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화와 빈곤

영국 BBS 라디오4 리스강좌 5회 / 반다나 시바

최근 저는 전염병 같이 퍼지는 농민들의 자살 때문에 펀잡주에 있는 바틴다를 방문했습니다. 펀잡은 한때 인도에서 가장 번창하는 농경 지역이었습니다. 오늘날에는 모든 농민이 부채와 절망의 늪에 빠져있습니다. 광대한 토지가 물에 잠긴 사막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리고 한 나이든 농부가 지적했듯이, 과다한 살충제 사용으로 가루받이 곤충들-꿀벌이나 나비 말입니다-이 몰살되어 나무에 열매가 열리지 않습니다.

이러한 생태, 사회적 재앙은 펀잡만의 일이 아닙니다. 작년에 저는 안드라 프라데시주의 와랑갈에 갔었는데 여기 또한 농부들의 자살이 속출하고 있었습니다. 전통적으로 콩이나 기장, 쌀을 재배하던 농민들은 종자 상인들이 “백금”이라고 선전하는 혼성 목화 종자를 구입하면 백만장자가 될 수 있다는 종자기업들의 유혹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이들은 가난뱅이가 되어버렸습니다.

농부들의 토착 종자는 새로운 혼성 종자로 대체되었습니다. 이 종자들은 저장할 수도 없어서 매년 비싼 값으로 새로 구입해야 하는 것입니다. 혼성 종자들은 해충의 공격에도 매우 취약합니다. 와랑갈에서 살충제에 지출하는 비용은 1980년대의 250만 달러에서 1997년의 5천만 달러로 2000%가 급증했습니다. 이제 농민들은 갚을 수 없는 부채에서 벗어나기 위해 살충제를 소비하면서 자신들을 죽이고 있습니다.

기업들은 유전자조작된 종자를 도입하려 하고 있습니다. 이는 비용과 생태적 위험을 한층 증대시킬 것입니다. 안드라 프라데시주 농민연합(APFU)의 말라 레디 같은 농민들이 와랑갈에서 몬산토사의 유전자조작된 볼가드 면화를 몰아낸 것은 이러한 이유에서였습니다.

지나 3월 27일 25세의 베타바티 라탄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2에이커 규모의 자신의 농장에 관정을 뚫기 위해 빌린 대출금을 갚지 못해서였습니다. 그가 판 우물은 지금 말라버렸습니다. 5천만 명 이상이 물기근에 직면해있는 구자라트주나 라자스탄주의 우물들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이러한 가뭄은 “자연 재앙”이 아닙니다. 이건 “사람이 만든(man-made)” 것입니다. 지역의 필요에 부합하는, 물을 아끼는 식량 작물 대신 수출을 위한 건조한 환금 작물을 재배하기 위해 건조 지역에서 부족한 지하수를 파낸 결과인 것입니다.

이러한 경험들은 신세계경제라고 우쭐거리는 우리들의 모습이 얼마나 잘못되어 있는 것인지 말해주고 있습니다. 저는 이번 강연에서 이제는 멈춰서서 보통사람들의 삶에 세계화가 미치는 영향에 관해 생각해야 할 시간이라고 주장할 것입니다. 이는 세계를 지속가능하게 하기 위해 매우 중요합니다.

시애틀과 작년의 WTO 반대시위들은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다시 생각하도록 만들었습니다. 본 강좌 시리즈 내내 사람들은 세계화를 당연한 것으로 간주하면서 지속가능한 발전의 상이한 측면들을 언급했습니다. 지금은 우리가 하고 있는 바를 근본적으로 재평가해야 할 때입니다. 우리가 세계화의 이름으로 가난한 사람들에게 하고 있는 것은 야만적이고 용서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특히 인도에서 명백하게 보여집니다. 인도에서는 특히 식량과 농업에서 세계화의 재앙이 펼쳐지는 것을 목격하고 있습니다.

누가 세계를 먹여살리는가? 제 대답은 대부분의 사람들과 매우 다릅니다.

제3세계의 일차적인 식량 공급자들은 다양한 생물에 노동을 가하는 여성과 소농민들입니다. 또한 지배적인 가정과는 달리 생물다양성에 기반한 소농장들은 산업화된 단종재배보다 생산성이 높습니다.

