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평화로 본 세상 : 짱돌
중요한 것은 테크놀로지가 아니라 문화적 실천이다!
이원재 / 대안문화·미디어모임 R.exe
세기말의 길목에 외로이 서있는 현대인에게 디지털은 종말론인 동시에
낙관론이었으며, 어둠인 동시에 메시아이기도 했다.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보다 Y2K를 더 무서워하는 세기말 증후군이 그러했고, 천연의 파
라다이스보다 테크노피아를 꿈꾸는 장밋빛 미래가 그러했다. 인류와
기술의 관계가 언제나 그러하듯 디지털은 동전의 양면으로, 안락과 멸
망을 동시에 내재한 양날의 검으로 그 광채를 빛내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세기말, 밀레니엄 등의 유행어들은 한낱 해프닝이 되어 사라져버
렸지만, 이미 현실이 된 2000년에도 디지털이라는 화두는 그 위력을
여전히 과시하고 있다. 그리고 이제 디지털은 정치, 경제의 영역뿐만이
아니라 우리들의 일상에서 그 위력을 더욱더 발휘하고 있다. 즉, 우리
는 디지털의 적자(嫡子)인 휴대폰, 인터넷, 테크노댄스, 게임방 등에 포
위되어 하루하루를 연명하고 있다. 아날로그의 장렬한 전사(戰死)와 함
께, 21세기 문화영토의 새로운 주인인 디지털 장군의 ‘0’과 ‘1’에 의한
통치가 본격화되고 있는 것이다.
‘테크노붐’, 디지털문화의 선봉대
최근 가장 위세를 드높이고 있는 디지털문화는 역시 테크노이다. 매스
미디어에서 길거리표 음반에 이르기까지 갑작스레 우리를 포위해 버린
‘테크노붐’에 대부분의 대중음악은 이미 항복을 선언한 듯 하다. 혹자
는 사람들이 ‘도리도리’ 때문에 대부분 목디스크에 걸리거나, 코고는
소리마저도 테크노풍으로 바뀔 것이라는 예상을 할 정도이다.
테크노의 특징은 일상생활에서 접할 수 있는 온갖 소리들을 신시사이
저 등을 이용해 재배열하고 접목시켜 더욱 다양한 리듬으로 재생해 내
는 것이다. 따라서 테크노 매니아들은 스타를 보고 열광하며 정체성을
상실하는 기존의 대중음악과 달리, 가사에 휩쓸리지 않고 음악의 본질
을 즐길 수 있다는 점에 주목한다. 즉, 반복적인 전자음에 몸을 싣고
흔들면서 젊은이들간의 유대 혹은 공동체를 지향할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초기 테크노의 지향점은 기술에 대한 종속보다는 기술에 대한
적극적인 전유를 상징하고 있다는 점에서 긍정적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우리가 일상적으로 보고 듣는 ‘테크노붐’의 대다수는
주류 문화자본의 전략으로서의 테크노이다. 테크노가 테크노댄스로 일
반화되는 경로를 통해 참여주체의 능동성이라는 측면은 비명횡사 당하
고, 인기가수들의 무늬 바꾸기를 통한 대중음악의 상품화에만 기여하
고 있는 거품현상이 되어버린 것이다. 따라서 최근의 ‘테크노붐’이 보
여주는 것은 실험적인 음악장르를 통한 일탈과 저항보다는, 스테레오
타입의 개인주의 문화, 만성적인 스트레스와 불안감에 시달리는 젊은
이들의 군상(群像)에 가깝다.
디지털문화의 伏兵, ‘게임산업’
한편, ‘스타크래프트 신드롬’으로 대변되는 최근의 디지털 게임산업은
‘테크노붐’과는 또 다른 차원에서 주목할 만하다. 테크노붐이 매스미디
어를 매개로 주류 상업문화에 무임승차했다면, 디지털 게임산업은 놀
이문화라는 틈새시장을 공략하여 새로운 시공간을 창조하고 있기 때문
이다. 즉, 디지털 게임산업은 코 묻은 돈의 위력과 가능성이 얼마나 큰
지를 잘 보여주고 있으며, 또한 아이들의 코 묻은 돈을 자본으로 축적
하여 자본주의적 주체를 착실히 재생산하고 있다.
