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커와 사이버 정치의 새로운 지평
1. 해커를 보는 새로운 시각
어느 시대에나 새로운 집단이 등장하는데는 그만한 사회적 근거를 갖
고 있다. 한 집단의 특성은 그 사회·문화적 시대 상황을 반영하고 있
는 것이다. 20세기가 마련한 디지털혁명의 파고도 예외 없이 새로운
집단의 출현을 이끌어냈다. 디지털 엘리트들, 새로운 산업과 기업가들,
신종 계급들 등의 새롭게 명명된 세력들이 서서히 자리를 잡고 있다.
물론 사회에는 각 시대마다 중심화된 사회 체계와 세력에 저항하는 힘
들이 존재했고, 그 주변적인 집단들도 그 때마다 고유의 특성을 지닌
채 변화를 거듭해왔다. 이들 집단 중 ‘해커'(hacker)는 디지털 기술을
자신의 관심사로 적극 활용하여 기술적 저항을 꾀하는 미래의 주변 세
력들 가운데 하나이다.
일반적으로 해커는 컴퓨터 코드와 전자 하드웨어를 ‘해크하기
‘(hacking)를 즐겨하는 이들이다. {해커들Hackers}이란 유일무이한 해
커의 비사(秘史)를 통해서 그들의 내력을 꽤 장황하게 풀어나갔던 스
티븐 레비(Steven Levy)는, 이 책에서 해커란 말이 생기게 된 연원을
미국의 50년대로 거슬러 잡고 있다. 그는 ‘해크'(hack)라는 말이 그 당
시 매사추세츠 공대(MIT) 학생들 사이에서 이미 널리 통용된 은어라
고 주장한다. 그가 정의하는 해크란 “작업 과정 그 자체에서 느껴지는
순수한 즐거움 이외에는 어떠한 건설적인 목표도 갖지 않는 프로젝트
나 그에 따른 결과물”이다. 우리는 이런 정의를 통해 해커가 상당히
반권위적이고 리버럴한 속성을 갖고 있음을 추측할 수 있다. 이들에게
해킹은 닫혀진 정보를 열어제끼고, 그 지식을 공유하는 행위인 것이다.
그러나 이와 달리 해커들을 사회 규범적 틀내에서 바라보는 시각도 존
재한다. 우리는 주류 언론매체들의 주장에 친숙해져, 해커에 대해 대체
로 맹목적인 불신을 갖고 있다. 이들을 타인의 컴퓨터에 불법적으로
전자 침입하는 사람들로 보고, 체제 전복적인 과격 단체로 고정해 바
라보는 시각에 익숙해져버린 것이다. {사이버펑크Cyberpunk}의 저자,
캐티 해프너(K. Hafner)와 존 마르코프(J.Markoff)가 해커를 “컴퓨터와
컴퓨터 네트워크에 사로잡힌 젊은이들, 그리고 컴퓨터 전문가나 입법
가들이 윤리적으로 수긍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서서 컴퓨터를 조작하
는 젊은이들”로 정의한 것처럼, 이제 해커는 사회적 가치 규범의 사악
한 위배자로 취급된다. 해커들을 시스템 파괴 행위를 일삼는 ‘크랙커
‘(cracker)에서부터 타인의 카드를 도용하거나, 전화 회선을 침입, 교란
하는 ‘프리커'(phreaker)로 보는 관점은 그들의 악하고 과격한 면모를
강조하는데서 나왔다.
통칭되는 해커의 모습에는 이처럼 사악함과 선함, 과격함과 온순함의
이중적 평가가 존재한다. 그러나 이들의 이중적 모습에도 불구하고 공
유되는 지점은 있다. 이들은 젊고, 반항적이고, 기성권위나 고정관념,
그리고 현대의 상식을 구성하는 상상과 가정을 거부한다. 고정되고 경
직된 기성 체제에 자유의 통풍구를 만들고자 하는 그들의 행동적 가치
는 다음과 같은 슬로건에서 집약된다.