풍부한 다양성과 지속가능한 식량생산 체계들은 식량생산 증대라는 이름 아래 계속 파괴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다양성의 파괴로 인해 풍부한 영양 원천들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에이커당 생산되는 영양량, 그리고 생물다양성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산업 영농 및 어업의 소위 “대량 산출”은 식량과 영양 생산의 증대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수확량은 보통 단일 곡물의 단위 지역당 생산을 의미합니다. 산출량은 다양한 작물과 생산물의 총생산을 의미합니다. 단종재배로 전체 농지에 한 작물만을 재배하는 것은 물론 해당 개별 작물의 수확량은 증가시킵니다. 여러 작물을 혼합해서 재배할 경우 개별 작물의 수확량은 낮겠지만 총 식량 산출량은 높아집니다. 이런 식으로 소농들에 의한 소농장의 식량생산이 사라지도록 수확량이 규정되어 왔습니다. 이는 제3세계 수많은 여성 농민들의 생산을 감춰버립니다. 자신들의 계단식 농지에서 오늘날에도 인도수수, 아마란스, 비둘기콩, 흑두, 마두, 대두, 바트콩 등-정말 끝없는 생물다양성입니다-을 경작하고 있는, 칩코운동을 통해 벌목에 반대해 싸운, 제 고향 히말라야의 농민들의 생산을 말입니다. 생물다양성의 관점에서 보면, 다양성에 기반한 생산성이 단종재배의 경우보다 높습니다. 저는 이러한 높은 수준의 다양성에 대한 무지를 “정신의 단종재배(Monoculture of the Mind)”이라 부릅니다. 이는 우리 농지와 우리 세계의 단종재배를 만들어냅니다.

치아파스의 마야족 농부들은 낮은 생산성의 대표적인 케이스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들은 에이커당 2톤의 옥수수만을 수확해내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콩이나 호박, 그리고 그외 다양한 식물과 과일을 다 따져보면 에이커당 총 식량 생산량은 20톤에 이릅니다.

자바에서는 소농민들이 자기집 앞마당에서 607종의 작물을 재배하고 있습니다.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에서는 여성들이 120종의 식물을 경작합니다. 타이의 한 농가에서는 채마밭에 230종을 기르고 있고 아프리카의 채마밭들에는 60종 이상의 나무가 있습니다.

콩고의 농촌 가정들은 농장에서 기르는 50종 이상의 나무에서 이파리를 따서 먹습니다.

나이지리아 동부에 관한 한 연구는 가계 전체 농지의 2%에 불과한 채마밭이 농장 총 생산고의 절반 가량을 차지한다고 밝힌 바 있습니다. 인도네시아의 경우 가계 소득의 20%, 국내 식량 공급의 40%가 여성들이 가꾸는 채마밭에서 나옵니다.

국제식량농업기구(FAO)의 연구는 소규모 다종재배 농장이 대규모 산업화된 단종재배보다 훨씬 많은 식량을 생산한다는 점을 입증했습니다.

또한 다종재배는 보다 많은 식량을 생산하는 외에도 가뭄과 사막화를 방지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입니다.

증대하는 인구를 계속해서 먹여살리기 위해 세계가 필요로 하는 것은 화학적 증대나 유전자조작의 강화가 아니라 생물다양성의 강화입니다. 여성과 소농민들이 생물다양성을 통해 세계를 먹여살리는 동안, 우리는 유전자조작과 농업의 세계화 없이는 전세계가 굶주리게 될 것이라는 말을 계속 듣고 있습니다. 유전자조작이 보다 많은 식량을 생산하지도 못하고 사실 종종 수확량의 저하를 낳는다는 모든 경험적 증거에도 불구하고, 이는 계속해서 굶주리는 이들을 위한 유일한 대안으로 선전되고 있습니다.

자, 다시 묻겠습니다. 누가 세계를 먹여살립니까?

다양성에 대한 이러한 고의적인 눈감음, 자연의 생산과 여성의 생산, 제3세계 농민들의 생산에 대한 눈감음은 파괴와 전유를 창조로 뒤바꿔버립니다.

