진압작전을 벌였지만 노동자들을 일자리로 돌아가게 할 수는 없었다.

수십만 명의 원주민, 노동자, 학생, 중소자영업자들이 키토 시위에 참여했다. 그들은 며칠 동안이나 국가기관들을 둘러싸며 이를 접수하기 위해 시위를 벌였다. 정부는 군대를 동원하고 철조망을 두르면서 이 건물들을 보호하려 했다. 그러나 이것으로 충분하다고 안심한 바로 그 순간, 이미 그들에겐 전체 민중들을 막아낼 힘이 없었고 결국 21일 금요일 의회는 민중들에 의해 접수되었다. 이에 대해 「풀사르」는 다음과 같이 썼다. “에콰도르 원주민 농민운동은 조직화된 도시 노동자, 중간층의 전적인 지지, 그리고 3군 중 육군의 지지와 더불어 이 나라에서 대안 권력을 창출했다. 대안 권력은 대규모 원주민 농민 시위대가 키토에 있는 의회 건물을 포위하고 끝내 이를 차지하는 순간 형성되었다. 초반에는 군인들의 저항이 있었지만 갑자기 육군사관학교에서 온 수백 명의 군인들이 장갑차에 올라 건물 점거를 지원했다.” 루시오 구티에레스가 이끄는 70명의 젊은 대령들은 봉기에 참여할 것임을 선언했다.

군대의 역할

일부 군인들이 봉기에 참여한 사실에 대해 분석할 때 우리는 여러 가지 요소에 대해 고려해야만 한다. 우선 군부의 주요 세력인 사관생도들(NCOs)과 일부 장교들이 안토니오 바르가스 말한 바와 같이 “그들의 형제들”인 노동자, 농민들의 투쟁에 결국 동참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혁명적인 노동자와 농민들에게 군인들과 사관생도들이이 친밀감을 갖게 된 것은 1917년 러시아 혁명 혹은 1936년 스페인 혁명에서처럼 모든 혁명에 있어 하나의 특징이다. 또 다른 한편, 군 장교들은 솔직히 한줌의 은행가들에게만 호의적이고 끝내 국가를 제국주의에 헐값으로 넘기고 말 정부의 경제 정책에 넌더리가 낫을 가능성 또한 있다. 부패와 외국의 간섭을 일소하길 원하는 이 “애국” 군장교들은 베네수엘라의 차베스 운동과 정확히 일치하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사회의 가장 억압받는 계층의 편에서 정치의 무대로 군부가 참여했다는 것은 몇 년 동안 처음 있는 것으로 매우 의미심장한 일이다.

2차 대전 이후 식민 세계에서 자본주의가 막다른 골목에 처하자 많은 국가들에서 조국을 후진성에서 탈피시키고 제국주의로부터 해방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군인들이 권력을 잡았다.

소련의 스탈린주의식 모델을 취한 몇몇의 경우 그들은 제국주의의 재산을 몰수하면서 경제와 약한 민족자본을 국유화했다. 스탈린주의 모델은 국가의 경제발전을 이룩하는 계획 경제를 가능하게 한다는 점에서, 그와 동시에 노동자 민주주의의 부재가 이들 군인들에게 지배 계급의 모든 특권을 부여한다는 점에서 매우 유용한 것이었다. 이러한 경우의 예는 시리아, 버마, 에티오피아, 아프가니스탄과 같은 나라에서 발견할 수 있다.

지금은 더 이상 소련의 모델을 따르지 않지만 많은 국가에서 벌어지고 있는 자본주의의 완벽한 위기는 여전히 이들 군부 세력들로 하여금 대중선동주의, 반제국주의, 신자유주의 경제정책 즉, “구조조정” 정책에 대한 거부 등이 뒤섞인 매우 혼란스러운 프로그램으로 정치에 관여하도록 만들고 있다. 이것의 가장 분명한 예가 베네수엘라의 차베스이다.

대중의 압력 속에서 그들이 얼마나 오래 버틸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혁명은 사회의 모든 억압받는 계층을 지도하는 노동자계급에 의해 수행되어야 한다는 것, 그리고 기껏해야 군부의 확고한 통제 속에 놓여 있는 스탈린주의 정권일 뿐이라는 것을 맑스주의자는 분명히 해야할 임무가 있다.

금요일 아침 봉기에 대한 지지를 결심한 70명의 군인들은 아마도 불만 많은 “애국” 군인들의 범주에 속할 것이다. 농민 지도부와 사회운동 그리고 군부 사이의 접촉은 이미 지난 12월에 시작되었다. 국회를 접수한 후 민·군혁명평의회가 형성되었다. 이 평의회의 구성과 첫 성명서는 이번 에콰도르 운동의 결점을 반영하는 것이었다. 이 평의회는 CONAIE 지도자인 안토니오 바르가스와 전 대법원장 솔로르사노, 그리고 구티에레스 대령으로 구성되었다.

