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에서 만난 성 그누시우스
오병일 <진보네트워크센터 인터넷사업팀장>
며칠 감지 않은 듯한 긴 머리, 몸집에 비해 유난히 불룩한 배, 허름한 남방과 바지. 바지춤에 꽂고 다니는 피리가 유별나 보일 뿐, 그의 외모는 무척 촌스러워 보일지 모르겠다. 하지만, 메일을 통해서 섭외할 때부터, 그에 대한 느낌은 남달랐다. 웬만한 유명인사들이 초청을 받고 방한했을 때 보통 호텔에서 묵는 것과 달리, 그가 요구한 것은 단지 ‘빈방 하나’만 있으면 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강연 요청 메일을 보내며, 의식적으로 Linux가 아닌 GNU/Linux라고 썼건만, 그는 답장에서 Linux가 아니라 GNU/Linux로 써야함을 주지시켰다. Global Linux 2000 행사에 대해 인용하면서 들어간 Linux라는 말을 가지고 지적한 것이다. (우리는 보통 리눅스라고 부르지만, 스톨만은 이것을 매우 싫어한다. 리눅스는 전체 GNU/Linux 운영체제의 부분일 뿐이기도 하지만, GNU/Linux로 쓸 때에만, GNU의 철학이 함께 확산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한 순간의 실수도 용납하지 않고, 기회있을 때마다 이 부분을 강조했다.) 그의 소탈함과 깐깐함은 어느정도 예상했던 것이기는 하지만, 실제 만나본 그는 ‘소탈함과 깐깐함 자체’였다.
스톨만의 방한은 정보통신부가 Global Linux 2000 이라는 행사를 준비하면서 이루어졌다. 행사의 홍보를 위해서라도 GNU/Linux의 창시자인 리차드 스톨만을 부르지 않을 수 없었겠지만, 정통부가 이 행사를 주최한 것은 산업적으로도 큰 잠재력을 보이고 있는 ‘리눅스’의 활성화를 위해서였고, 그것은 스톨만의 철학과 정확히 반대방향으로 빗나간 것이었다. COEX에서 열리는 대부분의 전시회가 그렇다시피, Global Linux 2000도 늘씬한 도우미들과 무료 경품, 그리고 시끄러운 소음으로 얼룩진 행사였다. 심지어 행사장에 윈도까지 등장했다고 하니, 이 행사 어디서 GNU와 스톨만의 자유 소프트웨어에 대한 철학을 찾을 수 있었겠는가. 아이러니컬하게도, 6월 15일 스톨만의 강연은 이 난장판 행사장의 한 가운데서 이루어졌다. 이날 강연의 주제는 ‘자유 소프트웨어 운동과 GNU/Linux 시스템’이었다. 즉, GNU 프로젝트와 카피레프트 운동이 시작된 계기와 진행되어온 과정, 그리고 카피레프트 운동의 의미와 철학에 대한 것이었다. (이 강연의 내용은 대부분 http://www.gnu.org/gnu/thegnuproject.html에서 볼 수 있다. 한글 번역은 http://www.gnu.org/gnu/thegnuproject.ko.html을 참조) 그의 생각은 어찌보면 단순하다. “우리는 어려서부터 좋은 것이 있으면 친구와 나누어야 한다고 배웠다. 하지만, 지금은 좋은 프로그램을 친구에게 복사해주는 행위를 다른 사람의 재산을 침해하는 ‘해적질’이라고 말한다. 우리의 자유를 지키고, 이웃을 생각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이에 맞서 싸워야 한다.”