이러한 눈감음에 대한 치료법으로 소위 “황금쌀” 또는 유전자조작 비타민A 쌀의 사례를 살펴보겠습니다. 유전자조작이 없이는 비타민A 결핍을 해결할 수 없다고들 합니다. 그러나 자연은 우리에게 풍부하고 다양한 비타민A를 제공합니다. 제분하지 않으면 쌀은 그 자체로 비타민A를 담고 있습니다. 밀밭에 제초제를 뿌리지 않으면, 비타민A를 함유하고 있는 맛나고 영양많은 야채인 바트콩과 아마란스, 갓 등의 이파리를 먹을 수 있습니다.

벵갈주의 여성들은 150종 이상의 야채를 기릅니다. 시금치, 소포, 갠지스 아마란스 등등 끝이 없지요.

그러나 [유전자조작이라는] 창조신화는 생명과학자들을 비타민A의 창조주라고 떠들어댑니다. 자연의 다양한 선물과 이러한 다양성을 이용해서 아이들과 가족을 먹여살리는 여성들의 지식은 부정하면서 말입니다.

자연과 지역경제, 소규모 자율적 생산자들의 파괴를 이어가는 가장 효과적인 수단은 이들의 생산을 보이지 않게 만드는 것입니다.

가정과 공동체를 위해 생산하는 여성들은 ‘비생산적’이고 ‘경제활동을 하지 않는다’는 대접을 받습니다. 여성의 노동과 지속가능한 경제 속에서 행해지는 노동에 대한 가치절하는 자본주의적 가부장제가 구축한 체계의 자연스러운 결과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세계화가 지역 경제를 파괴하는 방식이며 이러한 파괴 자체가 성장으로 간주되는 방식입니다.

한편 여성들 자체 또한 가치절하됩니다. 농촌 및 원주민 공동체의 많은 여성들이 자연의 주기에 맞춰 협동해서 노동하기 때문에 이들의 노동은 ‘발전’과 무역 정책이 주도하는 지배적 시장과 종종 모순에 처합니다. 그리고 필요를 충족시키고 생계를 유지하는 노동이 대개 가치절하되기 때문에 생활과 생활을 지탱하는 체계들의 양성이 줄어들게 됩니다.

지속가능하고 재생가능케하는 생산에 대한 가치절하와 비가시화는 식량의 영역에서 가장 두드러집니다. 가부장적 노동분업이 여성들에게 가족과 공동체를 먹여살리는 역할을 할당해온 반면, 과학과 기술에 대한 가부장적 관점은 먹거리를 제공하는 여성의 노동을 마술처럼 감춰버립니다. “세계를 먹여살리는 것”은 실제로 이를 행하는 여성들로부터 분리되어 전지구적 농업경제와 생명과학 기업들에 달려있는 것으로 투사됩니다.

그러나 산업화와 식품 유전자조작, 농업 교역의 세계화는 가난한 사람들을 먹여살리기는커녕 굶주림을 낳는 처방입니다.

식량생산은 세계 전역에서 쓸모없는 경제가 되어가고 있으며, 농민들은 산업적 생산을 위한 값비싼 투입물을 구매하기 위해 자신들의 생산물에 대해 받는 것보다 많은 가격을 지불하고 있습니다. 이의 결과는 빈국과 부국을 막론하고 부채의 증가와 전염병과 같이 퍼지는 자살입니다.

경제의 세계화는 종자 산업의 집중, 살충제 사용 증대, 그리고 결국은 부채의 증가로 귀결됩니다. 자본집약적이고 기업이 통제하는 농업이 확산되는 지역들은 비록 가난하지만 지금까지는 식량을 자급자족할 수 있는 곳입니다. 세계화를 통해 산업화된 농업이 도입된 지역들의 경우 높은 비용으로 인해 소농민들은 사실상 생존할 수 없게 됩니다.

지속불가능한 산업 영농의 세계화는 통화가치의 절하와 생산비용의 증대, 상품가격의 붕괴의 결합을 통해 제3세계 농민들의 소득을 말 그대로 연기처럼 사라지게 만들고 있습니다.