첫 성명서에서 구티에레스는 “이 나라의 변화를 갈망하는 전직 대통령들, 깨끗한 정치인, 교회, 언론, 정직한 기업인과 은행가, 노동자, 실업자, 여성 모두에게 호소했다.”(「풀사르」1월 21일자) 카를로스 솔로르사노도 같은 말을 했다. “우리는 선한 의지를 지닌 기업인과 정직한 은행가들이 이 정부에 참여하기를 원한다. 우리가 지금부터 원하는 단 한가지는 이 나라가 약탈당하지 않는 것이다. 도둑질은 지금까지로 충분하다. 우리는 에콰도르가 노략질에서 해방되기를 원하다. 이것이 중요한 슬로건이다”(「풀사르」1월 21자)라고 말했다.

지도부의 혼란

우리는 이 운동의 주요 취약점은 정확하게도 지도부에 있다는 것을 여기서 분명히 알 수 있다. 노동자, 농민들이 권력을 잡은 이후 그들의 지도부는 이미 그것을 은행가들과 자본가들에게 넘겨줄 생각(비록 지금까지는 “정직한” 사람들에게로 한정하고 있지만)을 하고 있다. 운동 지도부의 이러한 혼란은 새로운 기구를 건설하기 위해 낡은 국가 기구에 의지하게 만든다. 권력은 이미 그들의 손에 있었지만 그들은 그것을 현실화하지 못했다. 그럼으로써 매우 급진적인 성격과 조직적인 형식을 지녔던 이 운동은 정치 강령에 있어 매우 취약했고 혼란에 빠졌다.

금요일 저녁 군부의 지지를 받은 (언론의 표현대로) “코뮤나르드”는 결국 대법원과 마와드가 이미 도망을 간 대통령궁을 차지하게 되었다.

그런 다음 자신의 손에서 권력이 빠져나고 있음을 감지한 군부의 최고사령관 카를로스 멘도사는 봉기(봉기는 이미 승리에 이른 것이었고 단지 내부의 배신만이 존재할 수 있을 뿐이었다)에 참여하기로 결정했고, 혁명평의회에서 구티에레스의 자리를 대신하게 되었다.

이것이 혁명 운동의 첫 장을 끝냈다. 운동을 시작했을 때 그들을 멈추게 할 수 있는 힘은 지구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대중은 다시 한 번 확인했다. 이번에 그들의 목표는 분명했다. 단지 정부의 붕괴가 아니라 전체 국가기구의 폐절 및 민중 의회에 기반한 다른 대안적 기구의 창안이었던 것이다. 단 5일 동안 에콰도르의 농민, 노동자 대중은 전통적인 투쟁방식, 총파업, 봉기, 대규모 시위를 통해서, 그리고 군을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면서 권력을 쟁취하는 데 성공했다.

문제는 다른 모든 혁명에서 나타나는 것처럼 운동을 마지막까지 지탱시킬 수 있는 진정으로 혁명적인 지도부의 부재이다. 러시아의 2월 혁명, 1918년 독일 혁명, 그리고 1936년 스페인 혁명에서처럼 대중은 권력을 장악했지만 그들의 지도부는 그것을 다시 부르주아에게 넘기고 만 것이다.

에콰도르의 토요일은 멘도사 장군이 구스타보 노보아에게 권력을 이양한다는 소식으로 시작되었다. 그의 첫 번째 성명서는 그가 “물러난 마와드의 경제 정책을 대부분 이어나갈 것”임을, 그리고 “마와드에 의해 시작된 달러화와 금융기관 구제 및 현대화가 계속될 것”임을 확인시켜 주었다. 멘도사 장군이 부르주아 세력의 앞잡이로 행동한 것은 분명하다. 부르주아 세력은 권력에 매달린 마와드의 시도가 결국 자신들 체제의 완벽한 몰락을 가져왔다는 사실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부통령에게 권력을 이양한다는 결정은 멘도사가 미 대사관을 방문한 이후에 이루어졌다. 자신이 대표하는 국민들의

힘을 보았던 하밀 마와드는 기적적으로 목숨을 건질 수 있었고 노보아 신임 대통령에 대한 지지를 공식 표명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뉴스는 여전히 혼동되어 있다. 봉기에 참여한 군인들이 배신감을 느끼고 있고 구티에레스 대령은 구속되었다. 토요일 아침 대중들은 대통령궁을 재탈환할 가능성에 대해 논의를 했던 것으로 보여진다. 농민 지도자 로멜리오 구알은 “인디안 민중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들은 이미 허허 벌판에서 기아를 경험했기 때문에 도시의 도로와 거리에서 죽는 것은 문제도 아니다. 에콰도르 민중 전체의 변화를 갈구하고 있을 뿐이다”라고 말했다.