6월 18일의 강연은 진보네트워크의 주최로 연세대 대강당에서 열렸다. 강연시작 시간이 3시임에도 불구하고 1시 정도부터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해서, 강연이 시작될 즈음에는 1000여명의 청중들이 드넓은 대강당의 객석을 가득 메웠다. ‘성 그누시우스’라는 별명이 보여주는 바와 같이, 많은 사람으로부터 살아있는 신화로 인식되고 있는 그가 한국에도 상당한 ‘신도’들을 거느리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일까. 진보네트워크가 리차드 스톨만 강연회(이와 관련된 자료는 http://networker.jinbo.net/stallman.html 참고)를 준비한 것은 두 가지 의미에서이다. 첫째는, 단지 ‘리눅스’라는 이름으로 기술적, 산업적 측면에서만 확산되고 있는 한국적 상황에서 GNU의 정보공유 철학을 올바로 확산시켜나갈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둘째는 강연의 주제와 연관되는 것으로 최근 확산되고 있는 ‘비즈니스 모델 특허’에 대한 반대 여론을 확산시키기 위한 것이다. 진보네트워크는 올해 초 삼성전자의 특허 ‘인터넷을 이용한 원격교육 및 장치’에 대해서 무효심판 청구를 한 바 있으며, 리차드 스톨만 역시 아마존(amazon.com)의 특허에 맞서 아마존 불매운동을 벌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번 강연의 주제는 ‘소프트웨어 특허의 문제점’이었다. 소프트웨어 특허는 특정한 알고리즘이나 프로그램 기법에 특허를 부여하는 것으로, 비즈니스 모델 특허와 마찬가지로 간단한 아이디어를 특허를 통해 특정 기업이 독점적으로 사용하게 함으로써, 다른 사람들이 이 기법을 이용할 자유를 심각하게 제약하고 있다. 첫째, 소프트웨어 특허는 소프트웨어의 개발 자체를 심각하게 제약한다. 소프트웨어는 수많은 알고리즘들로 이루어지는데, 여기에 특허가 부여된다면, 특허권이라는 지뢰밭을 피해나가면서 소프트웨어를 개발하는 것은 쉽지 않다. 더구나, 사전에 기존의 특허를 검색하는 일은 비용도 많이 들 뿐더러 완전하게 검색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 둘째, 특허는 기본적으로 독창적인 것에 부여되어야 하지만, 특허청은 아주 기본적인 기술에도 특허를 부여하고 있다. 이것은 특허청이 전문성이 부족할뿐더러, 처리해야 하는 업무가 많고, 특허출원자를 고객으로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허가 중소기업을 보호할 수 있지 않겠느냐는 의견에 대해서도, 특허권을 많이 보유하고 있는 대기업의 경우는 특허 침해 소송에 대해서 대응할 수 능력이 있지만, 중소기업은 살아남기 힘든 환경이 될 것이므로, 그러한 환상에서 벗어나라고 경고했다. 스톨만의 결론은 그래서 “소프트웨어 특허 제도 자체를 폐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스톨만이 비유했듯, “음악에 특허를 인정해서, 수많은 악기의 조합, 멜로디, 화음 각각에 특허를 인정한다면, 누가 특허 침해로 고소당할 각오를 하지 않고 교향곡을 작곡할 수 있겠는가.”
리차드 스톨만 강연 시작 전에는, GNU Korea에 대한 간단한 소개시간이 있었다. 강연을 준비하면서, GNU Korea가 설립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던 것이다. “아, 이제 우리나라에서도 GNU 운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구나” 싶어서 무척 기뻤고, 그래서 관심있는 많은 사람들이 모인 이 자리를 통해서 소개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스톨만은 본격적인 강연 시작 전에 ‘안티포스코(http://antiposco.nodong.net)’에 대해서 언급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는 저작권이 표현의 자유를 침해하는 수단으로 쓰일 수 있다는 것에 대해서 심각하게 생각하고 있었으며, 이 싸움을 지지하기 위한 배려를 한 것이다. 그의 홈페이지(http://www.stallman.org) 내에 안티포스코의 미러사이트를 만들 것이라는 약속을 하기도 했다.
이번 스톨만의 방한은 과연 무엇을 남겼는가. 아쉽게도 정상회담에 묻혀, 그리고 주최측의 미숙함으로, 그는 언론에 충분한 주목을 받지는 못했다. 하지만, 그를 바로 앞에서 보고, 그의 강연을 들은 많은 사람들에게는 상당히 깊은 인상을 남겼으리라. 그의 깐깐한 성격은, 갈수록 독점 소프트웨어가 확장되어가는 경향에 맞서 싸우며 거의 20년이라는 기간동안 꿋꿋하게 자신의 원칙을 지켜가며 자유 소프트웨어의 영토를 확장해왔던 그의 완고한 삶을 반영하고 있다. 그의 모습이 우리의 가슴에 또 다른 파장을 일으킬 수 있다면, 그래서 그의 동지가 되어 싸워나갈 힘을 얻게되었다면, 피곤하고 어수선했던 그의 짧은 방한이 향후 한국에서 자유 소프트웨어 운동을 위한 중요한 기반이 되리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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