“스스로 생각하라, 권위를 의심하라”(Think For Yourself; Question
Authority, TFYQA). 최근 워쇼스키 형제가 만든 영화 <매트릭스>에
서도 권위(기계)의 가상 통제를 거역하고 인류 구원의 주역으로 해커
들을 그 중심에 놓고 있는 것처럼, 컴퓨터를 가지고, 그리고 이를 통하
여 권력에 의해 굳게 닫혀있는 정보를 해방하고 분산시키는 이들의 이
미지는 사회에 대한 새로운 가치의 긍정적인 표현에 다름 아니다.
2. 해커들의 정치적 유산과 그 전통
최근 해커와 관련하여 종종 등장하는 기사들을 살펴보면, 이들을 단지
소수의 철없는 행동으로 치부하기에는 그 수위나 지향하는 바가 단순
치만은 않다. 또한 신문 기사 내용 안에서 간헐적으로 언급되는 해커
의 행동주의를 지칭한 ‘핵티비즘'(Hacktivism)이나, 보다 광범위한 사
이버 테러와의 전쟁을 일컫는 ‘네트전'(Netwar)이란 신조어들은 이들
의 활동을 주목하는 세간의 관심을 반영하고 있다. 최근 몇 년간 일어
난 굵직한 국제적 해킹 사례들은 주로 권위주의 국가, 거대 언론사, 군
사/정부기관, 국책연구소, 은행, 대학 등에 집중하고 있다. 한국정보보
호센터에 따르면 국내에서도 98년에 해킹 빈도가 64건 정도였던 것이
올 상반기에만 81건으로 점점 늘어가는 추세임을 지적하고 있다. 최근
정부가 발표한 해커 대응팀 구성이나 국방부가 올해말에 창설하려는 ‘
컴퓨터 해커부대’ 등은 해킹 행위에 대해 적극적으로 대응하겠다는 국
가 권력의 심각한 의지로 읽혀야 한다.
한편 우리는 해커의 새로운 형태로 최근 신유형의 노동자들도 목격하
게 된다. 주로 사무직/기술직 노동자들에 집중된 이 새로운 해커들은
장차 조직화된 전자 저항의 방식이 어떤 것일 수 있는가에 대한 실마
리를 던져주고 있다. 라파르크(Paul Lafarge)가 언급한 ‘게으를 수 있
는 권리’를 향유하는 해커 노동자들이 새롭게 등장하고 있는 것이다.
이들은 노동시간을 단축하려 하기 보다 주어진 노동시간 내에서 게으
름을 부리며 ‘농땡이 치는'(goofing off) 넥타이 노동자들이다. 보통 이
새로운 노동자 유형은 초창기 산업 시대에 기계 파괴로 자본에 대응했
던 ‘러다이트'(Luddite)와 구분하여 ‘슬랙커 러다이트'(slacker
Luddite)로 불리운다.
한마디로 이들은 기업의 감시망을 피해 기업의 생산력을 떨어뜨리는
등의 비생산적 행위를 시도하는 하이테크 러다이트들이다. 예컨대, 작
업장에서 비디오게임을 하거나, 인터넷에서 동료와 채팅을 하거나, 여
행 계획을 짜는 등 소속 기업의 시간, 장비, 지급품들을 적대적 방식으
로 활용하여 작업장에서 비롯되는 노동 소외를 해소하고 치유하고자
한다. 어떻게 보면 이들은 새로운 시대의 기업내 위험스런 해커들일
수도 있는 것이다. 어쨌거나 최근 점증하는 해킹 사례들의 면면을 통
해 보면, 애초에 개인의 사적 욕심으로 이루어지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대체로 그 경향은 정치적인 저항의 성격이 강하다. 물론 해커들의 저
항은 인터넷 네트워킹 수단을 동원하여 개별적이고 일회적인 해킹 방
식으로 표현되는 기술적 저항이다. 그들의 강한 정치적 성향은, 이들의
공격 내용이 반전, 반핵, 생태, 인권 등에 집중해 있고, 그 목표가 주로
미국 연방수사국(FBI), 팬타곤, 핵관련 연구소, 해커 탄압에 대한 언론
사 홈페이지 공격 등이기 때문에 충분히 거론될 수 있다. 하지만 이들
의 부분적인 정치적 요구의 정당성에도 불구하고, 일반 대중이 이들을
백안시하는 것은 그들의 비합법적이고 비합리적인 저항 방식에 있다.
