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 체첸 전쟁

[시류에 대항하여(Against the Current)] 3·4월호 보리스 카갈리츠키

동유럽에는 “전쟁하러 가면서 허풍떨지 마라”라는 속담이 있다. 블라디미르 푸틴의 장군들은 이 속담을 한번도 들어보지 못한 게 틀림없다.

체첸은 결국 그로즈니를 포기할 게 분명하다. 한번의 전투도 없이 그로즈니를 양도할 수는 없는 일이지만 어떤 대가를 치르고서라도 그 땅을 지키고 있을 수는 없었다. 체첸인들의 일차 목적은 러시아 군대에 지속적 타격을 가하면서 이들의 세력권을 상대적으로 제한하고 고정시키는 것이다.

러시아의 국영 언론은 매일매일 수천 명의 체첸 전사들의 죽음을 자랑하는 보도를 내보내고 있다. 보다 차분한 보도들은 자기편 군대의 공습과 조직적 혼란에 관해 언급하고 있다.

2차 체첸전쟁은 “우리는 1994년의 오류를 반복하지 않을 것”이라고 되풀이해서 떠들어대는 집중적인 언론 보도와 함께 시작되었다. 그라체프 장군의 전략은 가능한 짧은 시간 안에 그로즈니로 단일 공세를 취하는 것이었다. 그는 빨치산 저항이 조직되기 전에 체첸 시민군과 이들의 정치조직을 분쇄하고자 하였다.

군사적으로 볼 때 1994년의 계획은 타당한 것이었지만 그 실행은 부적절했다. 그로즈니에 대한 강습은 실패했고 기나긴 포위공격이 되어버렸다. 이로 인해 당시 체첸 대통령이었던 두다예프 장군(이후에 러시아의 공격으로 살해되었다 – 편집자주)은 체첸

남부 산악지대에서 장기 항전을 할 수 있는 근거지를 준비할 수 있었다. 러시아 군대는 장기전으로 휩쓸려 들어갔고 조달가능한 자원으로는 결코 승리할 수 없었다.

전쟁 이후 장성들은 패배의 원인이 정부의 우유부단과 대중의 반발이라고 확신하게 되었다. 이들은 전쟁을 재개하기 전에 정치 엘리트들의 전폭적인 지지와 비판자들의 침묵이 필요하다고 결론지었다.

2차 체첸전쟁은 러시아식으로 해석된 나토의 코소보 전쟁의 교훈들을 충분히 활용하였다. 국민들은 홍수 같은 선전에 압도되었다. 전쟁 반대자들은 매스미디어에 접근을 거부당하거나 침묵을 강요받았다.

이 모든 상황에도 불구하고 여론조사를 보면 전쟁에 대한 러시아 국민들의 지지도가 전혀 압도적이지 않다는 점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혐오적인 옐친 정권과 싸우는 용감한 체첸 전사의 이미지 또한 희미해졌고 무관심과 냉소가 널리 퍼져있다. 1996년 체

첸이 실질적인 독립을 이룩한 이래 탁월한 야전사령관들은 범죄집단의 보스로 변해버렸고 러시아 엘리트의 최악의 분파들과 긴밀히 연결되었다.

체첸 대통령 아슬란 마스카도프는 자신의 핸드폰 요금을 모스크바의 우두머리 보리스 베레조프스키가 내주는 야전사령관들에 관해 언론인들에게 이야기해주었다. 러시아의 거대 범죄자들에게 있어 러시아의 명목적 국토이지만 국가의 통제 외부에 있는 영토의 존재는 거대한 기회를 창출시켜 주었다.

체첸공화국은 밀매, 돈세탁, 마약거래, 납치 등의 사업을 위한 은신처를 제공해왔다. 마스카도프의 친구들조차 그가 이들 세력에 대해 무력하다는 점을 알고 있다.

90년대 내내 체첸 악당들의 뻔뻔스러움과 폭발물에 대한 매혹은 러시아의 정치 민담에서 한 자리를 차지해왔다. 지난 가을 초에 있었던 일련의 아파트 폭발 사고로 300여명의 러시아인이 목숨을 잃었을 당시, 자동적으로 체첸인들에게 비난의 화살이 돌려졌다. 어떤 증거도 없었음에도 탱크들이 체첸 국경을 넘어 진격하기 시작했다.

전쟁의 이면

그러나 침공의 목표가 범죄를 가로막고 테러를 근절하는 것이었다는 생각은 순진할 따름이다. 러시아 엘리트들에게 있어 체첸이 범죄의 소굴이라는 사실은 이 땅을 공격하는 충분조건이 아니다. 체첸이 명목적으로는 러시아 영토이지만 모스크바의 통제를

벗어나 있다는 사실이 그 이유이다.

