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에라리온과 신노동당의 군사주의

제트넷(ZNet) 리차드 고트

신노동당의 영국은 짐바브웨에 이어 시에라리온에서도 자신의 과거 식민주의를 되살리고 싶은 참을 수 없는 충동을 갖고 있다. 아마도 로빈 쿡은 곧 서아프리카에서의 군사적 모험을 보상받기 위해 불운한 주민들에게 주거세를 부과하려고 할 것이다. 1898년에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이 특별한 세금은 식민지에 인두세라는 형태로 부과되어 19세기 아프리카에서 벌어졌던 대반란 중의 하나에 빌미를 제공했다. 영국은 두 번에 걸쳐 원정대를 이 식민지에 파견해야 했으며, 서인도제도 출신의 군인들이 보내졌다. 엄청난 탄압의 파고가 주민들에게 몰아닥친 후 거의 백 명에 이르는 반란 지도자들이 교수형을 당했다.

영국은 시에라리온에서 벌어진 혼란에 거의 전적인 책임이 있다. 로디지아(짐바브웨)의 혼란에도 마찬가지이다. 이 두 나라 모두 영국에 의해 구상되고 세워진 나라들이기 때문에, 영국이 이들 나라의 곤경을 해결하기에 마땅한 나라인지는 상당히 의심스럽다. 근세사의 무게는 너무 압도적이어서, 영국 정부가 기억을 되살리기에는 충분할 정도이다. 영국은 거의 한 세기 전에 시에라리온과 로디지아를 세웠다. 로디지아에서 응데벨레족과 쇼나족의 반란을 진압한 1896년 영국은 프리타운 내륙의 광대한 영토에 “보호령”을 설치했다. 새로운 시에라리온 “보호령”의 원주민, 템네족과 멘데족은 즉각적으로 식민 통치에 저항하는 봉기를 일으키고, 정착민들과 선교사들, 경찰과 “크리올인(북중미 출신의 혼혈인)”들을 무차별적으로 학살했다. 프리타운의 “크리올인”들은 백여 년 전인 1787년 이 지역에 정착했다. 당시 영국은 이 지역을 “백인정착 식민지”로 설정했다. 하지만 정착자들의 대부분은 흑인이었다. 노예출신의 흑인들이 (백인 매춘부들과 함께) 보내졌다. 당시의 소위 급진적 지도자들은 런던의 빈곤하고 열등한 무리들을 자신들의 “출신지”로 돌려보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일단의 박애주의자들(지금의 신노동당이나 다름없다) 역시 더 많은 흑인들이 런던에서 아프리카로 “돌려보내”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서아프리카의 토착민들의 생각은 달랐다. 일년이 되기 전에 그들은 외지 흑인들의 정착식민지 설치에 반대하는 반란을 일으키고 그것을 무너뜨렸다. 영국의 증원군이 곧 도착했고, 이전의 “대영제국 충성파” 흑인들은 프리타운 밖으로 내보내졌다. 이들은 미국독립전쟁 때 영국편에서 싸웠지만, 이후 정착했던 캐나다에서는 추위와 인종주의를 견뎌내지 못했다. 이들 북미 출신 흑인들은 몇 년 후 자메이카 출신의 머룬인(노예의 후손)들과 합류하게 된다. 머룬인들은 영국과 쿠바 출신 용병들과의 싸움이 끝난 후 자메이카에서 추방된 사람들이다. 이 새로운 세대의 흑인 정착민들은 대부분 기독교도로서 토착민들의 공격에 맞선 끝없는 싸움에 휘말리게 된다. 토착민들은 대부분 이슬람교도였다. 19세기 전반에 걸쳐 원주민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영국의 군함들이 강 상류로 보내졌다.