전세계 농민들은 10년 전에 같은 상품에 대해 받던 가격의 절반에도 못미치는 값을 받고 있습니다. 캐나다전국농민연합(CNFU)은 올해 상원에 제출한 보고서에서 이를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밀, 귀리, 옥수수 등의 곡물을 경작하는 농민들은 터무니없는 소득을 얻고 파산으로 내몰리는 반면, 아침식사용 시리얼을 생산하는 기업들은 거대이윤을 벌어들이고 있다. 1998년 켈로그, 퀘이커 오츠, 제네랄 밀즈 같은 시리얼 기업들은 각각 56%, 165%, 222%의 순이익을 올렸다. 35리터의 옥수수가 4달러도 안되는 값으로 판매되는 반면 같은 양의 콘플레이크 가격은 133달러이다… 아마도 다른 누군가가 너무 많이 가져가고 농민들은 너무 조금 벌어들이고 있다는 뜻일테다.”

또한 세계은행의 한 보고서는 “국내 소비자 가격과 세계시장 가격의 양극화 이면에는 국제상품시장을 주름잡는 거대 교역기업들이 자리잡고 있다”는 점을 인정했습니다.

농민들의 소득은 줄어드는 반면 소비자들의 지출은 커집니다. 인도의 경우 1999년과 2000년 사이에 식품 가격이 두 배로 뛰었습니다. 농촌 지역에서의 곡물 소비는 12% 떨어졌습니다. 전지구적 교역을 통한 경제 성장은 허위의 잉여에 기반한 것입니다. 가난한 사람들의 소비는 줄어드는 반면 식량의 교역은 증가하고 있습니다. 성장이 빈곤을 증대시키고 실질생산이 부정적인 경제가 되며, 투기자들이 “부의 창조자”로 규정될 때는 부와 부의 창출에 관한 개념이나 범주에 무언가가 잘못되고 있는 것입니다. 자연과 인간에 의한 실질생산을 부정적인 경제로 밀어넣는 것은 실물재와 서비스의 생산이 쇠퇴하고, 끊임없는 부의 창출이라는 닷컴 경제에 속하지 못한 수많은 사람들을 보다 깊은 빈곤의 나락으로 몰아넣는다는 것을 함축하고 있습니다.

(앞서 말한대로) 여성들은 전세계에서 일차적인 식량 생산자이자 가공자입니다. 그러나 이들의 생산과 가공 노동은 점점 비가시적이게 됩니다.

최근 맥킨지사[투자자문 초국적기업]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미국의 거대 식품기업들은 인도의 농업 산업이 식품 가공 등에 있어 성장의 여지가 많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인도는 생산되는 식량의 1%만을 가공처리한다. 이는 미국의 70%와 비교된다…”

우리 인도인들이 음식을 날로 먹는 건 아닙니다. 전지구적 컨설턴트들은 식품 가공의 99%가 가정의 여성이나 소규모 작업장에서 이루어진다는 점을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전지구적 농업경제에 의해 관리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인도 농산물가공의 99%는 의도적으로 소규모 수준에 유지되어 왔습니다. 이제 세계화의 압력 아래 상황이 변하고 있습니다. 지역에 기반한 경제와 소규모 가공처리를 폐쇄시키기 위해 허구적인 위생관련 법률이 도입되는 중입니다.

1998년 8월 소규모 국지적인 식용유 가공처리가 금지되었습니다. 미포장된 식용유의 판매를 불법화하고 모든 식용유를 플라스틱이나 알루미늄으로 포장하도록 하는 “포장 명령”에 따른 것이었습니다. 이로 인해 소규모 냉압축 공장들이 폐쇄되었습니다. 이는 또한 겨자, 아마씨, 참깨, 땅콩, 코코넛 등 우리가 가진 다양한 기름종자 시장을 파괴했습니다.

식용유 산업의 접수는 천만 명의 생계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또한 포장되고 상표가 붙은 소맥분으로의 대체는 1억 명의 생계를 위협할 것입니다. 이들은 새로운 빈곤으로 빠져들어가고 있습니다.

