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당신 자신과 싸워야 할 바로 그때
시타 (운동사회 내 가부장성과 권위주의 철폐를 위한 여성활동가모임)
사실, 운동사회 내 가부장성에 대한 이야기는 이제 그리 낯선 것도
아닐 것이다. 조직내 성폭력과 그것을 은폐하는 ‘보호주의’적 메카니즘
들, 학생운동 조직에서부터 당연시되어 온 억압적 성역할분담(성별분
업), 여성비하적/남성중심적인 운동권 놀이문화, ‘여성문제’를 인식하지
못하고 눈에 보이지 않으므로 그것이 없다고 단언하는 세계관과 이론
의 체계들. 그러나 우리는 어릴 때부터 여성과 남성으로 키워져 왔으
므로, 오늘날에도 운동사회 내에서 맹위를 떨치고 있는 가부장제는 마
치 공기처럼 편안하다.
하지만 바로 그 ‘편안함’이 문제였다. 솔직히 말하자면, 이 땅에서
여성으로서 살아가는 – 그리고 여성으로서 운동하는 – 나와 그녀들에
게 삶/운동은 점점 모순 투성이의 고단한 것이 되어가고 있다. 남자
선배를 ‘형’이라 부르면 너무 여자답지 않아서 문제이고 ‘오빠’라 부르
면 너무 여자다워서 문제인 일상적 ‘분위기’ 속에서 오락가락 할 때,
“오늘 화장 이쁘게 했네”라는 ‘동지’들의 한마디에 화를 내야 할지 좋
아해야 할지 무시해야할지 몰라 갈등할 때, 조직을 위해 나에게 일어
난 성폭력에 대해 침묵해야 할 때, 책임 있는 지위를 맡게 되어도 “마
땅한 남자가 없으니 할 수 없잖아”라는 뒷소리를 들어야 할 때, 좋은
마음으로 시작했던 몇 번의 커피 타기가 어느새 내가 해야할 당연한
업무가 되어있는 것을 발견할 때 ……. 그리고 이러한 문제들에 대해
끝없이 설명하고 글을 쓰고 논쟁을 해야할 때! 몹시 피곤하다. 나와
그녀들은 이럴 때마다 도무지 해결할 수 없는 딜레마에 놓이게 되는
것이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해서, 운동사회 내에도 역시 가부장적인 구
조와 문화가 지배적이며 그것은 지독하고 오래된 ‘철칙들’에 의하여 은
폐되어 왔다. 그러나 이제, 여성활동가들은 운동사회 내의 ‘당연함’과
‘편안함’에 대한 오래된 의구심들을 소리쳐 발언하기 시작한다. 도대
체 그것은 ‘누구의’ 당연함이었으며, ‘어떤’ 편안함이었는가?
더 이상 탄원은 없다
자기 자신의 해방이 사회의 해방과 연관되어 있다는 기본적 전제를
지금까지의 운동사회가 과연 체현하고 있는지 의심되기 시작할 때, 나
와 그녀들의 투쟁은 새로운 것이 되어야만 했다. ‘여성문제’를 사소한
문제, 부차적인 문제로 취급해온 가부장적 운동사회는 여성활동가들의
불평과 문제제기 역시 사소한 문제, 부차적인 문제로 여겨 왔다. 자신
의 운동의 공간에서 성차별을 느꼈을 때, 여성활동가들은 딜레마에 빠
진다. 문제를 제기함으로써 자신이 ‘인간(즉 남성)’이 아니라 ‘여성’임을
드러내고 고립과 특별취급을 감당해야 하는가? 아니면 침묵함으로써
현재와 같은 가부장적 운동사회를 유지시키고 문제의식을 느끼는 자기
자신을 부정해야 하는가? 자, 여러분들 각자가 대답해 보라. 이럴 때
여성활동가들은 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러나 이러한 딜레마야말로 다름 아닌 가부장제의 표현이자 양상
이다. 가부장제는 역사적으로 오랫동안 여성을 ‘인간(즉 남성)의 기준’
에서 벗어나는 특별한 존재, 불완전한 존재, 더 감정적이고 더 사소하
며 더 혼돈스러운 존재로 위치시켜 왔다. 이와 같은 구조와 이데올로
기를 당연한 ‘전제’로 삼음으로써 지금과 같은 형태로 성립되어 온 운
동사회의 가부장제 속에서, ‘여성문제도 있다’, ‘여성문제도 중요하다’,
‘여성활동가도 능력이 있다’는 탄원은 거의 아무런 실질적 변화도 가져
오지 않았다. 다양한 주제와 방식을 가지고 서로 다른 운동단체에서
활동해온 여성들에게, 또 하나의, 그러나 너무나 핵심적인 삶의 투쟁이
필요한 시기인 것이다. 더이상 탄원은 없다.