영국의 주거세는 1898년 시에라리온 내륙에서 두 번의 반란을 촉발시켰다. 한번은 바이 부레가 이끄는 템네족의 반란이었고, 또 하나는 모모 자가 이끄는 멘데족의 반란이었다. 영국 식민당국의 기본적 권리로서, 군 총독이었던 프레드릭 카쓔 대령은 새 “보호령”의 주민들은 주택 크기에 따른 세금을 납부해야 한다고 고시했다. 방 네 개 짜리 주택의 소유주는 일 년에 10실링을, 그 이하 크기 주택 소유주는 5실링을 납부해야 한다는 것이다. 카쓔 대령은 행정가가 아니라 인도와 남아프리카에서 수년을 보낸 직업 군인이었다. 1898년 1월 1일 처음 부과된 세금은 즉각적이고 거센 반대를 불러일으켰다. 처음 이 반대를 이끈 것은 60세의 바이 부레였다. 그를 체포하기 위한 작전이 2월에서 11월까지 전개되었으며, 영국 사령관 마샬 대령은 이것을 “서아프리카에서 가장 집요했던 싸움의 일부”로 적고 있다. “그 어떤 저항도 이만큼 지속적으로 이 지역에서 벌어졌던 적은 없었다.”

한 시에라리온 역사가는 이렇게 말한다. “바이 부레는 야자수 통나무로 짠 방책을 효과적으로 사용했다. 이 방책은 흙과 자갈로 지지하여 넝쿨에 얽어서 땅에 설치되었다. 반란군은 이 방책 뒤의 참호에 몸을 숨긴 채 방책 틈으로 총을 발사했다. 사실 마샬 대령의 부대는 이 방책을 충분히 돌파할 수 있었다. 이들은 도시와 촌락을 불사르고, 밭과 곡물을 불태웠으며, 주민들을 공포 속으로 몰아넣었다.” 1898년 5월말까지 영국군은 97개에 달하는 도시와 촌락들을 파괴했으며, 바이 부레측에 대한 식량 공급을 차단했다.

1898년 11월 사로잡힌 바이 부레는 “전쟁은 끝났다”고 진술했다. 식민당국은 그를 반역죄로 재판에 회부하고 싶어했다. 하지만 법률적 입장은 모호했으며, 결국 그는 가나로 추방되었다. 그는 1905년까지 귀국이 허용되지 않았으며, 1908년 사망했다. 모모 자가 체포된 후 두 번째 반영 반란이 1898년 4월 멘데족 지역에서 일어났다. 반란 세력은 불탄 나뭇잎을 운반하는 전령들을 보냄으로써 보호령의 먼 지역들에까지 반란 소식을 알렸다. 멘데 지역의 기독교 선교사들은 주거세를 옹호하는 내용의 설교를 하는 실수를 저질렀으며, 사람들에게 세금을 납부하도록 독촉했다. 그 결과 이들은 당국과 동일시되었으며, 곧 반군의 공격을 받게 되었다.

“폭도들은 흑백을 막론한 군인들을 비롯, 그들의 접근 범위 내에 있는 모든 선교사들을 살해했을 뿐만 아니라, 유럽화된 흑인들 역시 살해했다. 그들은 이 모든 사람들을 오만한 착취자의 무리로 간주했다.” C.L.R. 제임스는 자신의 ‘아프리카 반란의 역사’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반란에 대한 공식 청문회는 다음과 같이 보고하고 있다. “상당수의 분명한 증거들에 의하면 폭도들은 영어를 사용하는 모든 사람들을 영국 정부와 동일시했으며, 이들이 이러저러한 방법으로 주거세의 도입에 참여하거나 그것을 조장했다고 믿었다. 그 결과 이들에 대한 불만이 앙갚음으로 드러나게 된 것이다.”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서는 두 번에 걸친 군사 원정대의 파견이 필요했다. 카쓔 대령은 얼마 전 설치된 나이지리아 소재 서아프리카변경사령부에 병력 지원을 요청했지만 거절당했다. 변경사령부는 당시 나이지리아 북부의 반란을 진압하기에 바빴던 것이다.

“원주민 부족들은 자신들과 싸우도록 파견된 몇몇 서인도제도 출신 흑인 부대들을 일소해버렸다.” C.L.R. 제임스의 말이다. “또한 백인 부대 역시 거의 완전히 괴멸되었다고 이야기된다. 정부군의 대학살이 셔브로와 모페노에서 벌어졌다. 물론 반란은 진압되었으며, 수백 명의 원주민들이 살해되었다.

반란이 끝나고, 영국의 보복은 가혹했다. 재판에 회부되어 유죄 판결을 받은 158명 중 96명이 처형되었다. 퀠루와 본테, 반다주마에서 교수형이 집행되었다. 그리고 나서 고위급 행정청이 수천의 군대와 오십명의 관리, 오천명의 짐꾼들과 함께 “자신들의 권리를 주장하며” 이 지역으로 진주해 들어왔다.