식량 체계의 세계화는 지역 식품 문화와 식량 경제의 다양성을 파괴하고 있습니다. 신선하고 지역적인, 손으로 만든 모든 것이 건강에 위험한 것으로 규정되면서 전지구적인 단종재배가 강요되고 있습니다. 인간의 손은 최악의 오염물질로 정의되며 손으로 하는 노동이 금지되어 전지구적 기업들이 가져오는 기계와 화학물질로 대체되고 있습니다. 이는 세계를 먹여살리는 처방이 아니라, 힘있는 자들을 위한 시장을 창출하기 위해 가난한 사람들의 생계수단을 도적질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전지구적 경제의 “건강”을 위해 절멸되어야 할 기생충으로 파악됩니다.

이 과정에서 유전자조작 식품이나 다른 위험한 생산물들을 쏟아붓는 형태로, 건강과 생태계에 대한 새로운 위험이 제3세계에 강요되고 있습니다.

최근에 인도는 WTO의 판결로 인해 모든 수입품에 대한 규제를 철폐하도록 강요받았습니다.

이러한 규제받지 않는 수입품 가운데에는 우리의 문화에 위협을 가하고 광우병 같은 공공보건상의 위험을 불러올 수 있는 동물 사체와 폐기물도 있습니다.

아틀란타에 있는 미국질병예방센터(USCDP)는 미국에서 매년 거의 8천 백만 건의 식품으로 인한 질병이 발생하고 있다고 밝힌 바 있습니다. 탈규제로 인해 식품 중독에 의한 사망이 4배 이상 증가했습니다. 이러한 감염의 대부분은 공장에서 사육된 고기로 인한 것입니다. 미국은 매년 9천 3백만 마리의 돼지와 3천 7백만 마리의 소, 2백만 마리의 송아지, 6백만 마리의 말, 염소, 양, 그리고 8십억 마리의 닭과 칠면조를 도살합니다.

미국의 거대 육류산업은 폭력적이고 잔인한 방법을 통해 생산된 오염된 육류를 인도의 소비자들에게 넘겨버리고자 합니다.

부자들의 쓰레기가 가난한 사람들에게 버려지는 것입니다. 가난한 사람들의 부는 생물다양성이나 토착민의 지식에 대한 특허 출원 같은 새롭고 교묘한 수단을 통해 폭력적으로 전유됩니다.

특허와 지적재산권은 새로운 발명을 가져온다고들 합니다. 그러나 제 고향의 유명한 바스마티쌀이나 우리의 어머니, 할머니들이 이용해온 네엠에서 추출한 살충제 같은 다양한 품종들에 대해 특허권이 주장되고 있습니다.

미국계 기업인 라이스텍은 바스마티쌀에 대해 Pat. no. 5,663,484 특허를 출원했습니다.

바스마티, 네엠, 후추, 비터수세미, 심황…등등 우리 고유의 식품 및 의료 조직들에 체화되어 있는 모든 혁신적 측면들이 현재 해적질당하고 특허로 독점되고 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의 지식이 전지구적 기업의 자산으로 전환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 결과 가난한 사람들이 자신들의 영양과 건강상의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발전시키고 사용해온 종자와 약품들에 대해 돈을 지불해야 하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창조에 대한 이러한 잘못된 주장들이 이제는 전지구적 규범이 되었습니다. WTO의 무역관련 지적재산권 협정은 각국들에게 생명체와 고유의 지식에 대한 특허를 허용하는 체제를 도입하도록 강제하고 있습니다.

전지구적 법체계는 자연과 다른 문화적 공헌에 대해 상업적 이해가 지배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않은 채, 다른 나라를 식민지로 접수하면서 활용한 ‘발견의 신화’와 꼭닮은, 생명체에 대한 새로운 소유권을 만들어내는 가부장적 창조 신화를 신전에 올려놓고 있습니다.