체첸의 독립은 크레믈린 당국의 취약성을 광고하는 것이었다. 여름 동안 옐친의 행운이 쇠약해짐에 따라 체첸에서의 무력 과시가 가져다주는 매력이 커지게 되었다.

여름에 접어들어 옐친의 정치적 지지자들, 즉 감옥 바깥에서 “패밀리”(옐친의 인척을 비롯하여 그를 둘러싸고 있는 부패한 진영)를 유지하는 사람들이 선출될 수 없음은 분명해졌다.

정권 주위로 국가를 “공고화”하기 위해 검열을 도입하게끔 촉진시킬 또다른 주문가공된 위기의 필요성이 커지고 있었다. “체첸제” 폭탄이 러시아의 아파트를 파괴하기 시작하자 이는 정권의 정치적 필요와 거의 완벽하게 들어맞았다.

세르비아측이 코소보에서 벌인 잔학행위에 대한 분노를 떠들어대던 서방 정부들에게 있어 체첸에서의 러시아의 행동은 항상 미묘한 문제였다. 사상자가 얼마나 되든간에 서방의 우호국들이 또다른 체첸전쟁에 대해 자신을 계속해서 지지할 것이라는 러시아 당국의 결론은 정확함이 입증된 것으로 보인다.

어쨌든 서방 지도자들은 1994∼96년의 대학살 동안 분노의 표현을 분명히 삼갔다. 러시아와 서방에게 있어서 문제는 패주를 반복할 것임이 거의 확실하다는 것이다.

1994년에 그라체프의 전략은 교과서적으로 정확했지만 1999년에 채택한 전략은 그에 미치지 못한다.

군대는 그로즈니로 서서히 이동해갔고 대규모 전투에 말려들지 않았다.

포격과 공습으로 진지에서 “밀려난” 체첸 전사들은 퇴각했을 뿐이다. 이로 인해 군대는 승리와 진군을 선포할 수 있었지만 체첸의 부대들은 질서정연하게 후퇴한 것에 불과하다.

체첸인들은 1, 2차 세계대전의 규칙처럼 전선을 유지하고자 중대한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다. 이들은 러시아군의 진격 속도를 저하시키고 이로써 러시아의 전쟁비용을 증가시킬 목적으로 빨치산 투쟁을 수행하고 있을 따름이다. 사람들은 이를 용인하는 러시아측의 전략이 치밀한 계획에서 나온 게 아니라 적에 대한 두려움으로 인한 것이라고 의심하고 있다.

전도된 1812년

전쟁을 수행하는 러시아 장성들은 게릴라전에 관한 마오와 게바라의 저작들을 읽어보지 않았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군사학교에서 이들은 틀림없이 러시아군이 나폴레옹을 격퇴한 1812년 전쟁을 공부했을 것이다.

프랑스가 느릿느릿 러시아로 이동하는 동안 바르클레 드 톨리와 쿠투조프 휘하의 상대적으로 약한 러시아군은 결정적인 전투를 회피하면서 천천히 후퇴하였다. 프랑스군이 모스크바를 점령하고 승리를 선포한 후, 이들이 점령하고 있던 영토 전역에서 빨치산 전투가 개시되었다. 프랑스 황제는 불타버려 아무도 살 수 없는 모스크바를 포기하고 탈주하였다.

현재 체첸의 상황과 핵심적으로 다른 점은 나폴레옹이 러시아군을 전면전으로 이끌어내려고 노력할 만큼 상황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오늘날의 러시아 장성들은 소규모 접전 이상의 위험을 무릅쓰기를 두려워하고 있다.

그로즈니 점령과 같은 성공조차도 전쟁의 전반적인 추이에는 영향을 미치지 않을 것이다. 연방군의 지체로 인해 체첸측으로서는 1994년에 비해 그로즈니의 방어가 가지는 중요성이 덜하게 되었다.

아마도 러시아군은 체첸인들이 산악지대에서 겨울을 나기가 힘들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듯하다. 비록 두다예프가 이끄는 형편없이 준비도 안되어 있는 빨치산 부대가 거기서 두 해 겨울 동안 살아남기는 했지만 말이다. 러시아 군대가 체첸의 겨울을 이겨

낼 수 있을지에 관해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현재 군수 공급 체계는 낡아빠진 상태이며 94년보다도 훨씬 악화되었다. 1812년의 모스크바에서 정확히 유추해보면 불타버린 그로즈니는 대규모 군대의 혹한기 주둔지로서는 완전히 부적합하다.