토니 블레어의 신노동당 정부가 다시 한번 그 권리를 주장하고 있다. 식민 지원 병력은 이제 유엔 제복을 입고 도착할 것이다. 영국의 아프리카 정복을 돕고 그에 수반되는 반란들을 진압하기 위해 인도군 병력이 불려왔던 것처럼, 오늘날 로빈 쿡은 델리와 다카로부터 유엔군 병력이 소집되기를 바라고 있다. 나머지 부대는 영국이 만들어낸 또 하나의 작은 나라인 요르단에서 공수되어 올 것이다. 이 나라 군대는 한때 영국이 지휘권을 행사하기도 했다. 아프리카인이 보기에 이러한 대영제국의 부활은 도대체 이상하기 그지없다.

이미 잘 알려진 바처럼, 1997년 선거에 승리하기 전부터 토니 블레어는 실제로 외교 분야에 현저한 관심을 갖고 있었다. 영국 총리는 언제나 그러했다. 하지만 그 성공 기록이 고르게 나타났던 것은 아니었다. 전문적 지식은 사실 별 관계가 없었다. 영국 밖의 세계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던 네빌 체임벌린의 경우는 재난이었다. 꽤나 잘 알고 있던 안토니 이든 역시 마찬가지였다. 영국 밖의 세계에 있어서 지적이고 식견있는 조타수였던 해롤드 맥밀란은 제국의 해체를 현명하게 관장해 나갔다. 반면 나이지리아에서 교통사고를 당한 것 말고는 대외적인 경험이라고는 거의 없던 존 메이저 역시 분명 무난한 역할을 수행했다.

1997년 선거 후의 고조되었던 시기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예기치 못했던 것은 블레어가 모두가 기꺼이 잊어왔던 분쟁 지역 개입의 기억을 되살리면서 영국을 3년 동안 세 번이나 전쟁으로 끌어넣을 것이라는 사실이었다. 그것은 노동당이 한때 이 나라의 자유주의적, 평화주의적 양심의 수호자(지금은 전쟁광인 수호자일 뿐이다)였기 때문이다. 노동당은 언제나 식민 전쟁에 대한 개입이나 포함외교를 내켜하지 않았으며, 야당 시절에는 평화적 외교와 집단 안보의 끈기있는 옹호자였다. 하지만 블레어와 로빈 쿡의 신노동당은 격론을 불러일으키며 세계 각지에서 군사적 개입의 후원자가 되었다. 정치적 반향이 훨씬 더 뒤쪽에서 오기는 하지만, 이런 상황은 즉각적으로 1960년대 해롤드 윌슨의 제국주의적 정책의 일환이었던 “수에즈 동쪽”에 대한 군사적 지위 유지 계획을 떠올리게 한다. 현재 토니 블레어와 그의 측근들은 1882년 총리 주위에 몰려들었던 자유주의적 제국주의자들을 점점 더 닮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이집트를 침략하고 강점하도록 윌리엄 글래드스톤을 부추긴 것도 이들이었다. 이집트의 대외 교역과 금융계를 구원하고, 민족주의 혁명을 진압하는 한편, 채무를 갚도록 강제하기 위한 것이라는 명분이었다. 그 개입에서 얻었던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다. 이집트와 수단, 우간다, 소말리아 등지에서 끝없는 분쟁에 휘말렸으며, 영국군은 이 지역에 거의 반세기 동안이나 묶여있어야 했다.

신노동당의 새로운 군사주의 역시 그 어떤 긍정적인 결과도 내놓지 못할 것이다. 이라크에서, 코소보에서, 그리고 이제 시에라리온에서, 토니 블레어는 별 명확한 생각도 없이, 그리고 실제적 출구가 어디일 것인가에 대한 그 어떤 희미한 실마리도 없이 다른 나라의 분쟁에 개입해왔다. 그의 이러한 행동의 명분을 뒷받침하는 것은 새 세기를 위해 새롭게 주조된 자유주의적 제국주의의 교리일 뿐이다. 이것은 현재 언론계의 사민주의자 및 자유주의자들 대다수의 따뜻한 갈채를 받고 있다. 모두들 휘청거리는 제국주의 열강으로서 영국의 새로운 지구적 역할에 대한 가능성에 기쁨을 표시하고 있는 것이다. 이들 중 몇몇은 곧 스리랑카나 짐바브웨 같은 계속적인 식민지적 분쟁 지역에 대한 군사적 개입을 요구할 지도 모른다.