그들의 운동 방식은 개별적이고 산발적이며 파괴적이다. 일반인들에게
친숙치 못한 해커들의 이같은 행동 양식들은, 그 뿌리를 거슬러 올라
가다 보면 그들의 ‘아나키'(anarchy)적 전통에서 연유한다.
‘아나키’는 흔히 무정부 상태 혹은 무질서를 의미한다. 그러나 아나키
는 무질서 상태라기 보다는 ‘지배자의 부재'(without archons)란 뜻을
담고 있는 그리스어 ‘아나코스'(an-arkhos)에서 생겨났다. 즉 아나코스
는 역사의 진보와 자유가 하나의 거대 이론이나 행동 근거에 따른 권
위적인 방식을 통해서 보다는, 오히려 통일된 지배자가 없이 이를 희
구하는 개인의 능력과 각각의 자발적 참여와 연대에 의한 실천 방식을
염두에 두고 있다. 그래서 해커들에게 낭만적 유토피아주의는 그들 사
고의 핵심이다. 한편 아나키즘에는 러다이트적인 문명 파괴의 속성도
잠재한다. 제도와 기술에 반응한 반문명주의가 러다이트적이라면, 해커
의 아나키적 유산에는 이 속성이 잠재해 있다. 대중 정서와의 유리가
이 러다이트적 폭력적 속성에서 비롯되었다면, 해커들의 아나키적 속
성은 이들의 개별적이고 탈권위적 성격을 비추는 사회적 가치의 거울
이다.
역사적으로 거슬러 가보면, 해커들의 본고장인 미국의 해커들에겐 이
같은 아나키적 전통이 철저히 스며있다. 1965년 미국 서해안의 샌프란
시스코에서 시작된 탈사회, 반문화 집단인 ‘히피'(hippie)가 그들이다.
이들은 인간성을 압살하는 물질문명과 국가권력으로부터 개인의 해방
을 추구하면서 징병기피, 반전운동, 생태운동, 인종주의의 청산, 판에
박힌 성적인 구속에서의 해방을 부르짖었다. 히피들은 버클리(UC,
Berkeley) 등 대학 캠퍼스의 과격시위를 통해 물질 문명에 분노를 터
뜨렸고, 특히 군부나 관료체제에 의해 사용된 컴퓨터 기술의 빅 브라
더적 속성을 경멸하였다. 하지만 일부 히피들은 컴퓨터 기술이 오히려
아나키적 해방에 필수적 도구라 보았고, 스스로 그 기술을 자율적으로
활용하게 되는데, 이들이 바로 해커의 큰형님들인 것이다. 그 당시 히
피 출신으로 이루어진 해커 사회에서 정보와 컴퓨터는 곧 권위의 기반
이었다. 해커들이 컴퓨터를 사용하여 해킹 기술들을 개발하고 전수한
행위는 권위에 대한 기술적 도전이자, 테크노 시대의 아나키즘을 실현
하는 궁극적 실천 방식이 되었다. 예컨대, GNU라는 정보공개 운동 단
체의 그 유명한 리차드 스톨먼(R. Stallman) 조차도 해커 출신이자 히
피 세대이며, 90년대 사이버공간에서 활동하고 있는 여러 시민단체들
의 핵심 인물들이 미국의 60년대 히피 세대들이었다는 점은 현재 미국
내 해커들의 정신적 지주가 무엇이었나를 보여주고 있다.
3. 해커의 사이버 정치적 가능성
60년대 MIT대학의 컴퓨터 1세대 해커들이 정초한 ‘해커의 윤리’는 다
음과 같은 내용을 담고 있다. 1.컴퓨터 접근권에 대한 완전한 보장, 2.