지금까지 러시아 군대는 인구밀집지를 피해왔지만 허허벌판에서 겨울을 날 수는 없으며 그렇다고 퇴각할 수도 없다. 체첸 전사들은 이들이 퇴각하자마자 돌아올 것이다. 결과적으로, 러시아 군대는 무기한 이곳에 남아있어야 하며 모든 마을을 통제해야만 한다. 그러나 이들은 군사적 힘도 없을 뿐만 아니라 재정적 자원도 부족하다.

체첸과 러시아의 좌파

3년간의 독립은 체첸 국민들에게 쓰디쓴 좌절을 남겨주었다. 두다예프는 이들에게 번영과 민주주의, 세속주의와 사회주의를 약속하였다. 그러나 1999년까지 체첸인들이 받은 것은 빈곤과 혼란, 종교적 극단주의와 부패한 군지도자들의 독재뿐이었다.

하지만 이와 비교하여 러시아의 통치가 온화하게 보일 것이라는 크레믈린의 가정은 오류에 불과하다.

체첸인들은 1994년 러시아의 침공의 악몽과 이에 뒤따른 유린를 상기하고 있다.

한편, 러시아 군대의 인종주의와 부패는 그들이 난민들에게 가져온 혼란과 더불어 (그렇지 않았다면 동정적으로 변할 수도 있었던) 많은 체첸인들을 소원하게 만들 것이다.

시장(市場)에 대한 로켓공격과 난민 대열에의 폭격, 그리고 기타 “기술적 오류”들은 체첸 전사들을 또다시 영웅으로 만들게 될 것이다. 전임자들이 야기한 대혼란의 책임으로부터 자유로운 새로운 체첸 야전 사령관들이 속속 등장하게 될 경우 이는 더욱

그러할 것이다.

모스크바는 체첸을 재건하거나 일자리를 창출할 수 없다. 단지 파괴를 계속할 수 있을 뿐이다. 실제로, 체첸의 젊은이들은 러시아 군복을 입고 타겟에 총을 갈기는 직업을 얻게 될 것이다.

봄쯤이면 2차 체첸전쟁의 실패가 명백해질 것이다. “보이지 않는” 빨치산들에 대한, 악전고투식의 파멸을 초래하는 값비싼 전쟁에서부터, 1812년 프랑스인들이 겪은 것과 같은 군대의 전면 패주와 지휘구조의 해체에 이르기까지 가능한 시나리오는 수없

이 많다.

러시아에서 혁명과 개혁은 종종 패전과 함께 시작되었으며, 현재의 체첸전쟁은 이러한 패턴을 반복할지도 모른다. 전쟁에 대한 러시아 정치인들의 만장일치 지지는 군사적 패배 이후에 심각한 정치 위기가 뒤따르리라는 것을 의미한다.

체첸의 승리는 수많은 이들을 급진화하고 저항을 고무시키는 등 사회적 의식의 중심축으로 기능할 가능성이 충분하다. 또는, 수많은 굴욕을 유순하게 견뎌온 러시아 사회가 이 또한 다른 것과 마찬가지로 감내할 수도 있다.

어떤 경우든간에, 러시아의 장성들은 그들을 위해 놓여진 함정 속으로 계속해서 교만하게 행진하고 있다. 체첸분쟁의 해결은 유혈과 발작을 수반할 것이며, 정치적 반대파들에 대한 광범위한 억압의 호소를 동반하면서 “테러리즘”에 맞선 십자군을 다시 강

화시킬 것이다.

좌파의 경우 절대로 사태를 얼버무려서는 안된다. 체첸인들은 무조건적인 독립권을 갖고 있다. 러시아의 좌파는 이중적인 도전에 직면해있다. 정부에 대한 반전 투쟁을 개시하기 전에조차, 우리는 국수주의적 방향상실에 저항하기 위해 우리 자신의 군대를

보호하기 위한 활발한 정치투쟁에 착수해야만 한다.

이러한 과제는 오늘날의 체첸 지도자들에 관해 단 한 가지 진보적 측면이 있다는 사실에 의해 용이해지지는 않을 것이다. 이들이 해방의 동학을 지닌 투쟁을 이끌고 있다는 덧없는 이유들, 또는 이들이 그들 자신보다도 국제노동계급에게 훨씬 더 위험한 사

람들에 맞서 싸우고 있다는 모순적 이유들 때문에 말이다.

* 보리스 카갈리츠키는 러시아의 독립적 사회주의자이자 개혁의 실패에 관한 수권의 저서를 갖고 있다. 이 글은 원래 영국 잡지 [레드페퍼(Red Pepper)] 1월호에 실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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