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사람들이 모여 물건을 팔고 사는 일, 또는 그러한 곳.’

다름 아닌 ‘장(場)’이라는 단어의 사전풀이다. 사실 굳이 길게 설명할 필요도 없다. ‘사람’이라는 키워드 하나만으로도 충분할 테니까.

사람들이 모이면서 생겨나고, 그로 인해 더 많은 사람들이 모이게 하는 곳. 물건만 오가는 것이 아니라 사람사는 얘기, 소식, 정보가 오가는 곳 . 그곳이 다름 아닌 장이다.

매주 일요일 오후, 언젠가부터 대학로에 조금은 색다른 장이 들어선다.

혜화동 동성고등학교 담을 따라 10m남짓 늘어선 좌판들과 왁자하게 모여 든 사람들. 잡다한 물건들이나 음식들도 낯설고, 사고 팔며 나누는 대화 도 귀에 설다. 그러고보니 무엇보다 사람들의 생김새가 한국사람과는 사 뭇 다르다.

생소함을 느끼는 것도 당연. 이들 대부분이 한국에 거주하는 필리핀노 동자들이기 때문. 2년여 전부터 혜화동 성당에 필리핀인들을 위한 미사가 마련되면서 하나 둘 모이기 시작한 것이 이제는 미사에 참여하는 인원만 도 5백명에서 많게는 1천명에 이른다고 한다. 멀리 대구나 부산에서도 올 라오지만 대개는 서울 광주 마석 수원 성남 의정부 등 수도권지역에서 일 하는 사람들이다.

이들에게 일요일의 나들이는 가톨릭 신자로서 미사에 참여하는 것 이상 의 의미를 가진다. 모국 사람들을 만나 그들의 언어로 이야기를 나누며 타국에서의 외로움과 향수를 달랜다. 그야말로 ‘일요일의 혜화동’은 필리 핀사람들의 모임터인 셈. 이렇듯 필리핀사람들이 모여드는 곳에 필리핀장 터가 들어선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일 것이다.

장이라기보다는 노점이라고 해야 어울릴 정도로 아담한 좌판들. 하지만 없는 게 없다. 화장품이나 샴푸에서부터 망고 코코넛 등 과일과 야채를 비롯해 각종 조미료와 향료, 소스, 생선통조림까지. 심지어는 필리핀산 도미도 볼 수 있다. 그런가하면 필리핀에서 잘 나가는(?) TV 드라마나 영 화도 비디오테이프로 만날 수 있다. 물론 먹거리는 기본. 현장에서 직접 조리해서 파는 따끈따끈한 음식들. 보는 것만으로도 군침이 돈다.

마침 다정하게 앉아 점심을 먹고 있는 부부를 만났다. 로이 헤럴드(남 편)와 마리아(아내). 그들은 가수다. 93년 한국에 온 그들은 현재 광명에 있는 나이트클럽과 호텔 등에서 공연을 하고 있다. 돈 많이 벌었냐는 질 문에 IMF 전에는 많이 벌었는데 지금은 별로란다. “그래도 일요일엔 매주 여기에 와서 음식도 사먹고 물건도 사고 그래요. 친구들도 만나구요. 그 리고 돌아가서는 오늘밤에도 일을 해야 하지만요.”

손님들이 모두 필리핀인들인 것만은 아니다. 종종 필리핀 이외의 나라 에서 온 외국인노동자들도 만날 수 있고 지나가다 신기해서 둘러보는 한 국인들도 볼 수 있다. 필자가 찾아간 날에는 마천동에서 일하고 있다는 페루 청년들과 방글라데시인들을 만날 수 있었다. 그런가하면 바닥에 쭈 그리고 앉아 필리핀 음식을 경험(?)해보고 있는 한국인 노부부의 모습도 보였다.

한편 란디(21)라는 청년은 좌판 옆에 한참을 서 있으면서도 바지 호주 머니에 꽂아넣은 손을 좀처럼 꺼내지 않는다. 여기서 물건을 자주 사지 않느냐고 물었더니 너무 비싸서 절대로 안 산단다. 실제로 이곳에서 파는 물건의 가격은 필리핀 현지가의 두 세배 정도로 비싸다고 한다. 대부분 필리핀에서 직접 들여온 물건들이기 때문이다.

비교적 넓은 공간을 차지하고 물건을 파는 미나(33)와 나니(31) 남매.

이들은 보통 2주 동안 한국에 머무르면서 물건을 팔고 다시 필리핀에 돌 아가 물건을 사들여오는 식으로 필리핀과 한국을 오가며 장사를 한다. 수 입을 물어보니 많게는 하루에 1백만∼2백만원의 매상을 올리기도 한다고 귀띔. “그래도 순수입은 10% 정도밖에 안돼요.”

물건을 파는 사람들 중에는 주중에 공장등에서 일을 하며 일요일에만 나와 장사를 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장사만을 전문적으로 하는 이들이 대 부분.

그중에는 한국인 남편과 사는 필리핀 여성도 두어 명 있다.

서진수(38)씨의 아내 빙코 안나벨(37)도 필리핀 여성으로 일요일마다 혜화동장터에 나와 물건을 판다. IMF로 인해 일자리를 잃은 서진수씨 역 시 아내를 돕기 위해 나온다. 한국말이 서툰 장터 사람들에게 서씨와 같 은 한국인의 역할은 각별하다. 특히 최근에는 종로구청의 단속이 심해져 서씨가 나서야 할 일이 더욱 많았졌다.

“4주 동안 단속을 해서 아예 장을 못 열었어요. 오늘 한 달만에 다시 연 거에요. 저희도 가게 하나 얻어서 장사하고 싶지만 그게 어디 쉽나요.

최소한 5천만원은 있어야 구멍가게라도 얻을 수 있더라구요. 그게 안되 니까 여기 나와서 장사하는 거 아니겠습니까?”

사실 혜화동 로터리에서 이화동 사거리까지의 구간은 노점상 절대금지 구역. 종로구청에서는 3월부터 특별단속반을 꾸려 집중 단속을 하고 있다 . 종로구청 건설관리과 가로정비계의 담당자는 “필리핀노동자 장터와 관 련해 민원도 많이 들어오고 동대문경찰서의 단속요청도 있었을 뿐만 아니 라 노점상절대금지구역에서 필리핀사람들에게만 예외를 적용할 수는 없다 “고 입장을 밝혔다.

앞으로 단속이 계속될 경우 혜화동의 ‘작은 필리핀’은 아예 사라질 지 도 모른다. 일주일에 한번 사치라면 사치일 수 있는 쇼핑을 즐기며 외로 운 마음을 달래던 필리핀노동자들에게 그것은 단순히 장터 하나가 없어진 것 이상의 의미를 지닐 것이다. 한국인들에게도 마찬가지. 제법 재미가 쏠쏠한 장구경의 기회를 잃어버리게 됨은 물론이고, 이 땅에 함께 살고 있는 이웃들의 존재마저 망각하게 되지는 않을까.

분명 우리가 사는 이곳엔 적지 않은 필리핀사람들이 함께 살고 있다.

그리고 사람이 사는 곳엔 으레 장이 생기게 마련이다.

이 기사가 마음에 들었다면, 좋아요를 눌러주세요!

댓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