숙련된 전문가라면 시에라리온에서 전개되고 있는 사태에 대해 처음부터 의심스러워했을 것이다. 유럽의 이전 식민 열강들은 아프리카 국가들에 개입하는 유일한 이유는 자국민 보호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언제나 두번째 속셈이 있다. 잘 알려진 경우 중의 하나가 해롤드 윌슨도 도운 바 있었던 1965년 벨기에 공정부대의 스탠리빌(키상가니) 투입이다. 이때의 공중 투입은 남아프리카 백인 용병부대의 도시 진격과 병행하여 진행되었다. 이 백인 용병부대는 모이세스 촘베와 그의 군사령관 조세프 모부투를 위해 싸우고 있었다. 뒤따른 “반군”의 패배는 모부투의 삼십년 독재에 길을 터주게 된다. 오늘날의 영국군의 시에라리온 침공 역시 이와 마찬가지로 영국인들의 구출과는 별 상관이 없다. 나중에 밝혀지겠지만, 현지 영국인들 대부분은 기꺼이 머무르고 싶어했을 것이다. 첫번째의 은폐된 목적은 작년 체결된 국내평화협정을 종식시키고 포데이 상코의 9년에 걸친 “반역” 봉기에 최후의 일격을 가하는 것이었다. 미래의 모부투 장군은 아직 나타나지 않았다. 하지만 따지고 보면 수많은 후보자들이 존재한다. 백인 용병부대 역시 다시 돌아왔다. 방송에도 출연, 군사적 자문을 해준 바 있는 팀 스파이서 대령의 샌드라인 인터내셔널이라는 용병 회사가 다시 개입했다. 또한 공중에서는 이전 이그제큐티브 아웃컴이라는 용병 회사 출신의 몇몇 남아프리카인들이 전투용 헬기를 몰고 반군 지역의 마을들을 공격하고 있다. 이 전쟁의 참상 중의 하나는 언론에서 많이 이야기되고 있는 것으로서 반군들이 사로잡힌 사람들에게 자행하는 팔, 다리 등 신체 부위의 절단이다. 전쟁터에서 다소 멀리 떨어진 곳에 사는 유럽이나 북미 사람들에게 이러한 외견상의 광폭한 잔인성에 관한 사실 보도는 처참한 악몽 수준일 것이며, 사악함의 결정체처럼 보일 것이다. 하지만 이 시대의 삶을 특징짓는 현상으로서 부유한 세계와 빈곤한 세계 간의 근본적인 불평등함은 사람들이 사용하는 무기에서 가장 명확하게 드러난다는 사실은 왕왕 쉽게 잊혀진다. 만약 칼도, 총도 없다면, 당신은 적의 두 눈을 손으로 후벼 팔 것이다. 만약 돈이 있다면, 당신은 “세련된” 폭탄을 사용할 수 있는 누군가를 고용할 수 있을 것이다.

시에라리온의 반군은 전투용 헬기나 크루즈 미사일을 사용할 수 없으며, 서방 군대가 손쉽게 손에 넣어, 기꺼이 세르비아나 이라크에 뿌려대는 그 어떤 “정교화”된 무기도 사용하지 못한다. 대부분의 반군들은 여전히 도끼나 벌목도를 사용할 수밖에 없다. 이것은 모든 제국주의 열강들이 원시 부족들에게 토지와 노동의 대가로 준 첫번째 선물이었다.