모든 전술을 군부의 지지에 기초를 두었던 운동의 지도부는 장군들로부터 배신감을 느끼면서 전장을 포기했다. 멘도사 장군이 운동을 배신하지 않았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는 애초, 운동의 목을 베기 위해 전선에 나섰을 뿐이기 때문이다. 토요일 아침만 해도 상황은 되돌릴 수 있었다. 만약 지도부가 그들 스스로 군인위원회의 형성과 민중 의회의 모든 수준으로의 확장, 그리고 모든 부르주아적 요소의 일소에 힘을 쏟았다면 그들은 지금 권력을 장악할 수 있었을 것이다. 권력은 21일 금요일의 사건이 보여주듯이 관료적 대표자(국회의원, 판사, 대통령의 손에 있는 것이 아니라 키토의 거리와

나라의 전역에 있는 것이다. 민중의회의 손에 그리고 민중의 국회에.

누가 권력을 쥐었는가?

그러나 대중 지도부와 농민운동은 권력의 출현 앞에서 갈피를 못 잡았고 혁명평의회의 당사자인 멘도사가 이 평의회의 사멸을 선언하고 노보아를 대통령으로 지명했을 때 그들은 그것에 어떻게 대응하고 해석할 것인지에 대해 알지 못했다. 그들은 군의 대부분이 코뮤나르드의 편에 섬으로써 멘도사에게 돌아갈 권력은 거의 없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만약 그들이 조직된 노동자, 농민 대중에게 대통령궁을 다시 차지하자고 호소하고 군인들에게 군장성들에게 총을 겨누고 이 운동에 참여하라고 설득했다면

상황은 완전히 달라졌을 것이다.

가장 최신 뉴스는 인디안 농민들이 수도를 떠났고 민중 의회를 포기했다는 소식이다. 일부 지방의 민중 의회가 아직 해산하지 않았고, 또 다른 일부 지방에서는 대중 운동이 계속되고 있다는 보도가 들린다. 23일 토요일 「엘 카메르시오」는 다음과 같이 보도하고 있다. “리오밤바와 구아란다에서는 이번 운동에서 계속되었던 구호들을 외치는 원주민 농민들의 시위가 계속 되고 있다. 암바토와 오타말로에서 또한 시위가 있었다… 리오밤바에서는 약 1만 5천명의 원주민들이 콘다미네 시장을 향해 행진을

벌였고 시장을 폐쇄시켰다. 그리고 나서 그들은 지도부가 무기한 봉기를 비준했던 인디언 하우스에서 집회를 가졌다… 구아란다에서는 10시 30분 경 인디안 3천여 명이 행진 벌여 시장 가게들이 철시를 했다. 지도부는 운동의 진행 추이에 대해 실망감을 나타내면서 계속 봉기해 나갈 것을 선언했다”(「엘 코메르시오 1월 23일자) 그러나 이미 전체적인 추세는 지방의 민중 의회가 포기되고 운동이 종말에 이르고 있는 것으로 보여진다.

이 봉기의 즉각적인 성과가 무엇이건 간에 노동자, 농민 대중이 국가의 역할, 군사령관의 역할, 자신들의 힘 등에 관해 많은 것을 배웠으리라는 점은 분명하다. 에콰도르 부르주아는 절박한 상황에 놓인 경제 문제를 절대 해결할 수 없으며 따라서 이로써 모든 것이 끝나 버린 것이 아니라 이 운동은 역사의 중요한 한 장이었을 뿐이다.

에콰도르는 라틴아메리카에서 유일한 사례가 아니다. 콜롬비아, 베네수엘라, 아르헨티나, 온두라스, 니카라과, 코스타리카, 브라질 등 이 대륙 전체가 대규모 시위, 총파업, 농민 봉기가 한번씩은 있어왔고 최근 몇 년 동안 다시 재연되고 있다. 승리적인 혁명을 위한 모든 것이 준비되어 있다. 한 국가에서 혁명이 발생하는 순간 이는 라틴아메리카 전 대륙에 걸쳐 들불처럼 번져나갈 것이다.

에콰도르의 도시와 농촌의 모든 노동자들에게 가장 긴급히 요구되는 바는 계급 독립과 진정한 사회주의 강령의 원칙에 입각한 혁명적 지도부를 세우는 것이며 이것이 이 대륙의 민중들을 위해 나아갈 방향을 제시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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