<스타크래프트>의 경우를 보면 이는 명확하게 드러난다. ‘전략시뮬레
이션 게임’의 일종인 <스타..>는 디지털기술의 발달을 통해 다방구, 술
래잡기 등의 아날로그적 시공간과 공동체적 놀이문화를 완전히 해체한
다. 그리고 그 자리에 정보사회라는 이름으로 총칭되는 시대답게 디지
털기술을 가져다 놓는다. 이제 ‘스타크래프트의 아이들’에게 놀이문화
의 시공간은 운동장, 놀이터, 시냇가에서 무한한 잠재성의 공간인 네트
워크 상으로 이동한다. 여기서는 오직 컴퓨터 그래픽만이 존재하며, 이
는 실재공간의 모든 것을 모사(simulation)할 수 있다. 이제 놀이문화
의 준비물은 오직 최신 사양의 컴퓨터의 주변기기로 충분하다. 그리고
이를 통해 <스타..>는 국적과 거주지에 상관없이 실시간 네트워크게임
을 제공한다.(‘테크노음악’이 컴퓨터를 통한 샘플링만으로 완성된 창작
품을 생산해 내는 것과 동일한 이치이다)
문제는 우리가 디지털기술의 가상성에 빠르게 편입되고 있다는 것이
고, 이 가상성의 내면에는 여전히 자본주의적 코드화가 존재한다는 사
실이다. 여기서 코드화는 게임산업의 기술적 요소보다는 컨텐츠적 요
소를 통해 이루어진다. <스타..>가 디지털기술을 통해 ‘인간-인간’의
놀이경험을 떠나 ‘인간-기계’ 혹은 ‘인간-기계-인간’이라는 새로운 경
험을 제공함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불경스러운 것은, 자본주의적인 컨
텐츠를 통한 주체의 무의식적인 재생산 과정에 있는 것이다. 전략시뮬
레이션다운 폭력성, 치열한 경쟁논리와 승리주의적 관점, 그리고 네트
워크에서까지 형성되는 권력의 철저한 서열화…
기술의 양가성을 인식해야
디지털기술은 무제한적인 복제, 특히 원본의 독창성을 소멸시키고 무
한한 복수성을 생산한다는 측면에서 기존의 근대적인 기술패러다임과
는 양상이 다르다. 원본을 통한 가능성보다는 사이버스페이스와 컴퓨
터그래픽이 보여주는 것처럼 무한한 잠재성을 그 바탕으로 하기 때문
이다. 그런데 디지털기술은 양가(兩價)적인 특성을 내재하고 있다. 먼
저 디지털기술은 모사를 통해 문화의 복수성을 생산한다. 즉 문화자본
이나 엘리트주체들의 전유물인 문화생산이 일반화될 수 있다는 것이
다. 테크노의 경우만 보더라도 컴퓨터와 간단한 전자기기만을 갖추면
누구나 혼자서도 테크노음악의 뮤지션이 될 수 있다. 그리고 이는 대
부분의 디지털문화(웹진, 전자출판 등)에 있어서 제작비용의 부담을 큰
폭으로 감소시키고, 대중적인 생산의 가능성을 배가시킨다. 따라서 소
수의 문화권력은 디지털기술을 통해 복수적으로 해체되고, 주체 개개
인들의 대중적인 전유가 가능하게 된다.
반면에 디지털기술은 문화의 고립화, 즉 개인주의를 증폭시키기도 한
다. 이는 앞에서 보여준 인간과 인간을 매개하는 역할로서의 기술이
아니라, 기술과 자본에 종속된 사회관계가 형성될 때 발생한다. 기술발
달을 통한 인간의 기계화 혹은 인간성과 공동체적 문화의 가치가 퇴색
되는 것이다. 특히 인간중심이 아닌 자본중심의 기술패러다임이 팽배
하는 자본주의는 이러한 디지털기술의 특성을 상품화하여 문화자본의
증식과 주체통제 방식으로 재전유하고 있다. ‘테크노붐’, <스타..>, 허
리우드 블록버스터에 등장하는 디지털기술이 부정적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따라서 ‘테크노붐’이 테크노음악의 실험정신을 잃고 스테레오타
입의 개인주의를 재생산하는 이유와 게임산업이 자본주의의 백성을 재
생산하는 이유는, 디지털기술이 가지고 있는 전자의 긍정성을 상실하
고 후자의 부정적인 방식으로 축적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디지털
기술의 무한한 가능성 자체가 소멸된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기술
에 대한 좀더 대안적이고 적극적인 개입방식을 생산해내는 것이다. 디
지털의 문화적 이중성을 어떠한 주체가 어떠한 방식으로 활용하는가에
주목해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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