생명체를 조작한다고 해서 인간이 생물을 창조하는 것은 아닙니다. 자신들이 “새로운 벼종을 발명”했다는 라이스텍사의 주장이나 이안 윌무트가 돌리를 “창조”해냈다는 로즐린연구소의 주장은 자연의 창조성과 생명체의 자기조직 능력, 제3세계 공동체들의 앞선 혁신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특허와 지적재산권은 해적질을 방지한다고 합니다. 하지만 오히려 제3세계 가난한 사람들이 공유하는 전통적 지식을 해적질해서 서구 과학자와 기업들의 배타적 “재산”으로 만들고 있습니다.

바스마티쌀의 경우처럼 종자나 식물에 대해 특허가 허용될 경우, 도적질이 창조로 규정되고 종자를 저장하고 공유하는 것이 지적재산의 도적질로 규정되게 됩니다. 면화, 대두, 겨자 등과 같은 곡물에 대해 광범위한 특허를 갖고 있는 기업들은 종자를 저장했다는 이유로 계속해서 농민들을 고소하고 있으며, 농민들이 종자를 저장하거나 이웃과 나눠쓰는지를 감시하기 위해 탐정기관을 고용하고 있습니다.

몬산토사가 쌀 지놈을 무상으로 배포하고 있다는 최근 발표는 잘못된 것입니다. 몬산토사는 쌀 품종이나 다른 곡물 변종에 대해 특허를 얻지 않겠다고 약속한 적이 결코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 인류와 생태계의 생존의 근간인 나눔과 교환은 범죄로 재규정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우리 모두가 가난해지고 있습니다.

자연은 우리에게 풍요를 주었으며, 생물다양성과 농업, 영양에 대한 여성들의 고유한 지식은 이러한 풍요에 기반하여 결핍에서 부를, 나눔을 통한 성장을 만들어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한때 자신들이 갖고있었던 것을 돈주고 사도록 강요받음으로써 더욱 빈곤에 빠져들고 있습니다. 부자들 또한 가난해집니다. 이들의 이윤은 도적질과 강제적 폭력에 근거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부의 창출이 아닙니다. 노략질입니다.

지속가능성은 모든 생물종과 모든 민족을 보호할 것, 그리고 다양한 생물종과 민족이 생태적 과정을 유지하는 데 있어 필수적인 역할을 한다는 사실을 인식할 것을 요구합니다. 가루받이 곤충들은 식물의 수분과 생식에 없어서는 안됩니다. 논밭의 생물다양성은 야채와 가축사료, 의약품을 제공하며 물과 바람의 침식으로부터 토양을 지켜줍니다.

지속불가능성이라는 길을 따라 내려가면 갈수록 인류는 다른 생물종들을 위협하게 되며 우리의 생존에 이들이 극히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점에 눈감게 됩니다.

1992년 인도 농민들이 불량 종자에 항의하기 위해 카르나타카주 벨라리에 있는 카길사의 종자공장을 파괴했을 당시, 카길사 회장은 “우리는 벌떼들이 꽃가루를 약탈해가지 못하도록 하는 최신 기술을 인도 농민들에게 제공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제가 유엔 생물다양성 협정 논의에 참여할 당시 몬산토사는 “잡초들이 햇빛을 훔쳐가지” 못하도록 한다며 제초제에 저항성이 있는 자사의 라운드업레디(Roundup-ready) 곡물을 선전하는 문건을 돌렸습니다. 그러나 몬산토가 잡초라고 부르는 것은 어린이의 시력저하와 여성의 빈혈을 방지하는 비타민A를 쌀에 공급해주는 초원입니다.

가루받이를 “꿀벌의 도적질”이라고 정의하고 생물다양성을 햇볕을 “훔치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세계관은, 개방적이고 가루받이를 통해 번식하는 품종들을 열매를 맺지 않는 혼성 종자로 대체시켜버리고 라운드업 같은 제초제로 다양한 식물상을 파괴함으로써 자연의 수확을 도적질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습니다. 유전자조작된 생명공학 곡물(bt crops)이 제주왕나비를 위협하는 것은 새로운 생명공학이 낳은 생태적 불모의 한 예에 불과합니다. 나비와 벌이 사라짐에 따라 생산이 저하되고 있습니다. 생물다양성이 줄어들면 영양과 먹거리의 원천도 없어지는 것입니다.