‘이해’?
그렇다면 남성활동가들은? 어쩌면 많은 남성 활동가들 (그리고 몇
몇 여성 활동가들)은 이러한 문제들에 대해 이미 ‘알고’ 있을 것이다.
오늘날 ‘여성문제 따위는 존재하지 않아’라고 말하는 용감무쌍한 남성
활동가는 거의 없다(고 믿는다). 그들은 성폭력에 대해 함께 분노한다,
그들은 군가산제에 함께 반대한다, 그들은 조직내 성별분업에 반대한
다, 그들은 여성활동가들의 분노에 대해 귀기울인다, 그리고 그들은,
만약 그들이 알게 된다면, 현대자동차 식당의 여성노동자 사태에 대하
여 함께 분노할 것이다(라고 믿는다).
쉽게 말해 남성활동가들은 여성문제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고,
또 그것을 ‘이해한다’. 그리고 이러한 ‘이해’는 많은 여성과 남성활동가
들에게 ‘여성문제’에 대한 운동사회의 인식 변화를 (혹은 그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처럼 생각되어지고 있다. 그러나 우리의 바램과는 달리, 이
는 결과적으로 여성활동가들의 문제제기들을 단순히 “잡아먹을” 뿐이
다. 감정적이고 사소한 문제에 집착하며 신경질적인 여성(즉 불완전한
인간)이 되는 것을 감수하고 제기한 문제에 대해 “그래, 나도 이해해”
라는 말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나쁜’ 가부장제의 화신과 ‘불쌍한’ 여성
활동가들, 그리고 그 사이에서 이해자와 중재자의 역할을 자임하는 ‘객
관적인 사람들’ – 이러한 삼각구도를 만듦으로써 스스로를 투쟁의 전
선에서 초월시키고자 하는 시도에 대해 나는 분노한다. 그렇다. 나는
지금 ‘당연한 것’과 싸워야 하는 자들의 절망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운동사회의 가부장성에 대해, 운동사회내에서 존재해왔고 지금도
존재하는 수많은 성차별과 성폭력에 대해, 단지 ‘이해하는 것’ – 그것
도 여성활동가들이 엄청난 희생을 감당하며 그것을 ‘제기했을 때’에야
비로소 – 으로는 전혀 충분하지 않다. 그것으로는 아무 것도 바뀌지
않는다. 우리에겐 ‘너그러운 큰오빠’같은 늠름한 이해자가 필요한 것이
아니다. 여성활동가들의 문제제기를 단지 ‘들어주고’ ‘이해해주는’ 사람
이 많아진다 해도, 그것은 여전히 “인간의 얼굴을 한 가부장제”일 뿐
이다.
그러나 나의 질문은 아직 나오지 않았다. 내가 던지고 싶은 질문은
이것이다. “그렇다면 당신은?” 이 모두를 알고 있고, 이해하고 있고,
그래서 지금의 가부장적 운동사회가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그
렇다면? 당신은 무엇을 해야하고 또 하고 있는가?
지금, 당신 자신과 싸워야 할 바로 그때
운동사회내 가부장성을 척결하는 운동은 그 자체 자기 자신에 대한
비판과 성찰이며, 또한 일상에 대한 투쟁이다. ‘여성문제’에 있어서, 전
선은 자신의 바깥에 – 혹은 ‘동지들’의 바깥에 그어지지 않는다. 여성
문제에 있어서는, 비판의 화살을 외부로 돌림으로써 자기 자신을 그
비판으로부터 면제하는 전통적 논리구조의 성립이 불가능하다. 그것은
우리 자신 내부에 놓여 있는 전선이며, 매일 매순간 자기 자신과 싸워
야 하는 투쟁인 것이다.
운동사회내 여성억압의 존재를 부정하는 사람들과 싸울 때, ‘정말
이것은 부차적인 문제가 아닐까’ 하고 의심하는 자기 자신과도 싸워야
한다. 믿고 신뢰하던 남성동지가 성차별/성폭력을 행했을 때, 그를 변
호하거나 보호하고 싶어하는 자기 자신과도 싸워야 한다. 한 여성활동
가가 고립된 상태에서 문제를 제기했을 때, 침묵함으로써 ‘대세’와 ‘분
위기’에 편승하고 싶어지는 자기 자신과도 싸워야 한다. 단체 사무실에
설겆이거리가 쌓여 있을 때, 슬쩍 외면하고 싶은 자기 자신과도 싸워
야 한다. 끈질게 문제제기를 하기 보다는 ‘너그럽게’ 넘어감으로써 낙
인을 피해가려는 자기 자신과도 싸워야 한다. 그리고 바로 지금이, 당
신 자신과 싸워야 할 바로 그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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