정보의 공개성, 3. 권력에 대한 불신과 분권화, 4. 해커의 평등성, 즉
그들의 능력은 사회적 능력에 의해 평가받아서는 안된다. 5. 디지털기
술의 적극적 활용, 즉 컴퓨터는 인류를 보다 나은 방향으로 변화시켜
준다. 지금까지 이 핵심적 윤리 강령이 대체로 수정없이 유지되는 가
운데, 현실의, 그리고 전세계적인 해커 운동에 바탕이 되고 있다. 해커
의 윤리와 강령은 크게 보면 두 부분이다. 정보의 자유와 권력의 해체.
그들을 정치집단화하는 근거는 디지털 정보 독점에 대한 저항과 자유
로운 유통의 정신이다. 물리적으로 굳게 잠겨있는 모든 통제권과 이로
부터 나오는 권력의 일방성과 규제를 거부하고 공개하려는 것은 신선
한 정치프로젝트이다.
그렇다면 과연 해커들은 이 시대의 정치적 전위세력이 될 수 있는가?
하지만 이들이 경제적 지위나 신분에 구속받지 않으면서, 단지 정보의
활용 능력에 의해 이합집산한다는 점에서, 아직까지 대안의 주체가 될
수 있는지는 미지수다. 특히 그들은 자신의 특권들, 즉 남성적, 경제적,
교육적, 제 1세계적, 백인의 특권에 직·간접적인 영향을 받는다. 해커
들의 문제점은, 첫째, 능력있는 여성 해커를 전혀 볼 수 없다는 점이
다. 배타적인 남성들만의 문화를 형성하고 있다. 둘째, 해커들은 일반
적으로 10대들이고 생업에 종사하지 않는 대학생들이다. 특히 해커들
은 부유한 중류층 출신이며, 대학을 졸업할 나이가 되면 은퇴의 길로
접어든다. 나름대로 신분 상승이 가능한 계층이다. 셋째, 해커들 대부
분이 해킹을 게임으로 생각한다. 그리고 그들은 열광적인 SF 소설의
독자들이다. 그들에게는 해킹과 픽션이 사회적 실천의 의미와 별다른
의미없이 혼동된다. 이처럼 그들의 계급적 현실은 새롭게 신분상승을
이루거나, 아니면 디지털 지하세계의 반항아로 남아야 하는 갈림길에
서있다. 해킹을 크게 보아 ‘개인적’ 해킹과 ‘사회적’ 해킹으로 구분한
다면, 앞으로 우리는 후자에 기대를 걸어볼만 하다. 개인적 실리에 의
한 사악한 해킹이 아닌, 해커의 윤리에 기초한 사회적 행위에 그 대안
적 가능성이 엿보이기 때문이다. 사회적 해킹의 가능성은 바로 앞서
지적한 해커들의 문제점을 극복해야만 그 힘을 얻는다. 그들의 배타적
이고 개별적인 무모함을 해커의 정당한 윤리로 전환할 수 있는 기제만
주어진다면, 그들의 미래는 밝다. 낭만적이고 유토피아적이지만, 해커
들은 새로운 정치 행동주의의 힘, 컴퓨터로 무장한 N세대들이다. 경직
되고 권위적인 관료체계와 정보 독점자본에 대한 과감한 도전은 구태
의연하지 않다. 결국 그들이 대중과 호흡하기 위해서는 크게, 우선 국
가의 데이터 수집과 통제 기술의 사용과 점증하는 거대 기업들의 커뮤
니케이션 장악 능력에 대응한 감시자의 역할을 하는 것, 그리고 기술
권위적인 미래 문화에 대한 대항 정보/지식과 문화적 저항을 펼치는
것 등이 필요하다. 물론 그 전제는 ‘이건 건드리지 마’라고 말하는 권
위에 감히 도전하는 것, 자신의 독자적이고 창조적인 힘으로 힘껏 맞
서 싸우는 것이며, 그것이 이들을 새로운 정치적 세력으로 보게 만드
는 근거일 것이다.
■ 글 / 이광석 (텍사스 주립대학 뉴미디어 석사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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