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로 본 세상 : 외침
문화정책 수립과 문화인프라 구축이 절실하다
권경우(문화평론가)
새천년에 대한 기대와 설레임은 광화문의 밀레니움축제와 함께 허망하게 막
을 내렸다. 작년 4월 출범한 ‘새천년준비위원회'(위원장: 이어령)의 ‘새천년
기념사업’ 중의 하나로 진행된 것인데, 준비과정과 내용의 측면에서 졸속과
낭비의 정도가 눈에 뻔히 보였다. 새천년을 맞이한다는 명목으로 하루 저녁
에 ‘낭비’한 돈만 해도 자그마치 40억원에 이른다고 하니, 어느 시민의 지적
처럼 정말로 국민의 세금 무서운 줄 모는 것 같다.
밀레니움축제는 새천년준비위원회의 사업 가운데 아주 일부분일 뿐이다. 앞
으로도 매년 1천억원에 가까운 예산을 책정해서 계속 사업을 진행하겠다고
한다. 그 중 압권은 아마도 ‘평화의 열 두 대문’이 될 것이다. 10년에 하나씩
120년 동안 짓겠다는 이 대문은, 그 예산의 상당 부분을 국민들의 성금으로
충당할 것으로 보인다. 성금이 걷히지 않으면 다 짓지 못할 수도 있다는 입
장이다. 적반하장이 딱이다. 제대로 된 공청회 한 번 개최하지 않고 자기네
들 마음대로 사업을 실시하는 주제에, 이제는 사업의 성패에 대한 책임을
국민들에게 떠넘기겠다는 발상이다. 그나마 일회적이고 단기적인 사업이 되
지 않도록 120년이라는 긴 기간을 설정했다고 하는 것은 귀여울 지경이다.
새천년 기념사업은 우리나라 문화의 수준, 문화정책의 부재를 그대로 드러
내는 축소판이다. 이런 와중에 최근 새로운 문화사업이 진행되고 있어 주목
된다. 작년 10월 20일 문화의 날을 맞아 ‘국민의 정부 새 문화정책’이 발표
되면서 ’10대 중점과제’가 제시되었다. 그와 비슷한 맥락에서 문화관광부는
올해를 ‘새로운 예술의 해’로 선포하고 모두 6개 부문으로 나누어 사업을 실
시할 예정이다. 이처럼 문화관광부가 ‘새로운 예술’을 들고 나온 배경에는
앞으로 문화적 환경의 변화에 따른 새로운 기술과 예술의 결합의 필요성을
인식한 데서 비롯된 듯하다. 하지만 이것 역시 졸속적인 인상이 짙다. 새해
가 시작된 지 1개월이 지났건만 사업안이 확정된 곳은 문학 분야밖에 없다
는 사실에서 그러한 추측이 가능하다.
‘새로운 예술의 해 추진위원회'(위원장:강석희, 서울대 음대 작곡과 교수)에
서는 문학, 연극, 무용, 음악, 미술, 영상 등 모두 6개 분야에 걸친 ‘2000년
새로운 예술의 해’ 사업계획을 작년 12월 21일 최종적으로 확정 발표하였다.
이 사업계획안을 살펴보면, “2000년대를 새로 시작하면서 표현수단이나 양
식이 새로운 것, 테마나 소재가 새로운 것, 전통적 예술의 영역을 현대적으
로 확장한 것 등을 전반적으로 조망해 보고 비전을 제시함으로써 21세기 문
화의 시대에 한국이 예술이 새로운 흐름을 주도해 나갈 수 있는 계기를 마
련하고자” 하는 목표를 제시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는 것은 ‘새로운 예술’의 개념 규정
부분이다. 우선 사업계획안에서는 ‘새로운 예술’을 “기존 예술 장르 내에서
실험적이고 독창적인 표현 행위를 의미하는 동시에 장르간의 통합과 장르내
의 분화 등에 의한 새로운 형태의 예술, 첨단 과학 또는 산업과의 만남을
통해 새롭게 창조되는 예술, 그리고 일반 시민들의 생활 속의 예술, 환경 친
화적 예술 등을 포함하는 열린 개념”으로 말하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열거
는 ‘열린’ 개념으로 모든 것을 포괄하려는 것으로만 보인다. 다시 말해 기존
의 다양한 실험예술, 아방가르드적 예술들과는 어떤 관계를 가지며 어떻게
구별되는가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으며, 무조건 ‘새로운 것’이면 괜찮다는
것인지 그 기준과 변별점을 찾기가 쉽지 않다. 따라서 아직 부문별 사업안
은 확정되지 않은 만큼 각 예술 장르뿐만 아니라 예술 환경의 변화에 대한
더욱 면밀한 고찰을 통해 예산 낭비나 졸속적인 프로그램이 나오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다.
또 하나는 ‘추진방침’ 중에 “2000년도 주요 문화예술행사(광주 비엔날레, 미
디어시티 서울, ASEM 문화예술행사 등)와의 변별성 있는 사업 구상”이라
는 구절이 있다. 이러한 생각은 중복으로 인한 예산 낭비를 피할 수는 있을
지 모르지만 오히려 또다른 차원의 비효율성과 업적쌓기 행사가 될 수도 있
다.
기본적으로 실험적이고 다양한 새로운 예술에 대한 정부의 관심과 지원이
전폭적으로 시도된다는 점에서는 긍정적이다. 하지만 우리의 문학예술의 현
실이 이렇게 따로 ‘새로운 예술의 해’를 선포하고 중점지원할 만큼 문화적
인프라의 구축이 되어 있는가 반문하지 않을 수 없다. 장기적이고 효율적인
문화정책의 수립과 문화민주주의에 기반한 문화인프라의 구축이 우선 과제
이다. 아울러 우리에게는 이러한 문화예술의 졸속과 낭비를 막으려는 노력
이 요구된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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