아프리카 풍속의 야만성은 19세기 말 모든 제국주의 담론들에 등장하는 한 특징이었으며, 예외없이 침략이나 강점을 정당화하는데 동원되었다. 대조적으로 당시 유럽인들의 눈에 기관총은 상대적으로 문명화된 무기로 비춰졌다. 한나절만에 이름모를 흑인들의 부대를 해치워버릴 수도 있었던 것이다. 오직 백인인 독일인들이 솜므 전투에서 백인인 영국인들에게 이 총을 사용했을 때에야 사람들은 이 눈부신 무기에 대해 의심하기 시작했다. 오늘날 신노동당의 전쟁에 항의하는 목소리는 거의 전혀 들리지 않는다. 그것은 이 전쟁들이 사람들이 국제 문제에 흥미를 잃어버리고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거의 아무도 모르는 시대에 벌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신문들이 우리 지역 밖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에 대한 정치적 분석을 요구하는 독자층을 가지고 있지도 않고, 그 보도기사조차 그리 많지 않다고 이야기된다. 한때 신문에 존재하던 오랜 전문적 식견도 점차 사라져 가고 있다. 한때 자유주의적이었던 [옵서버]지나 일요 [인디펜던트]지도 내부에 아프리카 전문가는 없으며, 지난주에는 두 신문 모두 [이코노미스트]지의 보수적인 아프리카판 편집자인 리처드 도든의 말을 인용해야할 정도에 이르렀다. [가디언]과 [선데이 타임스]지 역시 코피 아난의 전 동료이자, 용병 활동의 열정적인 옹호자인 윌리엄 쇼크로스에 청탁을 요청해야할 지경으로 전락했다.

때때로 신문들은 “우리 편”이 개입하는 행동을 언급하는 데 아무런 곤란도 느끼지 않는다. 4월 초 영국과 미국의 비행기들이 이라크 남부의 민간인 주거지역을 공습, 14명을 살해했다. 그 다음 날 프랑스와 러시아는 이 폭격을 비난했으며, 프랑스 외무부는 이것을 “무의미하고 지독한” 짓이라고 묘사했다. 영국의 자유주의적 언론에서는 이에 대한 그 어떤 언급도 없었으며, 1968년 이후 영국과 미국의 폭격으로 160명 이상의 이라크 민간인들이 살해된 것을 상기시키는 그 어떤 시도도 없었다. 이러한 사태 전개는 낡은 제국주의의 습관이다. 영국은 꽤 오래전인 1919년 쿠르드인들에 대한 폭격을 시작했으며, 1920년대 전반에 걸쳐 이라크 민간인들에 대한 영국 공군의 폭격이 있었다. 신노동당의 대외 전쟁은 사람들이 이제 충분하다 싶으면 텔레비전을 끌 수도 있는 방관자적인 경기가 되어버렸다. 보스니아는 지겹다. 코소보는 전쟁 1년을 다루는 몇몇 기사들을 빼고는 거의 사라졌다. 이와 나란히 다른 머나먼, 잊혀진 전쟁을 다룬 기사들도 있었다. 1975년 끝난 베트남 전쟁이다. 영국군은 여전히 개입을 계속하고 있는지도 모르지만, 영국의 신문 독자들은 분명히 그렇지 않다.

하지만 식민 통치 시대처럼, 재정적 현실성이 실제적으로 신노동당 전략가들의 예측을 뒤집어버릴 것이다. 영국은 1896년 펜대를 굴려서 시에라리온 내륙에 “보호령”을 설치했고, 엄청난 반란을 겪었다. 이 새로운 획득물을 통치하는 데 드는 비용을 댈 수 없었던 영국은 모든 아프리카인들의 오두막에 주거세를 부과했다.

2년 후 새로운 세금을 납부하기를 거부한 이 지역 주민들은 대반란을 일으켰고, 자신들의 수중에 넣을 수 있었던 모든 유럽인들과 모든 유럽화한 흑인들을 살해했다. 영국은 이 봉기를 진압하기 위해 제국의 다른 지역들로부터 두 번에 걸쳐 군사 원정대를 보내야 했다. 기관총이라는 경이로운 무기를 사용했음은 물론이다. 오늘날, 식민지 증원군은 유엔이라는 옷을 입는다.

그 먼 옛시절, “좌파”는 그나마라도 이런 식민주의적 폭력에 반대했다. 오늘날, 그나마의 “좌파”는 이상한 침묵에 빠져있는 것으로 보인다. 코소보가 바로 그 경우이다. 영국에서는 신노동당의 촘촘한 대열이 아니라 오히려 보수당 진영에서 자유주의적 제국주의에 대한 더 많은 반대가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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