거대 기업들이 소농민과 꿀벌을 도둑으로 보고 무역 규칙과 신기술을 통해 이들을 근절시킬 권리를 좇는 동안 인류는 위험한 문턱에 다다랐습니다. 작은 곤충과 식물, 소농민들을 박멸해야 한다는 정언명령은 깊은 공포에서 나온 것입니다. 자유롭게 살아 움직이는 모든 것에 대한 공포 말입니다. 이러한 깊은 불안감과 공포는 모든 인류와 모든 생물종에 대한 폭력을 낳고 있습니다.

전지구적 자유무역 경제는 지속가능성에 대한 위협이 되었으며 가난한 사람들과 인류를 제외한 생물종들의 생존 자체가 위험에 처해 있습니다. 이는 부수효과나 예외로 인한 것이 아니라 가장 근본적인 수준에서 우리의 세계관을 재구조화하는 체계적인 방식을 통해서입니다. 지속가능성과 공유, 생존이 시장경쟁력과 시장효율성이라는 이름 아래 경제적으로 불법화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밤 저는 우리가 우리의 지구와 그안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 관해 긴급히 다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고 주장하고자 합니다.

세계는 자신을 구성하는 모든 존재를 먹여살림으로써만 유지될 수 있습니다.

다른 생명체와 종들에 양식을 줌으로써 우리는 우리 스스로의 식량안전을 위한 조건을 유지합니다. 소를 먹임으로써 우리는 토양을 먹이는 것이며, 땅을 위해 먹거리를 제공함으로써 인류를 위한 먹거리를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이러한 풍요의 세계관은 지구라는 가족의 일원으로서의 인류라는 깊은 자각과 나눔의 윤리에 뿌리를 둡니다. 다른 생명체를 황폐하게 만드는 것은 우리 스스로를 황폐화시키는 것이며, 다른 생명체에 자양분을 주는 것은 우리 스스로를 키우는 것이라는 이러한 자각은 지속가능성의 진정한 기초입니다.

지속가능성이 새천년에 던지는 과제는 세계화된 경제의 인류가 공포와 기근, 단종재배와 독점, 전유와 강탈에 기반한 세계관에서 벗어나 풍요와 나눔, 다양성과 분산, 모든 생명체의 존중과 존엄으로 나아갈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지속가능성은 다른 종이나 다른 민족에게 어떠한 공간도 남겨주지 않는 경제적 덫에서 빠져나오라고 우리에게 요구합니다. 세계화는 자연과 가난한 사람들을 상대로 벌이는 전쟁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세계화의 규칙은 신이 부여한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바꿔질 수 있고 바뀌어야만 합니다. 이 전쟁에 종언을 고해야 합니다.

시애틀 이후, 규칙에 근거한 체계가 필요하다는 말이 자주 사용됩니다. 세계화는 통상의 규칙이며 월스트리트를 가치의 유일한 원천으로 상승시켰습니다. 그 결과 큰 가치를 가져야만 하는 것들, 자연, 문화, 미래 등이 가치절하되고 파괴되었습니다. 세계화의 규칙은 정의와 지속가능성, 공감과 나눔의 규칙의 뿌리를 뒤흔들고 있습니다. 우리는 시장의 전체주의에서 벗어나 지구 민주주의(earth democracy)로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는 생태계의 규칙을 준수함으로써만 하나의 종으로 살아남을 수 있습니다. 세계 경제가 지속가능성과 정의라는 한계들을 존중하기만 하면 생태계는 모든 사람의 필요를 충분히 충족시킬 수 있습니다.

간디는 “지구는 모든 사람의 필요는 충족시킬 수 있지만 일부 사람의 탐욕에는 충분하지 않다”고 가르쳐준 바 있습니다.

* 반다나 시바: 뉴델리에 있는 과학·기술·생태연구소의 창설자. 물리학을 전공했으며 인도를 비롯한 여러 나라 정부에서 자문위원을 역임하였다. 현재는 세계화에 관한 국제포럼, 여성환경개발기구, 제3세계네트워크 등의 NGO에 참여하고 있다. 저서로는『자연과 지식의 약탈자들』,『에코페미니즘』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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