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7년 2월 23∼27일, 5일간

레온 트로츠키, 『러시아혁명의 역사』 7장 중 발췌

2월 23일은 세계 여성의 날이었다. 사회민주주의 진영은 회의나 연설, 리플렛과 같은 일반적

인 방식으로 이 날을 기념하고자 하였다. 이 날이 혁명의 첫째 날이 될지도 모른다고는 누구

도 생각하지 못했다. 어느 한 조직도 이 날 파업을 선포하지 않았다. 설상가상으로, 볼셰비키

조직조차, 심지어 가장 전투적인 비보르그 자치시 위원회에서조차도 모든 노동자들은 파업에

반대하고 있었다. 비보르그 노동자 지구의 지도자 중 한 명인 카유로프에 따르면, 대중의 분

위기는 매우 긴장되어 있었다. 파업이라도 일어나면 곧바로 공공연한 전투로 이어질 태세였

다. 그러나 전투적 행동을 위한 시간이 무르익지 않았다-당은 아직 충분히 강하지 않았고 노

동자들은 병사들과 접촉이 거의 없었다-는 판단 속에서, 노동자위원회는 파업을 조직하는 것

이 아니라 미래의 막연한 시기에 벌일 혁명적 행동을 준비하기로 결정하였다. 2월 23일 전야

에 위원회가 따른 경로는 바로 이러한 것이었고 모든 사람이 이에 동의하는 듯이 보였다. 그

러나 다음날 아침, 이 모든 지령에도 불구하고 몇몇 공장의 여성 섬유노동자들이 파업에 돌

입하였고 금속노동자들에게 대표단을 보내 지원을 호소하였다. 카유로프는 다음과 같이 기록

하고 있다. “볼셰비키는 다소 주저하면서 이에 동의하였다. 그 뒤를 노동자들이 따랐고 멘셰

비키와 사회혁명당원들이 동참하였다. 그러나 일단 대중파업이 벌어지면 모든 사람을 거리로

소집하고 이끌어야만 한다.” 카유로프의 결정은 이러한 것이었고 비보르그 위원회는 이에 동

의해야만 했다. “거리로 나간다는 생각은 노동자들 사이에서 오랫 동안 무르익어온 것이었

다. 단지 당시 누가 이를 이끌 것인가를 아무도 상상할 수 없었을 뿐이었다.” 당시 사건의

궤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한 참여자의 이러한 증언을 가슴에 새겨두는 것이 중요하다.

시위가 벌어질 경우 노동자들에 대항하여 병사들이 거리로 동원되는 게 당연시되고 있었다.

이 결과는 결국 무엇이 될까? 당시는 전시였다. 당국은 농담할 분위기가 아니었던 것이다.

다른 한편, 전시의 “예비”군은 정규군 가운데 나이먹은 병사와 같은 존재가 아니다. 예비군

이 정말 그렇게 무시무시한 존재인가? 혁명 진영에서는 이러한 문제를 계속 논의했지만 다

소 추상적이었다. 누구도, 단연컨대 어느 누구도 -우리는 모든 데이터에 근거하여 이를 단언

할 수 있다- 2월 28일이 전제정에 대한 결정적 타격의 시작을 알리는 날이 될 것이라고 생각

하지 못했다. 막연한, 그러나 어떻게 보더라도 제한된 전망에 근거한 시위에 관해서만 이야

기가 있었을 뿐이었다.

따라서 2월 혁명이 자기 자신이 속한 혁명적 조직들의 저항을 극복하고 아래로부터 시작되

었다는 것, 가장 억압받고 짓밟힌 프롤레타리아 부문-여성 섬유노동자들. 그 가운데는 필시

병사들의 부인이 많았다-에 의해 자발적으로 시작되었다는 것이 당시의 현실이었다. 빵을 배

급받으려고 길게 늘어선 줄이 마지막 자극을 제공하였다. 약 9만 명의 남녀 노동자들이 이

날 파업중이었다. 투쟁 분위기는 시위, 집회, 경찰과의 대면 등에서 저절로 표출되었다. 운동

은 대규모 산업 시설이 밀집된 비보르그 지구에서 시작되었지만 여기서부터 페테르스부르그

쪽으로 넘어갔다. 비밀경찰의 증언에 의하면 다른 곳에서는 파업이나 시위가 하나도 없었다.

이 날 군대 파견대가 경찰을 돕기 위해 군대 파견대가 소집되었지만 -분명 많은 수는 아니었

다- 이들과의 조우는 없었다. 여성 군중들-그들 모두가 노동자는 아니었다-은 시의회에 집결

하여 빵을 요구하였다. 이는 숫염소에게서 젖을 요구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도시 곳곳에서

붉은 깃발이 등장하였고 여기 쓰인 구호들은 노동자들이 독재나 전쟁이 아니라 빵을 원한다

는 것을 보여주고 있었다. 여성의 날은 열광과 함께, 아무 희생자도 없이 성공적으로 끝났다.

그러나 날이 저물 때까지도 이 날이 자신 안에 감추고 있던 것을 짐작한 사람은 아무도 없

었다.

다음날 운동은 힘이 감소하기는커녕 두 배로 커졌다. 페트로그라드의 산업 노동자 절반 가량

이 2월 24일 파업에 돌입하였다. 노동자들은 아침에 공장에 갔다. 그러나 일하러 가는 대신

그들은 집회를 열었고 곧 시내중심부를 향해 행진을 시작했다. 새로운 지구와 집단들이 속속

운동에 참여하였다. “빵을 달라!”라는 슬로건은 더 큰 구호들에 의해 밀려나거나 파묻혀버렸

다. “독재 타도!” “전쟁 타도!” 네프스키 대로에서는 계속해서 시위가 벌어졌다 – 처음에는

혁명가요를 부르는 노동자 군중들이 빽빽하게 들어찼고 시간이 지나자 여러 계층의 시민들

이 푸른 모자를 쓴 학생들과 뒤섞였다. “산책하는 군중들은 우리에게 정서적 공감을 느끼고

있었고 야전병원에 있던 병사들은 손에 잡히는 대로 흔들면서 우리를 환영해주었다.” 병든

병사들에서부터 시위 노동자들에 이르기까지 공감을 표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분명

하게 알고 있던 사람은 얼마나 될까? 그러나 코사크 기병대는 비록 잔혹하지는 않았지만 군

중들에 대한 공격을 계속하였다. 기병대가 모는 말들은 거품을 내뿜었다. 시위 군중들은 기

병대가 가로지를 수 있도록 흩어졌다가 다시 모이곤 했다. 군중들은 아무런 두려움도 없었

다. “코사크 기병대가 발포하지 않기로 약속했다”는 말이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다. 분명 몇

몇 노동자들은 코사크 병사들과 개인적으로 이야기를 나누기도 하였다. 하지만 얼마 안가서

반쯤 취한 용기병들이 욕을 내뱉으며 등장했다. 이들은 군중 속으로 뛰어들어 창으로 군중들

의 머리를 후려치기 시작했다. 시위대는 모든 힘을 모아 꼿꼿이 서있었다. “저들은 발포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이와 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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